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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물건
모든 불자들의 바람, ‘윤회금지’
서울 열린선원장 법현 스님
몇 년 전, 중국 광둥성 샤오관 시내에 있는 대감사를 찾은 적이 있다. 취재 겸 참배를 겸했던 자리였다. 대감사는 절 자체보다 육조혜능으로 더 유명한 곳이다. 이곳에서 혜능 스님 이 『단경(壇經)』을 설했기 때문이다. 1300년이 넘는 시간 전에 이뤄진 대 역사의 현장을 간다는 설렘에 가슴이 쿵쾅거렸던 기억이다.
큰 기대를 안고 떠났지만, 대감사로 가는 길은 대로(大路)가 아니었다. 대찰(大刹)이 아님을 직감했다. 빌딩 사이의 좁은 길을 한참 걸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시장을 지나고 주택가를 거쳐 절 앞에 서니 대감사는 한국에 있는 여느 도심포교당 분위기와 다르지 않았다. 사격(寺格)도 크지 않고 전반적으로 너무(?) 평범했다. 역사적인 성지어서인지 순례객들은 적지 않았다.
절을 참배하고 나서야 생각이 났다. 혜능의 말씀이다.
佛法在世間 不離世間覺
離世覓菩提 恰如求兎角
불법재세간 불리세간각
이세멱보리 흡여구토각
불법은 세간에 있으니 세간을 떠나 깨달음을 구하지 말라.
세간을 떠나 보리를 구한다 함은 마치 토끼머리에서 뿔을 찾는 것과 같다.
선지식의 말씀을 저 멀리 구름 위의 얘기로만 생각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다시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한국의 사찰이다. 설마했다. 시장에 있다고는 들었지만, 솔직히 시장의 중심에서 부처님을 외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진짜였다. 열린선원은 시장 속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다.
지하철역에서 생각보다 많이 걸었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열린선원 간판이 보인다. 몇 개의 교회와 시장의 각종 가게 이름들 사이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니 ‘좌(左) 교회, 우(右) 태권도 학원’이다. 그 사이를 지나야 열린선원에 들어갈 수 있다. 열린선원은 50여평의 법당과 조그만 공양실, 그리고 공양실보다 더 작은 열린선원장 법현 스님의 집무실로 구성돼 있었다.
법당에서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니 법현 스님은 공양부터 하자며 손을 붙잡았다. 공양주 보살님이 정성껏 마련해 준 공양을 앞에 두고 스님과 ‘독대 공양’을 했다. 다른 스님 같았으면 제대로 밥을 먹기 쉽지 않았을 터이지만, 스님과 함께 하는 공양에서는 양껏 ‘흡입’을 했다.
공양을 하고 다시 차를 한 잔 마신다. 그리고는 바로 본론을 시작했다. 차가 식기 전에 적장의 목을 베고 온 관우가 된 것처럼 인터뷰는 거침없이 진행됐다.
성도재일법회에서의 좋은 기억
“전남 화순에서 태어나 평택에서 자랐습니다. 불교는 길 가다가 만났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말이었는데 학교로 가는 길목에 평택 명법사에서 붙인 법회 안내 포스터가 있었어요. 그것을 보고 호기심에 명법사로 갔습니다. 알고 보니 그때가 성도재일(음력 12월 8일) 전날이었습니다. 법당 문을 열었는데, 스님도 여자, 신도님들도 여자, 학생들도 전부 여자였어요. 하하. 청일점이 되어 그날 철야법회에 동참했습니다. 50분 참선하고 10분 휴식으로 철야를 했는데, 저는 그저 눈을 감았다가 뜨는 과정을 반복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뭔가를 크게 얻은 느낌이었습니다.”
스님은 그렇게 불교와의 인연을 시작했다. 명법사 학생회 활동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대 기계공학과에 진학했다. 거기서도 역시 불교학생회에 가입해 ‘열혈 청년 불자’로 거듭났다.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서울지부장과 명법사 청년회 회장, 어린이 청소년 법회 지도간사 등을 맡아 부처님 법을 열심히 전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동시에 태고종 총무원에 ‘취직’을 했다.
