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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소떼와 함께 방북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오른쪽)이 1998년 6월 16일 오전 임진각에서 같이 북으로 갈 소떼와 함께 보도진들에게 포즈
를 취하고 있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9년 6월 16일 북한에 제공할
소 1천마리중 1차분인 소 5백마리를
실은 트럭과 함께 판문점을 통해 방북했다.
정주영 회장은 이날 오후
개성을 거쳐 평양에 도착.7박8
일간의 방북일정에 들어갔다. 분단
이후 민간차원의 합의를 통해 군사
구역인 판문점을 개방, 민간인의 북한
방문이 이뤄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정주영 회장은 새로 개통된
문산-판문점간 통일대교를
지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도착,평화의 집에서 방북기자회견
을 가진 뒤 판문점중립국감독위 회의실
을 지나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정주영 회장 초청 단체인 북한
아태평화위 부위원장 송호경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판문점 북측지역
판문각에 나와 정회장을 영접했다.
이번 정주영 회장의 방북은 북한
당국이 지난 1994년 남북 정상회담 실무회담을 제외하고 김영삼 정부기간 굳게 닫아온 판문점을 민간교류차원에서
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2015년 의인 고(故) 이수현 아버지, 일본 정부 훈장 받아
👉🏿 차가운 바람이 불던 2001년 1월 26일 저녁 7시 15분경, 한 취객이 일본 도쿄 신오쿠보역 선로로 추락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그곳에 있던 한국인 유학생은 추락한 취객을 발견하자 주저하지 않고 선로로 뛰어들었다. 그는 취객을 구조하려고 힘썼지만 끝내 선로에서 탈출하지 못했고 스물여섯,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 한국인 유학생은 바로 ‘의인 故 이수현’이다. 자신의 위협을 무릅쓴 그의 숭고한 희생은 한국과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름다운 감동으로 회자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을 잇는 가교가 되는 것이 꿈인 청년
본교 경상대학 무역학과에 93학번으로 입학한 이수현은 운동과 음악을 좋아하는 활발한 성격의 대학생이었다. 그의 부모님은 “수현이는 고집이 세서 좋아하고 관심이 가는 분야는 꼭 하고야 마는 성격이었어요”라며 그를 회상했다.
그랬던 그가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된 계기는 전공과목인 ‘지역연구’ 수업이었다. 수업 시간 중, 일본을 연구해 발표하고 세미나를 할 기회가 있었고 이를 통해 그는 일본의 경제·문화·사회에 흥미를 느꼈다. 특히 ‘우리나라와 일본의 무역 관계’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일본을 직접 체험하고 싶었던 그는 교내에서 1년 6개월 정도 일본어를 공부했고,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하며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도쿄 아카몽카이 일본어학교에 입학한 그는 유학 동기서에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교역과 문화교류에서 확실한 제1인자가 되고자 한다’는 확실한 목표를 적어냈다. 목표를 이뤄내고자 학업에 열중해 매번 최고 성적을 기록했으며,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신오쿠보역 앞의 PC방에서 아르바이트도 병행했다.
이수현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기숙사로 가기 위해 신오쿠보역에서 전철을 기다렸다. 그때 술에 취한 일본인이 선로로 추락했고, 이수현은 이를 보자마자 선로로 뛰어들었다. 근처에 있던 일본인 시키네시로 씨도 선로로 내려와 취객을 구조하려고 도왔지만 빠르게 진입하는 열차를 피하지 못했고, 결국 세 명 모두 숨지고 만다.
식을 줄 모르는 추모 열기
사고 발생 다음 날 아침에는 ‘한국 유학생 일본을 울리다…일본인 구하려다 숨져’(동아일보), ‘Korean Who Died Trying to Save Japanese Man Becomes Hero’(LA타임스), ‘당신의 용기, 잊을 수 없습니다’(마이니치신문) 등 내·외신 언론이 앞 다투어 이수현의 의로운 행동을 대서특필했고 추모의 물결이 일었다.
