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작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 및 <헨리4세>
대본 아리고 보이토
초연 1893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배경 헨리 4세 시대 영국의 윈저
<1992년 10월 뉴욕 메트 / 126분 / 한글자막>
뉴욕 메트 오케스트라 & 합창단 연주 / 제임스 레바인 지휘 / 프랑코 제피렐리 연출
존 팔스타프 경........늙고 뚱뚱한 기사........폴 플리쉬카(바리톤)
펜톤......................젊은이......................프랑크 로파르도(테너)
카이우스 박사.........의사.........................피에트로 데 팔마(테너)
바르돌포................팔스타프의 부하.........안소니 라치우라(테너)
피스톨라................팔스타프의 부하.........제임스 코트니(베이스)
알리체...................포드의 부인...............미렐라 프레니(소프라노)
포드......................알리체의 남편............브루노 폴라(바리톤)
나네타...................알리체와 포드의 딸.....바바라 보니(소프라노)
퀴클리 부인............숙녀.........................마릴린 혼(메조소프라노)
메그 페이지 부인.....숙녀.........................수전 그레이엄(메조소프라노)
---------------------------------------------------------------------------------------------------------------------
=== 프로덕션 노트 ===
26편 베르디 오페라의 막을 내리는 작품, 마지막 정열을 불태운 희극 오페라 <팔스타프>
보이토의 대본에 매혹되어 베르디가 은퇴생활을 청산하고 작곡했다는 그 오페라
전 3막으로 구성된 바람둥이 주정꾼 팔스타프의 이야기
두 여자에게 같은 편지를 보낸 팔스타프를 골탕먹일 계획을 세우는 포드와 카유스, 여자들에게 속은 포드와 카유스.
속고 속이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장난일 뿐 (Tutto nel mondo e burl)
=== 메트의 <팔스타프> - 제피렐리의 고전 === <Kenneth Chalmers / 정준호 번역>
베르디 마지막 오페라의 이 연출은 오랜 세월 사랑받아왔다. 지난 40년 동안 그 누추한 가터 여인숙과 멋지고 그럴 듯하게 재현된 튜더 시대 윈저의 사람들로 모든 위대한 <팔스타프> 가운데 우뚝 섰다. 연출가이자 무대 디자이너인 프랑코 제피렐리가 1964년 3월에 메트로폴리탄에 처음 모습을 보인 것이다. 친영파인 제피렐리는 그때까지 런던에서 <로미오와 줄리엣>과 곧 이은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영화, 그리고 코벤트가든에서 유사하게 연출한 <팔스타프>로 명성을 쌓은 셰익스피어 전문가였다. 그리고 메트에서 선보인 <팔스타프>에서 시각적이고 심리학적인 묘사는 큰 찬사를 끌어냈다. "이 도시 오페라 연출사의 이정표"라는 것이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평이었다.
음악 자체에 세부 묘사가 많다. 비올라들은 1막에서 팔스타프의 텅 빈 지갑을 놓고 투덜대는 바르돌포를, 3막에서는 지저분한 기사의 목구멍을 넘어가는 와인을 묘사한다. 무수히 많은 예 가운데 둘일 뿐이다. 제피렐레는 이와 같은 극장의 리얼리즘을 추구해 그의 무대를 살아 있는 공간으로 만든다. 등장인물들은 말없이 눈빛만으로도 서로를 이해하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집에서 만든 옷을 통해 즐거운 아낙네들의 생활이 묻어난다.
