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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문표
1960년 가을의 몇 달에 걸쳐 (이태리 포쟈 주의) 산 조반니 로톤도에서는 사도좌 순시관의 면밀한 조사가 진행 중이었다. 로마 교구 부주교의 비서이자 공의회 준비위원회 고문인 카를로 마카아리 몬시뇰이 성좌의 위임에 따라 모종의 사태를 수습하고 있었는데, 그 들뜬 분위기는 산 조반니뿐 아니라 수많은 신문에서처럼 전국을 흥분시켜, 아풀리아 산맥의 하늘은 온통 종교재판의 실루엣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실은 비오 신부 자신 심하게 나무랐고, 특히 북부에서 온 “순례자들”이 늘 어이없어했던 다음과 같은 사태에 제동을 건 것뿐이었다. 너무 극성스럽고 도를 지나친 존경자들의 행위, 가령 매일 새벽 성당문이 열리기가 바쁘게 원수 같은 여자들이 문자 그대로 “전쟁 치듯이” 성당에 돌진하여 면사포, 옷자락, 머리카락 할 것 없이 찢고 찢기면서 비오 신부의 미사제대 앞에, 그것도 한 발자국이라도 가까이 예쁜 자리 하나 차지하려고 아우성치는 것 등은 큰 문제였던 것이다.
지금은 사정이 좀 나아졌다. 우선 신축한 새 성당이 크기도 하지만, 새 수도원장이 제발 경건하고 정숙한 태도를 가져달라고 간곡히 당부했기 때문이다.
교황 시찰단은 여러 차례의 강론을 통해 어떤 미사에서도 예수님께 대한 흠숭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따끔히 경고하고, 이런 검소하기 짝이 없는 시골 성당의 미사와 성지 예루살렘의 장엄미사 사이에는 거기 모두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기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과, 더구나 이곳의 미사에서 비록 간택된 자이기는 하나 이 특별한 사제를 존경하느라고 예수님께 대한 흠숭심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특별히 당부했다. 비오 신부의 고해소 주변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거침없이 몰려가 짓궂을 만큼 그를 구경해댔고, 뭇 상인들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갖가지 잡동사니로 능란한 장사솜씨를 발휘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노골적으로 사기를 치기도 했다. 그러니 “성전의 청소”는 오직 이로울 따름이었다.
또한 비오 신부를 존경하는 사람들은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에서 거액의 금품을 희사해왔다. 이 겸허한 카푸친회 신부가 자선사업에 마음을 쓰는 것을 알고 그들은 적잖은 돈들을 보내어온 것이다. 신부는 그것으로 교황의 특별한 윤허와 수도회 장상의 허가를 얻어 수도원 가까이에 거대한 병원을 세웠다. 그것은 1000 개 병상의 이태리 굴지의 최신식 병원인데, 이미 연로해진 비오 신부의 사후에도 이 사업이 지속되게끔 교황청은 특별히 배려를 하고 있다.
비오 신부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은 이러하다. 오상(五傷), 회개, 치유, 이처소재(二處所在) 등, 이 모든 것을 교회는 극히 신중히 관찰하고 있지만, 은사(恩賜) 받은 이 사람이 살아 있는 한 루르드와 파티마 때처럼 명확한 판단이 서기까지 거기에 물음표(?)를 붙여둔다. 또한 교회는 이런 일들을 하느님의 계시니 하며 덮어놓고 믿으라 하지 않는다. 설령 누가 은사를 받았다 해도 그가 살아 있는 한, 그가 받은 은혜, 즉 은총의 사물(賜物)에 대해 교회의 직접적인 확인은 기대할 수 없다. 다만 교회는 허용되는 범위에서 사람들이 절도를 지키기만 하면 이런 일을 그냥 관망하거나 방치해둘 뿐이다. 교회의 입장인즉, 교회가 잘못 보증한 한 가지의 가짜 기적보다는 백 가지의 미확인 기적이 그래도 폐해가 적다는 것이다.
이런 은사자(恩賜者)들의 생애 또는 순례지에 관해서 쓰는 가톨릭 문인들은 교황 우르바노 8세의 교령에 따를 의무가 있다. 즉, 그런 사건은 다만 역사적 사실로 기록하고, 인간적 믿음으로 인정해주되 결코 교회를 앞질러서 어떤 판단을 내리지는 말라는 것이다. 우리 역시 여기에 무조건 동참할 생각이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결코 옹졸하지 않아 오히려 어머니처럼 관대한 면이 있다. 비오 신부에 관한 책과 글이 그토록 많이 나도는데도 교회는 이들 각양각색의 어느 하나도 금서목록에 넣지 않았다. 오히려 바티칸의 기관지 “오세르바토레 로마노”가 몇 가지 문건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교회는 이것을 조용히 덮어두고 있다. 대부분의 책들은 교구감독의 출판허가(imprimatur) 표시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그 내용이 우르바노 8세의 교령에 부응하여, 교회의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할 따름이다.
2. 감탄표
비오 신부에 관한 모든 긍정적 출판물은 교회의 공식적 “의문표”와는 무관하게 “감탄표”로 어우러져, 이 카푸친회 신부의 명성을 온 세상에 퍼뜨렸다. 따라서 이 소책자도 바로 비오 신부의 명성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다양한 물음에 대하여 사실에 입각한 간략한 대답이 되었으면 한다.
필자자신은 이 책을 쓸 때만 해도 산 조반니 로톤도에는 간 일이 없었고, 비오 신부를 개인적으로 본 일도 없었다. 그런데 한번은 내게, 뒤에 이 책을 펴내게 된 출판사에서 꽤나 얄팍한 원고를 가져와서 그 내용을 검토해 보고 가능하면 출판까지 해달라고 두고 간 일이 있었다. 원고의 필자는 당시 이미 열 차례나 비오 신부에게 내왕하여 그 주변사정에 매우 정통했고, 또 확실히 신뢰할 만한 사람이었다. 다만 서술 면에서 너무 엉성했고 구성도 적절치 못했다. 말하자면 출판사와 원고 집필자의 의도는 내가 원래의 기사를 참고하여 책을 새로 써서, 전체적으로 비오 신부에 대한 이야기를 누구나 알기 쉽게 재구성해 보라는 것이었다.
비오 신부가 오상을 받았던 아주 초기에, 한때 나의 동료 신부였고 당시 보첸에서 오르간과 성악 교수를 하고 있던, 지금은 고인이 된 에라스무스 핑크 신부가 산 조반니에 가서 카푸친회의 그 작은 수도원에 3 주간을 묵으며 비오 신부와 함께 지낸 일이 있었다. 이 핑크 신부가 여행에서 돌아와 비오 신부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했을 때의 그 강렬한 인상을 나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때 그가 한 이야기와 1920년대 초 비오 신부에게 몇 번이나 다녀와서 내게 해준 저명한 여류화가 마리아 슈푀틀의 이야기가 말하자면 내게는 최초의 신빙할만한 소식이었다.
그 후 친절하게도 볼로냐의 알베르또 델 판떼 교수가 그의 저서 “역사를 위하여(Per la storia)”와 “목적지에 이르기까지(Fino alla meta)”를 내게 보내어 주었는데, 이 두 책을 통하여 나는 이 오상 받은 비오 신부의 인품에 대하여 상당히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그 첫째 것은 날짜와 인명을 명시한 신빙성 있는 문헌이며, 둘째 것은 여러 가지 사실을 소설식으로 엮은 논픽션물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책과 팸플릿이 홍수처럼 흘러들었는데, 나의 관심은 그 중에서도 다만 주교좌의 출판허가를 받은 것에 집중했다. 특별히 유익한 것은 산 조반니 로톤도의 훼데리꼬 아프레슈 출판사의 소책자들인데, 거기에는 비오 신부의 편지와 어록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다가 1956년 1월과 2월에 걸쳐 로마에서의 한 피정에 참가했던 필자는 그 기회에 (수도회 최고장상의 허락을 받아) 산 조반니 로톤도에 간 일이 있었다. 거기서 나는 처음으로 비오 신부를 만났고, 가까이서 그의 언행을 접하며 그에 관한 확신을 얻었다. 비오 신부 바로 옆에서 또 직접 그와 교제하면서 필자는 그의 꾸밈없는 소박함을 보았고, 그의 진지하기 짝이 없는 숭신(崇神)행위뿐 아니라, 때로는 의사, 사제 그 외 여러 사람들과의 작은 모임에서 비오 신부와의 기탄없는 대화들을 느긋하게 새겼다. 그 결과 비오 신부에 관한 이야기는 사소한 일에 이르기까지, 준비 중이던 이 책에서 하나도 고칠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비오 신부에 대한 견해는 지금까지처럼 열광적인 존경심에서부터 전적인 거부에 이르기까지 상반되게 나타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을 끌어당긴 그의 인품이기에, 그에 관한 이야기에는 신빙성을 바탕으로 아무런 편견이 없다. 따라서 독자들 역시 사랑과 진실 안에서 그를 알려고 하는 한, 각자 나름대로의 안목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3. 생시의 “성인”?
비오 신부의 오상과 생활양식, 또 그에 대한 확신에 찬 여러 증언으로 그는 “성인”의 명성을 얻었다. 물론 교회는 살아 있는 사람을 두고 비록 그 언행이 범상치 않다든가 그 생활이 성인 같은 완전한 모범을 보인다 하더라도 결코 성인이라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교회는 사제 또는 평신도, 학자 또는 일반신자들이 어떤 특정인을 두고 성인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그냥 대수롭지 않게 묵인한다. 왜냐하면 훗날에 교회가 어떤 사람을 두고 그 영웅적인 덕행을 물어 시복심사(諡福審査)를 하자면, 한 성인의 생시에 있었던 사실을 확인하는 증언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오상, 탈혼상태(脫魂狀態), 병의 치유 등은 이런 심사에서 다만 부수적인 의미밖에 없다). “성인의 명성”이란 그 사람의 죽음에 즈음하여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있어왔던 것이라야 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런 심사는 처음부터 문제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한 “성인”의 일생을 조사할 때 그 공적을 찾아내고 인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교회의 분별력에 달려있다.
또 그런 심사에서 누가 증언을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개인적 소견에 머문다. 비단 교구장이나 심지어 교황의 의견이라 하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비오 신부에 대하여 사람들이 이와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을 굳이 말릴 이유가 없으며, 우리 시대에 이런 심상찮은 능력의 빛을 발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힘입어 기도 안에서 그와 즐겨 일치하는 기쁨이 있다면 그것을 막을 필요도 없다.
요즘은 기발한 일이라도 별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시대이다. 매스컴의 마력은 대단해서, 옛날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일, 가령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통해 신품성사, 새 신부의 첫미사, 주교축성, 성체대회 등 뜻 깊은 종교행사나 축전 등이 그 즉시 방송으로 전달될 때 오늘의 우리는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고 보면 그리스도의 오상과 여러 가지 은사(恩賜)를 받은 한 사람의 경우, 카메라맨의 눈길을 피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가히 짐작이 갈 것이다.
사실 비오 신부는 당시 이러한 매스컴에 대단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의 특성이 나타나기 시작한 초창기의 그의 사진이 하나도 없다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너나할 것 없이 당시의 카메라맨들이 모두 질겁했던 것은, 아무리 세심히 준비해도 유독 비오 신부를 찍은 필름만은 결코 감광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일은 비오 신부가 장상의 지시에 순응하여 부득이 사진촬영을 수용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기에 그의 사진은 거의 대부분 만년의 것들뿐이다. 텔레비전에 비추어지는 것은 고맙게도 장상들이 세심하게 막아주었다.
실제로 그의 교단의 총장은 산하 카푸친회 수도자 모두에게 비오 신부를 방문하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그에 관한 어떠한 소식도, 입으로든 글로든, 퍼뜨리지 못하게 함구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세상을 누비고, 비오 신부에게 쇄도하는 방문객이 매년 엄청나게 불어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는 사제였고, 더구나 사정만 허락했다면 사제직수행에는 활짝 열린 상태였다. 또 듣기로는 그에게 오는 하루 수천 통의 편지(그뿐인가 어떤 때는 오천 통 또는 그 이상)에 대해 그는 순명차원에서 한 통도 답장을 쓸 수 없었다. 부득이 여러 협력자들이 도와서 이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쇄도하는 무리들을 비오 신부 혼자서 감당하기는 전혀 불가능했다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4. 고향 그리고 성장기
피에트렐치나(옛 문서에는 인접한 페트라 마유리와의 대비에서 페트라 푸치나로 되어있다)는 남부 이태리 베네벤트 주의 손바닥만한 고을인데 당시의 인구는 아마 5000 쯤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1887년 5월 25일 포르조네 부부 사이에 뒷날 비오 신부로 알려지는 아이가 태어나, 다음날 마을의 “천사들의 마리아” 본당에서 프란체스코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오라찌오 포르조네(사투리로는 찌‘오라찌오 = 오라쯔 아저씨)는 소작농이었는데 건강하고 현명한 부인 마리아 주세피나 데 눈찌오와의 사이에 다섯 아이를 두었다. 비오 신부의 아버지는 주민들로부터 “오라찌오”라고 불려지고 또 세례자명부에도 그렇게 되어 있으나, 아내는 그를 그라찌오라는 세례명으로 불러 “그라”라고 했다. 본명축일은 7월 2일로서 옛날에는 “은총의 마돈나” 축일이었다.
