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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 박사
― 의고당 실기(擬古堂實記)
전 광 용
분명 착각이나 환각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읽은 문학 작품 속에서 간혹 나 자신의 분신, 또는 나의 주변을 재현해주는 것만 같은 심경에 사로잡히는 그런 충격적인 순간의 경우……
나는 가끔 햄릿도 되어보고 돈키호테로도 자처해보는 것이다.
굳이 투르게네프의 예증을 들 것도 없이, 그 두 개의 타입은 서구의 전형적 인 인간형의 양극이라니까, 나 같은 범부에게 고스란히 적용될 리도 만무하겠지만, 그 어느 하나도 아닌 양쪽에 아직 인생의 초년병인 나를 적용시켜 본다는 것은 자기도취의 만용으로도 이만저만한 오산이 아닌 환각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그나 그뿐인가? 나는 스탕달의 『적과 흑』을 읽었을 때에는 마치 나 자신이 쥘리앵 소렐이라도 된 것처럼 신이 나서 공명하고, 격한 흥분마저 느끼며 기고만장하는 내 깐의 기염을 토했었다.
이것은 아마도 설익은 나의 인간성이나 의식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격으로, 그 성숙해가는 과정에서 무엇이고 자기에의 적용될 가능성을 함부로 계산해보는 미숙이나 치졸에서 오는 결과인지도 모른다.
대학에 처음 입학했을 때에는 온 천하가 내 것인 것만 같았고, 학년이 높아질수록 그것은 점차 어떤 확정된 좌표의 방향으로 집중되어갔었고, 졸업을 앞둔 시기에는 그 지정석 같은 좌석이 보얗게 안개에 덮여 초조해졌고, 막상 졸업을 치르고 나니 아무 데도 나앉을 자리는 없는 허황한 공백으로 화해지던 심리적인 변천도, 어쩌면 이 성숙 과정의 한 단면이었는지도 또한 모를 일이다.
아무튼 문학 작품의 전형적인 어떤 인물에 자기 자신의 투영을 발견한다는 것은 그만큼 나 자신의 개성이 아직 기틀을 잡지 못하고 포부니 희망이니 이상이니 하는 걷잡을 수 없는 막연한 기대가 무한대로 확대된 시기 였음을 방증하여주는 일면도 될 것이다.
다른 한편 아직 개성이 뚜렷이 자리 잡지 않은 젊은이들에게, 적용 관용도를 넓게 가진 인간을 창조한 작품들이 또한 후세에 남는 걸작의 계산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의 하나로 되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작품상의 허구적인 인간상에 나 자신을 아전인수 격으로 적용시켜 보려는 환영 같은 것이지만, 그와는 전연 다른 별개의 경우가 또 나의 가슴속에 파생되어왔다.
그것은 나와 남궁(南宮) 선생과의 상관관계에서 추려진 아주 다른 각도, 작품이 아닌 현실 면에서의 나의 투영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관관계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그 농도가 더욱 짙게 내 가슴에 엄습해오는 압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
나는 대학원에 입학시험만 치르고 군대에 들어갔었다.
훈련소에서의 소위 학도병에 대한 기간 사병들의 적대, 그에 따르는 기합 그리고 전방 초소 수색대에서의 위기에 휩쓸린 고된 근무, 그런 것은 누구나 겪는 일이기에 정상의 건강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갑종 합격자 나에게라고 굳이 더 격무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나를 가장 아끼는 남궁 선생이나, 나만 믿는 보람으로 세상을 죽지 못해 살아오는 홀어머니에게 편지 쓸 여가조차 얻기 어려울 정도로 분망한 신병의 군대 복무에서 간간이 섬광처럼 스쳐가는 나의 의구와 고민은 연구실 동창들에 얽힌 착잡한 문제였다.
멀쩡한 몸뚱이든 아니든 간에 수 좋게 병종이나 무종으로 낙착된 친구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버젓한 갑종으로도 요리조리 묘하게 새어 빠져 끝내 입 대를 미루고 제자리를 착착 고정시켜가는 축들을 생각할 때, 나는 몇 번이고 거센 충격과 고지식한 순종에 대한 회한에 몸을 떨었던 것이다.
좀더 융통성 있게 유들유들하지 못하고 외줄박이 고집으로 단도직입하려는 내 결벽성이, 주위의 친구들이 어디 좀 두고 보자는 관망의 태세에 동조하지 않고 저돌적으로 미래에 대한 아무런 타산도 없이 발작 같은 순간적 욱기¹로 입대하게 되었지만, 그것도 어머니의, 늘 자식은 남편만 못하다는 거의 관습화된 푸념에 반발하여 한시라도 그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에서 해탈해보겠다는 충동이 자극된 바도 없지 않았다.
그간의 복잡한 곡절이야 어찌 되었든, 아무튼 나는 일 년 반의 병역 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육체적인 기능에 아무 장애도 없을 뿐더러 정신면에도 재기 일신하여 학교로 돌아왔고, 대학원이 끝나는 대로 연구실 조교로 근무하게 되었었다.
무급 조교, 그건 사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그러나 연구실에 파묻힌다는 일 그것은 나 스스로의 삶의 자세에 있어서의 제일차적인 지표였다. 거기다 아버지의 유업에 대한 계승을 갈구하는 어머니의 소망, 그리고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이며 나의 은사인 남궁 선생의 학문적인 정열에 찬 권유, 이러한 배경적 조건이 나의 결의와 실천에 박차를 가해준 것은 부인할 수없는 사실이다.
이리하여 곰팡이 냄새 풍기는 책 더미에 둘러싸인 정적과 고독의 분위기 속에서, 지극히 평범하고도 단조로운 반복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는 사이 나는 모교의 시간 강사로 강의 하나를 담당하게 되었다. 아니 물려받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입학 당초만 해도 이러한 일은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려운 일로 생각되었다.
이처럼 삶의 보람찬 숭고하고도 진실한 일은 없다고 우러러 동경하던 그 영예가 바로 나 자신 앞에 의외의 시기에 펼쳐졌으니 말이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지만, 이젠 네 아버지를 만나도 정말 떳떳할 것 같구나. 내 혼자의 적공²이 얼마나 대견하냐구……”
어머니는 울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물은 내가 십수 년래 보아온 그런 슬픔이나 악에 받친 궁상맞은 울음이 아니라, 진정 감격과 희열에 찬 막을 길 없는 격정에서였다.
