발칸전쟁(1912년∼1913년)
제1차 발칸 전쟁(Балканска война; Αʹ Βαλκανικός πόλεμος; Први балкански рат, Birinci Balkan Savaşı)은 1912년 10월부터 1913년 5월까지 발발한 전쟁으로 발칸 동맹 국가인 세르비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 그리스 왕국, 몬테네그로 왕국이 오스만 제국에 맞선 전쟁이었다. 1908년 청년 튀르크당 혁명 이후 오스만 제국의 정치는 혼돈을 겪었고, 1912년 알바니아 반란과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으로 오스만 제국의 군대가 그렇게 강력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발칸 동맹은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발칸 동맹은 승리를 거두었고, 오스만 제국은 유럽 쪽 영토의 83%와 유럽 쪽 인구의 69%를 잃었다.
발칸 반도는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거의 전 영역을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1829년에 그리스의 독립을 시작으로 발칸 반도의 여러 국가들은 자치령으로 바뀌거나 독립하게 되었다.
1908년, 오스만 제국에서 청년 튀르크당이 혁명을 일으키자 발칸 국가들을 긴장에 휩싸였다. 이는 청년 튀르크당이 당시 오스만 제국 헌법의 “모든 민족의 평등”대신 “튀르크의 평등”을 슬로건으로 하는 극단적 튀르크 민족주의를 내세웠고,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인해 발칸 반도의 영토를 잃은 오스만 제국의 재침(再侵)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1909년 북쪽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해 발칸 국가들의 위기감을 더욱 부추겼다.
1911년 이탈리아-투르크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하자, 오스만 제국의 힘이 약해졌다고 판단한 불가리아 왕국, 그리스 왕국, 세르비아 왕국, 몬테네그로 왕국 등 발칸 국가들은 1912년에 ‘발칸 동맹’을 맺고, 러시아 제국의 지원 아래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여 발칸 전쟁이 시작되었다. 또한, 당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알바니아도 독립을 위해 군사를 파견했다.
1912년 12월 16일에 런던에서 개최된 강화 회담에서는 아드리아노플 할양 문제 때문에 회의가 진전되지 않았고, 1913년 1월 23일에 오스만 제국에서 청년 튀르크당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하자 휴전이 취소되고 전투가 재개되었다. 결국 그 해 5월 30일에 휴전 협정을 맺고 오스만 제국은 이스탄불 주변을 제외한 유럽의 모든 영토를 잃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불가리아 왕국은 마케도니아 지방 일부를 제외한 루멜리아(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 대부분을, 그리스 왕국은 크레타 섬과 남부 마케도니아 지방 일부ㆍ남부 이피로스를, 세르비아 왕국은 북부 마케도니아 지방 일부를 합병하거나 세력권 내에 넣었고, 알바니아가 독립하였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지방에 대한 영토 배분을 둘러싸고 불가리아 왕국과 세르비아 왕국ㆍ그리스 왕국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어 결국 1913년 6월 29일 제2차 발칸 전쟁이 일어났다.
제2차 발칸 전쟁(Second Balkan Wars)은 1913년 6월 29일∼7월 29일에 제1차 발칸 전쟁으로 획득한 마케도니아 지방에 대한 영토 배분을 두고 불가리아 왕국과 다른 발칸 동맹국 사이에 벌어진 발칸 반도에서의 두 번째 전쟁이다.
발칸 동맹국들은 1912년 12월 이미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한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승기를 잡고 있었다. 1912년 11월 알바니아가 독립을 선언하고 이슬람 공국의 성립을 선포했는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가 아드리아 해로 세력을 넓히는 걸 견제하기 위해 알바니아의 독립을 지지했다.
북쪽으로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강력한 견제에 직면한 세르비아 왕국은 제1차 발칸 전쟁의 결과로 맺은 강화 조약과 함께 얻는 영토 배분을 놓고 동맹국인 불가리아 왕국과 강경하게 대립하였다.
불화의 시작은 불가리아 왕국이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세르비아 왕국보다 훨씬 넓은 영토를 차지하면서 시작되었다. 세르비아 왕국은 이에 불만을 품고 그리스 왕국, 루마니아 왕국과 함께 동맹을 맺어 불가리아 왕국에 맞섰다.