아버지 오라찌오는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했고, 돈벌이 때문에 두 번이나 미국에 갔다. 그러나 매번 그는 별수 없이 다시 황량한 고향에 되돌아왔다. 또 아버지와 어머니는 잘 읽지도 쓰지도 못했다. 그러나 자식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때가 되자 프란체스코를 어느 농가에 보내어 읽기와 쓰기를 배우게 했다. 그 뒤, 마을의 도메니꼬 선생의 지도를 받았는데, 선생은 소년에게 라틴어 책을 사주게 했다. 프란체스코는 그 뒤 2 년 동안 학교에 가서 카카보 선생으로부터 배웠다. 15세가 되던 1902년에 모르코네에 와서 카푸친 수도원의 수련생이 되었고, 1903년 1월 22일에 착복식을 가졌는데 이때부터 그는 비오 수사로 불려졌다. 그의 수련장이 증언하듯 그는 이것을 아주 엄숙하게 받아들였다. 공부를 위해 장상들은 그를 산 엘리아 아 피아니시(4 년), 붸나프로, 세라 카프리올라, 몬테 푸스코 등지로 보냈다.
자신의 소년시절에 대해 물으면 비오 신부는 환하게 웃으면서 “그야, 소금기 없는 국수였지.”라고 대답했다. 푹 퍼진 수제비 같이 어수룩했다는 얘기다. 그의 어린 시절이야 물론 그랬을 것이다.
수도원에서의 그는 이상하게도 마귀의 유혹을 받아, 걸핏하면 갑자기 높은 신열로 신음하다가 대번에 낫는 심상찮은 증상을 보였다. 혹시 폐병일지도 모른다며 그에게 장기간 고향의 신선한 공기를 쐬게 하려고 몇 번 휴가를 주었으나, 증세는 곧잘 재발되었다.
1910년 8월 10일 그는 베네벤트의 주교좌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어, 그 달 15일 고향 피에트렐치나에서 첫미사를 올렸다. 아버지는 그때 미국에 있었으므로 이 경사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제 젊은 신부로서 다시 고향으로 보내어진 그는 그 곳 부모의 농장 뒤에 초가집을 하나 지어 기도와 공부에 정진했다. 그곳의 주임사제 찌’토레(살봐토레 신부)가 그의 고해신부이자 그곳 작은 수도분원의 원장이었는데, 그는 그에게 절대적으로 순명했다. 사제 초년의 비오 신부에 대한 이야기는 이 찌’또레를 통해 알려진 것이 적지 않다.
당시 그의 기도생활은 벌써 범상치 않았는데, 가령 그의 미사는 너무 길어서 시골사람들은 곧잘 불평을 호소했고 이 불평은 대번에 그의 지도신부에게 하소연되었다. 그러나 비오 신부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러자 현명한 주임사제는 미사를 너무 오래 끌지 않도록 마음속으로 지시하여 중단 없이 계속하게 했다.
그 주임사제가 알려준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한번은 수도원 본원에서 아우구스틴 지도신부가 비오 신부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비오 신부는 약속에 따라 편지를 뜯지 않고 찌’또레에게 넘겼다. 찌’또레가 열어 본 그 편지는 아무 것도 없는 한 장의 백지였다. 혹시 아우구스틴 신부가 편지를 뒤바꾸었는가 하고 주임신부가 중얼거리자, 비오 신부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것은 뒤바뀐 것이 아니고, 장난끼 있는 분의 농담이지요.”
“아니, 그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기나 해?”
“그럼요, 찌’또레!”
하고 비오 신부는 그 편지의 내용물을 바로 맞추었다. 뒤에 주임사제는 아무도 모르게 아우구스틴 신부에게 편지를 내어 문제의 편지에 대하여 물어보았는데, 그 회신은 바로 비오 신부의 말 그대로였다.
찌’또레에 의하면 1915년 9월 20일 비오 신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오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 상처 때문에 그는 몹시 아파했다.
그해 5월 이태리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는데, 호적상 프란체스코 포르조네인 장정 비오 신부도 육군에 소집되었다. 그러나 그가 배치된 곳은 나폴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후방이었다. 글쎄, 도대체 군인다운 몰골이 아닌데다, 한번은 비가 줄줄 오는데 군복 차림에 우산을 쓰고 병영을 그냥 나가 버렸으니, 그런 위인은 일선에 배치해봤자였던 것이다.
그러자 그 즈음해서 그의 특이한 병세가 또다시 나타났다. 체온이 48℃까지 올라 보통의 체온계로는 감당할 수 없어 목욕탕 온도계까지 등장했다. 그는 반년간 휴가를 받아 그 뒤의 일은 군의 지시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반년이 지나서 프란체스코 포르조네라는 이름으로 소환장이 발부되었을 때 이 소환장은 갈 곳이 없었다. 고향에서나 전에 휴양차 머물었던 산 조반니 로톤도에서나 그는 단지 비오 신부로만 알려졌던 것이다. 하마터면 탈영병으로 몰릴 뻔했으나 곧 시정되어 그는 군에 복귀했다.
비오 신부는 그의 사제직 초기에 벌써 프란치스코회의 제3회나 수녀들로 예쁜 영적 서클을 만들었던 것 같다. 그것은 오늘날 남아 있는, 군복무 때와 그 전후의 여러 편지에서 엿볼 수 있다.
특히 감동적인 예로서, 젊은 비오 신부가 “영적 자녀들”중의 한 사람, 1934년 2월 16일에 성녀처럼 죽은 루치아 피오렌티노에게 보여준 영적 지도는 주목할만하다. 그녀는 1889년 한 선량한 가정의 네 번째 아이로 산 조반니 로톤도에서 태어났다. 수녀원 생활을 무척 동경했지만 가족에 얽힌 사정과 갖가지 질병 때문에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재속(在俗) 제3회 회원으로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희생정신과 깊은 속마음은 그녀의 생활 자체였다. 그런데 성직자인 오빠 펠리체가 신장병으로 죽고, 어머니는 암으로, 또 둘째 오빠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하는 등, 한마디로 고통이 이 가정에 연쇄적으로 덮친 데다 설상가상으로 그녀 자신도 병으로 몇 번이나 죽음의 가장자리를 헤매었다. 당시 그녀의 영적지도자는 본당의 보좌신부였는데, 그는 경건할 뿐 아니라 남의 영혼의 일이라면 열과 성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한 번은 루치엣타(가족끼리는 그녀를 이렇게 불렀다)가 어떤 환상(이것은 그녀의 고해신부가 따져 물어서 밝혀진 것인데)을 접하게 된다. 그 환상에서 그녀는 산 조반니의 카푸친 수도원 정원에 거대한 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때 이런 말이 들려왔다.
“이 나무는 지금은 멀리에 살고 있으나 얼마 후 이곳에 오게 될 한 영혼을 의미한다. 그 영혼은 이 나무처럼 굳건히 뿌리를 내려, 원근에서 오는 많은 사람들이 그 그늘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무시하는 자는 재앙을 받을 것인즉!”
그리고 또 계속되었다.
“… 이 나뭇가지는 온 세상에 펼쳐져, 많은 사람들이 그 그늘에 와서 은총의 열매와 용서를 얻게 될 것이다.…” 당시 그녀의 고해신부는 페피노 맛사 신부였다.
1916년, 한번은 그녀의 아버지가 중병으로 드러눕자 산 조반니의 수도원장이 찾아와서 말했다.
“주세페 씨, 나는 지금 포쟈에 갔다가 귀로에 피에트렐치나의 비오 신부를 이 곳 수도원에 데려올 것입니다. 그때 그와 함께 댁으로 찾아뵙지요. 괜찮지요?”
그리고 과연 1916년 7월 중순 수도원장은 비오 신부와 함께 그 댁을 방문했다. 수도원장 파올리노 신부는 피오렌티노 가족 모두에게 비오 신부와 방에서 개별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일렀는데 이를 보면 그의 명성은 대단했음이 틀림없다.
루치엣타도 그렇게 했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당시의 고해신부 맛사 신부의 중개로 비오 신부를 따로 찾아갔다. 2 주일마다 반시간 남짓 걸어 카푸친회 수도원에 가서 비오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보고 영적지도를 받았다.
그러던 1918년의 9월 23일 그녀는 비오 신부의 손등에 핏빛의 붉은 반점이 두 군데 파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비오 신부가 오상을 받았다는 것을 명확히 알면서도 감히 물을 수가 없었다.
1921년, 너무 많은 사람들이 비오 신부에게 쇄도하자 그녀 역시 비오 신부를 따로 만나기가 거의 불가능해졌다. 어느 날 그녀는 어떤 불가사의한 향기를 맡았다. 몇 번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향기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마음속으로 그녀는 주님께 여쭈어 이런 대답을 들었다.
“그것은 네 영혼을 인도해줄 한 사람의 영(靈)이니 그는 너를 떠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하느님께 그리고 그에게 충실하도록 하라!”
그런데 수도원의 장상은 비록 평소에 비오 신부의 보살핌을 받는 사람이라도 2 주일에 10 분 정도만 면담이 허용된다는 방침을 내었다.
비오 신부는 루치엣타의 영적 상태를 정확히 인지했다. 그러나 그녀를 위해 필요하다싶으면 자기 위엄과는 무관하게 질책과 비난을 아끼지 않았다(그녀의 말). 그의 손길은 강하고 확실하고 당당했다. 수도원의 장상은 루치엣타에게 비오 신부의 세탁물을 맡겼는데 그녀는 그 일을 큰 경외심과 기쁨으로 수행했다.
그 후 비오 신부는 공개적인 미사집전을 모두 금지 당했는데, 여기서 받은 루치엣타의 내적 외적 고통은 대단했다. 편지나 고해성사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녀는 가르가노 산의 성 미카엘 동굴에서 자신을 희생으로 바쳐, 비오 신부의 자유로운 활동이 다시 가능해지도록 주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1934년 2월 16일 선종했다. 아니나다르랴 그해 5월 8일 비오 신부에게 다시 사도직 활동의 자유가 허락되었다.
비오 신부는 한동안 나폴리의 육군병원에서 복무하다가 벙벙한 그의 군대생활을 마치고, 또 그의 지병 때문에 더 이상의 군복무에는 부적격이라는 판정을 받아 귀향 조치되었다. 적지만 그는 연금도 받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그것을 사양했다가 그나마 수도원에서는 소용이 된다는 말에 받기로 했다.
5. 예수 그리스도의 오상(五傷)
1918년의 5월초 비오 신부는 아직 군에 복무중이었다. 그 후 그는 제대를 하고 고향 피에트렐치나에서 쉬었다가 관구장의 명에 따라 포쟈에 왔는데, 다시 산 조반니 로톤도의 자그마한 수도원으로 “좌천”되어 갔다. 이제 그는 이곳을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 수도원에 있던 1918년 9월 20일 그는 식탁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 수도원장 카사칼렌데의 파올리노 신부는 그가 합송기도대 위에 넘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야 비오 신부에게 일어난 일이 밝혀졌다.
그는 주님의 오상을 받았던 것이다!
수도원의 장상으로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큰 낭패였다. 사태에 대처할 겨를도 없이 주변 마을 사람들이 그 사실을 모두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원장 신부는 서둘러 관구장 신부에게 보고하고 지시를 기다렸다. 관구장은 비오 신부의 상처를 사진찍게 하고, 사진을 로마의 수도원 본원에 보내는 한편 바를렛타의 루이지 로마넬리 박사를 현장에 불러 그를 진찰하게 했다. 의학박사 로마넬리는 향후 15 개월에 걸쳐 다섯 차례 산 조반니에 와서 그를 철저히 검사했다.
그 사이 시골 벽지의 이 수도원은 문자 그대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소문에 들뜬 사람들이 무리지어 들이닥쳤던 것이다.
비오 신부는 자기가 속한 카푸친회의 교부(敎父) 성 프란치스코와 거의 같은 날에 오상을 받았다. 또한 그는 잘 알려진 바대로 오상을 받은 첫 번째의 사제(司祭)였다.
주님의 오상을 받았던 성 프란치스코 당시의 전기(傳記)작가 첼라노의 토마스가 남긴 이야기가 있다. 한번은 한 수사가 성 프란치스코의 두 발에 있는 상처를 보고
“수사님, 그게 도대체 뭐지요?”
하고 묻자 성인은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대 일이나 보세요.”
마찬가지로 동료 수사에게 준 비오 신부의 대답도 이와 똑같았다. 그는 이제 어려운 시기를 맞이했다. 그 사정은 그의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1918년 10월 10일, 그러니까 오상을 받은 지 불과 며칠 뒤에 그는 암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자매들을 위로하면서 한 영혼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나 자신을 하느님의 자비에 맡길 수 있도록 모두들 간절히 기도해주십시오. 내 영혼은 나를 짓이기다시피 한 이 고통의 시련 때문에 거의 녹초가 되었지만, 내가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기도가 꼭 필요합니다!”
최선을 다한 로마넬리 박사의 양심적인 검사도 수도원 장상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대학 의학부 교수이고 무신론자인 비냐미 박사를 산 조반니에 초청했다. 그는 손바닥의 상처에 연고를 발랐는데, 그의 생각에는 상처는 곧 아물 것이 틀림없었다. 붕대 위에 봉인(封印)까지 하고, 그 도장을 로마로 되가져갈 만큼 그는 신중을 기했다.
그리고 장상들에게 상세한 보고서를 보내어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으나 그 결론이 무슨 설명이 되지는 않았다. 보통의 상처라면 상처가 낫던지 더 곪아터지던지 하겠지만, 이번의 경우는 그것이 아니었다. 결국 장상들은 또 로마의 유명한 페스타 박사에게 의뢰했고, 그는 1919년 10월에 산 조반니에 왔다.
다시 정밀검사 끝에 그는 비오 신부의 오장육부 모두는 완전히 정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한때 의심이 가던 그의 폐는 아주 정상이었다. 따라서 비오 신부에게 가던 참전연금도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다.
