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4대 세종
▲조선왕조 5대 문종
문종은 조선의 5대 임금이다. 본관은 전주 이고, 휘는 향이며, 자는 휘지이다.
시호는 [흠명인숙왕문성효대왕]이고, 명에서 받은 시호는 공순이다. 존시를 합치면 [문종공순흠명인숙광문성효대왕]이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맏아들로, 조선의 왕 중에서 적장자로 왕위에 오른 최초의 왕이다.
문종은 세종의 맏아들이자 소헌왕후의 소생 중 첫째로 출생하여 1421년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왕세자로 책봉된 다음해 1422년 조부인 태종이 세상을 떠난다. 젊은 나이에 일찍 혼인했으나 첫 째 부인이었던 휘빈 김씨는 문종의 사랑을 얻으려 온갖 잡술을 이용하다가 발각되어 폐위되었고, 둘째 아내였던 순빈 봉씨는 폭력직이고 동성애적인 기질로 나인 소쌍과 동침하여 자질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으로 인해 폐위되었다.
그리고 이미 후궁으로 들어와 있던 귄씨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권씨는 왕세자비 시절이던 1441년 단종을 낳은 지 3일 만에 산고로 인하여 죽고 말았다.
문종은 어렸을 때부터 인품이 관대하고 후하여 누구에게나 좋은 소리를 들었으며 학문을 무척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의 정량적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를 발명할 정도로 천문학과 산술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1421년부터 1450년까지 29년간 왕세자로 지내는 동안 문신과 무신을 골고루 등용하였으며, 언관의 언론에 대해 관대한 정치를 펼침으로서 언론을 활성화해 민심을 파악하는 데 힘쓰는 등 아버지 세종의 정치를 곁에서 보필하였다.
1442년 세종이 병상에 누워 국정을 다스릴 수 없게 되자 세종을 대신하여 8년간의 대리청정 기간 동안 국사를 처리하다가 1450년 음력 2월에 세종이 승하하자 그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했다. 이미 대리청정을 한 덕분에 공백기간 동안 정사 처리에 문제가 없었다. 세종은 생전에 문종을 염려하여 병석에서도 자신은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으며, 당시 세자였던 문종 역시 병약하였기 때문에 오래 살 지는 못할 것 이라는 예상을 하고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 세손 단종의 앞날을 부탁하였다.
1450년 3월에 즉위하여 바로 명나라에 책봉 주청사를 보냈고, 그해 흠력 5월 명나라로부터 책봉 고명을 받아 정식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문종은 재위 기간 동안 언론의 활성화와 역사책 편찬, 병법의 정비 등의 업적을 남겼으며, 유연함과 강함을 병행하는 정치를 실시하려고 했다.
문종은 6품 이상까지 윤대를 허락하는 등 하급 관리들의 말도 빠짐없이 경청하는 등 열린 정책을 펴는 한편 동국병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을 편찬하였다. 문종은 역사와 병법을 정리함으로써 사회 기반을 정착시키고 제도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문종은 왕세자 시절에 진법을 편찬했을 만큼 국방에도 관심이 많아서 병력 증대를 통해 병법의 정비와 국방의 안정을 꾀하려 하였다. 또 태종 때 만들었던 화차를 새롭게 개발하여 혹시나 있을 전쟁과 국방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세종과 어머니의 삼년상을 연속적으로 치르는 바람에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세종의 고명대신이었던 김종서가 잠시 섭정을 맡았다. 그러다가 결국 즉위한 지 2년 3개월 만인 1452년 음력 5월에 39세를 일기로 경복궁 천추전에서 승하하였다.
문종이 즉위한지 2년 3개월 만인 1452년 음력 5월에 39살의 나이로 승하하자,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위치한 현릉에 능을 조성하였다.
현덕왕후 권씨는 원래 소릉에 안장되었다가 계유정난 이후 1457년 추폐되어 재궁이 바닷가에 버려졌었고, 1512년에 현릉에 같이 묻히게 된다.
그로부터 180여년이 흐른 뒤인 1636년 병자호란이 끝난 뒤의 일이었다. 대신들이 선원전에서 어떤 왕의 초상화를 발견했는데 초상화 속의 그 왕은 수려한 외모에 짙은 턱수염이 묘사돠어 있는, 풍채가 위엄이 있고 당당해 보이는 모스이었다고 한다. 이 일을 두고 조정 대신들은 초상화속 인물 관련 조선 제12대 임금 인종이라고 주장하는 대신들과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대신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다 한 대신이 그 초상화의 뒷면에 있는 배접을 뜯어보니 문종대왕어진이라 적혀있었다 한다.1592년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 문종의 외모에 대한 정확한 고증은 불가능한 상태다.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
세종, 문종 시대의 조선은 세계 최고의 과학기술국이요, 군사 강국이었다.