어머니는 처음으로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온 것만 같이, 구겨진 손수건처럼 주름진 얼굴에 행복한 듯한 화색을 띠고 기뻐하였다.
그날 밤 우리 모자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아버지의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그때까지는 어머니가 좀처럼 입 밖에 내지 않았던 아버지의 이야기, 간혹 내쏟는 경우가 있어도 그것은 정해진 뻔한 때였다.
나의 학자금을 위시하여 집안 살림이 옹색해졌을 때나, 남들이 주인이 없는 과부댁이라고 얕잡아 보고 어머니에게 하대할 때, 어머니는, 흥 네 아버지만 있었으면 이럴 수야 있겠니, 하고 혼자 자탄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하는 일이 못마땅하게 느껴질 때, 툭하면 아버지를 빗대놓고 나를 나무라는 일들이다.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 내가 군대에 입대할 때 어머니는 좀더 기다려 형편을 보라고 한사코 말리다 못해, 오히려 그에 대한 반발로 올림픽 선수로라도 나가는 양 열기 떠 날뛰는 나를 쏘아보며, 흥 남편 덕 못 입은 년이 언제 자식 덕 보겠니 하고 통곡을 하던 일이다.
그러나 강사 발령장을 받아 가지고 온 그날 밤은 우리 집안은 십 여 년 전으로 복귀라도 한 것처럼 화기에 찬 분위기였다.
“얘 참 아버지 책이 그대로 남았더면 네 하는 일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니……”
이렇게 말하는 어머니는 참말 그 오래 때 앉았던 수심을 걷고 순간이나마 기쁨과 희망에 찬 웃음을 띠며 아쉬워하는 것이었다. 전연 없어져버린 아버지 책 이야기를 끄집어내기만 하면, 그깐 책 아무리 하면 사람 목숨보다 더하겠니 하던 모습과는 전혀 판이한 오래간만의 피붙이의 정이 얽힌 장면이었다.
그러나 내가 남궁 선생에 대하여 나 자신의 초상화 같은 영상을 더 절실히 느끼게 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남궁 선생이 담당했던 강의의 하나가 내 차례로 돌아왔다는 운명적인 사실이, 나를 자기 회의에 빠지게 한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그 후 풀브라이트 장학금³에 의한 나의 도미 수속 절차가 진행됨에 따라 나는 자신에게 강인하게 덤벼드는 이러한 강박관념을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을 정도로 착잡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나는 연구실에 들락날락하는 군상 속에서 나에게 깊은 영향을 주거나 적잖은 관심거리가 되는 몇몇 모습을 더듬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고질의 해수병⁴으로 한 학기 강의의 절반 정도밖에 치르지 못하는 K교수는 허리가 약간 구부러지고 수척한 얼굴이 연령에 비해 훨씬 늙어 보인다. 그래도 예과 시절에는 스포츠맨이었다는 관록의 덕분인지, 한번 강의를 시작하면 노 손수건을 입에 대고 기침을 막아가면서도 시간을 꼬박 채운다. 아직 난로를 놓지 않은 초겨울 끝 시간 같은 때는 듣고 있는 쪽이 오히려 민망할 정도로 버티는 모습은, 존경이 가면서도 처량한 동정 같은 것을 금할 길 없는 때가 적지 않았다.
그래도 그가 호탕하고 분방하던 대학 시절을 회상하는 추억의 비화를 쏟을 때는, 그러한 정열이 어디서 솟았느냐 싶게 눈동자에 빛나는 광채가 서리는 것이었다.
큰 키에 체중이 이십팔 관의 늠름한 체구를 과시하는 Y부교수는 늘 건강색이 과잉한 홍조를 띠고, 기름기가 번지르르하다. 그에게는 혈압이 자꾸만 높아진다는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겨 늘 거기에 신경을 쓰고 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무역 회사 사장이나 여당의 당수 격에 알맞는 풍채라고 하며 그 누그러진 인품을 건드린다. 그는 몸집 그대로 정력적이어서 가장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중견 학자로 학계에서 가장 촉망을 받고 있다. 그의 문장이 가끔 전후의 가락이 잘 맞지 않게 논리적인 비약이 있는 것도, 모두들 옥에 티 정도로 그의 생긴 성품의 탓에 돌리고 그를 아끼고들 있다.
이에 비하면 전임 강사 M선생은 날씬한 몸매에 너무 깔끔하다. 언제나 머리는 갓 이발한 듯 반질하게 빗자국이 나 있고 바지의 주름 하나 별로 구겨진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신혼 초기인 부인의 세심한 덕이기도 했지만,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는 이국적인 체취의 여운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양키이즘의 일면도 없지 않다. 그는 별로 논문 발표를 하는 것은 없지만, 말끝마다 외국어 실력을 앞장세워 허세를 재지 않으면, 새로운 연구 방법론을 입버릇처럼 내세우고 있다.
이 밖에 내 후임으로 들어온 박 조교는 몇 해 선배 아닌 나에게까지 고분고분하며, 과 안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족보 흐른 큰집 맏며느리처럼 뒤치다꺼리에 자기 몸을 아낄 줄 모르는 헌신적인 인간으로, 과 내의 지보⁵적인 존재로 공인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새로 선출된 졸업반의 과 회장 안 군은, 학생회장에 입후보했다가 낙선된 전력도 있어, 하급생의 통솔력은 그만이지만, 큰 벼슬자리라도 차지한 것처럼 으쓱대며 매사를 입으로 지휘하기만 하고 자기가 손수 하려고는 들지 않는 특성이 있다.
그 밖의 학생들이야 그 새파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얌전을 빼는 영감 투의 능청맞은 군이 있는가 하면, 선머슴같이 건들거리는 패, 여학생 옆이라면 없는 기세를 더욱 부채질하여 자기 존재를 시위하려는 축, 그렇지 않으면 남들이 책을 보고 있는 속에서 마치 신문사의 노련한 기자처럼 담배를 꼬나문 채, 책상 위에 구듯발을 올려놓고 제 마음대로 지껄여대며 강사 선생들이 어쩌다가 들러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안하무인격인 족속, 그런가하면 한쪽 구석에서 너희들 네 멋대로 해라 나는 절간에 들어왔다 하는 식으로 벌레처럼 하루 종일 책에 붙어 있는 독실가, 아무튼 각인각색이다.
이러한 만화경 속에서 대부분의 교수 강사들의 은사가 되는 남궁 선생은 대웅전의 본존(本尊) 불상처럼 주변의 군소 보살에 둘러싸인, 학문으로나 인격으로나 존귀하고도 거룩한 존재였다.