1920년 7월에 페스타 박사가 다시 와서 그의 동료이기도 한 로마넬리 박사를 철수시키고 그 자신도 돌아갔다. 더 이상 검사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비오 신부에 대한 초기의 의심과 경계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오상을 정밀검사하는 사이 그는 이 일이 보통 일이 아닌 초자연적인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그도 회개하여 유명한 책 “과학의 신비와 신앙의 빛”을 썼다.
비오 신부로서는 그 오상은 끝없는 고문이다. 고통이 심하면 평소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그는 우수의 그늘에 싸인다. 밤낮없이 아픈 상처를 애처롭게 본 장상들은 그를 가능한 한 외부와 차단시키기로 했다. 이리하여 그는 로마 본원의 지시에 따라 외부인이 참석하는 미사는 모두 금지 당했고 편지도 못 썼으며 방문객도 일체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비오 신부는 지금까지처럼 자기 식의 독특한 방법으로 줄곧 사람들의 영혼을 보살폈다. 그리하여 그는 “십자가의 그분을 대신하는 수도자”인 동시에, 유명한 문필가 미켈레 칼부치의 말마따나, 죄와 육욕에 찌든 많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기”도 했다.
물론 그 오상은 비오 신부 자신과, 구세주께 대한 그의 사랑에 가장 큰 의미가 있었다. 동시에 그것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구세주께서 보여주신 모든 이를 위한 구원사의 진실을 개개인의 생활 안에 일깨운다는 의미도 있었다.
물론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은 진실이고, 교회가 가르치는 계시진리로도 우리에게 충분하겠지만 하느님의 특별한 일들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그리스도교 초기의 말씀을 들어보자. 베드로와 요한이 드높으신 분의 분부로 되돌아온 뒤 초기 그리스도교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지금 그들의 위협을 받고 있는 우리를 살피시고 주님의 이 종들로 하여금 조금도 굴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권능의 손을 펴시어 주님의 거룩하신 종 예수의 이름으로 병이 낫고 표징과 기적이 나타나게 하여 주십시오”(사도 4장).
그런데 오늘의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진정 가톨릭 신자임을 자처하고 또 가톨릭신앙을 확신한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소심한 보금자리”에 안주한 나머지, 우리의 언행과 생활은 방관자들에게 그리스도교의 확신을 주기에는 너무나 무기력하게 되었다.
여기에 나타난 것이 이 시대의 큰 은총으로서, 주님이 가시적으로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한 도구이다.
비오 신부는 평소 반장갑을 끼고 있는데 미사 때만은 벗는다. 오상을 통해 그는 매일 약 한 컵의 피를 흘린다. 상처의 사진들은 그의 뜻과는 무관하게 찍힌 것들이고, 그는 한번도 상처를 버젓이 보여준 일이 없다.
6. 은총의 성모 성당
산 조반니 로톤도는 가르가노 산을 배경으로 포쟈 시에서 약 40 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고을이다. 장화처럼 생긴 이태리 지도의 뒤꿈치 위쪽에 보이는 돌기에 가르가노 산의 산 둥치가 있다. 해발 1000 미터를 넘는 이 산맥은 대지(臺紙) 모양의 벌거숭이인데 거기에는 많은 동굴이 있다. 대천사 성 미카엘의 성지가 이 산에 있어, 끊임없는 순례자들로 일찍부터 유명한 곳이다. 요즘은 옛날 같지 않으나 그래도 중요한 순례지임에는 틀림없다.
산 조반니는 이 산악의 네로(1011 미터)와 칼보(1056 미터) 산 사이에 있는 작은 시골도시이다. 한때 노르만 족의 지배하에 있다가 프리드리히 2세의 통치를 받기도 했고, 15세기에는 알바니아의 민족영웅 스칸데르베그(카스트리오타)의 지배도 받았다. 현재의 인구 약 2만은 대개 소규모의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 소도시에서 반시간쯤 가면 낡고 허름한 카푸친회 수도원이 하나 나타나는데 거기에 조그마한 “은총의 성 마리아” 순례성당이 붙어 있다.
입구 위의 각명(刻銘)에는
“하느님의 이 집은 은총의 마리아님께 봉헌되고 1629년에 개수되었음”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성당 정면의 성모자(聖母子)의 성화는 1959년 테데시니 추기경에 의하여 성대하게 축복된 것인데, 그것은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을 기념하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수십 년 전에만 해도 이 작은 성당은 그냥 외로이 잊혀진 존재였고 근처 시골사람들이 가끔 찾아오는 정도였다. 그러나 비오 신부에게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이래 사정은 급변하여 이 조그마한 성당은 급기야 대단한 명소로 돌변했다.
한편 그 많은 순례자들은 이 작은 마을에서 마음놓고 지낼 숙소를 구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물론 오늘의 산 조반니는 시설면에서 그 때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호텔, 여관, 여인숙이 생겼고 또 구 도시와 수도원 사이에는 비오 신부 가까이서 살려는 사람들의 집들이 들어서서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때 돌투성이의 낡고 텁텁하던 길은 이제 1급 도로로 탈바꿈하여 성전 바로 앞에까지 뻗어 있다.
그뿐이 아니다. 그 작은 수도원 주위 동네의 변화도 대단했다. 거대한 병원이 새로 생겼고, 주차장, 분수대, 광장 등이 촘촘하게 들어섰다. 낡기는 했으나 오랫동안 잘 보존된 어제의 작은 성당 옆에는 이제 새로 대리석에 빛나는 마리안 교회가 지어졌고, 여기에도 검소한 카푸친회 성당에서와 마찬가지로 성모자의 성화가 안치되어 있다. 그것 역시 거대한 모자이크 그림이다. 구 성당은 이제 웅장한 새 성당의 부속 성당처럼 되어버렸다. 그러나 작은 수도원 자체는 옛날 그대로 남아 있는데, 거기에는 대리석 같은 것도 없고 또 프란치스칸 아니랄까봐 현대화에 열 올린 흔적도 없다.
산 조반니는 이 고명한 신부 덕으로 많은 수익을 올렸다. 비오 신부는 사람들이 직장과 수입을 갖게 된 것은 좋은 일이 아닌가 하며 다행스러이 생각한다.
5 개 국어(이태리어, 독일어, 영어, 불어, 스페인어)로 쓰여진 여행 안내책자에는 우선 새 건물과 비오 신부의 컬러 사진이 두 장 보인다. 맑은 공기와 시원한 풍경, 대천사 미카엘의 성지라는 의미에서 이 작은 도시가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이 검소한 수사 신부 한 사람 때문에 산 조반니가 일약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그의 이름에 힘입고 있다. 열차 내왕도 빈번하고 도로도 현대식으로 확충되었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아졌기 때문이다.
한 예를 보자. 특별열차로 1000 킬로미터 너머의 북부 포사노에서 온 무리들이 저녁 늦게 녹초가 되어 차를 내려서는 다짜고짜 수도원장 신부에게 비오 신부를 보자고 교섭을 벌였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원장은 규칙을 지켰던 것이다. (알렛산드로 링구아 교수가 쓴 것을 보면, 당시는 마침 1950년의 희년이어서 사람들은 로마에 순례한 김에 이곳을 특히 많이 찾았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차례가 적힌 고해성사 카드가 이 사람들에게 배부되었다. 이 그룹이 받은 번호는 3465번부터였다. 2, 3 일 밖에 시간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가망 없는 차례였다.
한번은 날씬한 자동차가 와서 한 쌍의 남녀가 내렸다. 그 자동차처럼 세련된 차림이었다. 그들은 비오 신부와 반시간만 만나자며 100만 리라를 내겠다고 했다. 그러나 어림없었다.
“비오 신부님은 예외를 만들지 않습니다. 또 돈은 필요치 않습니다. 고해성사를 보시려거든 안내판을 보시고 다른 사람들처럼 하십시오.”(링구아 교수의 증언)
7. 비오 신부의 미사
미사는 그 자체로서 모두 똑같다. 하지만 누가 어떻게 집전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난다. 1961년 1월의 한 미사 때 교황 요한 23세의 두 번째 기도지향은 다음과 같았다. “미사를 합당하게 봉헌하여 모든 백성들을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로 이끌게 하소서!” 그런데 이러한 기도지향은 이곳 산 조반니의 마리안 성당에서 어느 정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체험한다. 비오 신부의 미사를 통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내적인 회개를 하는 것이 그것을 말한다.
사제들 역시 이 미사를 보고 난 뒤로는 미사를 피상적으로 봉헌하거나 다급하게 드리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다고 입을 모았다. 어쨌든 이러한 미사는 비오 신부를 경험할 때 느끼는 하나의 절정이다. 마음 설레며 밤잠 설치면서 새벽 2시면 벌써 사람들은 성당으로 걸음을 재촉하는데, 그것은 마치 시커먼 무리가 떼 지어 바다를 채운 것 같다. 그리고 기다린다.
성당문은 4시 반 정각에 열리지만 사람들은 자리 하나를 확보하려고 몇 시간이고 기다린다. 이제 문이 열린다. 혼잡이 일어나고, 밀고 부딪치는 남부 이태리인 특유의 생기로 제대를 향해 돌진하는 모습은 바로 달리기 경주 그것이다. 지금은 좀 나아졌다는 데도 사정은 비슷하다.
비오 신부가 입장할 때 제대에는 성작이 준비되어 있다. 그의 입장 때 길을 터는 데도 안간힘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역풍 속을 배가 지나가는 것처럼 그가 뚫고 나오면 인파는 다시 파도처럼 아물어졌다.
미사 동안 비오 신부는 맨손이다. 손은 제의의 너른 소매 안에 감추어지지만 제물봉헌과 성변화 같은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그가 손을 올리면 상처는 드러나 보인다. 솔직히 말해서 수많은 사람들은 이 순간을 고대했다. 낮 동안 신부는 손가락을 쓸 수 있도록 반장갑을 끼기 때문에 그의 상처를 구경하는 것은 이때뿐이다. 빨간 피의 상처를 그렇게도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이 광경을 보려고 호기심으로만 여기에 왔다고 한다면 어폐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전의 비오 신부의 미사는 매우 오래 걸렸다. 1 시간 45 분이 걸릴 때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그렇지 않다. 지금은 45 분 정도이므로 그의 미사는 이전에 비해 훨씬 짧아진 셈이다.
연약한 다리로 간신히 몸을 버틴 채 공손한 몸가짐과 감동으로 그의 동작은 몇 번이나 중단되다가 다시 이어진다. 어떤 꾸밈도 없고 무슨 “경건한 모양새”를 내는 법도 없다. 이따금 눈물을 닦는 수는 있지만 그 외 별다른 일없이 미사를 마친다. 물론 참석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그는 안중에도 없다. 오직 자기 일에 대한 눈길과 마음뿐이다. 그러나 그는 물론 거기 함께 기도하는 사람들이 모두 자기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기야 내게 그의 미사는 별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 역시 한 사제가 드려야 하는 대로 충실히 미사를 드렸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늘 그런 것이 아니다. 비오 신부의 미사에서는 가끔 독특한 감동이 매우 진하게 밖으로 드러나는 수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은 여지없이 여기에 끌리게 마련이다. 그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그의 영혼이 발하는 빛을 어떤 공감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그러나 가끔 어이없이 지친 모습밖에 없을 때 그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의 영혼은 불쌍하고 죄 많은 인간들을 하느님 앞에 대변하느라 큰 슬픔에 젖어 있기 일쑤였다.
미사를 마친 그는 기진맥진이다. 물론 피곤하기는 그전부터도 늘 그랬다. 그의 밤은 짧고 끊임없는 고통이 그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그가
“태양이 없는 세상이 미사 없는 세상보다 더 살기 좋을 것입니다!”
라고 한 말을 우리는 믿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K라는 한 증인이 내게 준 작은 노트에 있는 말인데(이하 “K 증인”이라고 줄임), 그 이유는 미사는 그리스도의 끊임없는 속죄이고 그 속죄를 통하여 인류는 비로소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신자들은 미사를 그토록 책임감 있게 드리는 사제와 만나는 것을 감사한다. 그 책임을 그는 자기가 희생을 치르며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희생을 치르는 사람으로서 비오 신부는 이런 말을 했다.
“전쟁이 아니라,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전후시대이다. 아무리 말려도 죽자고 지옥에 빠지는 사람들을 보고 어찌 울지 않을 수 있는가!”(“K 증인”)
그의 미사가 이러하기에 가까운 성직자나 일반신자뿐 아니라 수많은 예술가, 변호사, 국회의원 등 유명 인사들은 앞 다투어 비오 신부의 미사에 복사하기를 큰 신익으로 생각했다.
8. 고해소에 사로잡히다
비오 신부는 이 점에서 아르스 본당의 성 비안네 신부와 비교되기도 한다. 물론 두 사람의 과업은 한 가지만 빼고는 매우 달랐지만(한 사람은 본당신부, 또 한 사람은 카푸친회 수도자), 그것은 가령 그 두 사람이 고해성사에 쇄도한 무리로부터 많이 시달린다는 것과, 동시에 큰 보람을 느낀다는 점에서 적절한 비교였다. 사실 비오 신부는 많은 시간을 고해소에 사로잡혀 있었다. 고백자들은 이태리 전역뿐 아니라 전 유럽의 외국에서 찾아왔다.
그는 남자 고백자는 이전 성당의 제의실에서 받고 여자들은 성당 안에서 받는다. 그들은 고해소 앞에서 번호표에 따라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새치기나 고위층의 추천서를 들이대는 일은 아무 소용이 없다. 산 조반니에서는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때로는 수 일, 또는 수 주일을 기다리기도 했다. 고해성사는 이태리어로 행해지기 때문에 외국인이라도 어느 정도의 이태리어는 필수이다. 물론 여러 외국어를 구사하는 많은 신부들이 따로 고해성사를 주고 있다.