1983년 일본 동경대학 연구진이 기원전부터 20세기까지 세계의 대표적 과학기술 업적을 50년 단위로 편찬한 ‘과학기술사사전’을 발간했다. 이 사전은 놀랍게도 1400∼1450년 사이 50년간의 세계 과학기술 업적 62건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29건이 조선의 업적이라고 평가했다. 대국(大國)을 자처하는 중국은 고작 5건뿐이다. 동경대학 연구진을 이끈 과학사학자 이토 야마다는 “15세기에 노벨(과학)상이 있었다면(=존재 했다면)조선이 싹쓸이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1400~1450년 사이는 조선 제3대 임금 태종(1400∼1418)과 제4대 임금 세종(1418∼1450) 시절이며, 제5대 임금 문종은 왕세자로서 과학기술입국에 앞장섰던 기간이다.
세종대왕은 문학, 과학, 수학, 음악 등 다방면에 뛰어난 학자이자 군왕이었다. 세종의 싱크탱크였던 집현전의 학사 99명 가운데 21명이 과학기술자였다고 한다. 세종은 집현전에서 이들 학사와 호흡을 함께했다. 오늘날 우리가 세계에 자랑하는 훈민정음을 비롯해 천문학, 인쇄술, 지리학, 농업기술, 예술, 무기, 의학 등 당시의 모든 과학기술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이루고 있었다. 이 시대의 과학기술 활동은 세종의 명에 의해 많은 학자의 적극 참여와 협동 및 분야별 역할 분담을 통해 체계적 국가 산업으로 추진됐다. 세종은 1448년 무기 체계의 완성을 대내외에 선포하기도 했다.
이러한 조선의 과학기술 문화와 진취적인 사상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린 사람이 바로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 즉 제7대 임금 세조다. 수양대군은 형인 문종이 재위 2년여 만에 붕어하자 왕이 되려는 야심으로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 자신의 친동생들을 포함해 세종을 도와 과학기술과 학문을 연구하던 집현전 학사들을 참살했을 뿐만 아니라 세종이 과학기술과 학문의 전당으로 경복궁 안에 세운 집현전도 때려 부쉈다. 이후로 조선의 과학기술에 대한 열정과 전통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뿐만 아니라 수양대군의 집권을 도운 공신들의 특권과 횡포가 극심해 사회 정의를 무너뜨렸고, 이들 공신의 대를 이은 후손들의 특권 의식과 권력욕은 당쟁의 근원이 됐다. 이때부터 조선은 망해 가기 시작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세종, 문종 이후의 조선은 과학기술과 실학을 거부하고 허례허식의 폐쇄적인 사회로 전락해 겨우겨우 명맥을 유지해 오다 결국 1910년 우리가 ‘왜놈’이라고 얕보던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을 당했다. 다행히도 1945년 광복을 맞았으나, 얼마 안 돼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세계 역사상 네 번째로 비참하다는 3년간의 민족상잔 비극을 겪었다. 1953년 7월 휴전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못사는 나라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문화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선진국으로 우뚝 섰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정말로 ‘놀랍고, 자랑스럽고, 신비한 나라’다. 우리는 불과 50여년 만에 이러한 기적을 이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한다. 우리는 오늘날의 영광에 도취해 과거의 고난과 치욕을 잊어선 안 된다. 국가와 민족의 영광뿐만 아니라 치욕도 잊지 말아야 하며, 과거의 고난을 어떻게 극복하고 오늘날 강대국이 됐는지에 대한 정확한 원인과 과정을 국민 모두가 인식하고 공유할 필요가 있다. 지금부터가 한층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근대국가 건설 후 큰 전쟁을 겪으면서도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해 세계 최빈국에서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섰고, 세계 중심국으로 부상하는 행운을 누렸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지 않고 오늘날의 현실에 안주하며 부패한 정치 싸움에 몰입한다면 또다시 쇠퇴와 소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역사는 생생히 보여 주고 있다.
대한민국은 이제 더 이상 동북아시아 지역내 주변 국가 아니다. 우리는 항상 세계를 주시하며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고 세계 중심으로서의 시각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는 폐쇄적 민족 국가가 아니라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세계적 네트워크 국가를 지향함으로써 글로벌 허브 국가들과 경제·문화·정치 등 여러 분야에 걸친 협력을 더욱더 확대·지속해 나갈 뿐만 아니라 번영을 공유함으로써 세계 중심국으로의 위상을 굳건히 확립해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