나뿐만 아니라 졸업생의 누구든지 남궁 선생의 제자라는 것을 스스로의 자랑으로 여길뿐더러, 어느 좌석에 나서든지 한몫 덤을 보고 들어서는 자긍이기도 했다.
하도 값싼 말로 전락되었기에 국보라는 어휘는 외람되어 남궁선생에게 쓸 수 없는 말이지만, 사학계의 선구자로 그는 자기의 학설을 그렇게 고집하면서도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 발표된 새로운 학설에는 지금도 시간을 놓치지 않고 치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좀 깡마르기는 했으나, 강철같이 단단한 그의 체질은 그대로 그 자신의 의지와 신념을 상징하는 것같이 강인하고 다져진 인상을 주고 있다.
의학을 공부하여 돈벌이를 하든가, 법학을 전공하여 고등문관에 패스하여 군수 자리 하나 얻는다든가, 그렇지 않으면 정치 경제를 적당히 택하여 손쉬운 월급자리를 마련해 그대로 평범하게 살아가려는 어쩔 수 없는 왜정 시대에, 남궁 선생은 역사학을 택했고, 굳이 조선사를 전공했다는 그 시발점에서부터, 그의 삶의 자세나 학문에 대한 태도에는 확고한 지표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남궁 선생 자신은, 자기의 학문을 남들이 애국심이니 항일투쟁이니 하는 데 연결시켜 찬양하는 것을, 그리 달갑지 않게 여기고 극히 불순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했을 뿐이지 그 밖의 무엇이 있겠소, 이것은 예나 이제나 거의 일관된 대답이요, 또한 태도였다.
일제 시대 그의 연구에 의한 새로운 학설은, 일본인의 왜곡된 선입감에서 이루어진 기성 학설을 근본적으로 전복시킨 것도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는 이것을 순수한 학문 면에서 그들을 전복시킨 쾌재를 불렀지, 겨레니 나라니 하는 시류에 결부시키는 것을 꺼렸고, 자기 스스로도 그것으로 만족했었다.
그 남궁 선생이 참말 예상도 하지 않던 시기에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고, 학문에서 노후자(老朽者)의 취급을 받게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거울을 마주 앉아 나 스스로의 모습을 뚫어지게 쏘아본다. 거기에는 거듭 남궁 선생의 모습이 겹쳐옴을 어찌하는 수 없다.
인생 장송곡(葬送曲)!
내가 느낀 그날의 솔직한 소감이란 흡사 이런 테두리에 속하는 한마디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
구월 초순의 강당 실내는 아직 후덥지근하게 땀내가 풍겼다. 홀 안을 빼곡히 메운 뭇 시선은 무대 쪽으로 쏠려지고 있었다.
단 위에 가로 나란히 앉아 있는 정년(停年)퇴직 교수들. 그 속에 끼어 있는 남궁 선생의 무표정한 모습.
신문 보도반의 플래시가 연속 섬광을 비낄 때마다 그 얼굴들은 천고의 풍상을 겪은 석불마냥 더욱 두드러지게 음영을 나타내었다.
뉴스 사진반의 거센 조명등 촉광은 그들의 눈을 부시게 광선을 퍼붓건만 폐허 속의 촉루(觸膢)⁶를 연상시키는 그들의 표정에는 아무 반응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남궁 선생은 손을 마주 포개어 무릎 위에 얹고, 눈을 살며시 내리감은 채 묵묵히 앉아 있었다.
숱이 엷어진 반백의 대머리. 앞이마에 비치는 전광이 이날따라 유난히 반사되어 흘러간 인생과 학문에 대한 얽히고설킨 사연들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만 같게 여겨졌다.
새로 다려 입은 통 넓은 구식 바지의 앞 주름은 사모님의 정성어린 자국을 남기건만 개조한 양복 오른쪽 가슴에 옮겨 붙은 윗 포켓과 퇴색된 넥타이는, 그의 삶의 자세라고만 보기에는 너무도 초라하다 못해, 청빈한 삶의 이면을 연상시키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생래의 그 강건한 성격과 체질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굳이 늙었다고 하기에 스스로 늙음을 자처하지 않을 수없는 스승은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나라!
조국!
겨레!
아니 절박한 이 순간엔 그런 건 너무나 사치스러운 이야긴지도 모른다.
그러면 자기 자신의 흘러온 세월을 회고하고 있는 것일까.
조선 사람들끼리는 십몇 대 일의 격심한 경쟁률을 뚫고 들어가야만 했던 고등학교 입학, 그땐 확실히 남들 입에 수재라고 오르내렸다.
대학에서의 전공 선택. 얼마나 진실하고 값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던가.
일인들이 가장 적대시하던 역사학, 그중에서도 조선사 연구, 사위는 온통 적에 둘러싸인 것 같은 상아탑의 분위기……
그러나 새로 발표하는 논문 하나하나에 얼마나 삶의 보람을 느꼈던가.
지질려 살던 연륜 속에서 예상은 했지만, 너무나 일찍 다가온 해방. 이제 참말 네 활개를 치고 큰숨을 쉬면서 일할 수 있는 때가 왔다고 감격과 흥분에 젖었던 시기. 있는 것 가졌던 것이라곤 아낌없이 다 털어주고 싶던 순수하고도 적나라하던 심정.
사상적인 대립, 남북 협상 문제로 들끓던 연구실이 겨우 자리잡혀가던 무렵 태풍처럼 휩쓴 사변, 가장 아끼던 동료와 지기가 납치되고 계속되는 피난살이, 수복된 폐허에서의 재기……
육십 평생을 고집과 신조로 지켜온 상아탑이라고 하지만, 가족에게는 단 한 번도 이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니라고 떳떳이 보여줄 사이 없이 지나온 생애……
자기가 스스로 선택한 길을 자기 깐의 방법으로 성실하게 살아오노라고 했지만, 지금 이 자리는 나에게 또 무슨 색다른 레테르를 붙이려는 절차의 순간인가.
아니, 어쩌면 이것은 스승에 대한 나의 자아류의 착각이거나 감상(感傷)일지도 모른다.
정작 장본인인 남궁 선생은 태연자약히 현실을 체념하고 허탈한 공백 상태에서 무념무상의 경지에 있는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참 잘 살아왔다고…….’
장내를 울려대는 박수 소리에 비로소 나는 제정신을 가다듬었다.