이 영국식 유쾌함과 인정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잘 다듬어지고 정제되고 고양된 전통에 의해서도 탁월하게 표현된다. 베르디는 그의 대본작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나에게 다른 것과는 다른 서정적인 코미디를 써주었다"라고 썼지만, 그럼에도 셰익스피어와 오페라 부파가 공유하는 공통의 바탕이 있다. 부모의 권위와 싸우는 순수한 젊은 연인, 음탕한 자아도취의 늙은이, 그리고 그를 벌주는 머리 좋은 여인이 그것이다. 베르디는 마지막 역할인 알리체 포드가 "죽을 젓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피가로의 결혼>에서 모든 음모의 한가운데에 있는 수잔나를 떠오르게 한다. 미렐라 프레니가 적역이다(유명한 나네타이기도 했다). 당대 가장 위대한 수잔나 가운데 하나였던 그녀는 여기서 능숙한 상대역에 맞선다. 그녀와 장난을 벌이는 동료들도 마찬가지로 막강한 배역들이다. 바버라 보니와 수전 그러에엄은 미국 성악의 떠오르는 세대를 대변한다. 퀴클리 부인으로는 처음 메트 무대에 선 메릴린 혼은 로시니 희극의 기질을 여기서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물론 모든 것의 중심에는 존 팔스타프 경이 있다. 그 자신의 말처럼 "그가 없다면 다른 사람의 농담은 양념을 잃을 것이다." 미국 베이스 폴 플리쉬카에게 이 공연은 메트에서 노래한 오랜 이력의 정점에 해당했다. '뉴욕 타임즈'는 역할에 대한 그의 해석을 "거의 애처로운 인간의 본성"이라고 묘사했다. 그 자신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공연이 끝나고 몇 주가 지났지만 나는 몹시도 그 역할이 그리웠다. 나와 가깝던 사람이 죽은 것과 같은 상실감이 들었다."
베르디의 음악은 멈추지 않고 하나의 악상에서 다음 것으로 움직인다.희극의 비결이 타이밍이 있다면, 지휘자에게 필요한 것은 코미디 기질이다. 그렇게 해서 팔스타프가 알리체와 약속을 잡기 위해 밀고 당기는 장면 또는 '명예' 독백의 웅변술에서 효과를 볼 수 있다. 제임스 레바인은 베르디의 메트로놈 표시를 잘 지키며 듣는 이를 연기에 몰입하게 한다. '뉴욕 타임스'는 그가 오케스트라 또한 연기자의 일부로 만들었다고 썼다. 오페라 극장에서 보낸 일생의 경험은 베르디의 마술적인 오케스트레이션에 요약되었다. 등장인물들이 무대를 떠날 때 가장 단순한 방법인데, 작곡가는 잠시 휴지를 두어 장면의 마지막에 사라지는 저녁 빛을 관찰하고 다음 장면이 시작할 때 숲에 포근한 야경이 묘사되도록 한다. 메트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아름다운 음악의 삽화로 완성해낸다.
=== 작품 해설 === <다음 클래식 백과 / 이진경 글>
팔스타프
주세페 베르디
오페라 작곡의 대가 베르디의 마지막 오페라 작품으로 그의 평생에 음악적 가능성을 담아낸 오페라이다. 3막 구성의 서정 희극이며, 오늘날 오페라하우스에서 상연되는 베르디 오페라 중 유일한 희극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희극: 비극 오페라 대가의 마지막 종착역
〈팔스타프〉는 베르디의 마지막 오페라이다. 비극 오페라의 대가인 베르디의 마지막 오페라가 희극이라는 것은 흥미롭다. 로시니는 베르디에게 결코 희극 오페라를 쓸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베르디는 비극의 대가였다. 그리고 〈팔스타프〉를 작곡할 당시 베르디는 〈하루만의 임금님〉을 작곡할 때처럼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팔스타프〉를 작곡할 당시, 노장이 된 베르디는 주위 친구들의 죽음을 경험해야 했다. 마치 〈하루만의 임금님〉 작곡 당시 아내와 아들을 잃은 것과 비슷하다. 모든 열의를 잃은 베르디에게 보이토가 새로이 쓴 대본을 가지고 온다. 이 대본을 본 베르디는 다시 창작열을 불태우게 된다. 하지만 예전과 같은 속도로 작곡하지 못했고, 작품을 완성할 수 있을지에 대한 염려로 베르디는 이 작품을 비밀리에 작곡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대 실패로 끝난 〈하루만의 임금님〉 이후 첫 희극 오페라인 〈팔스타프〉는 대 성공을 이룬다. 로시니의 우려와 달리 베르디는 로시니의 희극 오페라와 자신의 극적인 작품을 패러디하였으며, 그는 평생 동안 음악과 문학, 극장에 헌신했던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이 작품에 담아냈다.