“대학을 마치니 학교 선배들이 대기업에 취업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며 빨리 원서를 달라고 재촉했습니다. 반면 대불련 선배들은 불교계에 남아 불교 일을 하자고 해요. 저는 당연히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태고종에서 종무원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보니까 태고종에는 ‘유발승’ 제도가 있어요. 태고종은 인재들을 영입하기 위해 비교적 자유로운 제도를 선택했던 셈이죠. 그래서 前 태고종 총무원장 운산 큰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했습니다.”
스님은 그렇게 출가해 1985년 12월에 사미계를 받았다. 그리고 1991년 삭발염의하고 ‘공식’ 출가자가 됐다.
스님은 출가 뒤 태고종의 역사를 정리하고 수행 풍토를 일신하는데 주력했다. 또 태고종의 기획국장, 총무부장, 교무부장, 동방불교대학 교학처장, 동방대학원대학 기획처장, 사회부장 교류협력실장, 부원장 등의 소임을 두루 맡았다. 또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사무국장과 상임이사를 맡아 불교 내 다양한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동시에 사찰에서 현장포교에도 적극 나섰다. 서울 종로 원각사, 정릉 천중사, 관악산 자운암 등에서 불자들을 만났다.
출가 전부터 가졌던 이와 같은 스님의 포교 원력(願力)과 실천행은 지금의 열린선원으로 이어졌다.
저잣거리에 세운 열린선원
도심포교당을 구상 중이던 스님의 눈에 교계 신문 광고가 들어왔다. ‘비구 셰프’로 유명한 적문 스님이 운영하던 전통사찰음식연구소 사무실을 인수할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었다. 적문 스님과 친분이 있던 스님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
“법현 스님이 맡아준다면 바로 인계하겠습니다.” 적문 스님은 흔쾌히 법현 스님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2005년 6월에 은평구 갈현동 역촌중앙시장 한복판에 문을 연 것이 바로 열린선원이다.
“옛 조사스님들도 깨달음을 얻은 뒤에는 산속에 있지 말고 대중들 곁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불교를 처음 접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 말씀은 제 가슴에 항상 남아 있었습니다. 열린선원이라는 이름은 2001년도에 개설한 인터넷카페 ‘열린절’을 모태로 지었습니다. 열린선원은 말 그대로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또 누구나 공부해서 부처님 법을 체험할 수 있게 한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보시듯이 선원이 시장 한복판에 있다 보니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시장 공용화장실은 저녁이 되거나 시장 전체가 쉬는 날에는 열지 않습니다. 주차장도 없습니다. 또 아무래도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다 보니 항의도 많이 받았습니다. 천도재를 지내고 있는데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와 시끄럽다고 고함을 치는 사람도 있었고 기도시간 겹치지 않게 하라는 목사님도 계셨습니다. 시간이 흐르다 보니 이제는 모두 이웃사촌으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하하.”
스님은 열린선원이 시장에 있어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했다. 장점도 많다고 한다. “매월 내야 하는 임대료가 그리 비싸지 않습니다. 또 누구나 편하게 올 수 있습니다. 각종 의식을 할 때 재료 준비가 쉽습니다. 주거용 건물이 아니다보니 실제로는 생각보다 조용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곳을 ‘저잣거리 숲’이라고 합니다. 숲처럼 조용할 때가 있거든요. 아침에 예불을 하면 산속에서와 같은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그리고 제가 오래 전부터 비염이 있어서인지 시장의 냄새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더 청량하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스님은 열린선원을 운영하면서 무엇보다 불자들이 공부하고 실천하는 토대를 만들어 주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다. 그래서 4개월 과정의 참선문화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벌써 22기째 운영 중이다. 1박 2일의 템플스테이를 마지막 과정으로 아카데미를 수료한 사람들에게는 남녀 공히 두 글자 법명(法名)을 준다.