남궁 선생이 표창장과 함께 기념품을 받고 있었다.
그제서야 뒤늦게 박수를 치고 있는 나의 눈언저리는 저려왔다. 이것은 내 자신의 먼 홋날을 견주는 자화상에서가 아니라, 분명 남궁 선생 자신의 흘러온 역정(歷程)이, 철 이른 돌개바람을 맞는 것 같은 낙화유수첩(落花流水帖)의 낙질(落帙) 같은 것이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별로 한 일도 없이 세월만 보낸 이 사람에게 이런 기념품까지 주셔서 ……’
교정에 나온 나는 남궁 선생의 답사에서 그 이상의 구절을 계속 더듬을 수 없을 정도로 격하고도 허황했다.
나는 학생들과 비슷한 나이의 젊은 교수가, 실존주의니 현대 철학이니 하며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에 겹쳐, 아덴의 수풀을 백발이 성성한 노교수가 지팡이에 의지해 젊은 제자들의 부축을 받아가며, 인생의 심오한 진리를 더듬더듬 이야기하며 걸어가는 전설같은 장면을 엇갈아 생각하면서, 자신의 허전한 마음속에 때 묻지 않은 백지를 덮어갔다.
불광동 종점 합승 정류장에서 내린 나는 신작로를 비껴 나간 교외의 들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맑게 갠 가을 하늘, 나의 부푼 젊음을 그대로 튕겨 올려 보내고만 싶은 그런 날씨건만, 나는 한쪽 구석이 텅 빈 것 같은 허전한 감을 금할 길 없었다.
어저께 이임식장에서 본 남궁 선생의 그 위엄 있는 기품으로도, 도저히 감싸지 못하고 터뜨려버린 초라한 모습, 그것만으로도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그것은 나의 주관적인 해석이 더 그렇게 보게 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그보다는 차라리 그러한 영상이 나 자신의 골수를 비비고 들어차, 스스로의 자화상을 그리는 선입감의 탓인지도 몰랐다.
나는 자신이 가고 있는 목적지가 명확하면서도 정처 없이 방황하는 양 맥없는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슬이 갓 내린 아침나절, 벌써 잠자리의 날개는 삼복 뙤약볕 속의 그 팔팔하던 솜씨는 옛일인 양 축 처져, 격전장에 다시 돌아온 패전 병사처럼 기력이 풀려보였다.
현재의 남궁 선생의 위치란 저런 것이나 아닐까……
그러나 밖에서 보는 뭇 시선이 그렇게 일방적인 판정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작 본인 남궁 선생은 정력으로나 사고면으로나 훨씬 젊은 세대를 자부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오히려 모든 객관적인 판단이라는 것이, 이 경우는 지극히 피상적이고 타성이나 관례에 얽매인 왜곡된 판정인지도 몰랐다.
나는 그날의 남궁 선생 옆에 자리 잡았던 정신병리학의 권위 P교수의 답사를 곱씹어보았다.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늙었다고 하지만 나는 아직도 젊습니다. 의약이 발달하여 생리적으로 늙지 않고, 정신 연령이 엄청나게 젊어지는데 내가 늙었다니…… 아직 얼마든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앞으로 내 주변에 변화가 온다면 연구나 수업이나 그런 것에는 아무 변동도 없고, 다만 수입이 줄어진다는 일일 것입니다…….’
오랫동안 체취에 밴 과묵과 겸양의 품격 그대로, 공손히 물러가는 남궁 선생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의사 표시였지만, 이러한 심경은 남궁 선생뿐만 아니라 그날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심정이기도 했다.
나지막한 산 언덕 경사지에 계단식으로 터를 닦고 정연하게 자리 잡은 후생주택 담 너머로 한길 가를 내려다보던 남궁 선생은 나를 발견하자 만면에 웃음을 띠고 손짓하는 것이었다.
대부분 일년생의 화초지만 꽃 속에 파묻힌 뜰에서 남궁 선생은 국화분을 어루만지며 잎사귀 하나하나를 가제로 닦아내고 있는 참이었다.
나를 반기는 사모님, 목소리를 듣고 뛰어나오는 난이, 옥, 철, 경, 이들은 거의 내 몸에 매달리듯 응석을 부리며 기뻐했다.
나는 웬지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대학에서부터 국민학교까지에 이르는 이들은 이적 남궁 선생에게는 무거운 짐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조롱조롱 그만하게 따라 자라는 이들 사 남매, 의무 장교로 출전했던 장남 훈만 있어도 남궁 선생의 어깨는 좀 가벼워졌으리라는 생각이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중년(中年) 상처(喪妻), 그것은 단밥에 재라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다 체득할 수 있는 세월을 겪은 나도 아니지만, 나는 지난 봄 학교 등록금을 계기로 문안의 자리 잡힌 구옥을 처분하고 이곳으로 나오던 때의 남궁 선생의 낙향 기분이라는 말을 회상해 보았다.
‘그래도 빚이 없으니 마음은 한결 편해.’
남궁 선생의 이 말 속에는 참말 거뜬한 심정의 소치에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체념이 서린 독백이었다고 나는 그때도 생각했었다.
연구에 지치면 서예(書藝)나 화초(花草)로 시간을 보내는 남궁 선생, 그 밖에 그에게 피로를 푸는 약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세상에 알려진 애주(愛酒)다.
나는 들고 간 술병을 사모님에게 드리면서도 무어라 인사를 드려야 할지 이 경우의 적합한 말을 찾지 못해 그대로 엄벙덤벙으로 때웠다.
“이 무거운 것을 일부러 들고 오시느라고…….”
“뭐 아무것도…….”
나는 말끝을 맺지 못했다. 사모님의 눈에 방울이 맺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겉으로는 나에게 웃음으로 대해주지만, 초상집 분위기나 다름없는 한적한 변두리의 이 집에, 아직 나밖에 찾아온 사람이라곤 없는 탓만도 아닐 것이다.
“저것들 데리고 어떻게 살아갈지 앞이 캄캄해요…….”
나를 서재로 인도하며 나직이 중얼거리는 사모님의 목소리는 흐려 있었다.
“어떻게 되겠지요.”
나는 이러한 지극히 무책임한 대꾸를 할 수밖에 없이 궁하고도 옹졸한 처신밖에 하지 못했다.