자유로운 음악의 구사
〈팔스타프〉는 노장이 마지막으로 작곡한 작품답게 그의 음악기법이 모두 깃들어 있다. 또한 그는 이전에 예상치 못한 새로운 면모를 많이 보였다. 〈오텔로〉와 마찬가지로 바그너 오페라처럼 지속적으로 음악이 흐르도록 작곡하여 아리아를 없앴으며, 관현악, 희극 배우, 다채로운 12중창을 선보이며 그만의 유머를 표현하고 있다. 그렇게 작곡가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자신이 펼치고 싶은 바를 그려냈다. 로시니의 희극 오페라뿐 아니라 자신의 극적 작품들을 패러디하였다.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노인
팔스타프는 15세기 초 영국 윈저를 배경으로 하며, 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의 일부와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을 소재로 보이토가 쓴 작품이다. 《헨리 4세》에 나오는 팔스타프는 사기꾼이며 무뢰한이지만 맥주통 같은 뚱보로 놀림 받는 인물이다. 베르디 오페라의 팔스타프는 《헨리 4세》에서 이미지를 가지고 온 것이다. 팔스타프의 캐릭터는 오페라 시작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그는 의사 카이우스가 팔스타프의 하인이 자신의 돈을 훔친 범인이라고 몰자 변상할 능력이 없는 그는 오히려 어쩔 것이냐는 반응을 보인다. 동시에 그는 부자 남편을 둔 유부녀와의 연애를 계획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오히려 팔스타프를 혼내 주는 계기를 만든다.
알리체 포드를 만나러 온 팔스타프에게 알리체는 오히려 메그 페이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지 물어본다. 그리고 메그가 도착하자 팔스타프를 커튼 뒤에 숨긴다. 아내의 부정을 걱정하는 포드가 들어오자 진퇴양난에 빠진 팔스타프는 부인들이 시키는 대로 세탁물 바구니에 숨는다. 그리고 알리체는 이 바구니를 템스 강에 던지라고 지시한다. 강에 빠져 겨우 살아난 팔스타프는 알리체가 그를 찾는다는 퀴클리 부인의 거짓말에 또 한 번 속아 넘어간다. 퀴클리 부인은 알리체가 자정에 윈저 공원에서 그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전언을 전하면서 ‘사슴뿔이 달린 전설 속의 기사’ 복장을 갖춰야 한다는 것도 전한다.
밤이 되어 복장을 갖춘 팔스타프는 알리체가 나타나자 그녀를 안으려 하지만 마녀들이 다가온다는 소리에 몸을 숨긴다. 사람들은 요정이나 마녀 등으로 변장하여 나타나 팔스타프가 참회할 때까지 괴롭힌다. 팔스타프는 당황하여 눈물을 흘리지만 곧 아는 이들이 얼굴을 드러내자 안심하면서 자신의 죄를 사죄한다. 오페라 초반에 무뢰한 모습을 보였던 팔스타프가 사람들의 장난에 속아 넘어가는 모습은 관중들이 그를 미워할 수 없게 한다.
술통 바리톤: 베르디 바리톤들의 마지막 종착역
팔스타프는 ‘술통’이라는 별명으로 비계덩어리 혹은 큰 자루라는 놀림을 받는 인물이다. 그래서 오페라 캐스팅에는 외모에서부터 제약이 따른다. 실제로 팔스타프 역을 맡기 위해서는 몸무게 130 킬로그램을 넘겨야 한다는 속설이 있기도 하다. 한때는 팔스타프를 연기하려는 많은 바리톤들이 일부러 살을 찌우기도 했다고 하니 이 역할이 외모에서 얼마나 많은 제약이 따르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바리톤들은 팔스타프의 역할에 걸맞게 살을 찌우기 보다는 자신의 마지막 희극적 작품으로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베르디 오페라의 명 바리톤이라 알려진 셰릴 밀른스 역시 메트로폴리탄에서 은퇴한 이후 중소 극장을 전전하며 오직 팔스타프만을 부른 것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1막 1장 팔스타프의 모놀로그, ‘명예라고! 이 도둑놈들아(L'Onore!)’