비오 신부에게 고백하려면 사전에 충분한 준비가 필요하다. 준비 없이 고해실로 들어오는 사람은 낭패를 당한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뒤에 다시 오기를 기다린다. 누구든지 양심성찰을 요리조리 피하다가는 깨끗이 당하고 만다.
사람들은 “신부는 모든 것을 훤하게 알고 있으며 사람의 마음을 읽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사실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가령 자기의 과거사를 깨끗이 정리하지 않았다든가, 또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할 때에는 날벼락이 떨어진다. 한편 고백자의 준비가 진지하게 되어 있으면 이제는 비오 신부 편에서 순조롭게 고백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도와준다. 그 대신 자기변명 같은 것은 상대도 하지 않는다.
링구아 교수의 친구가 비오 신부에게 고백할 때 자기의 “영적 위기”를 이야기하면서, 자기는 결혼한 몸이지만 애인이 있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괴롭다는 말을 했다. 비오 신부는 펄쩍 뛰었다. 그리고 차갑게 쏘아붙였다.
“뭐? 영적 위기? 자넨 음탕하단 말이야. 하느님은 자네 때문에 노엽게 되셨어! 냉큼 꺼져!”
그런데 이렇게 고해소를 쫓겨난 사람들은 틀림없이 다시 비오 신부를 찾아와 성사를 보게 마련이다. 물론 그들이 진지하게 회개할 때의 일이지만.
코젠짜에서 온 12 살짜리 소녀 마리엘라를 그는
“나가! 네 고백은 들을 수 없어.”
하며 고해소에서 내쫓았다. 그때 양친은 성당 안에 같이 있었는데, 울면서 돌아온 딸의 말을 듣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날 저녁 마리엘라는 양친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비오 신부에게 물었다.
“제게는 왜 고해성사 볼 기회를 안 주세요, 신부님?”
비오 신부는 담담하게 말했다.
“얘야, 물론 고해성사를 줄 수도 있었지. 하지만 너를 위해서 주지 않았단다. 생각을 해보렴, 너는 주일미사에 거의 가지 않았고, 교리반엔 코끝이나 내어봤느냔 말이다. 주일에는 네 부모가 널 데리고 어디론가 쏘다녔기 때문이야. 그러니 네가 범한 사소한 일로 고백을 들어봤자 네게 좋을 게 뭐있겠어. 근본적인 문제가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것은 옆에 있던 양친에게 한 말이었고, 그것은 천금의 무게를 가진 충고였다(링구아 교수의 증언).
점심 뒤에 비오 신부는 잠시 쉬었다가 동료 신부들과 함께 식탁에 앉는다. 그의 식사는 약간의 야채뿐이다. 이것을 들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농담을 즐긴다. 그리고 혼자 슬쩍 빠져나와 고해소로 향하면서 동료 신부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미안합니다. 나 때문에 일찍 일어나진 마세요. 사람들 때문에 먼저 나갑니다만.”
그리고 덧붙인다.
“고해성사로 사람들의 영혼을 치유하는데 좋은 시간이라 먼저 갑니다. 주께서 이러한 영혼을 인도해 주시고 또 내가 그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에 나는 그저 감지덕지할 뿐입니다.”
여기서 잊어서 안 될 것은 끊임없이 아픈 그의 상처이다. 특히 가슴의 상처가 그렇다. 또 문제의 영혼들과 노골적으로 싸우는 일도 허다하지만, 이럴 때 그의 고통이 밑거름이 되어 결국은 그들을 정복하고야 마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가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다던가, 사람들의 마음을 책 들여다보듯이 읽는다고 마냥 주장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남의 영혼상태를 사소한 일까지 꿰뚫어 보는 일는 허다하다.
젊은 시절의 그는 자기가 돌보고 있던 자매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영혼은 반드시 인도해 주신다고.
하기야 이런 것 없이도 으레 정상적으로 경건하게 사는 영혼은 별 감명 없이 고해소를 떠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비오 신부의 짤막하고 명확한 몇 마디 말로 그들의 영혼은 밑바닥부터 뒤흔들려 근본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하고 끝내 마음을 고쳐 갔다.
델 판테의 책은 하느님의 그물에 잡힌 이런 “큰 물고기들”의 체험담으로 가득한데, 가령 훼데리코 아프레슈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그는 지금 아예 산 조반니 로톤도에 옮겨와서 눌러 살고 있다.
그는 신앙이 없는 개신교 사람이었으나 가톨릭 신자인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면서 외형상 가톨릭이 되었다. 내적으로는 그러나 신앙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아내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가끔 영성체를 했다. 동시에 그는 가톨릭에 역행하는 영교술(靈交術)과 접신술(接神術), 점치기 등에 차례차례 물들어 갔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런 영적 탐구심 때문에 어느 때부터인가 비오 신부에 관하여 듣고 읽은 이야기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비오 신부를 그토록 따르는 “현상”을 철저히 알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비오 신부와의 첫 만남은 다른 사람의 경우에 종종 그랬듯이 그냥 실망으로 끝났다. 멋없이 스친 몇 마디의 말을 보면 그는 잘해봤자 그저 보통인 카푸친회 신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고해성사가 시작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고해소에서 비오 신부는 아프레슈가 지난 오랫동안 본 “고해성사”는 모두 거짓이었고, 따라서 모두 무효였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다시 양심성찰을 하게 내보냈다. 아프레슈가 다시 고해성사를 보러 왔을 때 이 카푸친회 신부는, 마지막으로 유효했던 고해성사는 그가 신혼여행에서 돌아 와서 본 것뿐이었다고 명확히 지적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산 조반니의 그 고해소에서 시작되는 많은 회개는 바로 그 자리에서 마무리되었다.
9. 진실한 회개
델 판테는 회개한 사람들의 숱한 사례를 주소, 성명, 일시까지 명시하여 책으로 펴내었다. 물론 그 진위는 추검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모두 고해성사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스스로 공개한 것들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빙산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밖으로 드러난 것은 극히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대부분은 숨겨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사실 그렇다. 대부분의 것은 고해소의 침묵 때문에, 또 성사의 인호로 새겨진 비밀보전 때문에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묻혀져 있다.
“K 증인”의 이야기를 보자.
“어느 날 오후 나는 이전의 은총의 성모 성당에 있었습니다. 약 5 명의 이태리 부인들과 함께였지요. 갑자기 무엇인가가 내 외투를 스쳤습니다. 처음에는 문이 열려있어서 짐승이 잘못 들어왔나 했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래요 삼십대 후반은 좋이 되어 보이는 어떤 사람이 무릎 꿇어 머리를 숙인 채 제대 쪽으로 기어가는 것을 보고 섬뜩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제대 앞에서 몸을 일으켰는데, 그때 우리는 눈물로 뒤범벅이 된 그의 얼굴을 보았지요. 사람의 얼굴 치고 그렇게 비통한 것을 나는 그때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북부 독일의 큰 병원, 또는 정신신경과의 환자들에게서나 본 그런 얼굴이었습니다.
측은히 여긴 부인들이 물었더니 그는 몸을 떨며 고백했습니다.
‘나는 공산주의자였습니다. 나는 뇌종양을 앓고 있었는데 이제 비오 신부님을 통해 심신 모두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노트”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며칠 후, 나는 이태리의 한 신문에서 위의 일을 뒷받침하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는 사비노 그리코라는 체리뇰라 지구 굴지의 공산당원이었습니다. 그는 당 조직책으로서 산 조아키노 일대를 공산화시킬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는 자기 가족에게 교회에 가는 것을 금했고, 또 태어난 아이들의 세례도 금했지요.
평소 그는 두통이 어찌나 심했던지, 그것이 너무 오래 끌자 바리의 전문의로부터 철저한 검진을 받았다고 합니다. 진단결과는 즉각 나왔습니다. 뇌종양.
그는 밀라노에서 큰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의사들이 수술을 논의하고 있을 즈음 그는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그는 꿈에 산 조반니에 가 있었고, 거기서 어떤 신부가 그에게 고해성사를 보라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꿈이 어찌나 생생했던지 그는 의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산 조반니에 와서 비오 신부의 고해소에 들어갔습니다. 그 뒤 그는 체리뇰라에 돌아갔는데, 몸은 깨끗이 나았고 그 상태는 그대로 지속되었습니다. 그는 깊은 통회로 교회에 돌아왔고, 그의 공산당 동지들도 차례차례 그의 선례를 따랐습니다.”
이러한 몸과 마음의 치유 사례는 부지기수이다. 자유사상가이고 의사인 리캬르디 박사는 바로 그곳 산 조반니에 살고 있었다. 그는 개방적이면서 고매한 성격이었고, 고지식하다할 만큼 명예를 중요시하여 직업에는 말할 수 없이 충실한데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속속들이 친절했다. 그런데 빈틈없이 확신에 찬 이 모범생이 비오 신부에 대해서는 특별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과학적 실증 이외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하느님도 그에게는 하나의 환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위암에 걸렸다. 주치의 쥬바 박사는 이제 끝장났다고 낙담했고, 함께 진찰에 임했던 네 사람의 의사들 역시 같은 소견이었다. 포쟈와 나폴리에서 의사를 새로 불러왔지만 리캬르디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곳 본당신부가 그를 방문했지만 문 앞에서 쫓겨나는 꼴이었다. 이제 그는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고 보기에도 죽음의 시간은 확연했다.
그런데 그때 문턱을 넘어 방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비오 신부였다. 당시 그 자신도 무신론자였던 안젤로 메를라 박사가 청해서 왔던 것이다. 지난 10 여년간 한번도 수도원 밖으로 나온 일이 없는 그 신부가 이 집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비오 신부가 진정시키듯이 손을 들어올려 말을 하자 그 고지식한 자유사상가가 대번에 항복해버린 것이다. 그는 그 자리에서 고해성사를 보았고 성체를 받아 모셨으며 병자의 성사도 받았다. 지난 30 여년간 한번도 영성체한 일이 없던 그가!
그리고 그는… 이제 나았다. 완전히 원기회복해서 나아버린 것이다!
이어진 귀결은 다음과 같다.
철저한 무신론자 메를라 박사도 신앙의 세계로 돌아왔고, 그에 따른 일련의 연쇄반응도 적지 않았다.
델 판테가 그의 책 제5판에 이 사실을 추가했던 당시의 담당의사들은 모두 생존 중이었는데, 그의 보고를 부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역사를 위하여” 241쪽 이하).
10. 연쇄반응
비오 신부를 통해 신앙과 평화를 되찾은 사람들은 한때의 프리메이슨 비밀결사단원, 공산당원, 불신앙인, 그리고 온갖 죄에 빠진 사람들이었다. 또 병이 치유된 사람도 있었다. 그러한 회개가 연쇄적으로 광범위한 회개를 유발한 것도 비일비재했다. 한 사제의 상처난 손을 통해 주께서 산 조반니에 치신 그리스도의 그물에 물고기가 연달아 헤엄쳐 들어간 것이다.
변호사 알베르토 델판테의 사례를 보자. 그는 터놓고 또 감동적으로 그가 겪은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한때 그는 프리매이슨 비밀결사단원이었으며 따라서 신앙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그 집안에는 알베르토 자신처럼 시인이자 문필가인 엔리코 델 판테라는 대학생이 있었는데, 시험을 코앞에 두고 열병에 걸려 그만 드러누워 버렸다. 만성신장병에다 골수결핵, 폐결핵이 겹친 복합 증세였다. 체온이 40℃까지 올랐다. 그런데 그 다급한 가운데서 누군가가 비오 신부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젊은이의 목에 비오 신부가 축복한 메달을 걸어주었다.
그런데 그날 밤 자정이 되기 직전 그의 아버지가 체온을 재었더니 그 긴박했던 신열은 내려갔고, 복합 증세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숙부 알베르토로 말하면 그는 잡지 “이탈리아 라이카”에 여러 차례 비오 신부를 비방하는 격렬한 기사를 써서, 그는 사람들의 경박한 신심을 이용하는 위선자이고 사기꾼이라고 거세게 몰아붙인 인물이었다. 그러한 그가 조카 녀석이 낫기만 하면 비오 신부를 찾아가겠다고 다짐을 했던 것이다.
그는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산 조반니에 왔는데 비오 신부를 보며 맨 처음 받은 인상은 별 것 아니구나 하는 것이었다.
“뭐 보통의 카푸친회 신부와 똑같네.”
이 변호사는 고해소에서 포문을 열었다. 그는 고해성사를 본 것이 아니라 고해소에서 스피노자, 데카르트, 스펜서, 다윈 등의 철학자를 들먹이며 딴전을 피웠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있던 비오 신부가 짤막하게 응답하는 가운데, 이 세상에서 그 변호사 이외엔 아무도 알 수 없는 비밀사실을 몇 가지 알베르토에게 귀띔하자 변호사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아니, 이럴 수가!
그는 믿게 되었고 뒤에 영성체를 했는데, 이때부터 그는 “진리의 변호사”로 완전히 탈바꿈하게 된다.
그는 굴지의 주간지 “셋띠마나”에 기고하여 비오 신부를 적극적으로 비호하는가 하면, “회의(懷疑)에서 신앙으로”라는 소책자를 썼다. 그의 절실한 글을 읽은 많은 친구들, 또 그를 개인적으로 모르는 사람들도 속속 회개의 길을 찾았다. 불신앙의 그의 부모도 산 조반니에 와서 모든 것을 체험하고 지금은 신앙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고 있다.
