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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성 여행기 제 2부
"청두, 그리고 하이루오꺼우의 빙천"
*사천성이란? 사천성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지우자이꺼우(구채구)이다. 웬만큼 중국을 여행한 사람은 구채구를 거의 다 한 번쯤은 다녀왔을 것이다. 보통 구채구를 다녀올 때, 청두 남쪽의 낙산대불과 아미산을 함께 다녀온다. 2011년 7월 29일 현재, 인터넷으로 조사해보니, "중경-구채구"를 3박 5일 다녀오는데 120만원이라고 하나투어 홈페이지에 나와 있다. 하지만 우리가 다녀온 청두의 서쪽 지방은 아직은 한국 사람이 자주 찾는 곳은 아닌 것 같다.
사천성은 남한의 5-6배의 면적이다. 사천성은 청두를 중심으로 해서 동쪽은 평야지대이고, 서쪽은 가파른 산악지대이다. 마치 인도의 평지에서 갑자기 네팔의 수천미터로 대지가 높아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천의 서쪽을 보통 동티벳이라고 부르며, 해발 2000미터 - 7000미터까지 있다. 우리가 여름에 이곳을 가기로 결정한 한 가지 이유는, 청두의 아열대성 기후가 만들어 내는 습한 25-29도의 더위를 피해, 서늘한 서쪽 산악지대에서 피서를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사천성은 중국인의 입장에서 오지 여행지로 꼽힌다. 소위 무협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곳이다. 또한 이곳은 삼국지에 나오는 촉나라가 있었던 곳이다. 지금도 유비, 관우, 장비 등의 이름이 걸린 사당을 도처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야크를 키우는 사람들, 붉고 노란 옷을 입은 승려들, 그리고 이상한 장식을 한 아름다운 여인들도 자주 눈에 뜨인다.
*청두의 일일 투어
<청두 시내 지도>
2011년 7월 4일 청두다. 우리는 각자가 가보고 싶은 곳을 가보기로 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우리의 숙소인 심스코지 게스트하우스(위 지도의 E)에서 가까운 원슈위엔(文殊院:문수원: 위 지도의 F)에 걸어가 보기로 했다.
길을 물어 물어 찾아가는데, 대체로 젊은이는 호기심을 가지고 친절하게 잘 가르쳐 주지만, 나이가 들은 사람은 불친절하거나 모른다고 했다. 5번인가를 물어, 30분 정도 걸어서 원슈위엔이 있는 거리에 도착했다.
<문수원 근처 상업지구>
원슈위엔 근처는 이미 상업화 되어 있었다. 길 양쪽으로 그리고 골목 안으로 각종 가게가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놀라운 것은 첫 인상에 여기가 일본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일본적인 분위기라는 것이다. 세부적인 것은 잘 모르겠지만, 울긋불긋한 장식에서부터 뾰죽한 지붕까지 얼핏보아 일본을 많이 닮아 있었다. 아니, 일본이 여기를 닮았는지도 모른다.
<문수원 근처>
<인상적인 붉은 문수원 담>
<문수원 근처 가게>
당나라 때 지어졌다고 하는 불교사원 원슈위엔은 아침부터 신도들이 들끓었고, 절에서 근무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탑 위의 작은 잔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향로에는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으며, 붉은 색 복장을 한 스님들이 경전을 읽거나 분주히 왕래했다. 점심 때라 그런지 나물을 얹은 밥그릇을 가지고 서성이는 사람이 많은 것도 볼거리 중의 하나였다.
<문수원>
<문수원>
안내 책자에 따르면 이곳은 채식이 유명하다고 한다. 그래서 한 번 사 먹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컴컴한 건물 안이 미로처럼 복잡해서 식당을 찾기가 힘들었다. 마침내 음식을 사 먹는 곳이라고 보이는 곳에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는 것이 보였으나 어둡고 분위기가 칙칙해서 그냥 건물 밖으로 나왔다.
한편으로는 낮은 기도 소리와 고즈넉 한 분위기이면서도, 그리고 또 한편으로 구경꾼으로 분주한 사찰 경내를 일찍 떠나기로 한 것은 단지 무더운 날씨 때문이다. 청두의 날씨가 무덥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 답답하게 더우리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덥다 못해 머리가 아프고 어깨에는 천근되는 쇠뭉치를 걸치고 산을 오르는 느낌이었다.
<문수원>
밖으로 나와 무조건 에어콘이 있는 식당을 찾았다. 그러나 에어컨이 있는 집을 찾는 것은 아이 머리에서 흰 머리카락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겨우 한 집을 찾았는데, 그 집은 문을 연 상태로 에어컨을 켜 놓고 있었다. 아마도 에어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 것이다.