돈을 구하기 위해 부유한 유부녀들과 연애를 하겠다는 계략을 짠 팔스타프는 알리체 포드와 메그 페이지에게 편지를 쓴다. 그 편지를 그의 부하들에게 전달하라고 하지만, 두 사람 다 명예가 실추된다며 거절한다. 팔스타프는 도둑놈이 명예를 운운할 수 없다고 하며 부하들에게 한바탕 설교를 늘어놓으며 부하들을 내쫒는다. 이 모놀로그는 팔스타프의 성격과 생각이 반영된 재미난 모놀로그이다.
3막 펜톤의 아리아, ‘뜨거운 입술에서 사랑의 노래가 흐르네(Dal labbro il canto estasiato vola)’
펜톤과 나네타의 사랑 이야기는 이 오페라에서 또 다른 중요한 줄거리이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지만 아버지 포드는 그의 딸 나네타를 의사 카이우스에게 결혼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알리체와 메그는 이 두 연인을 이어줄 계획을 세운다. 팔스타프를 괴롭히기로 한 날 밤, 포드의 의도를 알고 있는 퀴클리 부인은 나네타를 기다리는 펜톤에게 미리 준비해온 수도사 복장을 입히고, 나네타와 카이우스와의 결혼을 막으려고 한다. 펜톤의 아리아는 나네타를 기다리며 그녀를 그리워하면서 부르는 정열적인 아리아이다.
3막 2장 합창,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장난이여(Tutto nel mondo e burla)’
수도승 복장을 한 펜톤, 나네타, 카이우스, 변장한 바르돌포의 결혼식이 거행된다. 사람들의 계획을 모르는 포드의 주례로 합동결혼식을 진행하지만, 가면을 벗자 파트너가 바뀐 것을 알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딸을 생각한 알리체의 계획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포드는 이를 용서하고 팔스타프 역시 두 젊은이의 결혼을 인정해 달라고 한다. 포드가 두 사람의 결혼을 인정하자 팔스타프는 마지막으로 합창을 부르자고 한다. 오페라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합창은 ‘인생은 짧고 세월은 빠르며 인생은 다 장난이다’라는 내용으로 마지막까지 유쾌함을 선사한다.
---------------------------------------------------------------------------------------------------------------------
=== 작품해설 === <2012년 1월 18일 네이버캐스트 / 이용숙 글>
명곡, 명연주
베르디, 팔스타프
셰익스피어 [헨리 4세],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 등을 토대로 대본 작성
1893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
“작곡가로서 나는 평생 완벽을 추구해왔다. 그러나 작품이 완성될 때마다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서 내게는 분명 한 번 더 도전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남아있다.” 오페라 작곡을 시작한 이래 50년이 넘도록 비련의 여주인공들에게 고통과 눈물의 세월을 보내게 한 베르디는 여든이 다 되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도전 [팔스타프 Falstaff](1893)에서 여주인공들은 드디어 유쾌한 반격을 시도합니다. 자기가 잘난 줄 아는 남자주인공을 얼간이로 만들고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젊은 남녀를 결혼으로 맺어주지요. [팔스타프]는 상식을 벗어난 우스꽝스런 주인공을 벌하고 비웃는 전형적인 희극에다 결혼으로 끝나는 해피엔딩입니다. 전혀 베르디답지 않은 작품이지만 베르디 노년의 새로운 통찰이 깃든 오페라랍니다.