쌍룡사(雙龍寺)를 지나 맑은 계곡 널바위 위에서 한숨 돌리고 난 우리 일행은, 가파른 산길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선봉은 여전히 남궁 선생, 그 뒤가 딸 난이, 다음이 나, 비대한 Y교수는 뜸뜸이 이어가는 일렬종대의 대열에서 거리가 벌어지기 일쑤였다.
간밤에 내린 서리 탓인지, 돈암동 종점을 출발할 때는 좀 쌀쌀한 기분이었지만 한낮으로 접어들자 기온은 훨씬 풀렸다.
Y교수는 골짜기 초입에 들어설 때 이미 잠바는 벗었지만, 이젠 스웨터까지 벗어젖히고 러닝셔츠 바람으로도 연신 이마의 땀을 훔치며 헐떡거렸다.
나는 Y교수가 따라오기를 기다려 그의 옷을 받아 내 짐짝에 걸어매었다.
선두에 선 남궁 선생은 같은 속도로 걸어가고 있었고, 난이는 개울섶의 들꽃을 꺾어가며 가끔 우리 쪽에 시선을 돌리곤 활짝 편 얼굴에 웃음을 머금었다.
단풍이 한창이어서 난이의 경이에 찬 탄성은 연발되었고, Y교수는 여전히 고역의 표정 속에 하마 모양 허우적거리기만 했다.
미끄러지는 언덕길을 일착으로 올라선 남궁 선생이 뒤를 한 번 돌아보더니, 뒤처진 Y교수에게 손짓을 하면서 자작나무 밑에 쉼터를 마련했다.
급경사 진 돌길에서 엉기적 대는 Y교수의 궁둥이를 난이가 밀고 올라가는 뒤를 따라, 나도 숨을 바투 쉬면서 언덕 위에 올라 등쪽이 찍찍해오는 륙색을 내려놓았다.
온 산이 붉고 노란 단풍에 묻혀, 채색으로 단장한 병풍에 둘러싸인 듯한 황홀한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홍조 띤 얼굴을 바라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오늘은 김 군이 제일 수골 하는군……,”
마도로스 파이프의 연기를 사뭇 맛있는 듯 들이삼켰다가 길게 내뿜으면서 남궁 선생은 건너편 능선에 눈길을 박은 채 나를 걱정했다.
“아녜요…….”
말소리는 들릴락 말락 웃음으로 대답하면서도, 기실 나는 무거운 짐에 짓눌렸던 어깨를 좌우로 뒤틀어보는 것이었다.
하기야 일행의 식사와 음료가 끈이 겨우 매어질 정도로 내 륙색에 들어 있으니 근량도 적잖은 편이었다.
그러나 나는 무언지 모르게 기뻤다. 내가 남궁 선생 댁을 방문한 후 얼마 안 되어 선생을 찾고 돌아온 Y교수와의 느껴진 심정이 똑같았기에, 이날의 등산도 누가 먼저 제안한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었다.
갑자기 주위가 적적해진 것만 같은 남궁 선생의 심경에 하루의 소풍의 기회라도 마련하여 조그마한 위로라도 되게 하고픈 심정……
남궁 선생은 즉석에서 쾌락했고 아버지 옆에 기대고 있던 난이가 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Y교수는 축축이 젖은 내의 속에 타월을 넣어 땀을 닦아내면서도, 마치 어린애같이 싱글벙글하면서 남궁 선생과 난이를 번갈아 보고는 나에게 잘했다는 듯한 의미 있는 시선을 보냈다.
나는 륙색에서 사과와 배를 끄집어내어 둘러앉은 가운데에 내놓았다. 난이가 재빨리 사과를 들어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괜찮아. 나는 그대로 주어…….”
남궁 선생은 한 알을 덥석 쥐어 손바닥으로 껍질을 쓱쓱 문대고는 그대로 한 입짝 뚝 떼어 넣는 것이었다.
나는 젊은 나이에 벌써 충치 하나를 금니로 쌌지만, 남궁 선생의 치아는 총총히 그대로 있는 것이 이날은 유달리 눈에 띄었다.
“이렇게 좋을 줄 알았더라면 억지루라도 강 선생을 끌고 올 걸…….”
바야흐로 제철인 단풍 속에 하루를 혼자 즐기는 것을 애석해하는 것만 같은 남궁 선생의 어조에 나는 기뻤다. 더욱이 아버지가 노 서재에만 들어앉고 바깥출입이 덜한 요즈음의 난이의 얼굴에는 그 밝은 눈동자에 무엇인가 티가 비낀 것 같게만 여겨지던 나에게, 이날의 하늘처럼 밝은 산속의 난이를 보는 것이 더욱 즐거웠다.
K교수도 좀더 억지로 강권했더라면 이 아름다운 분위기에 한데 어울릴 수 있었을걸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난이는 언덕 밑 바위틈에서 솟는 샘으로 물 뜨러 내려갔다.
“윤 선생은 역시 몸집 값이 있어 땀을 갑절 흘리는군·…‥”
Y교수는 너털웃음으로 대꾸하면서도 어색한 때의 습성 그대로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선생님은 비탈길을 올라오시는 게 우리 젊은이보다 더 기력이 좋으세요…….”
“흥, 이 사람아, 이 나이에도 아직 잠자리에는 이상이 없다네……”
세 사람은 함께 건넛산에 메아리치도록 웃어제껐다. 가슴이 후련했다.
난이가 떠 온 이 시린 산수를 마시고 우리 일행은 다시 망월사(望月寺)를 향해 오르막을 걸었다.
등반 차림의 완전 장비를 한 학생 사오 명의 부대가 우리 일행을 앞질러 나가고 있었다.
“무어 무어 해도 인생에는 젊음이 첫 자본이야…….”
남궁 선생은 그들 젊고도 씩씩한 부대에 선망의 눈길을 보내면서 뒤에 선 Y교수를 돌아보았다.
“윤 선생, 사십 고개를 넘어서면 벌써 달라요…….”
사십 줄에 갓 들어선 Y교수는 그 뒤에 무슨 말이 계속될지 귀 기울이는 자세로 천천히 남궁 선생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나는 한쪽이 비탈진 바위 섶을 난이의 손목을 쥐고 부축하면서 뒤를 따랐다.
“공자는 사십을 불혹(,不惑)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비로소 인생을 바루 볼 수 있다는 지능 면에서겠고, 역시 사십 고개는 육체에 금이 가고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때야…….”
“저야 몸이 좀 부해서 그렇지, 선생님은 아직도 젊은이 못지않게 정정하신데요…….”