아카몽카이 일본어학교에 마련된 추도식에는 모리 요시로 일본 총리와 후쿠다 야스오 관방장관 등 정계인사들을 비롯해 천여 명이 넘는 일본 국민들이 장사진을 쳐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고인이 비록 유명을 달리했지만,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은 한일 양국 국민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며 애도의 뜻을 전했다.
한국인 유학생이 얼굴도 모르는 일본 사람을 구하려다 목숨을 읽었다는 소식은 장기 불황과 이기주의가 만연했던 일본 사회에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갔다. 일본 각지에서는 이수현을 위해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낸 성금이 모였고, 일본 정부는 ‘목배’ 훈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이러한 이수현의 의로운 행동은 음악, 영화, 다큐멘터리로 제작됐다.
그랬던 그가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된 계기는 전공과목인 ‘지역연구’ 수업이었다. 수업 시간 중, 일본을 연구해 발표하고 세미나를 할 기회가 있었고 이를 통해 그는 일본의 경제·문화·사회에 흥미를 느꼈다. 특히 ‘우리나라와 일본의 무역 관계’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일본을 직접 체험하고 싶었던 그는 교내에서 1년 6개월 정도 일본어를 공부했고,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하며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도쿄 아카몽카이 일본어학교에 입학한 그는 유학 동기서에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교역과 문화교류에서 확실한 제1인자가 되고자 한다’는 확실한 목표를 적어냈다. 목표를 이뤄내고자 학업에 열중해 매번 최고 성적을 기록했으며,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신오쿠보역 앞의 PC방에서 아르바이트도 병행했다.
이수현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기숙사로 가기 위해 신오쿠보역에서 전철을 기다렸다. 그때 술에 취한 일본인이 선로로 추락했고, 이수현은 이를 보자마자 선로로 뛰어들었다. 근처에 있던 일본인 시키네시로 씨도 선로로 내려와 취객을 구조하려고 도왔지만 빠르게 진입하는 열차를 피하지 못했고, 결국 세 명 모두 숨지고 만다.
식을 줄 모르는 추모 열기
사고 발생 다음 날 아침에는 ‘한국 유학생 일본을 울리다…일본인 구하려다 숨져’(동아일보), ‘Korean Who Died Trying to Save Japanese Man Becomes Hero’(LA타임스), ‘당신의 용기, 잊을 수 없습니다’(마이니치신문) 등 내·외신 언론이 앞 다투어 이수현의 의로운 행동을 대서특필했고 추모의 물결이 일었다.
아카몽카이 일본어학교에 마련된 추도식에는 모리 요시로 일본 총리와 후쿠다 야스오 관방장관 등 정계인사들을 비롯해 천여 명이 넘는 일본 국민들이 장사진을 쳐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고인이 비록 유명을 달리했지만,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은 한일 양국 국민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며 애도의 뜻을 전했다.
한국인 유학생이 얼굴도 모르는 일본 사람을 구하려다 목숨을 읽었다는 소식은 장기 불황과 이기주의가 만연했던 일본 사회에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갔다. 일본 각지에서는 이수현을 위해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낸 성금이 모였고, 일본 정부는 ‘목배’ 훈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이러한 이수현의 의로운 행동은 음악, 영화, 다큐멘터리로 제작됐다.
이수현의 부모님은 사고 이후에 일본 아카몽카이에 자주 갔다고 한다. 이수현의 아버지 이성대 씨는 그곳에 공부하러 온 여러 국가의 젊은 학생들을 보고 아들생각이 났다고 한다. “아들이 일본에서 못 다한 공부가 아버지로서는 한이 됐어요”라며 당시 일본 국민들에게 받은 성금으로 아들 이수현의 이니셜을 딴 LSH 아시아장학회를 설립했다. 이렇게나마 한국과 일본의 가교가 되고자 했던 아들의 꿈을 이어나가고자했던 것이다.