베르디의 마지막 오페라는 희극
평생 비극에만 익숙했던 베르디는 1887년에 마지막 비극 [오텔로 Otello]를 발표한 뒤 ‘앞으로는 재미로만 작곡하겠다’는 말을 편지 쓸 때마다 지인들에게 강조했습니다. 극장의 요구나 관객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마음 내키는 음악만 만들겠다는 뜻이었지요. 베르디는 [팔스타프]를 작곡하면서 이 작품을 그저 자신만의 새로운 형식 실험으로 간주했고, “성악가들이 무대 리허설을 다 마친 뒤라 할지라도 작품 공연을 철회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음을 처음부터 못박아두었습니다. 이런 자유로운 여건이 베르디에게 드디어 편안한 마음으로 희극오페라를 작곡할 수 있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베르디는 결코 희극오페라를 쓸 수 없을 것”이라는 로시니의 장담을 마침내 여든 살에 뒤엎으며 베르디는 소원성취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팔스타프]를 쓰는 동안 정말 기쁘고 행복했다. 수공업자가 의뢰인에게 내줄 작품이 아니라 자기 집에 두고 즐길 애장품을 작곡하는 심정이었다.” 1893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무대에 [팔스타프]를 올린 뒤 베르디가 한 말입니다.
자연 속에 묻혀 느긋하게 노년을 즐기려 했던 베르디를 설득해 [오텔로]와 [팔스타프] 같은 걸작을 작곡하게 만든 친구이자 대본작가 보이토. 그는 팔스타프(원작에서는 폴스타프)가 등장하는 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1598)와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1597), 그리고 오토 니콜라이(Otto Nicolai, 1810-1849)의 동명 오페라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을 토대로 더욱 생동감 있는 [팔스타프]를 창조했습니다. 베르디의 주인공 팔스타프는 니콜라이 오페라의 팔스타프처럼 단순하고 어리석은 광대로 그려지지 않았죠. 그보다는 [헨리 4세]에 등장하는 통찰력 있고 기지에 넘치는 팔스타프에 가깝답니다.
[헨리 4세]는 셰익스피어의 방대한 사극들 가운데 가장 희극적 요소가 강하고 언어 표현이 다채로운 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야기는 국왕 헨리 4세와 왕자, 그리고 기사 폴스타프(오페라에서는 이탈리아어식으로 ‘팔스타프’)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폴스타프는 젊은 시절에 기사의 덕목을 지키려고 애쓰며 고지식하고 성실한 삶을 살았지만, 나이 들어가면서 술고래에 호색한으로 변해갑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성찰할 능력을 지니고 있죠. 궁정을 떠난 폴스타프는 왕자가 왕으로 즉위한 뒤 옛 친구이자 스승인 자신을 불러 주리라 기대하지만, 왕자가 찾지 않자 낙심해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시대착오적인 기사도 추종자 팔스타프
1막이 열리면 카이우스 박사가 팔스타프를 찾아와, 팔스타프의 두 하인이 간밤에 자기와 술을 마시다가 지갑에서 돈을 훔쳐갔다며 펄펄 뜁니다. 그러나 팔스타프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하인들 편을 들며 카이우스 박사를 제풀에 지쳐 돌아가게 만든 뒤, 두 하인에게 연애편지 심부름을 시키려 하죠. 이 마을 최고의 미인인 유부녀 알리체(알리스) 포드와 메그 페이지에게 똑같은 내용으로 구애하는 편지를 써놓고 이를 동시에 전달하라는 것입니다. 명예에 먹칠하는 그런 심부름은 할 수 없다고 하인들이 거절하자 팔스타프는 ‘명예가 밥 먹여주나, 이 도둑놈들아! L'onore! Ladri!’라고 노래합니다. “명예란 배를 채워주는 것도, 부러진 다리를 고쳐주는 것도 아냐. 그저 공허한 단어일 뿐이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고 실질적으로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 그런 명예 따윈 필요 없어!” 그러면서, 말을 안 듣는 하인들을 즉각 쫓아내 버립니다. 그리고 동네 소년을 불러 편지 심부름을 시키죠.