Y교수는 남궁 선생의 말을 받아넘기면서도 여전히 헐떡거렸다.
“아니, 눈에서부터 먼저 온다니까……”
중학교 때부터 안경을 썼다는 Y교수는 그 말에 반응이라도 주는 듯이 안경테를 들고는 콧등의 땀을 훔쳐내고 있었다.
아까 우리가 쉬고 있을 때 옆을 스쳐 올라온 젊은 쌍쌍이, 개울에 발을 담그고 히히덕거리면서 물방울을 튀겨 댔다.
그들 옆에 놓여 있는 트랜지스터는 숨 가쁜 게임의 야구 중계방송을 이 산속까지 옮겨오고 있었다.
“아니, 이 외진 산속에까지 저 도시의 소음을 싣고 올 건 무어람…… 산도 속도 아니란 말야…….”
중얼거리듯이 나직이 말하는 남궁 선생의 표정 속애는 자연 속의 유수한 흥마저 깨뜨린다는 아쉬움이 서렸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나는 그 분위기 훼방의 쌍쌍 주인공들을 쏘아보았다.
그들은 주위의 시선에는 아랑곳없이, 이번에는 광분하는 재즈곡에 맞추어 서로 마주 서 몸뚱이를 비비 꼬는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닌가.
“세상도 많이 변했군…… 이제 나 같은 건 정말 쓸모가 없는 폐물이야.”
질책인지 자탄인지 모를 남궁 선생의 이 한마디는, 상아탑에서까지 추방당한 이방인의 체념같이 나에게는 확대 해석이 되어지는 것이었다.
망월사에 다다른 일행은 절간 약수에 목을 다시 축이고 땀을 들인 후 서쪽 언덕 양지쪽에 점심참을 펐다.
남궁 선생을 위하여 마련한 양주 병뚜껑을 빼고 Y교수는 선생에게 첫 잔을 권했다.
“이거 요새 세상에는, 진품이군…….”
남궁 선생은 단모금에 쪽 들이켜고는 입맛을 다셨다.
“고 송진 냄새가 감칠맛이 있단 말이야…….”
남궁 선생의 만면에 넘치는 만족한 듯한 웃음을 보면서 우리 일행은 모두 다 즐거웠다.
“벌써 십 년이 넘었군…… 이 사람 아버지 석계(石溪)와 그리고 피난 중에 작고한 박 교수와 셋이서 여기로 온 것이…… 그때도 아마 가을 이맘때였지… …”
나는 아버지의 아호(雅號)를 부르는 남궁 선생의 눈언저리에서 덧없는 인생의 추억을 느끼면서, 나 스스로도 사변 전의 세월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나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는 남궁 선생이 이날은 흐뭇한 기분 속에 약간의 감상도 섞인 듯이 흘러간 일들을 더듬더듬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들이 가고 난 후 나만 살았으니, 지금까지의 십 여 년을 덤으로 산 셈이야……부정목(不正木)⁹이 산(山)을 지킨다고, 나 같은 것이…… 이젠 연구실에서도 쫓겨났지만…….”
퇴직 이후 좀처럼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던 남궁 선생이, 이날은 유달리 자탄에 찬 침울에 잠기는 데에, 나는 더욱 마음의 동요를 누를 수 없었다.
그럼 대체 나는 무엇인가. 사변으로 많은 유능한 인재들이 없어지고 폐허에서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됐으니 나 같은 것이 대학의 시간을 맡지……“
나는 지난 주일 처음으로 강단에 섰던 첫 시간의 수업을 생각하며 자책감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해가 거의 질 무렵에야 우리 일행은 망월사를 떠났다. 지난날 셋이서 왔던 자운봉(紫雲峰) 아래 마루턱을 넘어 천축사(天竺寺) 계곡으로 빠지자는 남궁 선생의 고집 센 우격다짐으로 우리는 그 노정(路程)을 택하는 데 이의나 불만이 없었다.
“저 달을 보아. 그날 밤도 이러 했어…….”
감탄에 찬 남궁 선생의 말소리에 나는 동녘 하늘을 쳐다보았다.
멀리 불암산(佛岩山) 등성이로 열나흘달이 떠올라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인적이 그늘어져 차츰 정적에 잠겨가는 산길을 우리는 남궁 선생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때처럼…… 저 아래 신작로 어귀에서 막걸리 추렴이나 하세.”
이 밤의 남궁 선생은 확실히 십여 년 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남궁 선생이 일선 교직의 전임(專任) 자리에서 물러난 지 일 년.
나는 지난봄까지는 자주 찾아뵈었지만, 나의 복잡한 여권(旅券) 수속의 절차에 얽매여, 이 몇 달 동안 천천히 자리를 같이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간혹 방문했대야 잠깐 인사만 여쭈고 돌아오는 형편이었다.
그간 남궁 선생은 줄곧 서재에만 틀어박혀 있었다고 한다.
교과서나 고시(考試) 관계 참고 서적 하나 출간하지 않고 외곬으로 학술 논문만 집필해온 그에게, 여러 권의 귀중한 논문집이 있지만 그 가치와는 별개로 전문 분야의 수요자에 한계가 있는 그들 저서에서 윤택한 인세(印稅)의 혜택을 입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일이었기에, 그 생활은 점점 쪼들려만 들어갔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
나는 도미 수속을 진행하는 사이에 몇 번인가 그만 중단해버릴까 하는 충격적인 사태에 접했었다.
신체검사는 그것대로 지정된 병원 이외에서는 절대로 받을 수없는 제약이 되어 있어, 외국인 원장이 직접 진단하는 때를 맞추느라고 몇 번 헛걸음을 했는지 몰랐다.
그것도 마지막에는 뢴트겐에 나타난 흐흡기 사진에 반점(斑點)이 나타난다는 것으로 육 개월 후에 다시 사진을 찍어 그동안 하등 변화가 없이 원상일 때에는 용인할 수 있다는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 마음대로 출발 일자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저쪽에서 정한 기일까지에는 내가 도착해야 될 날짜의 제약에 나는 몹시 초조했다. 결국은 홍콩에 있는 병원에 그 사진을 보내어 그쪽의 확인을 얻어 최종 단안이 내려졌다. 그나 그뿐인가. 문교부는 문교부대로, 외무부는 외무부대로, 그 밖에 신원 조회의 복잡성, 마지막에는 한국은행의 달러 교환, 지정된 비행기 회사의 출항 일자, 이런 것까지에 신경을 써야만 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언제 떠나느냐는 인사를 받기에 부끄러울 지경이었고, 짓궂은 친구들은, 아니 여태 떠나지 않았느냐고 능청을 부리는 데는 참말 민망할 정도였다.
