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2일(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죄스럽고 약한 인간의 믿음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첫 번째 그리고 거의 본능적인 반응은 죄스러움이고 그래서 두려움이다. 베드로 사도도 목수 예수님의 지시대로 그물을 던졌다가 그물이 끊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자 그분 앞에 엎드려 이렇게 말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예수님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을 부르시고 함께 지내신 거처럼 오늘도 죄인들을 부르신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의인들이 아니라 죄인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라고.
교회가 범죄 집단이 아닌 이유는 우리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그걸 늘 고백한다는 사실이다. 두렵고 내키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그 이유는 하느님이 언제나 용서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죄스러움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만나는 은혜로운 장소다. 바오로 사도도 “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라고 말했다. 우리 죄스러움이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숨길 비밀은 아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아니 세상 어딘가에 꼭꼭 숨어 있고 하느님께 등을 돌려도 하느님께는 내 모든 게 드러나 있다. 에덴동산에서 사람에게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라고 부르신 건 그가 안 보여서가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라는 초대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세례로 그리스로 예수님과 친구와 형제자매가 되었어도 우리는 여전히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은 그 두 사람의 자손이다. 이는 악하다는 게 아니라 약하다는 뜻이다. 기회가 되고 여건만 맞으면 아닌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하고야 마는, 언제나 그렇게 되고야 마는 그리고 또 후회하는 참으로 연약하고 불쌍한 존재이다.
복음서에는 베드로 사도의 죄스러움과 연약함이 고스란히 다 드러났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이 거룩한 고백도 완전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잘 안다. 그는 그날 새벽닭 울음소리에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사람을 모르오(마태 26,74).”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그를 탓하지 않으셨다. 어떻게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붙잡혀 가고 죽임을 당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하느님은 한 번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지만 그 믿음은 완전하지 않다. 어쩌면 입으로만 고백하는 건지 모른다.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면서도 미래를 걱정하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으니 말이다.
새벽닭 울음소리에 서럽게 울고, 빈 무덤을 발견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귀신을 보는 거처럼 두려워하면서 사도의 믿음은 마침내 완성되었을 거다. 완성된 믿음은 미래를 내다보거나 하느님을 보는 뭐 신통력 같은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보이는 것과 아는 것을 두고 믿는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산다(로마 1,17).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을 믿기 전에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믿으셨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8-19).” 내가 하느님이라면 이렇게 못할 거다. 뭘 보고 인간에게 이렇게 위대한 사명을 맡긴단 말인가? 주님의 그 약속은 인간의 잠재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의 표현이다. 죄스러움과 약함을 고백하는 사람 안에서 하느님은 그를 만나주시고 영원한 나라로 초대하신다. 내 믿음은 죽음도 이길 수 없다.
예수님, 저는 주님을 믿습니다. 믿음이 밥 먹여주는 건 아니지만 죽음을 한낱 낮잠 정도로 여기게 해줍니다. 아주 조심스럽지만 용기내어 고백합니다. 주님, 저를 한 번 더 믿어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참 좋으신 하느님을 무한히 신뢰하게 도와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