결국, 1913년 6월 29일에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 지방 전부를 차지할 목적으로 세르비아 왕국과 그리스 왕국에 선전 포고를 하여 제2차 발칸 전쟁이 시작되었다. 제2차 발칸 전쟁이 일어나자, 루마니아 왕국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 몬테네그로 왕국도 세르비아와 그리스 동맹에 가담해 불가리아에 선전 포고를 했다.
불가리아 왕국군은 아드리아노플(에디르네) 등을 맹폭하며 맞섰으나 외교전과 군사전에서 밀리고 있었고, 그 사이에 오스만 제국이 동트라키아 지역을 회복했다. 결국 알바니아를 제외한 모든 발칸 국가들과 전쟁을 해야 했던 불가리아 왕국은 끝내 항복을 선언한다.
불가리아의 패전으로 7월 30일부터 루마니아 왕국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강화(講和)회의가 개최되었다. 8월 10일에 체결된 부쿠레슈티 조약으로 불가리아 왕국은 도브루자를 루마니아 왕국에, 마케도니아 지방 대부분을 세르비아 왕국과 그리스 왕국에, 동트라키아를 오스만 제국에 내주었다.
불가리아는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얻은 영토를 이 전쟁에서 대부분 잃었기 때문에 세르비아를 크게 원망했고, 러시아와도 사이가 멀어졌다. 이 전쟁으로 인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그리고 이 때의 패전은 불가리아 왕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편에 서는 계기가 되었다.
1, 2차 발칸전쟁의 결과, 러시아 제국의 외교정책은 말 그대로 초토화 되고 말았다. 발칸 동맹의 형성을 추진하고 협조했던 국가는 러시아였다. 하지만 발칸 전쟁이 모두 종결된 시점에서 발칸 동맹의 일원인 국가들이 적대관계로 돌아섰기 때문에 동맹은 당연히 해체되었고, 발칸 동맹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삼으려 했던 러시아에는 큰 타격이었다.
거기에 불가리아와 러시아의 관계도 틀어졌다. 불가리아의 공격적인 태도에 질려버린 러시아는 발칸 전쟁이 일어나자 親세르비아 태도로 일관했고, 2차 발칸전쟁에서 불가리아와 세르비아가 적대 관계가 되었기 때문에 세르비아의 뒤를 봐주던 러시아와는 당연히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렇게 되자 불가리아는 反세르비아 교두보라는 가치를 강조하며 삼국 동맹에 접근하는 과거의 외교 방식으로 회귀했다. 이러한 전개가 되자 세르비아는 발칸 반도에서 고립된 상태였기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 러시아를 끌어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가장 큰 문제는 1913년 이후였다. 발칸반도는 부동항을 얻고 싶어 했던 러시아에겐 매우 큰 의미가 있었고, 그 지역에서 영향을 줄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인 세르비아를 놓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러시아로서는 무조건적으로 세르비아를 지원하는 수밖에 없게 되어 러시아 측의 외교수단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그 후 발칸반도에서 고조되는 긴장감과 갈등이 터져 나오는 걸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1914년 7월,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처가 세르비아 군의 비밀결사인 검은 손과 연계 된 청년에게 암살당한 사건이 발생했다(사라예보 사건).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의 서막이었고, 러시아에는 파멸의 신호였다.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대규모 전쟁을 치를 준비가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이 전쟁은 극단적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명분으로 했다는 점에서 훗날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연상케 하는 학살과 인종청소를 목적으로 한 강간이 자행되었다. 발칸지역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에 대해서는 학살 및 강제 개종이 이루어졌으며, 그리스 내에 거주하는 라틴계 언어를 사용하는 루마니아계의 블라키아인들은 강제로 정교회로 개종되고 그리스식 이름을 받았다. 그리스 영토 내에 거주하는 불가리아계에 대해서도, 반대로 불가리아에 거주하는 그리스계에 대해서도 강제로 모국어교육을 금지하고 불가리아, 그리스화 시키는 정책이 자행되었으며, 발칸 전쟁으로 인해 고향과 전 재산을 잃고 오스만 제국으로 흘러들어온 무슬림 피난민들의 수는 거의 100여 만에 달한다. 이들은 러시아와 동방정교회에 극도로 적개심을 품었고, 이후 아르메니아 학살에 동조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