어머니 신윤찬 씨는 몇 해 전에 배용준과 신승훈의 일본 팬클럽 회원들이 성금을 모아 장학회를 기부한 적이 있다고 회상하며, “사고가 일어나고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수현이를 기억하고 성금을 보내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놀랍다”라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LSH 아시아장학회는 매년 10월 중순에 장학금 수여식을 개최하며 2017년까지 18개국 844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이러한 한·일 양국의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는 아들의 유훈을 이어받은 장학 사업이 공로로 인정받아 LSH 아시아장학회의 명예회장 이성대 씨는 지난 2015년에는 일본정부로부터 ‘욱일쌍광장’을 받았다.
이성대 씨는 “저희 부부가 살아있는 동안 어려운 유학생을 돕는 LSH 아시아장학회를 운영하는데 힘쓰겠다. 한국에서도 ‘의인 이수현’을 기억하며 장학회에도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란다”라고 당부했다.
‘의인 이수현’은 17년 전 한국과 일본의 가교가 되겠다는 꿈을 못다 이루고 하늘로 갔지만, 그의 부모님은 LSH 아시아장학회, 이수현의인문화재단 등으로 아들의 꿈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의 의로운 희생은 양국을 잇는 가교가 된 것이다.
이수현의 생전 일기에 이러한 구절이 있다.
‘나는 나보다 못한 사람을 도울 것이다.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도울 것이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건강한 젊은이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남긴 것처럼 위험에 처한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선로에 몸을 던졌다. ‘뜻 있는 사람과 어진 사람은 살기 위해 인을 해치지 않고 목숨을 바쳐 인을 이룬다(志士仁人 無求生而害仁 有殺身而成仁)’라는 논어 속 말처럼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는 한국과 일본을 잇는 ‘가교’이자 ‘아름다운 청년’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2015년 한식 코스화의 효시 ‘용수산’ 최상옥 회장 별세
▶2015년 원로 무용가 전황 전(前) 국립창극단장 별
▶2015년 부동산 재벌 도널트 트럼프, 미국 대선 출마 선언
▶2009년 신종 플루 변종 바이러스
(인플루엔자A상파울루H1N1) 브라질서 처음 발견.
▶2009년 대한민국-미국 정상회담.
▶2005년 6.15 남북공동선언 5주년 기념 민족통일대축전 폐막(평양)
▶2005년 국내 최장 12km 인천대교 착공.
▶2002년 방북단, 평양서 대규모 예배.
▶2002년 프랑스 총선 중도우파 압승.
▶ 2001년 미국-러시아 동반자 관계 구축.
▶1997년 금융감독원 신설 발표
▶1996년 ‘북청사자놀음’ 예능보유자 변영호씨 별세
▶1992년 미소정상회담,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 I) 합의
▶1989년 조치훈 명인, 본인방 획득
▶ 1987년 6월 16일
해금강 유람선 극동호 화재 사건
👉🏿극동호.1987년 6월 16일 14시 50분경, 경상남도 거제군 남부면 다포리 (속칭 ‘솥뚜껑’) 해상에서 관광객 87명(선장·선원 2명 포함)을 태우고 해금강 관광을 마치고 충무로 돌아가던 충무유람선협회 소속 ‘극동호’가 기관실 엔진 과열로 불이 나면서 침몰, 관광객 29명(남3·여22) 이 숨지고 7명이 실종, 51명이 구조되었다.
극동호는 24톤급, 출력 265마력, 속도 17노트의 목조디젤선으로, 정원은 승무원 3명을 포함하여 87명이었다. 충무-한산섬-해금강 구간을 부정기유람선으로 운행했다.