또 하나의 사례는 전형적 세속 사교계의 루이사 봐이로 부인의 회개이다. 그녀는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다 가질 수 있는 부유한 집에 태어나, 온갖 재미와 향락에 빠졌던 유한마담이었다. 종교적인 것은 그녀에게는 하찮은 서커스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당시 그녀는 런던에 살고 있었는데, 그녀의 남자 친구가 권태를 이기지 못해 향락의 여행길에 올랐다가 한번은 로마에서 비오 신부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것이 그의 구미를 당겼다. 산 조반니에 온 그는 비오 신부를 통해 완전히 돌아버렸다. 회개를 한 것이다.
런던에 돌아온 그는 이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는 사교계의 친구들에게 자기의 여행담을 늘어놓으며, 이젠 너희들도 하찮은 법석들만 떨지 말고 정신 좀 차리라고 핀잔을 곁들여 충고하느라 열을 올렸다.
봐이로 부인이 비꼬았다.
“로마에 가서 수도자가 된다더니 그게 정말이유?”
“아니, 난 수도자가 되진 않아. 하지만 나를 회개시킨 수도자는 계셨어!”
여자들이 얘기를 해보라고 졸랐다. 어떻게 하여 그렇게 변했느냐고. 그러나 그는 이렇게만 대답했다.
“그건 말할 수 없어! 너희가 가서 직접 보라구!”
봐이로 부인이 그렇게 하기로 했다. 남자 친구가 그토록 변한 데 대해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산 조반니의 은총의 성모 성당에 온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고 묵상하는 사이, 자기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깊은 우수에 잠겼다. 지금까지의 그녀의 인생 전체가 완전히 무의미했다는 것이 처음으로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녀는 소리 내어 울었다. 그 울음은 그녀가 비오 신부의 고해소에서 완전히 회개해서 나올 때에야 비로소 멎었다.
부인은 이 모든 일을 아들에게 편지로 썼다. 그러나 아들은 자기 어머니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므로, 또 무슨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렀구나 하며 이 “회개”를 하나의 “변덕”으로 치고 있었다. 그러나 봐이로 부인은 가르가노 산에 한 달 이상 머물며 아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녀로서는 아주 진지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한 프랑스 사람이 봐이로 부인에게 심심풀이로 보라며 프랑스 신문을 주고 갔다.
봐이로 부인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아들이 탄 기선이 바다 한복판에서 침몰했다는 기사를 본 것이다. 그녀를 본 비오 신부는 단지,
“아들이 죽었다고? 누가 그랬소?”라고 할뿐이었다. 신부는 눈길을 하늘로 올려 잠시 기도하더니 말을 계속했다.
“주님께 감사하세요. 아들은 살아 있소. 그는 지금 어디어디에 있소 (신부는 아들이 그 시간에 머물고 있는 장소와 집주소를 대었다).”
어머니와 아들의 편지는 서로 교차하여 전달되었다. 아들 편지의 발신인 주소는 봐이로 부인이 비오 신부한테서 들은 바로 그 주소였다. 아들 역시 어머니가 자기의 임시 주소로 편지한 것에 대해 입이 딱 벌어졌다. 그는 지체 없이 산 조반니에 왔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내일 아침까지 공복재를 지켜, 고해성사를 본 뒤에 함께 미사에 가서 영성체하자고 일렀다.
어머니가 성당에 먼저 간 사이 아들은 밖에서 시장 구경을 하다가 포도와 계란 2 개를 사 먹었다. 어머니가 성당에 온 그를 비오 신부에게 소개하자 신부는 웃으며 말했다.
“이 불한당! 거짓말쟁이!”
그리고 어머니에게는
“에고,… 저런 녀석을 믿소?”
그러자 젊은이는 화가 났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데가 어디 있어요, 신부님이 저를 어떻게 아신다고?”
신부가 대답했다.
“그래, 공복재 지켰다고 우길 참인가? 계란 2 개와 포도. 그걸 누가 먹었지? 응?”
젊은이가 회개하기 직전의 장면이었다.
11. 기적의 치유인가?
모든 것은 오직 은총이라는 사실을 은사 받은 사람들처럼 확실히 아는 사람도 없다. 특별한 수많은 치유가 비오 신부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사례들을 델 판테는 날짜와 장소를 명시하여 수십 건 수집했다. 비오 신부의 입장에서는 그러나 사람들이 그런 치유를 자기의 공으로 돌릴 때 참으로 난감해했다. 그는 격렬하게 거부하며 개인적으로 그에게 감사하는 사람들을 모두 무뚝뚝하게 훈계한다.
“하느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나한테 말고!”
사실 기적의 힘을 가진 사람이란 없다. 다만 비오 신부는 대데레사 성녀의 말을 절실하게 체험했다. 즉 “누구든지 하느님께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는다면 하느님도 그에게 아무 것도 거절하지 않으신다.” 그가 보여준 갖가지 작용 뒤에 숨은 비밀의 열쇠는 바로 이것이었다.
병이 치유된 사람과 그 가족, 신자들 그리고 의술을 담당한 의사들의 눈에는 죽음 직전에 갑자기 사태가 역전되어 사람이 새로 살아났다는 사실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을 “기적”이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적어도 비오 신부가 살아 있는 한 그 말에 관여하지 않는다. 교회는 단지 이렇게는 말한다. 즉 하느님이 원하셔서 사람들의 더 큰, 진실된 회두를 위한 도구로 누가 간택되었다면, 그가 육체적인 치유의 자선행위를 보이더라도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많은 자료가 있는데, 이제 한 어린이가 치유된 사례를 보기로 하자.
피에몬트 주 포사노에 사는 다섯 살짜리 어린이 리나 카셋세는 눈병을 앓았다. 산 레모, 나폴리, 로마, 토리노 등지의 전문의들에게 갔으나 모두 허사였다. 꼬마아가씨 리나는 눈을 반쯤 뜨기는 했지만 웬만한 빛은 가려줘야만 했다. 아이는 언제나 보안용 안경을 끼고 있었다. 의사들은 아이가 성장기에 접어드는 열두 살 내지 열네 살쯤에는 그 안질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누가 그녀를 위해 비오 신부에게 기도해달라는 청을 넣었다. 집에는 특별한 치유에 관한 책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비오 신부에게 전구를 청하는 글이 있었다. 어느 날 저녁 딸이 그 책을 펴들고 말했다.
“엄마, 이 이야기 좀 읽어줘요, 네!”
엄마는 글을 읽고 작은딸은 쫑긋하게 듣고 있었다. 그것은 날 때부터 눈먼, 다른 한 소녀의 치유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그 소녀의 금목걸이를 비오 신부에게 드렸더니 신부는 그것을 받지 않고 아버지에게 되돌려주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리나가 말했다.
“엄마, 엄마도 비오 신부님한테 가서 내 금목걸이를 드려요. 신부님이 이것을 가지셨으면 해요. 난 필요 없으니까.”
그것은 어느 토요일의 일인데, 그 다음 월요일에 어머니는 산 조반니로 떠났다. 그녀는 꼬박 사흘 동안 고해성사 차례를 기다렸다. 그사이 어머니는 비오 신부가 성당에서 제의실에 가는 틈에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그 목걸이를 딸의 사진과 함께 신부의 손에 쥐어드렸다.
1950년 6월 17일 토요일 그녀는 드디어 고해성사를 받았다. 그것은 오전 9시 15분의 일인데 그 때 비오 신부가 말했다.
“잘 가세요. 당신 딸은 이제 괜찮소.”
이 말에 부인은 못에 박힌 것처럼 그 자리에 꿇어 움직이지 않았다. 비오 신부가 물었다.
“또 뭘 원하지요?”
“아! 신부님, 제 딸이.…”
신부는 호주머니에서 마리아의 메달을 하나 끄집어내어 어머니에게 주며 말했다.
“그래, 가 보시오, 당신 딸은 이제 괜찮소, 그리고 이걸 딸한테 주시오.”
뒤에 안 일이지만 어머니가 이 말을 듣고 있던 같은 시각에 집에 있던 딸 리나는 유치원 보모에게 이렇게 말했다.
“보모님, 난 안경 필요없어요. 이젠 괜찮아요!”
아이는 완쾌되었던 것이다. (링구아 교수의 책 48 쪽 이하)
산 조반니에 오거나 비오 신부에게 편지를 쓰거나 하는 대부분 사람들은 각자가 당면한 간절한 소원들을 가지고 온다고 봐야한다. 그래서 마치 그런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비오 신부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참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비오 신부가 받은 은사는 바로, 죄에 물든 영혼들을 구출하는 영적 인도를 위한 것이다. 그의 관심은 첫째도 둘째도 사람들의 회개에 있었으니, 사람들의 회개야말로 그의 관심사의 전부였다.
여러 가지 사례를 보면 교훈적인 것이 많다. 육신의 치유가 없는 경우에도 영적 치유가 가능했던 것도 있다. 가령 신앙 없이 공산주의자로 살아온 베티 나이르는 산 조반니에서 암으로 죽었으나 그녀의 죽음은 비오 신부의 인도로 거룩한 선종이 되었다.
링구아는 예전에 있었던 한 일을 이야기한다.
병상에 누운 성직자인 자기의 친구가 혹시 치유될 수 있을까 하고 링구아 교수는 고해성사 뒤에 비오 신부에게 물었다. 그에 앞서, 함께 순례 왔던 친구가 똑같은 물음을 드렸기에 그는 더욱 간절하게 물었다. 비오 신부는 조용히
“하느님 뜻에 맡기십시오!”
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시도했다.
“저희는 1000 킬로미터 너머에서 와서,…”
그러자 신부의 말이 거칠어졌다.
“하느님 뜻에 맡기라니까! 알겠소? 더구나 환자는 자기 생명을 하느님께 희생으로 바치고 있는데, … 뭐란 말이오?”
링구아 교수는 집에 온 길로 곧바로 병상의 친구를 방문했다.
“자네, 혹시 자네 생명을 하느님께 희생으로 바쳤는가?”
친구는 어리둥절해지더니 불쑥 말했다.
“아니, 아니야!”
“들어보게, 친구야, 난 자넬 강제하지는 않아. 하지만 죽음의 병상에서 자네가 거짓말하거나, 아니면 비오 신부가 거짓말했거나 둘 중의 하나일세!”
그러자 환자가 대답했다.
“그래, … 그래, 그건 맞아! 그러니까 그건 2 년 전의 일이야. 난 신학생 한 사람과 ‘최후의 만찬 수녀회(이 수녀회는 이 환자가 창설한 것)’를 위해 내 생명을 희생으로 바쳤지. 그런데 이렇게 기쁠 수가 있나, 하느님께서 그것을 받아들이셨다고 비오 신부님이 확인해주시다니! 고맙네!”(링구아 교수의 책, 57 쪽)
12. 두 곳에 동시에?
비오 신부가 그의 작은 수도원, 아니, 산 조반니를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떠난 일이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고 먼 타지에서 비오 신부를 보았다는 보고가 적지 않게 수집되어 있다. 그것은 말하는 사람들의 덕망이나 신뢰성으로 봐서 결코 허황한 주장이라 할 수 없었다.
플로렌스의 딘디코 몬시뇰의 누이는 파라티프스 A 형과 B 형으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친척들이 비오 신부에게 이 일을 어쩌면 좋으냐고 도움을 청했다.
1928년 7월 20일 몬시뇰은 혼자 서재에 있었는데, 오후 2시반 경 갑자기 누가 옆을 스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몸을 돌려 주위를 살폈다. 어떤 수도자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대번에 비오 신부를 생각하고 그 이야기를 보좌신부에게 했다. 보좌신부는 지금 몬시뇰이 신경과민이라 그것은 환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몬시뇰에게 기분전환으로 산책을 하자며 둘은 밖으로 나갔다.
산책에서 돌아오자 연락이 와서 그들은 병원의 누이에게 갔다. 누이의 말로는 조금 전에 어떤 수도자가 자기에게 왔더라는 것이다(뒤에, 그 시각은 몬시뇰이 비오 신부를 느꼈던 바로 그 때였음이 밝혀졌다). 그 수도자는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내일이면 열이 내릴 것이오, 또 며칠 안에 당신의 고통도 깨끗이 사라질 것이오.”
환자가 물었다.
“어머, 신부님, 신부님은 성인이세요?”
이에 대해 신부는,
“아니오. 나는 다만 주님 자비의 도구로 쓰이는 사람일뿐이오.”
“그러시다면, 신부님, 신부님의 소매에 키스하게 해주세요.”
“여기 고통의 자리에 키스하세요.”
하며 그 방문자는 손의 상처를 내밀었다.
사람들은 비오 신부를 베드로 성당 지하납골당에 있는 교황 비오 10세의 묘 곁에서도 보았다고 했다.
비오 신부를 보았다는 또 다른 이야기는 베드로 성전에서 있었던 소화 데레사의 장엄한 시복식(諡福式) 때의 일인데, 사람들은 그가 거기에 함께 있었다는 말을 했다. 그 증언의 장본인으로 델 판테는 우루구아이 델 살토 교구의 한 대주교의 이름을 대었다. 이 대주교가 전하는 이야기인즉, “극히 정상적 상식을 가진 한 고위 성직자”가 그에게 한 이야기라는데, 그 고위 성직자는 데레사의 시복식 때 비오 신부를 틀림없이 보았다는 것이었다(그들은 개인적으로 서로 아는 사이). 그리고 그 성직자가 비오 신부한테 인사하러 접근하자 비오 신부는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산 조반니를 한 발자국도 떠난 일이 없는 비오 신부가 다른 데에도 나타났다는 이러한 풍문은 교황 비오 11세에게도 알려졌다. 교황은 무슨 영문인지 확인하려고 유명한 돈 오리오네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저도 그를 보았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이 말에 비오 11세는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나도 그것을 믿겠소!”