<다시 문수원을 나와서>
종업원이 와서 메뉴판을 탁자 앞에 깔아 놓았다. 사실 중국 음식을 주문하는 것은 한 마디로 복질복이다. 모두 한자로 써 있는 까닭에, 나름대로 주문한 음식이 어떤 것인가하는 것은 하늘에 맡겨야 한다. 그리고서는 스릴과 서스펜스를 양손에 쥐고서 손 바닥에 땀이 고일 때까지 기다리는 도리밖에 없다.
나는 아는 척 하지 말고 솔직하게 고백하기로 했다. "나는 한국인이고 중국 음식을 잘 모른다. 단지 담백한 음식을 좋아한다. 추천해 달라.(我是韩国人,不知道中国菜,喜欢清淡的。推荐一下。)"고 종업원에게 말했다. 종업원은 어딘가로 들어가더니 그림이 그려져 있는 메뉴판을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여기저기 메뉴판을 넘기면서 하나하나 가리켰다.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여 OK를 표시했다.
잠시 뒤에 음식이 나왔는데, 처음 것은 오리고기를 감자와 볶은 것이었고, 두 번째는 호박을 삶은 것이었고, 세 번째는 배추를 데쳐서 약간 달작지근한 소스를 뿌린 것이었다. 뜻밖에도 내가 사용한 이런 주문 방식은 적어도 그날은 대 성공이었다. 약간 짠 맛이 있는 오리고기와 배추를 겯들여서 먼저 먹고, 나중에 호박을 먹었다. 나는 이후에도 이런 방법, 즉 종업원의 추천 방식을 종종 사용했는데, 그들이 우리의 음식 습관을 모르기 때문에 역시 성공의 확률은 반반이었다.
날이 더워 나머지 관광 명소인 "두보초당"이나, "무후사" 같은 곳은 구경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하는데, 운전수가 윗통을 벗고 운전했다. 택시 안에 에어컨이 없는지, 아니면 있어도 돈을 아끼려고 안 켜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택시 안도 더워 미칠 지경이었다. 나는 현재 기온이 33도 이상일 거라고 확신하고 운전수에게 현재의 기온이 몇 도쯤 되는지 물었다. 그의 이야기는 27도쯤 되는데 습기가 많아서 그렇게 덥게 느껴진다고 한다.
그날 12시쯤 택시로 돌아와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에어콘을 켜고 잠자고, TV보고 이것저것 먹으면서 빈둥빈둥 하루를 보냈다. 역시 여행은 따뜻하거나 시원할 때 해야지, 기온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경치라도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을 다시 느꼈다. 한 여름이나 한 겨울에 여행을 하는 것은, 아픈 몸을 이끌고 여행하는 것과 별 다름이 없다고 느낀 것이다.
*하이루오꺼우(海螺沟:해라구) "해라"는 우렁이처럼 생긴 "바다 고등"을 말한다. 전체적으로 이곳의 모양이 고등을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무더운 청두에서 하루만 머문 것은 천만 다행이다. 공가샨(贡嘎山:공알산. 7566m)을 보고 빙하를 구경하기 위해 7월 5일 아침 일찍 청두의 신난먼(新南门:신남문)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중국에는 버스터미널에 들어갈 때나 기차를 탈 때도 모든 짐을 엑스레이 투시기에 통과 시켜야 한다. KC가 갖고 있는 7-8개의 개스통을 여러 사람에게 분배했다. 왜냐하면 개스통은 여행 금지 물품이기 때문이다. 개스 통을 가슴에 넣고 가는 사람, 주머니에 넣고 돈 주머니인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 모자 속에 숨겨가는 사람 등 다양하다.
<야안에서 점심을 먹은 식당>
7시 30분에 출발한 35인승 버스는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곡예하듯이 요리조리 빈 차선을 운행하며 달렸다. 한국과 좀 다른 면이 있다면 툭하면 버스기사가 경적을 울려댄다는 것이다.
점심 때가 되어서 도착한 곳이 고속도로가 끝나는 지점인 야안이다. 간단히 음식을 사먹고 나서, 2달간 일정으로 중국을 여행하러 다닌다는 2명의 중국 여자를 만났다.(위 그림의 오른쪽에 서 있는 두 여자). 북경에서 출발한 이들은 사천성을 구경한 뒤에 운남성을 거쳐 티벳으로 간다고 했다. 대학을 졸업했다는 이들은 직장도 얻기 힘드는데, 우선 여행이나 하고 보자고 생각해서 모든 것을 때려치고 여행을 시작했다고 했다. 2달이면 대단히 긴 여행이지만, 우리 남한의 100배에 달하는 중국 땅덩어리를 생각하면, 이는 마치 한국을 반나절 보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무슨 인연인지 이들은 그날 오후에도 그리고 그 다음 날도 갈 때마다, 발이 닿는 곳마다, 우리와 마주쳤는데, 만날 때마다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은 "你呀你!(너도, 참!)"뿐이었다.