6월 16일 11시경 선원과 승객 87명을 태우고 충무항을 출발한 극동호는 관광을 마치고 14시 40분경 다시 충무항으로 돌아갈 때 배에 과열한 엔진에서 불꽃이 튀면서 선체에 옮겨 붙어 화재가 발생하였다. 객실로 불이 번지자 승객 다수가 객실 밖으로 나와 바다에 뛰어들었다. 구명동의는 줄로 묶여 있었고, 소화기는 작동되지 않았다. 승객들은 10분 만에 모두 뛰어내렸으며, 배는 20분 만에 완전히 침몰되었다.
사고 해역은 물살이 센 곳으로, 인근을 지나던 선박들이 불길을 보고 구조에 나섰으나 87명 중 29명이 사망하고 7명이 실종되었다. 29명은 중경상을 입었고, 21명만이 무사했다. 승객들은 남원과 대구의 단체관광객들로, 부녀자가 대부분이었다. 선장과 기관장은 살아남아 구속되었다.
극동호는 6월 17일 밤에 인양, 18일 새벽에 예인되었다.
선박의 노후, 소화·구명장치 미비 등이 사고의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육상용 엔진을 불법으로 사용하고, 제한된 운항시간을 초과하였으며, 안전검사가 부실했고, 승객 안전수칙을 준수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었다. 관계 당국의 허술한 관리와 공무원들의 전문지식 결여도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1984년 캐나다 수상에 존, 터너 선출
▶1983년 교황 요한바오로2세 모국 폴란드 방문
▶1980년 KBS TV과외 `가정고교방송` 방영개시
▶1977년 브레즈네프, 소련 국가원수로 선출
▶1977년 핵물리학자 이휘소 박사 의문사
👉🏿 미국에서 활동한 한국계 이론물리학자 이휘소(미국명 벤저민 리·1935~1977·사진) 박사가 세상을 떠난 지 40년 되는 해예요. 한국인으로는 노벨상에 가장 근접한 과학적 업적을 남긴 천재 물리학자로 평가받는 인물이지요. 지난여름에는 이 박사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인 고(故) 강주상 고려대 교수가 쓴 이휘소 평전이 다시 출간됐고, 이달 말엔 노벨상 수상자를 포함한 여러 과학자가 모여 이 박사의 연구 업적을 되돌아보는 특별 강연회가 열린답니다.
이휘소 박사는 일제강점기이던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소학교(현재 초등학교) 교사였고 어머니는 의사였지요. 과학 잡지를 즐겨 읽던 평범한 소년이었던 이 박사는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란을 갑니다. 피란 생활 중 검정고시를 친 그는 1952년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했어요.
대학에서 이 박사는 물리학에 큰 흥미를 가져요. 전공을 바꾸려 했지만 학교에서 허락하지 않자, 이 박사는 미군이 후원하는 장학생으로 뽑혀 미국 마이애미대 물리학과에 편입합니다. 이때부터 아침 7시에 일어나 전공 수업을 듣고 자정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기숙사로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했다고 해요. 그 결과 그는 미국에 건너온 지 1년 반 만에 물리학과를 최우등 졸업합니다.
이 박사는 만 25세이던 1960년 펜실베이니아대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그의 전공은 입자물리학이었는데, 물질을 구성하는 아주 작은 단위인 소립자(小粒子)를 연구하는 분야랍니다. 그는 26세에 펜실베이니아대 조교수에 임용됐고 이어 2년 뒤 부교수, 다시 2년 뒤 정교수로 '고속 승진'합니다. 또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연구원, 페르미연구소 부장, 시카고대 교수 등을 거치며 미국 물리학계에서 명성을 쌓아가지요.
이휘소 박사는 논문을 60여 편 남겼는데, 인용된 횟수가 1만 4000회를 넘어요. 학계에 미친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와 함께 입자물리학을 연구했거나, 그의 도움으로 이론을 완성한 수많은 과학자가 훗날 노벨상을 받았답니다. 1979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압두스 살람은 수상 소감에서 "이휘소는 현대 물리학을 10여 년 앞당긴 천재다. 그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 부끄럽다"고 했고, 1999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토프트는 "이휘소를 만난 건 하늘이 내게 내려준 행운이었다"고 말했어요.
