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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강 목사 칼럼] 행복의 순례 (11)
기자 | 크리스천투데이 : 2026.10.26 20:23
시한부 행복에서 영원한 행복으로 -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걷는 행복의 여정
“인간은 모두 행복을 원한다. 그런데 왜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가? 12명의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끝이 있는 행복’ 너머 ‘끝나지 않는 행복’을 찾아가는 행복의 순례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행복의 순례 목차.
11. A. W. 토저 — 행복인가, 행복을 주시는 분인가
“네가 내 아들임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라.”
어느 교회 학생이 교리문답 시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자신 있게 “내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자, 어머니는 위와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웃음을 자아내는 이야기지만,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정확히 알고 깊이 묵상해야 할 신앙의 본질이자 행복의 지표입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오셨습니다(요 6:38). 겟세마네에서도 자신의 원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구하셨습니다(마 26:39). 그분의 삶 전체를 관통한 것은 성부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와 의탁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영혼까지 아버지의 손에 맡기신 것이 그 절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리면서도 여전히 자기가 주인으로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삶 전체를 그분의 손에 맡기는 삶입니다.
이 신앙의 본질을 깊이 통찰한 사람이 미국의 목회자이자 영성 작가 A. W. 토저(A. W. Tozer, 1897–1963)입니다. 그의 대표작 《하나님을 추구함》을 하나의 질문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원하느냐, 하나님을 원하느냐?”
선물인가, 선물을 주시는 분인가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죽이려는 사람들로부터 보호하신 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고 말씀하셨습니다. 죄 사함의 은혜와 죄에서 돌이키라는 말씀이 한 문장에 담겨 있습니다. 이어서 죄의 종이 된 삶에서 벗어나는 길을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죄 사함은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선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선물만 주지 않고 선물을 주신 분을 따르는 삶을 제시하셨습니다. 토저는 《네 주인은 누구인가》에서 예수님을 죄를 용서해 주는 ‘구주’로만 받아들이고 삶의 ‘주님’으로는 따르지 않는 것을 강하게 경계했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눅 17:17–18)
누가복음 17장에서 열 명의 나병환자가 모두 고침을 받았지만, 예수님께 돌아온 사람은 사마리아인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아홉은 병이 낫자 그대로 자기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돌아온 한 사람에게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 17:19)고 말씀하셨습니다.
아홉은 선물을 얻었고, 한 사람은 선물을 주신 분을 얻었습니다. 토저는 《하나님을 추구함》에서 바로 이 문제를 짚었습니다. 선물을 주신 분보다 선물을 더 사랑하는 것은 신앙의 모양을 한 우상숭배임을 지적했습니다.
제단에 올려진 하나님의 선물
이삭은 아들을 가질 수 없던 아브라함이 25년의 기다림 끝에 얻은 소중한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따랐습니다. 아브라함이 무정하거나 아들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아들을 주신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신뢰했기 때문입니다(히 11:17–19).
토저는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잃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맡김으로써 비로소 안전하게 가졌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정리합니다. “하나님을 자기 보화로 삼은 사람은 그 한 분 안에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다.” 하나님의 선물이나 복을 거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복도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많은 사람이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선물을 더 사랑하게 될까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온전히 위하신다는 사실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선물은 손에 잡히지만,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은 믿음으로만 붙들 수 있습니다.
너를 위하여
하나님은 노아에게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창 6:14)라고 하셨습니다. 방주가 필요한 쪽은 하나님이 아니라 노아였습니다. 노아는 미래를 알아서 방주를 지은 것이 아니라, 미래를 아시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그 말씀을 따랐습니다(히 11:7).
토저는 《거룩하신 하나님》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 그리고 전지전능하심을 깊이 탐구한 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며 지혜롭고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분을 신뢰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명과 진리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때로는 그 말씀이 우리의 욕망을 거스르고 고난의 길로 이끌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선하신 분이시기에, 그분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롬 8:28).
참된 행복은 하나님의 뜻을 내 뜻에 맞추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신뢰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행복을 이루려 할 때, 우리는 오히려 참된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됩니다.
자아의 정체, “내가 하리라”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딤후 3:1–2)
바울은 고통하는 때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맨 앞에 ‘자기 사랑’을 두었습니다. 물론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몸을 돌보는 것 자체가 죄라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욕망을 앞세우는 자기중심적인 사랑입니다.
토저는 《하나님을 추구함》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친밀한 교제를 가로막는 자아의 문제를 깊이 다루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말씀하시지만, 그 말씀을 가로막는 것은 바깥이 아니라 내 안에서 속삭이는 ‘자아(自我, Self)’의 음성입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쪽 끝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사 14:13–14)
이 말씀은 본래 바벨론 왕의 교만을 책망하는 말씀이지만, 창조주의 자리를 넘보는 피조물의 교만을 돌아보게 합니다. ‘내가 올라가리라, 내가 높이리라, 내가 앉으리라, 내가 같아지리라.’ 이처럼 반복되는 ‘내가 하리라’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려는 자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피조물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듯이, 자신의 지혜와 능력만으로 참된 행복을 완성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아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신다는 사실을 신뢰하지 않고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 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신다는 믿음보다 내가 나를 위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설 때, 자아는 하나님께 속해야 할 마음의 왕좌를 차지합니다.
