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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충만한 스데반 (행 7:54-60) 26. 5. 31
|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주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소서. 아멘 |
[서 론]
할렐루야! 오늘 복된 자리에 잘 오셨습니다. 옆 사람과 함께 인사를 나눕시다. ‘반갑습니다. 참 잘 오셨습니다.’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또 치료하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오늘 설교 제목은‘성령충만한 스데반’입니다. 따라해 보십시다. ‘성령충만한 스데반’ 55절을 읽어볼까요?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행 7:55)
스데반은 누구입니까? 그는 기독교의 처음 교회인 <예루살렘교회>의 집사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님을 전하다가 사람들에게 끌려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기독교의 첫 순교자입니다. 59-60절을 읽어볼까요?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59-60) ‘자니라’는 말은 죽음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죽기 전에 무엇으로 충만하였다고 했습니까? ‘성령 충만하여’(55절) 성령으로 충만하였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시는 영입니다. 성령은 불이나 비나 바람처럼 인격이 없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처럼 인격을 지닌 영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사람의 심령 속에 부어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4-5) ‘아버지가 약속하신 것’은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신자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왜 성령을 받아야 합니까?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이전과 다른 새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나를 변화시킵니다. 오늘 스데반이 성령으로 충만하자 보통 사람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 시간에는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였을 때 나타난 신앙을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 론]
1. 성령충만한 스데반의 신앙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⑴ 전도하게 하십니다.
54절을 읽어볼까요?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러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행 7:54) 여기서 ‘그’는 스데반을 말합니다. 스데반이 말하는 것을 듣는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이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했기에 이를 갈았을까요? 세상 일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가 믿는 예수님을 전한 것입니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예수)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행 7:52-53)
여기서 ‘의인’은 누구를 말합니까? 그들이 십자가에 죽인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스데반이 예수님을 전하는 것을 싫어하고 도리어 그를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 하지만 스데반은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어떻게 스데반은 자기 말에 이를 가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전도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성령충만’하였기 때문입니다. 곧 스데반의 심령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그에게 전도할 수 있는 담대함을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도 성령으로 충만하자(행 4:8) 예수님을 전하지 말라고 협박하는 자들 앞에서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18-20)]
이처럼 성령으로 충만하면 전도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나가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나 홀로’조용히 믿는 신자가 아니라 나가서 사람을 낚는‘어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가 전도할 때 듣는 사람들이 다 좋게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전도를 싫어하는 사람, 비웃는 사람, 반대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 자들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히 전하려면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면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사람들 앞에서 전도할 수 있는 담대함을 주십니다.
우리도 성령 충만하여 스데반처럼 전도하는 신앙을 갖도록 하십시다.
⑵ 천국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55절을 읽어볼까요? “스데반이 성령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행 7:55) 스데반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이 서신 모습’ 그는 보통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영적 세상(=천국)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자기가 본 그 광경을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56절을 읽어볼까요?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행 7:56)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듣고 싶지 않아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습니다. 57절을 읽어볼까요?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행 7:57)
어떻게 스데반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영적 세상(=천국)을 볼 수 있었을까요? 그가 ‘성령충만’하였기 때문입니다. 곧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스데반의 영적 눈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의 눈이 열려야 영적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아람 군사들이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를 잡으려고 도단 성을 포위했습니다. 아침에 엘리사의 종이 밖에 나갔다가 성을 포위한 아람 군사들을 보고 두려워하며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엘리사)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왕하 6:15)
그러자 엘리사는 하나님께 그 종의 눈을 열어 주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사환의 영적 눈이 열려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 6:17)]
이처럼 성령으로 충만하면 영의 눈이 열려 영적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성령으로 충만하였기에 영적 눈이 열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천국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천국은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영의 눈을 열어주셔야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최종 목적지는 이 세상이 아니라 천국입니다. 천국을 바라보는 신앙을 가져야 세상을 담대하게 살 수 있습니다. 큰 고난도 이길 수 있습니다. 천국을 바라보는 신앙이 없으면 신앙이 견고하지 못하고,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령 충만하여 스데반처럼 천국을 바라보는 신앙을 갖도록 하십시다.
⑶ 고난을 이기는 하십니다.
57-59절을 읽어볼까요?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행 7:57-59) 스데반의 말을 듣기 싫어한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스데반을 죽이려고 그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돌에 맞는 것은 얼마나 두렵고 아프겠습니까?
스데반은 무엇 때문에 돌에 맞는 고난을 받았습니까? 자기의 잘못이나 죄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전하는 신앙 때문에 고난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스데반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 때문에 받는 고난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받았습니다.