생전에 이 박사는 몇 날 며칠 방에서 나오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해 '(속옷도 안 갈아입어) 팬티가 썩은 사람'이라는 놀림을 받았다고 해요. 마흔두 살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그가 살아있다면 한국계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됐을지도 몰라요.
▶1973년 소련 브레즈네프 제1서기 방미
▶1972년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실무회의,본회의 의제확정, 합의문서교환
▶1972년 제1회 소년체전 개막
▶1971년 의료파동 발생
▶1968년 시인 김수영 교통사고로 사망
▶1967년 브라질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실험에 성공
▶1966년 장창선선수, 세계아마 레슬링대회서 금메달
▶1960년 일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방문 취소
▶1956년 적십자사, 납북자 신고 접수
▶1956년 국내 최초 TV방영 시작
▶1954년 제5회 월드컵 스위스서 개막
👉🏿 2017년인 지금, 우리는 매스미디어인 TV와 인터넷을 통해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 선수들의 소식을 시시각각 접하고 있다. 한국 축구의 전설로 추앙 받는 차범근을 넘어서며 대기록을 경신한 토트넘의 손흥민을 비롯해 구자철(아우크스부르크), 황희찬(잘츠부르크)등 많은 선수들이 세계 각지에서 한국 축구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또한, 한국이 달성한 ‘월드컵 본선 9회 연속 진출’은 세계에서 강호로 손꼽히는 브라질(21회), 독일(16회), 이탈리아(14회), 아르헨티나(11회), 스페인(10회)에 이어 역대 6위 기록에 해당한다.
세계 5대리그에서 한국 선수들이 뛰는 모습을 보고 있는 많은 축구팬들은 한번쯤 이렇게 생각해 봤을 것이다. ‘우리 한국 축구가 지금의 위치까지 올 수 있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필자는 궁금해 하는 팬들에게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의 한국 대표팀 이야기를 추천해주고 싶다. 축구 변방에 불과했던 한국이 현재 축구계에서 영향력을 꽤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이 한국 축구의 발전에 이바지했기 때문이다. 스위스 월드컵 당시,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하며 홀로 먼 타국으로 향한 대표팀. 그들은 오로지 ‘헝그리 정신’과 ‘투혼’만을 가지고 경기에 임했다.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그들의 이야기, 지금 시작한다.
# 투혼의 시작
“일본을 이기지 못하면 모두가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습니다.”
일본에서 월드컵 지역 예선을 치르고 있는 한국 대표팀
1954년 제 5회 스위스 월드컵을 앞두고 아시아 지역에 배정된 출전권은 단 한 장이었다. 애초 한국, 중국, 일본 3개국이 참가하기로 되어있었지만 중국이 기권을 하게 되면서 한국과 일본의 맞대결로 좁혀졌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최초로 치러지는 한일전이었다.
당시 일본과 국교 정상화가 이뤄지지 않아 한국 정부는 일본팀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한국 대표팀은 일본에서 홈, 어웨이를 모두 치러야만 했다. 이유형 감독 이하 모든 선수들은 한국을 떠나기 전, 이승만 대통령에게 “일본에게 이기지 못할 경우 선수단 모두가 현해탄(대한해협)에 몸을 던지겠다.”라고 하며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3월 7일 진눈깨비가 내리던 일본 메이지 신궁 외원 경기장은 온통 진창이었다. 하지만 한국 선수들은 오직 ‘대한민국’이라는 조국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1차전 5대1 승리, 2차전 2대2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월드컵 티켓을 따내고야 말았다.
쉽지 않은 일본 원정에서 거둔 승리이기도 하지만 한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든 6.25가 휴전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이뤄낸 것이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었다.