“열린선원 초기에는 예비불자들이 기초공부를 할 수 있도록 ‘열린불교아카데미’를 운영했습니다. 그러다 좀 더 체계화된 명상과 참선을 위해 지금의 참선문화아카데미로 확대 개편했습니다. 참선문화아카데미에서는 매주 수요일 저녁에 부처님 생애, 수행과 불교문화 등등을 주제로 강의합니다. 지금까지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불자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어떤 때에는 한 명의 수강생을 놓고 4개월 동안 아카데미를 진행한 적도 있어요. 어떤 거사님은 전북 전주에서 매주 아카데미 수업에 참여하셔서 법명을 받고 이곳의 신도가 되셨습니다.
또 매월 둘째와 셋째 주에는 일요법회를 하고 지장재일에는 ‘조상님 추모법회’를 합니다. 또 추석과 설에는 불교식 차례 올리기 운동을 이어갑니다.”
스님은 차례를 올릴 때 술이 아닌 차를 올리자는 불교식 차례 올리기 운동을 수십 년 전부터 펼쳐왔다. 1997년에 천중사에서 불교식 차례 시연회를 열어 불교계 안팎의 호응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언젠가 한 언론에서 각 종교별 차례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불교식 의례만 빠져 있었어요. 그래서 관련 자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차례는 ‘충담 스님의 미륵부처님께 차 올리기가’ 시초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제대로 몰랐습니다. 불교식 차례 올리기 운동은 앞으로도 계속 벌여 나갈 생각입니다.”
법현 스님은 요즘 많은 대중들이 이용하고 있는 SNS에서도 ‘사이버 포교’에 적극 나서고 있다. 열린선원이 인터넷 카페에서 출발했던 것처럼 말이다.
스님은 카카오스토리에 매일 한 꼭지 이상의 글을 올린다. 또 각종 카페와 밴드, 페이스북에서도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 있다. 이렇게 매일 만나는 사람이 수만 명이다. 스님은 특히 종단을 가리지 않은 도반 70여명의 스님들과도 매일 소통하며 종단 내외의 현안에 대한 생각도 공유한다.
“새벽에 예불을 올리고 아침공양을 한 뒤 한 시간 정도 할애를 합니다. 그래서 저와 관련이 있는 각종 인터넷에 글을 올립니다. 글을 올리고 나서는 다시 시간을 내 대중들과 댓글을 주고받으며 소통합니다. 또 좋은 동영상 등도 공유하면서 우리시대에 맞는 포교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스님은 각종 불교의식의 한글화를 추진하고 있다. 2010년에는 열린선원 자체적으로 ‘한글법요집’을 발간해 신도들의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저는 불교의식과 수행에서도 우리말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사띠(sati)는 ‘마음챙김’ 보다 ‘온마음’으로, 중도(中道)는 ‘깨달음에 명중하는 하는 길’로 해석해서 강의합니다. 좀 더 쉬운 말로 해야 불자들도 불교를 쉽게 공부할 수 있지 않겠어요?
저의 캐치프레이즈는 ‘쉽고 재미있고 유익하게’입니다. ‘쉬운 불교 여는 도량, 바른 불교 닦는 도량, 밝은 불교 펴는 도량, 모두 함께 웃는 도량’이 열린선원이길 기대합니다. 한글법요집을 몇 년 전에 만들었지만 앞으로는 경전과 법요의식, 찬불가를 함께 묶은 종합 ‘불교성전’을 만들어 널리 보급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님의 이런 활동은 열린선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불교생명윤리협회 집행위원장, KCRP(한국종교인평화회의) 종교간 대화위원장, 서울시 에너지살림홍보대사, 국가인권위원회 생명인권포럼위원, 생명존중헌장 제정위원, 한국사찰림연구소 이사, 갈현2동 복지두레위원 등을 맡아 ‘전방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웃종교인들과 함께 하는 방송 토크쇼가 생겼을 때 불교를 대표해 처음 출연한 사람도 바로 법현 스님이었다.