라고 대답했다.
하루는 비오 신부가 동석한 자리에서, 옛날 파두아의 성 안토니오에게 있었던 이처소재(二處所在 = 두곳에 동시에 존재함)의 은사가 화제로 떠올랐다. 거기서 한 신부가 이런 견해를 말했다.
“아마 그 은사 받은 당사자들은 이처소재를 해도 어떻게 됐는지 전혀 모를 게 아니오?”
그러자 비오 신부가 대뜸 이 화제에 끼어들어 이렇게 말했다.
“물론 알고말고! 다만 몸과 영혼, 둘 중의 어느 것이 어느 곳으로 움직여 가는지는 알 수 없어요.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또 그 이처(二處)가 어디라는 것은 또렷이 알아요.”(델 판테의 기록)
그의 현존 또는 최소한 그의 영적 접근이 어떤 집중적인 향기를 통해 감지되는 수가 있는데, 그것도 매우 잦은 편이었다. 1919년 로마넬리 박사가 비오 신부를 조사했을 때 그가 놀란 것은 비오 신부한테서 강한 향수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거기 있었던 발렌짜노 신부에게
“신부, 그것도 경건한 수도회 신부가 향수를 사용한다는 것은 한번도 본 일이 없는데.…” 하며 고개를 저었다. 향기는 두 시간이나 지속되다가 사라졌는데 계단을 내려오자 향기는 아래층에도 있다는 것을 알고 그는 또 놀랐다. 향기는 신부의 상처에서 나는 듯했고, 향수와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한 사제가 겪은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비오 신부의 영적인 아들이라고 밝힌 사람이다.
“어느 날 아침 미사를 드리면서 그 향기를 느꼈습니다. 그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냥 넘어갔지요. 그런데 한 시간 반 정도 지났을까, 일에 열중하고 있는데 같은 향기가 또 나를 덮쳤어요. 그 순간, 혹시 비오 신부가 내게 무엇을 원하고 있지나 않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정오에 그 향기는 세 번째로, 그리고 매우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심상찮은 일이었습니다. 일과를 마치고 나서 생각에 잠긴 채 숙소로 돌아가는데, 친구가 차를 세우더니 나를 집에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사양하고 그냥 가기로 했습니다. 왠지 혼자 있고 싶었습니다. 몇 분 후 나는 한 교차로에서 끔찍한 교통사고를 목격했습니다. 사람들이 불러서 나는 뛰어갔고, 중상 입은 사람에게 재빨리 사죄(赦罪)를 주었습니다. 종일 그 향기 때문에 마음이 쓰인 뒤라, 혹시 이 일과 관계가 있을까 하고, 사고 당사자의 인적사항을 알아보았지요. 과연 그는 오랜 세월을 교회와 성사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아온 사람이었는데, 가족이 그의 영혼을 위해 오래 전부터 비오 신부에게 기도를 청해 두었던 것입니다.”(“K 증인”)
뷔노프스카의 “비오 신부의 진면목” 에 있는 작은 에피소드를 보자. 하루는 산 조반니 로톤도 근처의 가난한 여인이 가풀막에서 뒷걸음으로 밤알을 줍고 있었다. 갑자기 멋진 향기가 노파를 덮쳐서 머리를 들었다.
“맙소사!”
한 발 차이로 그녀는 절벽에서 떨어질 번했던 것이다. 훗날 비오 신부가 그녀를 보고 호되게 꾸짖었다: “뒷걸음치는 버릇, 이제야 고치겠군!”
13. 카푸친회 수도자의 자선사업
비오 신부는 카푸친회의 토박이 신부이다. 자연스럽고, 성실하고, 사람 좋아하고 파격적인 성품인데다 그지없이 정열적인 신부이다. 그의 성격은 건전함 바로 그것이어서 혹시 그의 인품에 무슨 특별한 면이라도 없을까 하고 호기심의 눈으로 보는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재미없어할지도 모른다.
“꾀죄죄한 농민들, 무뚝뚝한 수도자들, 대개 조금은 오만한 순례자들, 경건하기는 해도 게을러빠진 사람들이 모여 떠들썩하게 아우성치며 짜증까지 겹쳐 있는데, 여기에 비오 신부 자신도 촌사람 같이 또 이따금 퉁명스럽기까지 한 몰골이니, 이들이 함께 한 자리에서 어떤 극적 감명이 있으리라고는 처음부터 바랄 수 없었다.… 그러나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이 검소한 사람, 이 겸허한 수도자 비오 신부는 가장 검소하고 가장 정상적인 방법으로, 사실은 가장 독특하고 비범한 삶을 보여 주고 있다. 즉 그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몸에 지니고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죽음의 공포와 고통을 몸소, 그것도 날마다, 시간마다, 경험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 속사정을 눈치 챌 수도 알 수도 없다! 이러한 방법으로 이러한 고통을 짊어지며 비오 신부가 치르는 대가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느님만이 아시는 일이다.”(미켈레 칼부치)
세상의 재난과 근심을 그토록 무겁게 짊어진 “기적을 행하는” 그는 어디에 무엇이 필요한지 하는 세상물정을 보는 눈은 놀랄 만큼 밝았다. 가르가노 산의 후미진 벽지를 바라보면 부근 어디에도 병원다운 병원이 없었다. 규모나 시설 면에서 작은 것이 하나 있기는 했으나 산 조반니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고부터는 환자의 홍수 때문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비오 신부는 그 필요성을 절감한 끝에 기도하며 하느님께 상의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의사 몇 사람과 함께 논의를 거듭하여 하나의 계획을 세웠다.
1940년 1월 9일 그 아이디어가 여물어 “고통을 더는 집”이라는 이름으로 병원을 하나 짓기로 했다. 이렇게 불꽃이 한번 튀자 온 사방에서 거액의 돈이 쏟아져 들어왔고, 이태리의 대도시들도 이기에 호응하여 한 병상에 350,000 리라씩 하는 “튼튼한 병상”을 위해 희사를 아끼지 않았다.
1956년, 개원식과 함께 여기서 전문의들의 국제학술대회도 개최되었다. 북아메리카, 아르헨틴, 영국, 프랑스, 스페인, 스웨덴, 벨기에 등지에서 온 유명한 전문의들 가운데에는 가령,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주치의인 심장병 전문의 화이트 박사도 있었다. 이 학술대회의 주최국은 물론 이태리였으며 볼로냐의 레르카르 추기경이 개원 축하미사를 집전하고 병원을 축복했다. 물론 카푸친회 총장 아빠스도 출석했고 바티칸에서는 교황님이 축전을 보내어주셨다.
병원은 이태리에서 최고의 것이었다. 수술실, 조제실, 양호실, 소성당, 에어컨, 소독장치, 세탁소, 광전식 자동승강기 등은 주목을 끌었다. 거기에다 양로원, 수도자 양성소, 사제 숙소 등도 계획중이거나 일부 신축 중인데, 이들 조용한 시설은 완성되는 대로 “침묵의 도시”라는 이름을 가질 예정이다.
이 모든 것은 비오 신부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 관리는 사람들에게 맡겨졌다. 현재뿐 아니라 비오 신부의 사후에도 그 운영은 교황청의 감독 하에 있게 된다. 비오 신부 자신은 병원의 업무와 무관하게 홀가분한 마음이지만, 그곳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기꺼이 힘을 주고 시간을 내고 또 자기의 고통을 희생으로 바치고 있다.
14. 이 책이 의도하는 것
조르조 페스타 박사는 그의 유명한 책에다 신빙할 만한 사람들의 비오 신부에 관한 의견들을 도큐먼트로 수록했다. 가령 카푸친회의 당시 총회장 쥬세페 안또니오 다 페르시체토 아빠스가 한 저명 의사에게 손수 친서를 보낸 일이 있는데(1920년 11월 9일자), 거기에는
“비오 신부가 귀하에게 보여준 것은 사실 그대로” 라는 것과, “비오 신부를 통해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하는 불가사의한 현상에 대한 그의 소견”을 밝힌 것도 있었다.
그는 또 교황 베네딕도 15세가 우루구아이 델 살토 교구의 총대리 페르난도 다미아니 몬시뇰에게 말씀하신 것도 인용하고 있는데, 거기서 교황은 이 고위 성직자에게 스페인어로
“비오 신부는 인간의 회개를 위해 하느님께서 이따금 세상에 보내시는 특별한 사도 가운데 하나인 놀라운 사람” 이라는 견해를 말했다고 한다.
그는 심리적인 감명을 다룬 장에서 한 젊은 유태인의 경우를 이야기하고 있다. 한 유태인이 호기심으로 친구들과 함께 이곳 비오 신부에게 왔다. 교회 입구에 몇몇 신부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한사람이 그 겸손한 거동이나 온화한 인상으로 보아 비오 신부이다 싶어 청년은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죄송합니다, 신부님, 혹시 비오 신부님이신지요?”
“예, 그렇소만.”
그러자 청년은 그 자리에 무릎꿇어 이렇게 말했다.
“신부님, 주님의 발아래 꿇어 말씀드립니다. 제게 세례를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가지 않겠습니다!”
페스타 박사는 이 대목에서 자기의 소견을 이렇게 덧붙인다.
“제아무리 위대한 설교자가 용을 썼다 해도, 이런 개종은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그 외 그는 이전에 러시아 군 대령이었던 네스토르 카테리니치와 그의 루마니아 태생의 부인이 그들의 친인척들과 함께 비오 신부를 통해 러시아 정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일이라던가, 또 변호사로서 한때 제노바에서 프리메이슨 비밀결사대원이었던 자기의 사촌 체사레 페스타 박사를 비오 신부가 회개시킨 예도 들었다. 페스타 박사가 체험했거나 보증하는 사건들은 부지기수이다.
그러니 이렇게 수많은 의미심장한 증언들을 우리는 곧이곧대로 믿어도 될 것이며, 비오 신부가 한 은사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비오 신부는 사람들에게 자주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다른 사람들의 기도와 희생이 보태어지면 이 은사 받은 사람은 더 높이, 더 널리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오 신부는 사람들이 그의 지향을 위해 미사를 봉헌해 주기를 간청했고 또 기도로써 밀어 달라고 부탁했다.
한번은 마리아 X 라는 부인이 비오 신부를 기다리고 있는데, 비오 신부가 이런 부탁을 전해 왔다.
“댁이 팟사우를 거쳐 상부 오스트리아 주로 돌아가시거든, 수고스럽지만 XX 부인을 좀 방문해 주세요(그는 정확히 그 주소를 대었다). 그녀는 나를 위해 매일 세 번의 성모송을 바치고 있습니다.”
물론 그 XX 부인은 한번도 비오 신부에게 편지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기도의 희사(喜捨)에 대해 멀리서 민감하게 감응하고 있었다.(“K 증인”)
“거룩한” 사람들 역시, 또 특히 그들은, 사람들의 기도의 선물을 민감하게 느낀다. 그들의 사명이 너무나 광범하고 무겁기에 그들은 그러한 뒷받침을 매우 필요로 하고 또한 그것을 고마워한다. 사실 바오로라는 한 성인은 이렇게도 말한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강론을 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은 실종되지 않을까 하여 늘 불안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오 신부와의 만남은 내게 가장 아름다운 만남의 하나였다. 틀림없이 그것은 한 관광객이 “피사의 사탑”을 보듯이 단지 호기심에서 그를 마치 “구경거리 비오 신부”로 본다든가 또는 그저 세속적인 기대로 그로부터 신탁(神託)의 힘을 얻으려 하는 것과는 비길 것이 아닌데, 그러나 이때 그리스도의 값진 피를 치러서 산 영혼들에 대한 그의 갈망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5. 비오 신부와 성시간(聖時間)
이제 이러한 비오 신부 자신의 묵상을 들어보자. 젊은 시절 오상을 받은 초기에 손수 써서 남긴 그의 글을 읽어보자. 여기서 그는 예수님께 말씀드리기도 하고, 올리브 산의 예수님이 어떠한 고통을 겪으셨는지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거룩하신 성령이시여, 예수님의 고통이 어떠하셨으리라는 것을 묵상하고자 하오니 저를 비추시고 저의 생각에 흐트러짐이 없게 하소서. 그 끝없으신 사랑, 하느님의 그 끝없으신 고통을 헤아리고자 묵상하오니 저를 도우소서.
우리의 인성을 취하신 그분은 우리 인성을 천주성에 가까이 해주시기 위하여 진력하시다가 죽음의 공포를 당하시고 결국에는 인간들에게 죽으셨습니다.
그 엄청난 순교를, 그 치욕스러운 십자가상의 죽음을, 그것도 뭇 사람들의 비웃음과 비방을 견디어 내시는 끝없는 겸손 안에서, 이 영원하시고 불멸하신 분께서는 아무 말 없이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그토록 모욕하고 더러운 죄에 빠져있던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죄를 즐기는 인간과 그것을 슬퍼하시는 하느님.
그러면서도 그분은 죽음을 앞에 하시고 피땀을 흘리셨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저는 바다와 같이 넓은 그 사랑과 그 큰 고통의 근처에 가지도 못할 것입니다. 아니, 결코 가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예수님 성심의 가장 깊은 곳을 헤쳐 들어가고 싶습니다.
거기서 저는 올리브 산에서 그분을 죽음에 이르도록 괴롭힌 그 비통함의 의미를 배우고자 합니다.
아버지와 그의 제자들로부터 버림받으신 그분을 저의 사랑으로 위로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분과 일치하여 그분께 속죄하고 싶습니다.
비탄의 성모 마리아시여, 저로 하여금 당신과 함께 예수님을 따르게 하여 주소서. 그분의 고통과 당신의 아픔을 저에게도 나누어주소서.
