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우리는 누구에게 가장 거짓말을 많이 할까.
이 질문 앞에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영화가 하나 있다.
중국계 미인인 영화감독 룰루 와의 (페어웰)이라는 작품이다.
영화 속 '빌리'는 오늘도 수화기 너머 할머니에게 거짓말을 한다.
월세가 밀려 한숨을 쉬는 나날을 보내면서도 잘 지내냐는 말에 애써 잘 지낸다고 말하고,
코에 피어싱까지 했음에도 뉴욕에선 귀걸이도 잡아당겨 훔쳐가니 조심하라는 말에 귀걸이를 안 했다고 말한다.
그런 빌리의 모습에서 가족에게 솔직하지 못한 우리가 보인다.
사랑은 걱정 앞에서 많은 말들을 거둬가 버리고 나의 힘겨움은 가족에게 비밀이 도니다.
때로는 어설픈 연기도 한다.
괜찮은 척, 힘들지 않은 척, 행복한 척, 그렇게 우리는 가족에게 종종 선의의 거짓말을 하면서 산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내 가족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일이니까.
이 진창에 내 가족까지 빠지면 안 되니까.
죽음 앞의 선택
사랑하는이의 행복과 펴오하를 꺠트리고 싶지 않은 마음은 죽음이라는 커다란 위기 앞에서도 거짓말을 지어내게 한다.
빌리와 통화할 때 할머니와 함께 있던 이모할머니도 그렇다.
방금 의사에게 자신의 언니가 페암 4기라는 말을 듣고 왔지만 궁금해하는 언니에게 '양성 음영'이라는,
양성인지 음성인지 모르는 모호한 말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안심시킨다.
이 소식을 고스란히 전해 들은 가족들은 똘똘 뭉쳐 할머니에게 절대로 발병 사실을 알리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흩어져 살고 있는 가족들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할머니를 다 같이 보러 가기 위해 한가지 묘안을 짜낸다.
바로 빌리 사촌의 위장 결혼식을 계획하는 것이다.
아무리 의도가 좋다고 해도 이게 돠연 옳은 일일까.
중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란 빌리는 이런 상호아이 낯설고 이해하기 어렵다.
할머니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 모르니 삶을 스스로 정리하고 이별을 준비할 시간을 드려야 하는 게 아닌지 혼란스럽다.
그러나 가족들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건 암이 아니라 공포라며 고개를 젓는다.
할머니도 자신의 병을 알 권리가 있고 그게 합법적이고 도덕적이지 않냐고 묻는 빌리에겐 동양에서 한 사람의 삶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며 할머니 대신 그 짐을 져야 하는 게 자신들의 몫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대답만 돌아온다.
이 모든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할머니는 오늘고 기합을 넣으며 활기찬 하루를 열고 힘들어도 참고 계단을 걸어 오른다.
이 나이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건 그동안 꾸준히 운동을 했기 때문이라는 할머니를 보며 빌리는 생각이 많아진다.
나라면 과연 어땠을까.
예전의 나라면, 그러니까 부모님을 보내드리기 전, 빌리와 비슷한 나이의 나였다면 무조건 빌리의 편에 서서
당사자에게 진실을 말할 것을 종용했을지 모른다.
답을 알 수 없는 질문
실제로 엄마의 골수에서 ㅇ마세포가 발견됐을 때 우리 가족은 숨기지 않았다.
자신의 병을 당사자가 모르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믿었다.
글허다고 의사가 첫 진단과 함께 선고한 1년 남짓의 여명까지 가감 없이 전한 건 아니었다.
엄마에게는 그저 쉽지 아ㄴㅎ은 병이라고만 말했을 뿐이다.
믿고 싶지 않은 마음 반, 엄마가 감당해야 할 충격에 대한 두려움 반이었다.
우리는 엄마의 투병 기간 내내 갈등했다.
힘들어도 결국 나올 수 있다는 거짓말을 해야 하는 건지, 숫자로 통보된 엄마의 여명을 사실대로 알려야 하는 건지,
병의 위중함은 어느 정도 알테지만, 주어진 삶이 얼마나 남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엄마를 위하는 길을 끊임없이 고민했다.
너무나 두렵고 피하고 싶은 순간이지만 엄마에게 사실을 솔직히 전하고 죽음과 이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것은 아닐까.
괴로워하며 하루에도 수백수천 번 물움표에 갇혔다.
그 사이 엄마의 병은 더 위중해졌다.
당시 엄마는 골수이식으로 알려진 조혈모세포이식을 고통스럽게 받았는데 결국 암이 재발했고, 의사는 ㄷ 달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마지막 선고를 내렸다.
더는 미룰 수 없는 힘든 이야기를 엄마의 동생인 이모 수녀님께 부탁드렸고 엄마는 짧은 유언이나마 남길 수 있었다.
엄마는 이런 이야기들을조금 더 일찍 나눌 수 있었다면 좋았겠다고 아쉬워했다.
그리고 현실을 받아들이자마자 몸과 마음을 모두 내려놓은 사람처럼 2주 만에 서둘러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3년 뒤 아빵게 폐암이 발병했다.
가족들은 이 사실을 아빠에게 전하며 무엇이 됐든 아빠의 뜻을 존중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아빠는 항암치료를 받지 않고 평범하게 지내기를 원하셨고, 6개월이남았다는 의사의 말과 달리 2년 반 넘게
우리 곁을 계시다 떠나셨다.
가끔 아빠에게 발병 사실을 숨겼으며면 어떘을까 하고 생각할 떄가 있다.
병에 대한 스트레스 없이 일상을 지내셨더라면 혹시 더 오래 아빠와 함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정담을 알 수 없는 질문은 언제나 남겨진 자의 몫이다.
영화 (페어웰)에서 할머니의 발병 사실을 어떻게든 슴기려고 필사적으로 거짓말을 거듭하는 가족들의 마음이 이제는 조금
이해가 간다.
할머니에게 준비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냐고 묻던 빌리의 마음 또한 모르는 건 아니다.
그렇기에 똑같은 상황이 오더라도 나는 또다시 치열한 고민에 빠질 것만 같다.
인생에는 정헤진 답이 없고, 우리는 그저 주어진 상황에서 각자에게 더 좋은 답을 찾아 애쓰고 또 애쓰는 존재일 뿐이다.
그런 우리가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하든 최선을 다해 사랑하려고 했던 마음만은 서로가 꼭 알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엔젠가 찾아올 이별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다면 좋겠다. 박애희
박애희 오랜기간 KBS와 MBC에서 방송 작가로 활동했고, 잊히지않기를 바라는 것이 있어 읽고 쓰며 살아갑니다.
기쁨보다는 아픔, 높은 곳보다는 낮은 곳,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 눈부신 것보다는 스러져가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엄마에게 안부를 묻는 밤), (어린이의 딸), (견디는 시간을 위한 딸들) 등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하얀 거짓말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상자 하나.
소중한 사람에게 슬픔이 되는 진실을 몰래 숨겨두고
자물쇠로 굳게 잠가두었습니다.
그래도 안심되지 않아 두르고 또 두릅니다.
당신에게 평안과 희망만 주고 싶은
마음의 포장지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