어떻게 스데반은 그런 큰 고난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끝까지 지킬 수가 있었을까요? 그가 ‘성령충만’하였기 때문입니다. 곧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스데반에게 그 고난과 아픔을 견디고 이길 수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스데반이 자기 힘으로 견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12제자를 보십시오. 그들은 성령을 받기 전에는 예수님이 붙잡힐 때 모두 도망을 가거나,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또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고 숨어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약속하신 성령을 받자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제자들은 더 이상 숨지 않고 나가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했고, 또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매를 맞거나, 옥에 갇히거나, 욕을 먹거나, 핍박받는 것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했습니다.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0-41)]
[로마 시대 때 교부 <이그나티우스>가 사형장으로 끌려갈 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타협하지 말라. 내가 놓이기를 바라지 말라. 나는 밀알이 되고 짐승의 이빨에 가루가 되어 하나님의 깨끗한 빵이 되기를 원하노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형벌당하기를 원하노라.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 있다면 짐승의 이빨에 뼈 가루가 되고, 손과 발이 잘리더라도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겠노라. 나에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신앙 때문에 순교했습니다.]
이처럼 성령으로 충만하면 예수님을 믿는 신앙 때문에 받을 수 있는 고난과 핍박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를 믿는 신앙 때문에 고난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11-12) 하지만 주 예수님을 위해 고난과 핍박과 욕을 먹으면 하늘의 상이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령 충만하여 스데반처럼 신앙으로 인한 고난을 이겨내는 신앙을 갖도록 하십시다.
⑷ 기도를 하게 하십니다.
59절을 읽어 봅시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행 7:59) 스데반이 돌아 맞아 죽어갈 때 무엇을 했습니까?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스데반은 지금 기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돌을 맞고 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그런데도 스데반은 무릎까지 꿇고 기도했습니다. “무릎을 꿇고”(60절) 보통 사람 같으면 돌에 맞을 때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스데반은 돌에 맞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기도를 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성령충만’하였기 때문입니다.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스데반에게 그런 상황에서도 기도할 수 있는 힘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스데반의 기도생활을 보여줍니다. 그가 평소에 기도하는 습관이 없었다면 이런 큰 고통을 당할 때 쉽게 기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생활은 어떠합니까? 매일 기도하는 습관이 있습니까? 그렇지 못한 성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지 않는 이유를 말할 것입니다. ‘바빠서 못하고, 피곤해서 못하고, 반대해서 못하고, 몸이 약해서 못하고, 잠이 많아서 못하고, 거리가 멀어서 못하고 등’
그럼 언제쯤이면 기도할 수 있습니까? 피곤하지 않으면, 편안해지면, 바쁘지 않으면, 건강해지면, 거리가 가까워지면 기도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지금 기도하지 못하면 아무리 환경이 좋아져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긍휼을 여는 열쇠요, 사탄의 침입을 막는 자물쇠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에게서 기도를 빼앗아갑니다. <새뮤얼 차드위크>는 기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탄의 한 가지 관심은 사람들이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악마는 기도 없는 성경공부, 기도 없는 봉사, 기도 없는 예식에 안심한다. 악마는 우리의 수고를 비웃고 조소하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 떤다.”
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까? 기도해야 내게 찾아오는 여러 가지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일할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 하나님의 기적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으로 충만하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기도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를 찾으시고, 기도하는 자에게 귀를 기울이십니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시 116:1-2)
그러므로 우리도 성령 충만하여 스데반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를 쉬지 않는 신앙을 갖도록 하십시다.
⑸ 원수를 사랑하게 하십니다.
60절을 읽어볼까요?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60)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무릎을 끓고 기도했습니다. 그가 무릎을 꿇고 마지막으로 기도한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자(원수)들에게 복수를 해달라고 했을까요? 아니면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자기를 죽이려고 돌을 던지는 자, 곧 원수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한 것입니다.
어떻게 스데반은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원수들을 용서하는 사랑을 베풀 수가 있었을까요? 그가 ‘성령충만’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그에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고통 속에서도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 자기를 욕하고 조롱하는 자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34)]
이처럼 성령으로 충만하면 나를 힘들게 하거나, 나를 대적하는 사람, 곧 나의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7-28)
하지만 내 힘으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의 거의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나의 원수를 사랑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나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나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를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성령이 힘을 주셔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내주하시는 성령은 우리로 원수까지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령 충만하여 스데반처럼 나를 힘들게 하는 원수도 사랑하는 신앙을 갖도록 하십시다.
[결 론]
성도 여러분, 오늘 스데반의 신앙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 신앙을 닮아가고 싶지 않습니까? 스데반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신앙은 무엇입니까? 전도하는 신앙, 천국을 바라보는 신앙, 고난을 이기는 신앙, 기도를 쉬지 않는 신앙, 원수를 사랑하는 신앙입니다.
스데반의 이러한 신앙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자기의 힘과 결단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답은 그가 성령으로 충만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니’ 그가 성령으로 충만하자 성령께서 스데반에게 그러한 것을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스데반과 같은 신앙을 가지려면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성령)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눅 24:49)
[어느날 <바울>이 에베소에 가서 에베소 교인들을 만났을 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 19:2) 그러자 에베소 교회 신자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행 19:2) 그래서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은 약속하신 성령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행 19:6-7)]
여러분은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예수님이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신 성령을 받았습니까? 성령이 계시다는 말은 들어보셨습니까?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받지 않고 내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무척 힘들고, 괴롭고, 신앙이 무너지기 쉽습니다. 연약한 우리를 돕고자 보내주시는 성령을 받아야 성령이 주시는 힘으로 온전한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성령충만’을 받아 스데반과 같은 아름다운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하십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