거룩한 수호천사이시여, 저의 생각을 보호하여 주시고, 저의 생각이 고통받으시는 구세주께로 향하도록 지켜 주시고, 저의 생각이 멀리 달아나 헤매지 말게 하여 주소서. 아멘.
* * *
I.
그분의 지상생활이 종국에 가까워지자 그분은 그분의 전존재를 사랑의 성사 안에서 음식으로 남기시고, 그 하자 없으신 몸을 사도들에게 먹이신 후 그들과 함께 올리브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그 올리브 동산은 그분의 제자들에게도 낯익은 곳이었습니다. 물론 유다스에게도 알려진 곳이었습니다.
저녁을 잡수신 후 동산으로 가시는 길에 그분은 제자들을 가르치십니다. 이제 절박하게 닥친 이별과, 그분 목전의 수난에 대하여 제자들이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하시고, 또한 앞으로 그들에게 닥칠 비방과 방해와 죽음을 그분께 대한 사랑으로 감당해 내도록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으로서의 모범을 보이시는 그분을, 그렇게 해야만 닮아갈 수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겠다. 너희는 그러나, 나의 제자들이여, 들뜨지 말지어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바는 채워질 것이니 이 엄숙한 시간이 그것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이제 고통에 찬 수난을 준비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을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제자들을 걱정하십니다.
그분의 마음에 숨겨진 엄청난 사랑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분의 모습은 비애와 연민의 정으로 가득 차 계시며 그분의 말씀은 그 속사랑을 그대로 나타내십니다.
그 말씀은 따뜻하신가 하면 용기를 주시기도 하고, 위로의 정을 담으시는 한편 구원을 약속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수난에 얽힌 신비를 새겨주시는 말씀이셨습니다.
늘 그렇습니다만, 나의 예수님이시여, 그 최후만찬의 방에서 올리브 동산으로 이동하실 때의 광경이 저를 얼마나 감격시키는지요. 그 기진맥진한 상태에서도 넘치는 사랑으로 자신을 희생으로 바치기까지 하셔서 당신은 인류를 죄의 노예상태에서 구하기로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벗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것 이상의 사랑은 없다고 가르치신 당신이셨습니다. 그리고 과연, 이것을 증명해 주신 것은 당신의 죽음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숭고한 희생에 감동하지 않을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올리브 동산에서 스승님께서는 제자들 곁을 떠나시며 베드로와 야고버와 요한 오직 세 사람만 당신 죽음의 고뇌에 대한 입회자로 선택하셨습니다. 타보르 산에서 그분께서 모세와 엘리아 사이에 영광스럽게 변모(變貌)하심을 보고 그분을 하느님이라고 고백했던 이들 세 사람이, 죽음의 고뇌에 싸이신 지금의 그분을 보고도 역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것인지요?
올리브 동산에 들어가시면서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여기 남아서 깨어 있어라, 그리고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원수는 잠자지 않으니 경각심을 가져라. 기도는 바로 무기이니 이 무기로 무장하여 죄악이 너희를 농락하지 못하도록 하라. 지금은 어둠의 시간이니라.”
이러한 말씀으로 그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시고 그분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셔서 땅바닥에 몸을 던지셨습니다.
그분의 심정은 죽도록 서글프십니다. 그분의 영혼은 말할 수 없는 비통에 싸여 계십니다. 밤늦은 하늘은 맑기만 합니다. 달은 벌겋게 하늘에 치솟아 있고 동산은 반쯤 어둠 속에 잠깁니다. 희미한 빛이 파멸적인 손짓으로 땅을 어루만지듯, 어떤 커다란 운명적인 사건 하나가 눈앞에 얼렁거립니다.
혈관의 모든 피가 굳어버릴 듯한, 억장이 무너지는 큰 사건이 눈앞에 얼렁거립니다. 다가올 폭풍의 징조처럼 한 바람이 휘몰아쳐, 올리브 나뭇잎을 사정없이 뒤흔들어 놓더니 이윽고는 뼈마디마다 쑤셔놓습니다. 그것은 영혼 위에 덮쳐서 극도로 애처롭게 만드는 죽음의 사자(使者)와도 같습니다.
이토록 무시무시한, 두려움에 찬 밤은 전무후무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예수님이시여, 이 무슨 변고이겠습니까.
한때, 당신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셨던 그 밤은 얼마나 아름다운 밤이었습니까. 기쁨에 넘친 천사들이 온 누리에 평화를 알리고 글로리아 노래를 불렀던 그 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그들은 당신을 두려워하는 한편으로 당신의 그 죽도록 괴로우신 영혼에 흠숭을 드리면서도, 저 멀리 거리를 두고 당신 주위를 에워싸고만 있는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인성(人性)에 그분의 신성(神性)을 부여하고 있던 힘이 떨어져 나감을 예수님은 감수하십니다.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비애와 극도의 쇠약, 버려졌다는 심정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그분은 그 인성 안에서 느끼십니다. 그분의 영혼은 마치 바다에서 부침(浮沈)을 거듭하며 허우적거리시는 것 같습니다. 아니, 그 속에 침몰해 들어가시는 듯합니다. 그분은 눈앞에 닥친 수난의 전체 모습을 생각하시고, 헝클어지고 가슴 조여지는 장면들을 조용히 묵상하십니다.
그분은 우선 유다스를 보십니다. 그는 그분께서 마음으로부터 사랑하시던 사도(使徒)입니다만 그는 그분을 동전 몇 닢에 팔아넘기게 되는 것입니다. 유다스는 뒤에 이 동산에서 그분을 배반하고 그분을 원수들에게 넘기는 것입니다.
유다스 그 사람!
그분의 벗이자 그분의 제자인 그를 그분께서는 방금 그분의 살로써 먹이시고 그분의 피로써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의 앞에 무릎꿇으시고 그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그분은 그의 두 발에 형제애로 입맞춤하시고 그분 사랑의 힘으로 그의 경솔한 계획을 말리시려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안 된다면 하다못해, 그가 일을 저지르고 난 뒤에라도, 그래도 구원을 얻기 위해 회개하도록 몸짓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어찌 하리요. 그분의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유다스는 멸망의 길을 스스로 재촉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자청해서 빠지는 이 파멸을 두고 울음을 터뜨리십니다.
그분은 원수들이 그분을 오랏줄에 묶어 예루살렘 거리를 이리저리 누비는 것을 보십니다. 그 거리는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그분을 메시아(救世主)로 모시고 온 천지가 떠나가도록 환호성에 찼던 그 거리였습니다.
그리고는, 사형선고를 받으실 때 대사제들 앞에서 어떻게 매를 맞으시고 어떻게 뺨을 맞으시는지 그 장면도 보십니다. 생명의 창조주이신 그분은 재판소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재판장 앞에 서셔서 끝내 사형선고를 받으십니다. 그분이 그토록 사랑하시고 그토록 많이 베푸셨던 그분의 백성들조차도 그분을 욕하고 멸시할 뿐 아니라, 휘파람과 아우성으로 그분의 죽음을 요구하는, 아니 그 혹독한 십자가상의 죽음을 요구하는 광경을 그분께서는 어떠한 심정으로 보시겠습니까.
이토록 얼토당토않게 덮어씌우는 일을 그분은 듣고만 계십니다. 참혹한 매질은 또 어떻습니까. 그분은 그것도 보십니다.
가시관을 쓰시고 조롱 받는 왕으로 비방 받으시고 얻어맞으시는 그분 자신을 그분은 보십니다.
사람들은 그분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하였습니다. 그분은 골고타의 길을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사이 몇 번이나 기진하여 핏기 하나 없이 쓰러지십니다. 해골산에서 그분은 끝내 실오라기 하나 없이 발가벗겨지시고 십자가 위에 사지를 벌렁 벌린 채 뉘어지십니다. 그들은 그분을 무자비하게 십자가에 못박고 십자가를 들어 세워서 모든 사람의 구경거리로 만듭니다.
그분은 살을 꿰뚫고 들어간 세 개의 못에 걸려 계시고, 그 거룩하신 몸은 참혹하게 비틀어지시고 아래로 축 처지십니다.
아! 찢어지는 고통과 싸우시는 죽음 앞의 세 시간은 끝이 없는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주위의 군중들은 어떻습니까.
그분을 끝없이 매도하는 그 어리석고 무정한 군중들은 어떻습니까.
타는 듯한 갈증을 그분은 미리 느끼십니다. 그분의 내장과 목은 불이 붙는 듯합니다.
고통스러운 순교이십니다. 그 고통은 신 포도주와 쓸개를 입에 댐으로써 더욱 고조됩니다.
그분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으셨다는 것은 이제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십자가 아래에 서 계시는 어머니의 절망은 또 어떠하십니까.
그리고 끝내 굴욕적인 죽음이 옵니다. 두 사람의 강도 사이에서 말입니다.
그 중의 한사람은 그분을 하느님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받지만, 다른 한 사람은 그분을 비방하고 욕하면서 끝까지 의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병사가 가까이 옵니다. 그는 말하자면 모독의 극치를 연출하듯 그분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릅니다.
마침내 그분은 모든 죽은 이의 경우처럼, 무덤 속에 얌전하게 누운 자기 자신을 보십니다.
모든 장면 장면마다 그분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이 저녁에 생각하시면서 예수님은 전율하십니다.
이러한 전율과 공포가 그분 하느님의 마음, 치명적인 슬픔에 잠기신 그분의 영혼을 사로잡고 맙니다.
온몸에 신열이 나서 그분을 덮칩니다.
그분, 그렇습니다, 그 무고하신 어린 양, 무방비상태로 이리들에게 내어맡겨지신 채, 그분 하느님의 아드님은 자발적으로 희생의 제물이 되는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사탄의 힘에 그분을 희생시키시며 인류를 구원하시는 성부의 영광이 그로써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가장 위험한 인간으로 지목되신 그분을 피하여 비겁한 마음으로 달아났던 제자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그분은 이 희생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분, 하느님의 영원하신 말씀이신 그분은 이제 그분의 원수의 조롱감에 지나지 않게 되셨습니다.
이러한 사명을 그분은 포기하실까요?
아닙니다.
바로 지금 그분은 모든 것을 대담하게 한 몸에 짊어지십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죽도록 전율하시는 것입니까?
오호라, 그분의 인성을 그분은 멋대로 쏘라고 버티는 과녁처럼 내맡기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그로써 인간의 죄악으로 난처해지신 하느님 정의의 화살을 모두 잡으시려는 것입니다.
완전 무방비 상태의 영혼 안에서 그분은 그분이 겪게 되실 고난을 감지하십니다.
개개의 죄를 개개의 고통으로 속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적인 모든 약점과 근심과 공포에 온통 내맡겨지신 그분의 인성이 움츠려드는 것입니다.
그분은 극한상태에 놓여지신 듯합니다.
땅도 얼굴을 돌리는 사이 그분은 이제 아버지의 위엄 앞에서 먼지 속으로 자신을 던지십니다.
하늘의 천사들과 성인들이 영원한 황홀경 안에서 그토록 경탄해 마지않던 그 아름다우신 용모도 먼지 속에서 일그러집니다.
주님이시여! 나의 예수님이시여!
당신은 하늘과 땅의 하느님이 아니신지요?
모든 것에서 아버지와 같으신 가운데 그토록 겸손하신 나머지, 어쩌면 인간적인 모습을 잃어버리지는 않으시는지요?
오호라, 저는 이해합니다. 당신은 저에게 교만에 대하여 가르치려 하십니다.
하늘과 말씀을 나누자면 저는 땅끝까지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려 하십니다.
저의 교만을 속죄하기 위하여 당신께서는 성부께 그토록 겸손하게 사정을 하셔서, 배신으로 이탈해나갔던 인간에게 그분의 은총이 다시금 돌아오게끔 해주셨습니다.
당신의 겸손 때문에 성부께서는 교만한 인간들을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땅이 하늘과 화해하도록 하시면서, 당신 자신은 땅으로까지, 땅에 입맞춤하시듯이 깊이 숙이셨습니다.
오 예수님, 당신의 겸손은 언제나 모든 이의 축복과 감사를 받으소서.
그 겸손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로 거룩한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II
다시 몸을 일으키신 예수님은 호소하시는 눈으로, 슬픔에 잠기신 눈으로 하늘을 향해 기도하시며 팔을 들어올리셨습니다.
하느님이시여, 그분의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창백하게 질려있습니까!
그분으로부터 등을 돌리시는 듯하신, 그리고 무안을 당하신 나머지 노여우심의 칼로 치시려는 아버지께 그분은 호소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들로서의 신뢰심으로 호소를 드리지만, 그분은 한편 자신의 사명이 어떤 것인지도 익히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다른 모든 이들을 대신하여 하느님의 권능을 혼자서 모욕하는 자가 되시는 것을 아십니다.
그분은 그분 삶의 희생을 통하여 하느님의 정의가 되살아나고 피조물들이 창조주와 화해하게 된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것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것도 매우 훌륭하게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쓰라린 수난 앞에서 사람의 본능은 무서움에 주춤해집니다.
수난 그 모두를 본능은 기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희생을 마다않으시는 그분의 영혼은 지금의 상심에도 불구하고 혼신의 힘으로 처절하게 싸우십니다.
나의 예수님이시여, 당신이 그토록 힘없어 하실 때에 우리는 당신으로부터 어떻게 힘을 얻을 수 있을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압니다, 당신께서는 우리의 모든 약점을 당신의 것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저희에게 당신의 힘을 주시기에 당신은 그토록 힘없이 되신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저희들 인생의 온갖 투쟁에 있어서 오직 당신만 신뢰하도록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비록 하늘이 귀기울여주시지 않을지라도.