막판에 가서는 나 스스로도 이게 정말 가지는 건가, 이러다가 흐지부지되는 거나 아닌가 하고 어리벙벙하게까지 되었다.
서류 절차의 진행 정도는 아랑곳없이 자기들끼리 날짜를 정해 환송회를 해준 동창들을 얼마 후 길거리에서 만났을 때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민망한 심정이었다.
그럭저럭 출국증을 받고 비행기 예약까지 되어 출발을 이틀 앞 둔 날 저녁, 나는 떠나는 인사를 여쭈러 남궁 선생 댁을 찾아갔다.
남궁 선생은 서재 한가운데 서가(書架)의 책을 내려 산더미처럼 무져¹¹놓고, 무엇인가 골라내코 있는 것 같았다.
창만을 남기고 좁은 방 사면을 꽉 메운 서가. 부문별로 다 분류되어 책꽂이에 정돈되어 있는 책들을 새삼스럽게 왜 이러시는가 하는 의아심이 없을 수 없었다.
“아! 김 군인가, 이거 오래간만일세…….”
나는 그동안 찾아뵙지 못한 미안한 생각이 앞질러 그대로 공손히 인사만 했다.
“여기는 먼지투성이가 돼서…… 저 방으로 들어가세…….”
남궁 선생은 손의 먼지를 털고 내 손을 덥석 쥐면서 건넌방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선생님, 갑자기 왜 책을 정리하세요?”
내 질문에는 확실히 의아스러운 어조가 어렸다고 스스로도 느껴졌다.
“글세…… 좀 그럴 일이 생겼어…….”
그는 말을 더듬더듬 이어가면서 억지스러운 웃음으로 말끝을 흐려버렸다
“어서 앉게……”
어딘가 서먹한 심정을 누를 길 없으면서도 나는 자리에 앉았다.
잠깐 이웃에 나갔다던 사모님도 난이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참 오래간만이군요…….”
자주 찾아오지 못한 이유가 분명하면서도 사모님이 다시 이렇게 첫인사로 물을 때에 나는 아침저녁으로 제집처럼 드나들던 예전 일을 생각하여 양심의 가책을 금할 길 없었다.
“벼슬이 떨어지면 친구도 떨어진다구…… 어디 어엿한 벼슬자리나 한번 하시구…… 저렇게 사람이 그리워 적적해하신다우……”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것이 다 지금까지의 나에 대한 애정의 소치 라고 여겨지면서도 나는 괴로워 견딜 수 없었다.
“그래 미국 가는 수속은 어떻게 되었는가…….”
남궁 선생이 이 미묘한 분위기를 전환이라도 시키려는 듯이 사모님의 말문을 가로채어 건너다보며 말했다.
“인제 수속이 다 돼서 내일모레 떠나게 됐습니다.”
그래서 떠나는 인사로 왔습니다, 하는 말이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아 나는 말이 계속되려는 입술을 묵묵히 다물었다.
“그래요?”
“응 그래…….”
두 분 다 사뭇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내 말끝에 곧 물어오는 사모님의 반문보다 남궁 선생의 그저 긍정하는 조의 대담은 퍽 뒤에 이어졌다.
“꽤 복잡하다던 절차가 그래도 쉬 됐구만……
“……”
“아무튼 잘됐네.”
나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하는 말이 혀끝에서 뱅뱅 돌았으나, 그도 어쩐지 입에 발린 형식적 인사로만 여겨질까 봐 그대로 머리를 약간 숙인 대로 있었다.
“그럼 이게 작별 인사가 되겠네…… 여보 그 술상 좀 보오…… 바쁠 테니 빨리……”
사모님의 치마 스치는 소리와 문이 여닫히는 음향을 들으면서 나는 다음 말을 찾고 있었다.
꼭 가장 아껴주던 사람에게 무엇인가 배신하고 돌아선 것만 같은 심경이었다.
“잘됐네, 하나, 젊어서 남들이 학문하는 방법도 배우고 살아가는 모습들도 보아두어야지…….”
“모두 선생님의 덕분입니다……”
침묵의 공간을 메우려느니보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지만, 나 스스로에게도 어색한 감이 없지 않은 말곁이었다.
김치 깍두기에 마늘장아찌를 곁 놓은 술상에, 남궁 선생과 나는 마주 앉았다.
“장도를 축하하네!”
사모님이 손수 따라주는 첫 잔을 들자, 남궁 선생이 평소에 없이 내 잔을 찧어 소리를 내면서 들었다.
나도 잔을 비웠다. 나에게 다시 한 잔을 권하고 난 남궁 선생은 이번에는 사모님에게 손수 잔을 건네는 것이었다.
이것도 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자, 당신도 한잔 드오. 김 군도 먼 길을 떠나고…… 나도 새 길을 떠나게 됐으니……”
나는 남궁 선생과 사모님께 번갈아가며 의아의 눈동자를 돌렸다. 선생님이 새 길을 떠나시다니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그러나 나는 전에 없이 심각한 이 분위기에서 그것을 물을 용기가 없었다.
사모님이 자리를 뜬 후 몇 잔 먹은 술이 몸에 퍼짐에 따라 내 기분도 적이 누그러져옴을 느꼈다.
나는 남궁 선생이 묻는 대로 수속 절차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말씀드리고 비행기 시간까지 결정된 경위를 아뢰었다.
“아무튼 잘됐네…….”
같은 소리를 남궁 선생은 몇 번 되풀이했는지 몰랐다.
“살아가는 데는 젊음이 첫 쨀세. 학문이구 사업이구 간에……”
“늙어서 아둥바둥한다는 것은 다 억질세.”
남궁 선생은 술잔을 비우면 내게로 넘겼고 나도 마시는 대로 선생에게 반배 했다.
“나도 새로 살기로 했네……”
그는 다시 빈 잔을 들어 내게로 넘기면서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변절한 건 결코 아니고…….”
남궁 선생의 어조는 점점 침통해갔다. 간간이 웃음을 섞지만 그것은 오히려 나에게는 그 침통을 누르려는 억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학문도 젊어서 정력이 좋을 때 해야지, 이렇게 눈언저리가 흐릿해가지구야 무엇이 되겠는가……”
선생은 수건으로 눈 가장자리를 닦고는 술잔을 거듭하며 말을 계속했다.
