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사간원 대사간 기대승이 졸하였다. 대승이 다시 대사간에 제수되었다가 사양하여 체직되었는데, 때마침 황제가 붕어하여 변무 주청사(辨誣奏請使)를 보내는 일을 정지하니, 대승이 드디어 결심하고 남쪽으로 귀향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볼기에 종기가 나서 고부(古阜) 인우(姻友)의 집에 이르렀다가 끝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상이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내의(內醫)를 보내 약을 가지고 달려가 구제하게 하고 교지를 내려 위유(慰諭)하였으나 미처 당도하기 전에 죽었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기대승은 어릴 때부터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견해가 뛰어났습니다. 이황(李滉)과 서찰을 주고받으면서 성리설(性理說)을 강명하여 선현(先賢)이 미처 밝히지 못한 것을 밝혔으며, 경연에 입시하여 진술한 것은 모두 이제 삼왕(二帝三王)의 도였으므로 온 세상이 추대하여 유림의 종장(宗匠)으로 여겼는데, 불행히도 병이 생겨 귀향하다가 도중에서 죽었습니다. 집안이 청한(淸寒)하여 장사를 지낼 수 없으니, 관가에서 상장(喪葬)을 도와주어 국가가 유자(儒者)를 높이고 도를 중시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대승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지기(志氣)가 고매하였다. 어린 아이 때부터 효우(孝友)에 독실하고 행동을 예로써 하였으며, 국상(國喪)이 나면 반드시 곡림(哭臨)하고 졸곡 때까지 재계(齋戒)하고 소식(素食)하였다. 장성한 뒤에는 광범위하게 배우고 뜻을 굳게 지켜 옛 성현처럼 되겠다고 스스로 다짐하였는데, 조예가 고명하고 논의가 영발(英發)했으므로 학자(學者)들이 추중(推重)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뒤에 청명(淸名)이 크게 드러나자 이양(李樑)이 권력을 잡고 있으면서 그를 꺼려 파직시켰다. 그러나 이양이 패하자 벼슬이 더 높아졌다. 금상(今上)이 즉위한 뒤에 맨 먼저 경연에 들어가 국사를 도모하고 잘못을 간하여 임금에게 도움을 준 것이 많았다. 당시는 조정이 혼탁한 뒤라서 사기가 위축되어 있었는데, 새 조정이 대승을 종주(宗主)로 삼고 원왕(冤枉)을 신설(伸雪)하고 현준(賢俊)을 등용하여 조정이 맑아졌으므로, 소기묘(小己卯)라고 불리워졌다. 얼마 후 대신과 의논이 맞지 않아 고향으로 물러나 학문을 강론하고 글을 저술하면서 일생을 마치려고 하였는데, 불행히도 일찍 죽으니 사림이 애석해 하였다.
대승은 이황을 스승으로 섬기고 학문을 강론함에 있어 서로 뜻이 맞았는데, 이황 또한 대승을 추대하여 제자로 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출처 어묵(出處語默)을 서로서로 규계하며 닦았다. 어떤 자가 대승은 행동이 그의 지식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자, 이황이 말하기를,
“기명언(奇明彦)은 임금을 예로써 섬기고 진퇴를 의(義)로써 하는데 어찌 지식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가.” 하였다. 학자(學者)들이 고봉 선생(高峯先生)이라 불렀는데, 문집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나중에 광국 공신(光國功臣)에 녹훈되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는데, 이는 일찍이 변무(辨誣) 논의에 참여하여 주문(奏文)을 제술하였기 때문이다.
대승의 자는 명언이고 본관은 행주(幸州)이며 나주(羅州)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 진(進)은 아우 준(遵)과 모두 도학으로 세상에 이름났는데, 준은 당화(黨禍)에 연좌되어 죽고 진은 은둔하여 일생을 마치면서 문헌의 전통을 가전(家傳)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