<하이루어꺼우 가는 길>
야안에서부터 버스는 좁은 길로 접어들어 굉음을 내며 위로, 위로 올라간다. 기본적으로 2000미터를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우리가 묵는 곳이 여기는 "백두산보다 높은 곳이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들어야 했다.
멀리 일하는 농부가 가끔 보이고, 자전거 여행하는 사람도 보인다. 구름이 다가왔다 사라지고, 산이 머리 위에 왔다가 저 멀리 사라진다. 길가를 배회하는 돼지를 만나기도 하고, 할 일 없어 먼 산 보고 짖는 개도 만난다. 커브 길을 서둘러 가다가 급브레이크에 가슴을 쓸어 내려야 했고, 떨어진 돌덩어리를 피해가는 운전수의 재주를 보면서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하이루어꺼우 가는 길>
<목적지에 도착했다. 모시의 금화사 앞>
<우리가 묵은 객잔>
모시라는 조그만 도시는 사방이 토목공사장을 방불케할 정도로 집을 짓고, 도로를 건설하고, 하수구를 정비하고 있었다. KC의 말에 따르면 3년전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도시로 변모해 있다고 한다.
목조 건물을 숙소로 잡고, 여기저기 구경 다닌다. 아직도 남아있는 옛 거리를 걸어본다. 농산물 시장(농마오 시장)은 몇 사람이 앉아서 파리를 날리고 있었다. 땀을 찔찔 흘리면서 두꺼운 작업복을 입고 뙤약볕을 쬐어가면 멋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젊은이가 인상적이다.
<모시의 구도로>
<저녁 식사 집>
<저녁 식사와 술: 칭커주(청과주) 때문에 다음 날 죽는 줄 알았다.>
하여튼 그날 밤 칭커지우(青稞酒: 청과주)로 시작했다가 반 병신 될 정도로 술을 먹었다. 술을 마시러 몇 차례를 갔는지도 모르고, 몇 시인지도 몰랐다. 허름한 점빵에서 중국인이 주는 맥주와 백주를 넝큼넝큼 얻어 마셨다. 중국인들은 내가 보통화를 잘 한다고 너도 나도 경쟁적으로 술을 부어주었다.(사실 중국인들은 내가 한 마디만 중국어를 해도 잘 한다고 말 해 준다.). 내가 가져간 담배를 그들에게 권했고, 못 피우는 담배지만 그들의 담배도 피워봤다. 그들이 자주 하는 말은 한국의 영화, 연속극, 그리고 가수들이 훌륭하다는 것이다. 집에 가면 하는 일이 한국 영화를 본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말을 나는 얼마나 많이 자주 들었는지 모른다. 이런 한류 덕택에 조금은 우쭐대며 중국을 다닐 수 있기도 하다. 사또 덕분에 나팔 분다고나 할까?
마실 물을 사러 갔던 내가 객잔으로 돌아오지 않으니까, 아내가 나를 찾으러 나왔다. 아내가 나를 데리고 가려고 하면, 중국인들이 내 다리를 잡았다. 다시 아내가 데려 가려고 하면 그들은 내 두 팔을 잡아 못가게 했다. 그러다가 결국 아내는 사진만 몇 장 찍고 돌아갔다. 나는 그들과 술을 먹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즐겁기는 했으나, 취중에서도 내가 이렇게 백주(白酒)를 먹다가는 백주(白晝)에 백골(白骨)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어슴프레 나기 시작했다. 나는 꾀를 내어 객잔에 한국술이 있으니 그 술을 가져오겠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好好"를 연발하며 팔을 들어 "얼씨구 비슷한 춤"을 추기 시작했고, 어떤 사람은 손을 입에 넣어 휘파람을 불었다. 내가 그들을 피해 나온다는 것이 하필 그집 화장실이었고, 다시 빠져 나온다는 것이 그집 부엌이었다. 잠시 나는 내가 왜 부엌에 왔는지 몰랐다. 거기에서 소변을 볼까하다가, 정신을 차린 다음, 물을 마시고 마침내 기적적으로 밖으로 나와 생환인지 환생인지 하는 기적같은 희열을 느꼈다.