“그래 장살 시작하기로 했네……”
“네?”
내 목소리는 의외로 컸었다.
“아니, 그리 놀랠 건 없고…… 저 책 장사 말이야·…‥”
“책장사라니요?”
“왜 나는 장사를 못 할 것 같은가…….”
게슴츠레하던 남궁 선생의 눈동자가 이번에는 십 년 전의 그것처럼 광채 나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글쎄, 고본상(古本商)을 불러다 금을 하자고 했더니, 수지¹³값도 치지 않는 게 아닌가…… 이제 내가 여생에 무얼 하겠는가, 안다는 건 책과 연구실과 교단뿐인데…… 다른 건 다 가버리고 책만 남았으니…….”
나는 코허리가 시큰해왔다.
“자본은 내 장서가 있겠다. 그래도 옛 동창이 좋아서, 그 덕에 동대문시장에 조그만 점방도 하나 마련했네. 그 친구도 처음에야 말문이나 붙이게 했겠나…… 말하자면 책장사에 대한 내 신념에 굴복된 셈일세·…… 복덕방 하는 셈 치고…… 귀중본이 많으니 심심치 않게 팔릴 걸세……”
나는 자정이 가까워서 남궁 선생 댁을 떠났다.
오늘은 내가 고국을 떠나는 날이다. 그저께 저녁 일이 이틀 동안 내 머릿속을 맴돌았고 지금도 그것이 가셔지기는커녕 오히려 남궁 선생의 모습이 더 확대되어 내 머리를 휘덮어음을 어쩌는 수 없다.
나는 지금 반도호텔로 나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왜 나 자신이 미국으로 가야 하고, 무엇을 어떻게 해가지고 돌아와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그저 가고 있는 것이다. 처음 추천을 받아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신청했을 때는 어떻게든 그 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뽑혀야겠다는 일념이었고, 그것이 요행히 결정된 후는 무조건 흥분에 싸였었고, 수속 도중에는 귀찮아졌고, 이제는 정말 가지는가 보다 하고 생각하니, 막상 떠나는 이 순간에는 그 지표가 더욱 흐릿해짐을 어찌하는 수 없다. 그것은 남궁 선생에게서 받은 충격의 탓도 있겠지만, 나 자신이 도미에 대한 좀더 확고한 신념이 없이 들뜬 허영에 얼마간 휩싸였던 데 더 큰 원인이 잠복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선생님 같으신 분이 그래도 아직 학계에서 일하셔야 후진들이 더 의욕을 가질 것 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말을 비롯한 그저께 밤의 취중의 많은 이야기는 남궁 선생에 대한 나의 진정이요 호소였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내가 당도하기 전 서가에서 그 손때 묻은 책을 내릴 때 벌써 선생의 삶의 자세는 그 방향을 새로운 각도로 확정했던 것이었다.
들었던 술잔을 상 위에 놓고 서재로 들어가던 남궁 선생은 두툼하고 긴 널판때기 하나를 들고 나왔다.
“이게 간판일세…… 하하하하.”
나는 어이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쯤하면…… 시작이 반이라는데 새 출발이 미덥지 않은가…….”
그는 나에게 자기의 확고한 새 방향을 실지로 보여주려는 듯이 벼룻장을 내놓고 먹을 갈았다.
“그렇지 않아도 한 가지 확정을 짓지 못한 것이 있네…….”
“무어 말씀입니까?”
이제 나도 평상 기분으.로 자유로이 대꾸를 할 수 있었다.
“그 상호(商號) 말일세, 역시 상호란 점방의 간판이어서 자식의 명명(命名)처럼 신경이 쓰여진다니…….”
“그럼 참말 책방을 내세요?”
“참말이래두 이 사람·…… 나라나 민족을 위하겠다고 학문을 한 것도 아니구·…… 내 좋아서 한 것이지만…… 나라도 민족도 늙은이는 필요 없다구, 하구…… 나두 또 이젠 서리를 한 번 맞으니까 자신이 없어…… 하하하……”
이번의 웃음은 확실히 사회에 대한 냉소가 아니면 자신에 대한 자조(自嘲) 라고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가만있자…… 청춘당(靑春堂)…… 이건 너무 반발의 허세 같군…….”
나는 가만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그것밖에 알맞는 것이 없어…….”
남궁 선생은 붓끝을 입술에 다듬어 벼루의 먹을 묻히더니 그 나무 판때기를 내놓고 단숨에 쭉 내려 썼다.
의고당(擬古堂)!
붓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나는 긴 한숨을 내리쉬었다. 농담으로만 여겼던 지금까지의 생각이 온통 뒤집어졌다.
“어때, 의고당! 음향도 좋고, 시각(視覺)으로도 늙은이 점방으론 괜찮지…….”
남궁 선생은 다시 서재로 들어가서 부피 나는 질책을 들고 나오면서 위의 먼지를 떨었다.
이것은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일세…… 실은 사변 때 피차 장서를 잃었지만…… 이건 자네 엄친 걸세. 대학 연구실 장서 속에 석계(石溪)의 장서인이 찍힌 이 한 질이 어쩌다 남았기에 내가 보관하고 있었네. 이젠 이것까지 내 상품(商品) 속에 넣을 수는 없으니까…….”
아버지의 유일한 장서를 받아 드는 나의 손은 떨렸다. 나는 아버지를 우는 것이 아니라 분명 남궁 선생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이었다.
반도호텔 앞에 닿으니 남궁 선생은 벌써 나와 있었다.
“자, 먼 길 조심하게…… 제 나라 안에서 늘 쓰는 말로 몇 해 공부해도 별 수확이 없기 일쑤인데, 낯선 땅 익숙지 않은 말로 일이 년 했댔자 무슨 큰 소득이 있겠는가만, 너무 욕심 부리지 말고 몸조심해서 잘 다녀오게…….”
“네, 감사합니다.”
“나도 오늘 개업이니까, 첫날부터 근실해야지…….”
나는 돌아서는 남궁 선생의 뒷모습을 묵연히 바라보며 이십 년 후 삼십 년 후의 나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한강을 건너 북한산을 등지고 공항(空港)으로 질주하는 차 속에서, 나는 내가 하고 돌아올 일이 과연 무엇인가 점점 더 막연해짐을 느낄 뿐이었다.
-끝-
2016년 7월 6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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