보이토가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 따온 이 ‘명예’에 관한 부분(원작에서는 왕자에게 이끌려 마지못해 전쟁터에 나가는 폴스타프가 하는 말)은 이 오페라에서 바리톤 배역인 팔스타프의 기량을 처음 선보이는 대목입니다. 팔스타프는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향락주의자인데요, 주인과 함께 밤마다 술집을 전전하느라 딸기코가 된 하인 두 명을 거느리고 뚱뚱한 배를 자랑스럽게 두드리며 늘 동네 여인들에게 연애편지 쓰느라 바쁩니다. 여자들이 뚱보의 구애에 비웃음을 흘려도, 그것이 팔스타프 자신을 좋아해 유혹해보려는 웃음이라 믿고 돈키호테처럼 돌진합니다.
장면이 바뀌면, 팔스타프의 편지를 받은 알리체 포드와 메그 페이지가 편지를 한 줄씩 번갈아 소리내어 읽으며 포복절도합니다. 나이든 퀴클리 부인과 젊은 나네타는 이 두 여인과 힘을 합해 무례한 과대망상증 환자 팔스타프를 확실하게 골려주기로 작정하죠. 이에 팔스타프에게 보복하고 싶은 남자들 다섯이 합세하는데, 이들은 알리체의 남편인 미스터 포드와 카이우스 박사, 나네타의 연인 펜톤, 그리고 팔스타프에게 쫓겨난 두 하인입니다. 9대 1의 싸움이니 팔스타프에게 승산이 없을 것은 초반부터 명약관화죠. 아홉 명이 서로 떠들어대는 이 복잡한 중창은 베르디의 원숙한 경지를 확인하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여러 사람이 뒤섞여 어지럽게 노래하는 사이사이에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 나네타와 펜톤이 서정적인 이중창을 부르는 것도 이채롭답니다. 1막 피날레의 9중창에서는, 초반에는 각자 노래하다 여자들끼리 그룹을 지어 노래하고, 남자들도 마찬가지로 각자 노래하다가 그룹을 이룹니다. 그리고 이 두 그룹의 노래가 한데 어우러지다가 요란한 웃음소리로 1막이 마무리되죠.
2막이 시작되면 퀴클리 부인이 팔스타프를 찾아와, 알리체가 그에게 밀회를 제안했다는 소식을 전해줍니다. 두 시에서 세 시 사이에는 남편이 언제나 집을 비우니 그때 찾아오라는 것이죠. 다만 메그 페이지의 남편은 외출하는 일이 거의 없어 유감스럽게도 기회가 없다고 덧붙입니다. 경의를 표하는 인사(“Reverenza!”)로 시작되는 이 대목에서 퀴클리의 연기는 능청스럽기 그지없답니다. 팔스타프는 여자들을 무장해제시키는 자신의 매력을 다시금 확신하며 신이 나죠. 그때 알리체의 남편 포드가 ‘폰타나’라는 이름으로 가장하고 찾아와 팔스타프에게 ‘알리체를 정복해달라’고 당부합니다. 자신은 그녀에게 구애하다가 상처만 받았는데 팔스타프가 일단 작업을 걸어놓으면 자기도 그녀를 유혹하는 일이 수월해질 것이라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늘어놓으며 '작업 자금'으로 돈까지 주고 갑니다.
팔스타프는 약속한 시간에 알리체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갑자기 남편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여자들이 시키는 대로 황급히 빨랫감이 가득 찬 궤짝으로 기어 들어가죠. 그러자 여자들은 하수가 흘러가는 운하에 궤짝을 던져버리고는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팔스타프를 내려다보며 박장대소합니다.