선악과의 독성, 자기 판단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판단을 앞세우기 시작한 장면은 에덴동산에서 발견됩니다. 뱀의 유혹 앞에서 하와는 하나님의 경고보다 자신의 눈에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열매를 선택했습니다(창 3:6).
이는 단순히 금지된 열매를 따먹은 것이 아니라, 선악을 스스로 판단하려는 인간의 반역, 곧 “누가 왕인가?”라는 문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를 정하실 권한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 열매를 먹는 행위는 인간이 하나님 대신 왕과 재판관이 되려 한 것입니다. 판단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 판단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두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판단만이 아니라 종교 지도자의 판단에도 해당됩니다. 어떤 지도자의 가르침이든 말씀에 비추어 검증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따르면,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판단을 추종하게 됩니다. 누가는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듣고도 성경을 통해 확인한 베뢰아 사람들을 특별히 기록했습니다(행 17:11).
토저는 《지성소》에서 인간의 이성과 판단은 창문과 같다고 했습니다. 창문은 밖에서 들어오는 빛을 받아들이는 통로이지 스스로 빛을 만들지 못합니다. 창문이 자기를 빛이라고 착각하는 순간 방은 오히려 어두워집니다. 예수님은 자기 판단에 사로잡힌 바리새인들에게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41)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지식과 경험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오늘 옳다고 확신했던 판단이 내일 잘못된 것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돈과 권력, 세상의 성공을 절대적인 가치로 여기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진리와 영원한 가치는 놓치기 쉽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 5:30)
예수님은 자기 뜻을 내려놓으시고 자신의 판단을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일치시키셨습니다. 하물며 제한된 지식과 죄의 영향을 받는 인간이 자신의 판단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이겠습니까.
한 뿌리, 세 얼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지금까지 살펴본 자기 사랑과 자기 판단, 그리고 욕심은 서로 다른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세 얼굴입니다. 그 뿌리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는 자아입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면 자기 사랑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생각을 앞세우면 자기 판단이 되며,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욕망을 앞세우면 욕심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죄의 지배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에게도 자기중심적인 욕망의 유혹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자기 부인과 성령 충만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눅 9:23). 바울은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고 가르쳤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존심을 더 억누르고 욕망을 더 철저히 끊어야 자기 부인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죽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출발점을 보여 줍니다.
십자가에서 만난 결말과 사랑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바울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다고 선언했습니다. 로마서에서도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부인은 “내가 나를 죽여야 한다”는 결심이 아니라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다”는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은 내 의와 노력으로 구원을 이루려 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영원한 속죄를 믿는 복음의 원리와 같습니다.
십자가는 내가 나를 위하려던 자아의 결말과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는 사랑이 만난 자리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에서 죄만 해결된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위하는 삶’이 끝나고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는 삶’이 시작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더 이상 죄의 욕망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사실을 믿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 이것이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는 삶입니다.
좀비 자아의 속삭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옛사람은 더 이상 우리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그 옛사람이 살아서 자신을 지배하는 것처럼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마치 이미 죽었는데 살아 움직이는 영화 속 좀비와 같습니다.
이 ‘좀비 자아’는 끊임없이 자신이 주체가 되게 하고, 자신의 판단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세우도록 유혹합니다. 그 속삭임은 때로 이렇게 들려옵니다.
“네가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실 거야.”
“네가 이만큼 이룬 거야. 너는 정말 대단해.”
“네 의견이 중요해. 너를 무시하는 사람은 가만두지 마.”
이 속삭임에 속으면, 무언가를 잘하면 교만해지고 잘하지 못하면 낙담하거나 자신을 정죄하면서 살아갑니다. 더 심각한 것은 문제의 원인을 자아가 아니라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기를 정말 위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습니다.
1974년, 전쟁이 끝난 지 29년 만에 필리핀 밀림에서 한 일본군 소위가 걸어 나왔습니다. 그는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홀로 싸움을 이어 왔습니다. 옛 상관이 직접 찾아와 “작전은 끝났다”고 명령했을 때에야 비로소 총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십자가에서 죄의 지배가 이미 깨졌다는 사실을 잊으면, 여전히 죄가 자신의 주인인 것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명령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여기라’는 것은 없는 일을 상상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선언하신 사실에 근거하여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육신에 남아 있는 죄는 실재하는 적입니다. 바울도 “내 속에 거하는 죄”(롬 7:20)를 말했습니다. 거짓인 것은 죄의 존재가 아니라 “아직도 내가 네 왕이다”라는 자아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곧이어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롬 6:12)라고 당부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자신의 힘으로 승리를 만들어 내는 싸움이 아니라, 이미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의 능력으로 죄의 유혹에 맞서는 싸움입니다.
