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23일 연중 제3주일
-류해욱 신부
갈릴래아, 빛의 마을들 오늘은 연중 제3주일입니다. 복음은 루카 복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전체적인 맥락을 집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 내용은 전체적인 상황의 서두입니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 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께서 왜 갈릴래아로 가셨고, 복음 사가는 왜 굳이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가시어, 복음을 선포하셨다고 분명하게 장소를 지적했을까요? 우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으니 틀림없이 곧 죽게 될 것을 아 셨을 것입니다. 요한이 갈릴래아에서 회개하라고 외쳤고 결국 바른말을 해서 잡혀서 죽게 된다면 당신이 걸어가야 하는 그 길도 결국은 죽음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으셨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나자렛을 떠나 갈릴래아로 가십니다.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 고이제 당신의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아신 것이지요. 요한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다 했고 예수님에게 바통을 넘겨준 셈입니다. 요한은 누구보다도 자기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았던 사람이었지요. 자기는 다만 그의 길을 닦는 사람이었기에 이제 바통 을 넘겨주면서 홀가분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당시 갈릴래아 사람들은 호숫가를 중심으로 삶의 터전을 이루고 살고 있었지요. 호숫가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의 터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고향, 보금자리였던 나자렛을 떠나 이제 사람들 가운데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떠남 은 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지요. 바로 그들과 하나가 되어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시작을 위해서 사람들 한가운데 오신 것 입니다. 같은 내용을 서술한 마태오 복음에서는 이사서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예수님께서 나자렛을 떠나 갈릴래아로 가신 사건을 두고 이렇게 노래합니다. “즈블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공동 번역은 호수로 옮겼는데, 새 성경은 바다로 옮겼네요. 당시 사람들은 갈릴래 아 호수로 바다로 불렀지요.) , 요르단 강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갈릴래아는 과연 어떤 곳이었을까요? 그곳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갈릴래아는 문화,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 지였던 예루살렘과는 멀리 떨어진 곳이지요. 오늘날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이나 수도권과는 멀리 떨어진 강원도 정도 되겠 네요. 아무래도 문화적, 정치, 경제적 중심지에서 떨어져 있으니 가난할 수밖에 없지요. 대부분이 어부나 농부로서 열심히 일해서 그날그날 하루의 양식에 감사하는 서민들이었지요.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의 ‘첫 하루’라고 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 안에 예수님 공생활 전체의 축소판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어, 예수님의 하루 일상의 삶의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짧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고 악령을 쫓아내시고 시몬의 장모 병을 고쳐 주시고, 문 앞에 모여든 온 고을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시고,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일어나시어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모두 찾고 있는 상황에서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을 찾아가자. 그곳에서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온 갈릴래아를 다니셨다고 전합니다. ‘유대 고대사’를 쓴 유명한 역사학자이며 한때 총독도 했었던 요세푸스에 의하면, 갈릴래아에는 약 240여 개의 크고 작은 마을이 있었다고 해요. 사실 큰 마을은 인구가 만 오천 명이 넘었다고 하니 마을이라기보다는 도시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께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240여 개가 넘는 마을들을 두루 다니시며 계속해서 ‘다음 동네에도 가야 한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머리 둘 곳 없는 방랑자가 되셨다는 것을 쉽게 가늠할 수 있겠지요. ‘이방인의 갈릴래아’라고 옮긴 부분은 좀 설명 이 필요해요. 언뜻 들으면 갈릴래아는 이방인들의 땅으로 들리지요. 그게 아닙니다.
갈릴래아는 원래 히브리말 ‘싸릴’에서 왔다고 해요. 싸릴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원이나 둘레를 의미한답니다. 갈릴래아 는 원래는 ‘이방인들의 갈릴래아’, 곧 이방인들의 주변이라는 말인데 줄여서 그냥 갈릴래아로 불렸던 것이지요. 이방인들의 나라로 둘려 싸여 있다는 의미에서 갈릴래아로 불렸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많은 이방인과 함께 공존하면서 사는 곳이 되었지요.
따라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다 지방보다는 비교적 이방인들, 타민족이나 문화에 열려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유 다가 아닌 갈릴래아에서 전도를 시작하신 의미를 헤아려 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정통 유다이즘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문화라고 할 수 있었지요.
예수님께서는 전도를 시작하시며 “회개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라고 하십니다. 당신의 오심으로, 당신에게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된다는 선포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는 천지개벽으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바로 지금 여러분들 안에서 시작되고 있다고 하셨으니 전혀 새로운 가르침이지요.
갈릴래아 사람들은 그 말씀을 귀담아 듣습니다. 복음서에서 보는 것처럼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은 제대로 듣기도 전에 트집부터 잡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닫혀 있으니 들릴 리가 없지요.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이 아닌 갈릴래아 사람들 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마음에 새겨야 하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서 시작된다고…….
[류해욱 신부님/예수회. 영성, 피정 지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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