죽기 전에 한 번 웃고 싶었던 베르디
3막에서는 낭패를 보고 잔뜩 마음이 상해있는 팔스타프에게 퀴클리가 다시 찾아옵니다. 하인들이 실수를 해 일이 잘못된 거라 변명하며 퀴클리는 알리체가 숲에서 밤에 팔스타프를 다시 기다릴 거라고 전해줍니다. 시키는 대로 팔스타프는 뿔 달린 염소 변장을 하고 약속장소에 나갔는데, 숲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나머지 등장인물들은 팔스타프에게 몰매를 퍼부으며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자신이 왜 이런 일을 당하는지 팔스타프가 전혀 영문을 모른다는 점에서 희극성은 더욱 고조되는데요. 자기를 때리는 무리 가운데서 자기가 쫓아낸 하인의 딸기코를 알아보고서야 팔스타프는 마침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1막에서 “내 뚱뚱한 배는 나의 왕국, 그걸 늘려 가는 게 나의 과제”라고 노래하던 팔스타프는 3막에서 다른 사람들이 함께 그를 굴리고 짓밟을 때도 “내 배만은 살려줘!”라고 간청해 관객이 폭소를 터뜨리게 만들죠. 뚱뚱한 배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자랑으로 여기는 그의 익살스런 태도에서 팔스타프의 낙천적인 성격을 읽을 수 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뚱뚱한 사람을 그대 곁에 두어라”라는 말로 이런 팔스타프에게 찬사를 보냈습니다. 뚱뚱하고 낙천적인 사람들은 독재자가 되어 남을 괴롭히는 일이 없다는 것이 셰익스피어의 코멘트였습니다.
이제 등장인물들은 달빛 아래 가장무도회를 벌입니다. 자기 딸 나네타를 카이우스 박사와 결혼시키려는 포드는 이날 밤 카이우스와 나네타를 가장무도회 커플로 선포하려는 계략을 꾸미지만, 딸을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주려는 아내 알리체는 요정여왕 변장을 하기로 한 딸 나네타에게 다른 옷을 입히고 팔스타프의 하인을 요정의 여왕으로 변장시킵니다. 아내를 비롯한 다른 여자들의 합동작전에 속은 포드는 오히려 진짜 연인 사이인 펜톤과 나네타를 커플로 축복할 수밖에 없게 되죠. 팔스타프는 포드가 자기보다 더 심하게 속았음을 알고 즐거워합니다. 등장인물 모두는 팔스타프의 선창으로 ‘세상만사는 희극이며 남자들은 타고난 어릿광대 Tutto nel mondo’라고 노래하며 오페라의 피날레를 장식합니다.
베르디의 [팔스타프]를 ‘그의 [오텔로]에 대한 냉소적인 코멘트’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질투와 열등감에 사로잡혀 아내에게 배신당했다고 믿고 죄 없는 아내를 살해하는 오텔로(셰익스피어에서는 ‘오셀로’). 그와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는 인물이 바로 천하태평이며 과대망상증 환자인 팔스타프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오텔로처럼 살게 아니라 팔스타프처럼 사는 편이 낫다는 진리를 베르디는 여든이 다 되어서야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추천 음반 및 영상물 (팔스타프-펜톤-포드-알리체-나네타 순)
[음반] 티토 곱비/루이지 알바/롤란도 파네라이/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안나 모포 등, 카라얀 지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1956년 녹음
[음반] 레나토 브루손/달마치오 곤잘레스/레오 누치/바바라 헨드릭스/카티아 리차렐리 등,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지휘, LA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및 LA마스터코랄, 1982년 녹음
[DVD] 가브리엘 바키에/막스 르네 코소티/리처드 스틸웰/캐런 암스트롱/유타 레나테 일로프 등, 게오르크 숄티 지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및 빈 국립오페라 합창단, 괴츠 프리드리히 연출, 1979년(영화판)
[DVD] 폴 플리쉬카/프랑크 로파르도/브루노 폴라/미렐라 프레니/바바라 보니 등, 제임스 레바인 지휘,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 프랑코 제피렐리 연출, 1992년 실황
첫댓글 <불멸의 오페라 1 / 박종호> ★★★
이 실황의 가장 큰 매력은 프랑코 제피렐리의 연출과 무대미술이다. 사실적이고 화려한 무대는 아름답고 세심하고, 브라이언 라지의 영상도 아주 빼어나다. 메트로폴리탄 극장 사상 가장 뛰어난 실황 영상이다. 이 오페라의 화려한 진용은 보는 이를 압도하는데, 특히 미렐라 프레니, 매릴린 혼, 바바라 보니, 수전 그레이엄의 여성 4인방은 메트가 아니면 갖추기 힘든 진용이다. 팔스타프의 폴 플리슈카도 기대 이상이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8.03.29 14:41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8.03.29 16: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