그 뒤, 객잔의 베란다에서 사람들과 또 마셨다. 그리고 다시 거리로 나가 근처 어디에서 사람들과 또 마셨다. 낮에 보아 두었던 술집으로 가려고 하다가, 마침 문 닫고 나오는 술집 주인과 마주쳤다. 왜 2시까지 영업한다고 해 놓고, 일찍 나오는지 내가 술집 주인에게 심술궂은 놀부처럼 따졌다. 주인은 내일은 꼭 2시까지 있을테니 내일 오라고 나를 타일렀다. 그뒤 정신이 가물거려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하여튼 객잔에는 안전하게 돌아왔으니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모시의 한 가게에서>
<다음 날, 아침 7시도 되기 전에 빵을 먹으면서 걸어간다.>
<객잔을 나서는데 멀리 공가산의 한 봉우리가 보인다. 이것은 공가산의 주봉은 아니라고 한다.>
<수직의 빙천(氷川)을 멀리서 줌 렌즈로 당겨 찍었다.>
<케이블 카를 타고 가면서 바로 아래에 있는 빙천을 찍었다. 흙으로 덮여 있어서 처음에는 얼음인지 아닌지 잘 몰랐다.>
다음날 나는 단 몇 발자국도 걸을 수 없었다. 케이블카로 내린 지점이 해발 3700미터 지점인데다가, 전날 술에 망가진 몸이어서 몇 발자국만 떼어 놓으면 숨이 찼다. 개울가에 앉아서 먼산만 바라보았다. 동료 몇 사람이 눈 앞에 보이는 산으로 올라가 멀리 개미처럼 작게 보였다. 노상 등산으로 단련된 한국인이나 올라가지, 중국인들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저기 올라가는 사람들은 한국인이라고 중국인들이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한 중국인이, 왜 한국인은 저렇게 강한지 묻는다. 한국인은 본래 운동을 좋아하는데, 특히 등산을 좋아한다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청년들은 누구나 군대에 가서 2년 동안 신체를 단련하기 때문에 건강하다고 말했는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멀리 빙하 폭포가 보인다. 빙하 폭포를 포함한 전체 빙천은 길이가 총 14키로라고 한다.>
<빙하폭포>
<우리 팀 중 일부가 산에 오른다.>
<드디어 일행 중 일부가 산의 정상에 올랐다. 약 4천미터 정도 될 것이다.>
<빙천의 오른 쪽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날 구름에 가려 7566미터 공가산의 주봉은 끝내 보지 못했다. 어떻든 중국에 이렇게 높은 산이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하여튼 중국에는 없는 것이 없는 곳처럼 보인다.>
<3700미터 지점에 있는 부처상. 돈을 내고 이 주위를 4바퀴 돌면 복이 온다나 뭐라나. 아내는 1700원(10위안) 내고 네 바퀴 돌았다. >
<케이블 카에서 내린 지점에서 아래로 바라본 풍경. 관광객들이 직접 내려가 얼음을 밟아보고 있다.>
<한 사람이 빙하가 있는 곳으로 날 듯이 뛰어가고 있다.>
<이곳 산의 일부 벽은 붉은 색이다.>
<매표구에서 버스를 타고 버스 종점까지 가면, 케이블카 타는 곳이 나온다. 그 근처의 숲에서 옥수수 장수가 있다. 사먹어 보았으나 겉보기와는 달리 별 맛은 없었다.>
<버스를 타지 않고 숲속으로 걸어가면 원시림이 나온다.>
<구경을 마치고 매표소에서 밖으로 나오는데 묵 장수가 있었다. 아이가 아래에서 자는 모습이 특이하다. 엄마의 사랑이 얼마나 그리울까?>
<우리 대원 중 한 사람이 빙천의 얼음 조각을 가져와 한 번씩 만져 보았다.>
(2011년 7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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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게으름의 소치로 여적 사진 정리도 못하고 있다가
사진이 첨부된 곽선생님의 실감나는 여행기를 읽고 있으려니
제 안에서도 지난 여행에서의 기억들이..느낌들이 고스란히 살아 움직이네요
벌써 다음편도 그 다음편도 기다려집니다 ^^
3년전엔 빙하를 바라보며 대나무찰밥을 먹었었는데... ㅎㅎㅎ그 기분이 되살아느껴집니다.ㅎ
수연양이 기억하는 그 맛있는 대나무찰밥!
난 지금까지 중국에서 먹은 음식 중에 그것이 제일 맛있었다오.
미리 주문하여 아침에 숙소로 배달온 대나무 밥 한 통씩 배급받아 케이씨가 한국에서 가져온 김 한 장씩 곁들여 바위에 앉아 빙하 계곡을 내려보며 먹었지요...
그 여행 중에 비가 많이 와서 길이 끊어져 정작 가고 싶었던 구채구는 가지 못하고 해로구로 발길을 옮겨야 했기에 무척 아쉬웠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은 모두 소중한 추억이 되었어요.
대나무찰밥이 그리운 것은 그 시간들이 그리움으로 남았기에 더 생각나는 것이겠지요.
재밌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간접 체험여행 할수 있어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