# 험난한 스위스행, 무시 받은 한국
숙적 일본을 꺾으며 사상 첫 월드컵 진출을 달성해냈지만 스위스로 가는 길은 매우 험난했다. 당시 한국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복구하기 위해 여념이 없었던 터라 국가로부터 지원금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축구협회 직원 또한 협회장을 포함하여 겨우 5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행정상으로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보통 국가대표팀은 월드컵이 개막되기 전부터 미리 현지에 도착해서 현지적응 및 전술 훈련을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한국 대표팀은 스위스로 가는 비행기 표를 제때 구하지 못하면서 수일간 발이 묶여 있다가, 도쿄-방콕-콜카타-로마-취리히를 거치는 대장정 끝에 경기가 열리는 전날 오후 10시에야 간신히 도착할 수 있었다. 시차적응은 물론이고 피로도 제대로 풀지 못한 채 경기에 나서야만 했다. (※ 이 때 모든 선수들이 함께 간 것이 아니라 1진 11명만이 먼저 도착해 헝가리 전에 나섰다. 2진은 헝가리 전이 끝난 뒤에야 도착했다.)
당시 한국은 경기가 치러지기 전부터 세계 외신들의 웃음거리가 되다시피 하며 무시 아닌 무시를 당했다. 제대로 된 단복조차 맞추지 못한 한국 대표팀의 모습을 본 외신 기자가 “당신네 나라에서는 짧은 바지가 유행인가?”라는 질문을 했는데 이때 골키퍼 홍덕영이 “우리는 전쟁을 겪은 나라다. 물자를 절약하는 것이 애국이기 때문에 바지를 짧게 입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뿐만 아니라 월드컵을 홍보하는 표지에서는 아예 태극기를 찾아볼 수 없다. 축구전문자료수집가 이재형씨가 입수한 1954년 스위스월드컵 공식 팸플릿을 보면 유일하게 태극기만 빠져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중앙에 위치한 축구공이 태극기를 가리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비해 당시 시드 배정국인 브라질, 헝가리, 프랑스, 잉글랜드, 오스트리아, 터키, 우루과이, 이탈리아 등은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분명 사진 아래에 공간이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축구공을 중앙에 배치한 것은 FIFA 측에서 의도적으로 한국을 무시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아시아’라는 축구 변방에서 온 한국의 첫 월드컵은 시작부터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 9대0 대패, 하지만 결코 부끄럽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월드컵에 참가한 한국 대표팀.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당시 세계 최강의 전력을 가진 헝가리였다. ‘매직 마자르’라는 별칭을 가진 헝가리 대표팀의 위상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대회 직전에 치러진 평가전에서 ‘질주의 소령’ 푸스카스와 그에 비견될 수 있는 콕시스를 앞세워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를 7대1로 대파했고, 강호 서독조차도 8대3으로 꺾는 등 그야말로 엄청난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 서독이 1954년 스위스 월드컵 결승전에서 헝가리를 꺾고 우승하자 축구계가 이를 두고 ‘베른의 기적’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매직 마자르’와 마주하게 된 한국 대표팀은 ‘마의 10분’(※ 어떤 팀을 만나더라도 헝가리 대표팀은 10분 안에 두골 이상을 넣을 수 있다는 뜻)으로 불리던 헝가리의 공격을 전반 18분까지 잘 막아내며 선전했지만, 결국 ‘월드컵 최다 점수차’라는 기록을 세우며 9대0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9대0. 필자는 이 스코어를 두고 자랑스럽다고 말하고 싶다. 9대0이라는 점수는 한국 선수들의 투혼과 정신력이 만들어 낸 결실이라고 생각한다. 뛰고 또 뛴 한국 선수들은 후반전에 4명이 다리에 쥐가 나서 7명만 그라운드에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없이 몰아치는 헝가리의 공격을 막아내며 엄청난 투혼을 발휘했다. (※ 당시 교체선수 규정이 없어 부상으로 선수가 아웃되면 남은 선수들로 경기를 끝까지 치러야 했다.)