“성불의 길로 모두 함께 가기를…”
법현 스님은 수행과 포교뿐만 아니라 종단 안팎의 현안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여러 소임을 맡아 많을 때는 하루 7~8개에 이르는 모임에 참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스님은 특히 불교계 내부의 문제들이 해결은커녕 장기화되고 있는 것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했다.
“수행자들이 기본에 충실하지 않아서 문제가 생기고 있습니다. 수행자는 근본적으로 수행과 전법 외의 것에 눈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사회적인 활동을 할 때도 재가자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그리고 수행자의 소유는 제한되어야 합니다. 청빈한 소유정도는 불가피하지만 그 이상을 갖는 것은 곤란합니다. 우리나라 평균 직장인의 삶을 살아도 충분한데, 중소기업 사장 이상의 삶을 살려고 해요. 스님들이 부와 명예 등 ‘기본’ 이상을 가지려 해서 지금 문제가 생기고 있습니다.
어쩌면 가장 기본적인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상황이 너무 이상하게 되어 버려, 그 기본이 너무 혁신적인 것이 되는 역설적인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철저하게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법현 스님은 종단을 막론하고 불거지는 범계 문제, 각종 사건사고에 대한 걱정을 한참이나 했다. 불교를 걱정하는 것은 스님들이나 재가자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 숫자가 너무 적어서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몇 시간에 걸친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차(茶)는 식지 않았다. 식기 전에 마시기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스님은 다시 차를 주셨다. 마지막 차가 식기 전에 핵심적인 질문을 했다.
“스님의 활동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스님의 물건’은 무엇인가요?”
질문은 들은 스님이 갑자기 일어서서 열린선원 입구로 가 무언가를 들고 왔다. 커다란 원형의 ‘물체’다. 얼핏 보아서는 교통표지판처럼 생겼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익숙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윤회금지-NO SAMSARA'
“열린선원 개원 3주년이 되었을 때 김영수 작가가 선물로 선원에 기증한 것입니다. 제가 동산반야회 청년회 지도법사를 할 때 계(戒)를 준 인연이 있거든요. 김 작가가 이 작품을 저에게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해서 기분 좋게 받았습니다.
‘윤회금지’는 말 그대로입니다. 더 이상의 설명도 필요 없습니다. 열린선원이어도 좋고 다른 사찰이어도 좋습니다. 부처님 공부를 열심히 하고 또 쉬지 않고 정진해서 우리 모두가 윤회에서 벗어나자는 의미입니다. 저부터 더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하하. 그러고 보니 이것은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성보(聖寶)네요.”
스님의 말씀처럼 ‘윤회금지’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쩌면 법현 스님이 살아온 궤적 자체가 ‘윤회금지’의 범주에 들어 있었는지 모른다.
얼마 전 열린선원 개원 10주년 법회에서 삼천사 회주 성운 스님은 ‘농담 반 진담 반’의 축사를 했다.
“법현 스님이 역촌시장 안에 열린선원을 만들어 처음 개원할 때 그렇게 말했습니다. ‘야밤에 도망가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개원 3주년 때는 ‘도망가지 않아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이번에 다시 한 말씀 드립니다. 앞으로도 저잣거리를 벗어나지 마세요.
열린선원 입구의 교회는 벌써 3번째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그만큼 포교가 쉽지 않은 곳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수행하고 포교하는 법현 스님은 정말 우리시대의 부루나 존자입니다.”
대중들은 뜨거운 박수를 공감을 표시했다.
법현 스님은 열린선원 불자들과 함께 새 도량 마련을 발원하고 있다. 성운 스님의 당부처럼 저잣거리를 벗어나지 않은 도량이 될지, 아니면 산 속의 도량이 될지는 모르지만 언제나 대중 속에서 빛이 났던 석가모니 부처님과 육조혜능 스님처럼 법현 스님도 우리 곁의 수행자가 될 것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불교포커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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