탄식과 감사 사이
그러나 죄의 지배에서 해방되었다고 해서 자신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모든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힘을 의지할수록 교만과 낙심 사이를 오가게 됩니다. 바울은 이러한 인간의 무능함을 탄식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 이는 자신의 힘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 탄식은 곧바로 감사로 이어집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5). 이 탄식과 감사는 신자의 삶에서 평생 함께 가는 두 숨결입니다. 무엇보다 감사의 자리에서 바울은 자신을 주어로 세우지 않았습니다.
수고를 말할 때에도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고 했고, 삶 전체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갈 2:20)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아가 고개를 들 때마다 이렇게 선포해야 합니다.
“너는 이미 십자가에서 왕좌를 잃었다. 내 삶의 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님께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부인은 자신을 더 철저히 억누르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서 자신의 생각과 욕망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성령을 의지하는 순종으로 이어질 때,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의 삶에서 드러납니다.
안쪽에 있는 손잡이
성령 충만은 단순히 강렬한 종교적 감정이나 특별한 능력을 경험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과 욕망을 다스리시고, 말씀을 깨닫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어 내는 성취가 아니라, 성령을 의지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삶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이 말씀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스스로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교회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친밀한 교제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주님 없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데 있었습니다.
영국 화가 홀먼 헌트는 1853년 이 장면을 〈세상의 빛〉으로 그렸습니다. 그림 속 문에는 바깥 손잡이가 없습니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누군가 손잡이를 빠뜨렸다고 지적하자, 헌트는 그 문은 안에서만 열 수 있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주님은 문을 부수고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아 5:2)라는 사랑의 음성으로 두드리며 기다리십니다. 그렇다면 닫힌 마음의 문은 어떻게 열립니까?
사람의 마음은 자기를 무시하고 해치는 사람에게는 닫히고, 자기를 이해하고 위해 주는 사람에게는 열립니다. 예수님이 나를 간섭하고 억압하는 분으로 여기면 문은 굳게 닫힙니다. 그러나 그분이 나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 주신 분임을 믿을 때 손잡이를 잡은 손이 움직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목적은 단순히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하시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목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몸은 떠났으나 마음은 남아
출애굽기는 12장의 유월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을 떠났지만 이야기는 광야로 이어지고, 40장에 이르러 백성의 장막들 한가운데 하나님이 거하실 성막이 세워지면서 마칩니다.
출애굽의 목적은 애굽에서 나오는 것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몸으로는 애굽을 떠났지만, 마음은 여전히 애굽에 길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광야로 이끄신 이유를 모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토저가 경계했던 것도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면서 여전히 세상의 가치관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으며 자신들의 생명이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 있음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명령을 지키는 일이 아닙니다. 먼저 그 말씀을 하시는 분이 누구신지 알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에게 스스로 살길을 만들라고 하지 않고, 양들을 위해 친히 목숨을 버립니다. 양이 사는 근거는 자기의 능력이나 열심이 아니라 목자의 사랑과 희생입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는 자기 열심으로 행복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목자가 누구신지 알고, 그 음성을 바르게 듣고 믿음으로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가?”가 아닙니다. “나는 선한 목자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그분이 이루신 구원이 무엇인지 바르게 알고 믿고 따르고 있는가?”입니다.
주시지 않을지라도
건강과 평안, 가정의 화목과 앞날의 형통을 구하는 기도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가 오직 그것들을 얻기 위해서라면, 하나님은 어느새 행복을 얻는 수단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을 때에도 그분을 신뢰할 수 있는가? 내 계획과 다른 길로 인도하실 때에도 따를 수 있는가? 하박국 선지자는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선물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기쁨이 처음부터 선물이 아니라 선물을 주시는 분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시편 73편의 아삽은 악인의 형통을 보며 거의 넘어질 뻔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겨도 손에 쥐는 것은 없고 오히려 날마다 재난을 당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소에 들어갔을 때 그의 눈이 열렸고, 마침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 73:25–26, 28)
이것이 토저가 평생 강조했던 신앙의 본질입니다. 행복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고, 하나님의 선물은 하나님 자신보다 귀할 수 없습니다. 참된 행복은 하나님께 무엇을 얼마나 얻어 내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과 영원히 함께하는 데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보다 이삭을 주신 하나님을 신뢰했고, 노아는 미래를 알지 못했지만 미래를 아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박국은 모든 소출이 사라져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했으며, 아삽은 하나님 자신이 영원한 분깃임을 발견했습니다.
행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지만, 하나님 자신은 그 어떤 선물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의 영원한 행복이십니다.
이제 《행복의 순례》도 마지막 여정에 이르렀습니다. 다음에는 청교도 토머스 왓슨과 함께, 하나님이 우리의 최고의 행복이시라는 진리를 살펴보겠습니다.
12. 토머스 왓슨 —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 자신이다
▲행복신앙연구소 소장 제임스강 목사.
※ 제임스강 목사는 미주장신대 목회학 석사 및 미국 그레이스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행복신앙연구소 소장이자 국제기독교이단대책협의회 공동회장으로 활동하며, 유튜브 채널 ‘진리의 재발견’을 통해 개혁주의 신앙 회복과 영원한 속죄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
이 칼럼은 「행복의 순례」라는 제목으로 12회에 걸쳐 연재되며, 행복신앙연구소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전체 칼럼을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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