당시 한국의 골문을 지켰던 홍덕영은 이렇게 회상했다. “나보다 키가 작은 푸스카스가 시도한 슈팅이 골대를 강타하는 순간, 한참을 ‘딩~’하는 소리를 내며 골대가 흔들렸다. 그만큼 슈팅이 너무 강해 맞으면 갈비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 나중에 너무 힘들어서 공을 잡으면 관중석으로 차냈다. 그때는 공을 1개만 가지고 할 때여서 경기장에 다시 공이 들어올 때까지 시간을 벌 요량이었다.”
100개가 넘는 헝가리의 슈팅을 막아낸 홍덕영의 선방이 없었다면 20대0 또는 그 이상으로 패배할 수 있었다. 오히려 9대0이라는 스코어는 기적과 같은 결과였다. (※ 2차전인 터키와의 경기에서 7대0 패배를 기록하며 탈락 확정. 3차전(서독)은 당시 규정에 의해 치러지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귀국길, 홍덕영은 화물기 안에서 동료들에게 울면서 말했다. “모두 나의 잘못이다. 내가 조금만 더 잘 막았어도 이런 쓰라린 패배는 없었을 것이다.”
48년 뒤 한국은 월드컵에서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을 격파하고 4강에 올랐다.
# 선배들의 투지를 후배들이 이어나가야 한다.
비록, 세계 강호들과의 격차를 극복하지 못하며 번번히 조별 예선 통과에 실패해 왔지만 (2002년, 2010년 제외) 우리가 수십 년간 ‘월드컵’이라는 세계 축제의 장에 발을 내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그 원동력을 ‘투지’라고 말하고 싶다. 축구 변방에 불과했던 한국이 세계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었던 것은 몸을 아끼지 않는 투혼, 쉽게 포기하지 않고 한 발 더 뛰려는 근성과 어떠한 팀을 만나더라도 물러서지 않는 당당함을 가지고 경기에 임했기 때문이다.
스포츠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정신력이다. 정신력의 투지와 집중력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 어떤 팀을 만나더라도 쉽게 이길 수 없다. 지금의 대표팀은 과거 60년 전 월드컵 1세대인 자랑스러운 선배들의 ‘정신력’을 이어받아야 한다. 최근 가까스로 본선에 직행하는 등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며 내리막길을 걷고 있지만, 선배들이 늘 그래왔듯이 위기를 잘 극복하리라 생각한다. 1년도 채 남지 않은 2018년 러시아 월드컵.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출전했던 선배들처럼 자신감을 갖고 한국축구의 저력을 보여주기 바란다.
* 1954년 스위스 월드컵 한국 대표팀 명단
故홍덕영, 故함흥철, 故박규정, 故이종갑, 박재승, 故이상의, 故김지성, 故강창기, 故한창화, 故민병대(주장) 故주영광, 故이수남, 故박일갑, 故정남식, 故최정민, 故성낙운, 故정국진, 故최영근, 故이기주, 故우상권, 故김용식(감독)
▶1954년 고 딘 디엠, 베트남 수상에 취임
▶1947년 제1회 유엔아시아극동경제
위원회(ECAFE) 상해서 개막
▶1944년프랑스 역사가 마르크 블로크 사망
▶1940년프랑스 페탱 내각, 독일에 항복
▶1932년 로잔배상회의 (독일의 배상액 절하)
▶1924년 중국, 황포군관학교 개교. 교장 장개석
▶1920년 멕시코의 대통령(1972-82) 로페스 포르티요 출생
▶1917년 제1회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1910년 페루의 대통령(1968-75) 벨라스코 알바라도 출생
▶1903년 미국 포드자동차사 설립
▶1902년 이상재 등 개혁당사건에 관련되어 구속
▶1901년 손문, 일본에 망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