극단적인 침통함 속에서 예수님은 성부께 호소를 드리십니다.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소서.”
그것은 위험 안에서 하늘에 호소하는 본성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 부르짖음이 받아들여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만 그래도 그분은 그렇게 바라시며 기도하십니다.
나의 예수님이여, 당신의 그 청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바라시면서 왜 그것을 요구하시는지요?
여기서의 그 이유는 고통과 사랑 안에서 이해되는 것이고, 또 그것은 커다란 신비입니다.
당신에게 덮친 그 고통 때문에 당신은 도움과 위로를 바라는 호소를 발하셨지만, 하느님의 정의에 일치하시려는 사랑, 그리고 저희들을 아버지께로 되돌려 놓기 위한 사랑 때문에 당신은 이렇게도 부르짖으십니다.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그리고 하늘도 이 기도에 더 확고한 무게를 두십니다.
고문당하시는 그분의 마음은 위로가 필요하십니다.
그분의 버려지신 처지나, 고통과의 외로운 싸움에서는 원군이 필요한 것입니다.
조용히 몸을 일으키시고 거의 비틀거리다시피 몸을 움직이십니다.
그분의 제자들에게 가십니다.
그분과 함께 살아왔고 그분의 신뢰를 받던 그들은 그분의 고통과, 그분이 의도적으로 맞서고 계시는 그 위험을 이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야말로 그분께 얼마만큼의 위로라도 드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무슨 실망스러운 일입니까?
그분이 보신 것은 곯아떨어져 자고 있는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분 영혼의 끝없는 고독감 속에서 그분은 더욱 더 큰 외로움을 느끼십니다.
그들에게 가까이 가셔서 그들을 부르시며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나의 죽음에까지 따라오겠다고 맹서하던 네가 아니더냐, 그리고 나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던 네가 아니더냐, 그런 네가 자고만 있다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시며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단 한 시간도 너희는 나와 함께 깨어있을 수 없단 말이냐!”
이것이 희생양으로 선택되신 그분의 한탄이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에 깔리신 마음이 외롭게 그리고 아무런 위안도 받을 수 없는 고통으로 뇌이신 한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여명처럼 피어오르는 절망에서부터 자유로운 그리고 무아인 상태로 빠져나오시며 말씀을 계속하십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하시며, 내가 싸우고 있는 사이 너희가 나의 고통을 잊고 있었다 하더라도 깨어서 최소한 너희 자신을 위해서라도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시려 했던 것입니다.
잠에 떨어진 그들은 그러나 예수님의 목소리는 아무도 듣지 못하였고, 다만 어떤 그림자로밖에는 느끼지를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얼굴이 고통스런 근심으로 얼마나 일그러져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오, 예수님, 당신의 한탄으로 상심된 나머지 그 올리브 동산에서 당신과 자리를 함께 하고 당신의 그 비통하심과 죽음의 공포를 함께 나누던 용감한 영혼들은 몇이나 되었는지요!
역사의 새로운 세기(世紀)가 마련되는 이 전환기에 당신의 요구에 깨끗하게 부응하여 나선 사람들은 몇이나 되었는지요!
그들이야말로 지금 이 결정적인 시간에 당신에게 위로가 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당신 제자들보다 나은 이런 무리들이 있었더라면 이들이야말로 당신의 근심에 더 가까이 참여하고, 그들 자신뿐 아니라 다른 여러 인간의 구원행위에 동참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저로 하여금 그들 안에 끼일 수 있게 하여주소서.
그리하여 저도 당신을 얼마만큼이라도 위로해드릴 수 있게 하여 주소서.
III
예수님은 기도하시던 곳으로 되돌아오십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더욱 놀라운 광경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모든 죄가 그 온갖 추태와 함께 그분 앞에 펼쳐집니다.
그분은 그 모든 부분을 자세히 보십니다.
그분은 인간들이 저지르는 온갖 악의와 악행을 보십니다.
이러한 죄가 하느님의 위엄을 얼마나 손상하고 모욕하고 있는지를 그분은 아십니다.
모든 사악과 부정(不正)이 돋보이는 가운데, 고약한 마음들로 인간의 입술을 통해 내뱉어지는 온갖 비방이 하느님께로 까지 올라가는 것을 그분은 들으십니다.
그 마음, 그 입술이라는 것은 원래 창조주를 찬미하는 데만 쓰라고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사제, 평신도할 것 없이 성체를 냉정히 더럽히는 독성(瀆聖)을 그분은 보십니다.
하느님 은총의 전달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제정되었던 성사를 두고 죄를 짓는 바가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영겁의 벌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타락된 인간의 더러운 옷을 입으시고 그 하나하나의 죄를 기워 갚으시기 위하여, 또 손상된 하느님의 영광을 회복하시기 위하여, 성부 앞에 서지 않으면 안 되십니다.
하느님을 냉담하게 멸시하며 날뛰는 인간들의 모든 배설물을 그분은 말끔히 닦아 내지 않으면 안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분은 겁나서 물러서지는 않으십니다.
죄의 시궁창이 성난 바다와 같이 그분을 덮치고 죄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아버지 앞에, 그리고 하느님 정의의 노여우심 앞에 서십니다.
그분은, 육화되신 신성으로서 모든 순결의 바탕이신 그분은, 죄와의 접촉을 느끼십니다.
아니, 그분 자신이 죄인이 되신 것 같은 꼴이십니다.
이때 그분 영혼의 깊숙한 내부에 감지된 그 혐오감을 누가 이해하겠습니까?
그분이 느끼시는 경악, 구토증, 모멸감을 누가 이해하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것 모두를 하나 남김없이 짊어지셨기에, 그분은 그만 바닥에 팽개쳐지시고 어마어마한 짐덩이 밑에 깔려버리십니다.
힘이 다하여 그분은 하느님 정의의 무게 때문에, 또 노여움으로 저주받은 자를 내리치시듯 고개 돌리시는 아버지 앞에서 한숨을 쉬십니다.
그 거대하고도 엄청난 짐덩이를 그분은 벗어버리고 싶으시고, 몸서리치는 그 부담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으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순수하신 본마음은 그것을 뿌리치십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아버지의 분노에 차신 눈길은, 그분을 시궁창처럼 썩은 죄의 물길 속에 빠진 그대로 방치하십니다.
이것이 그분으로 하여금 고통스러운 수난을 피하라고 압박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의 본능적인 싸움입니다.
모두가 이 무지무지한 일에서 벗어나셔서 또 중재자의 역할을 거부하시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난 정의는 진정되지 않았고, 화해되지 않은 죄인들 생각 때문에 그분의 애정어린 마음은 더욱 더 굳세어지십니다.
이와 같이 구세주의 영혼 안에서, 하나는 성스럽게, 하나는 또 다르게, 두 가지의 힘, 두 가지의 경향이 여러 고심을 하다가 드디어는 그분의 뜻에 따라 모욕으로 얼룩진 정의가 틀림없이 승리를 얻어내고야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정의야말로 가장 주된 것이고, 승리의 개가는 정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분께 주어지는 역할은 어떤 것일지요?
한 인간으로서의 역할은 세상의 온갖 추악함으로 더럽혀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함 그 자체이신 그분께서는 비록 겉보기 만으로이기는 하나, 죄로 더렵혀지셔야 하시는지요?
그것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놀라시고 아연해하시고 불안해하십니다.
이러한 어려운 문제를 푸시기 위하여 그분은 바로 기도로 아버지의 위엄 앞에 몸을 던져 호소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주소서.”
그것은 그분이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아버지의 정의가 빈틈없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모든 인간이 당신과 남김없이 화해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제가, 당신의 거룩하심도 함께, 죄로 더럽혀지다니요!
오, 그것만은 제발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잔이 저를 비껴가도록 하여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이 잔은 저를 비껴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당신께서는 당신의 무한하신 능력 안에서 다른 방도를 찾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그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면, “제 뜻대로 마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IV
이번 역시 구세주의 기도는 아무런 효험 없이 끝나고 맙니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죽도록 거기에 매달리십니다.
위안이 될 만한 일이라도 있는가 하고 그분은 고단한 몸을 일으키시고, 비틀거리고 가쁜 숨을 쉬시며 제자들에게 몸을 끌고 가십니다.
그리고 잠에 떨어진 그들을 다시금 보십니다.
슬픔이 배가되는 사이 그분은 그들을 깨워야겠다고 느끼십니다.
사실 그들이야말로 얼마나 부끄러워해야 할 처지였겠습니까.
이제 예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제게는 그분의 모습이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 차 보이십니다.
이러한 배반을 보신 그 쓰디쓴 고통과 그들의 그 무관심을 그분은 홀로 속으로 사기십니다만, 그것은 마치 그분의 침묵 때문에, 그들을 그렇게도 관대하게 대하신 것이 오히려 나약한 약점으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나의 예수님, 당신의 마음 속속들이 파고 든 그 고통을 제가 어떻게 헤아려야 할지요.
슬픔에 깊이 잠기신 채 당신은 제자들로부터 떨어져 나오십니다.
제가 도움이 된다면, 제가 조금이라도 당신께 위안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할 수가 없기에 저는 당신과 함께 울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께 대한 저의 사랑의 눈물과 저의 죄로 인한 고통의 눈물, 그렇습니다, 당신의 그 크신 고통을 함께 하는 그 눈물이 당신의 눈물과 이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 눈물이 왕좌에 계시는 아버지께 까지 사무쳐서 그분의 자비를 빌 수는 없을는지요.
당신과, 그리고 아직도 죄 때문에 죽은 듯이 잠에 떨어져 있는 그 많은 영혼들에 대한 자비를 빌 수는 없을는지요!
몸이 굽혀져서 얻어맞으신 것처럼 예수님은 다시 그분이 기도하시던 자리로 돌아오십니다.
그리고는 몸을 던졌다기보다 내뒹굴듯 땅에 엎어지십니다.
죽음과 같은 공포가 그분의 영혼을 뒤찢고 그분의 내적인 기도는 끝을 모릅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모른척하시고 그분은 가장 미움 받은 사람처럼 되십니다.
이에 저는 구세주님의 호소를 듣는듯합니다.
“내가 인간을 대신하여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고 또 모든 것을 감당해 내려고 하니, 인간이 이에 감사할 줄 알고 나의 고통에 사랑으로 보답할 줄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간에게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진정한 삶을 주기 위해, 인간을 죄의 죽음에서 되돌리려는 나의 이 노고가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하다못해 인간이 알기만 했다면!
아, 사랑이 내 마음을 형리가 내 살을 찢는 것 이상으로 찢는구나.”
아니, 그러나 그분이 보시는 것은 그분의 고통을 이용할 수 없는 인간입니다, 인간에게는 그러한 뜻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이 피를 모독할 것입니다. 그럴수록 피할 수 없고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영혼에 드리워진 상처일 것입니다.
사실 그분의 수난으로 은총을 얻을 사람은 몇 밖에 안 될 것이고, 대부분은 파멸의 길을 재촉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극단적인 고민으로 끊임없이 되물으십니다. “내 피는 어디에 쓰인단 말인가?”
그리고는 얻어맞으신 것처럼 땅에 쓰러지십니다.
그러나 그 몇 안 되는 사람들은 그분의 마음에 압박하기까지 하여 그분을 이 싸움터에 잡아두고, 그분의 수난과 죽음의 온갖 고통을 멸시하여, 그들이 승리를 쟁취하려 합니다.
이제 그분은 어떠한 위로도 받을 수 없는 처지에 이르십니다. 하늘도 그분께는 봉쇄되었습니다.
죄의 짐이 그분을 짓누르고 있음에도, 그분이 받으시는 대접은 냉랭하고 감사의 마음과도 거리가 멉니다. 숭고한 사랑은 그분 자신에게는 생소하기만 합니다.
사랑이 그분을 고문하는 가운데 그분은 죽음의 공포로 고민하십니다.
그분의 용모는 죽음에 질리시고 눈은 생기가 없으신 가운데 말로 다 할 수 없는 슬픔이 엄습합니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오, 나의 예수님, 당신의 말씀이 끝없는 고통 속에서 당신의 입술에서 떨어집니다. 당신은 영혼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는 말씀으로 어떤 장례를 암시하십니다.
공포가 그분을 덮치고 뒤흔들어 머리에서 발끝까지 전율케 합니다. 죽음을 앞둔 공포가 그분을 말할 수 없이 억누릅니다. 그리고 그 많은 죄인들의 악취가 그분을 메스껍게 합니다.
그분은 끝없는 이 번뇌 때문에 지고 마십니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예수님, 나의 위대하신 보증인이시여, 당신의 말씀이 제 마음에 준 충격이 어떠했겠습니까!
당신을 바로 일으켜 세워드릴 수만 있다면, 그리고 지켜드릴 수만 있다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당신이 받으시는 그 어마어마한 고문을 묵상하면서 저는 당신 편에 서서 거저 울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 예수님이시여!
오, 그분은 나의 부르짖음을 더 이상 듣지 않으십니다.
사랑은 그분으로 하여금 자신을 예리하게 판단하는 재판관으로 만듭니다.
그분은 기절하신 채 몸을 땅에 누이시고, 그분의 얼굴 전체에서, 그분의 온 몸에서, 피가 흘러 땅을 적십니다.
당신의 땀구멍 곳곳에서 번져 나오는 커다란 핏방울을 저는 이제야 봅니다. 그리고 이들이 모여서 당신의 거룩하신 몸을 타고 개울처럼 땅으로 흘러내림을 봅니다.
그분 얼굴은 더 이상 땅을 향하지 않으십니다. 두 팔을 땅위에 펼치시고, 손은 접으신 채 심장을 아래로 하여 몸을 눕히십니다. 죽은 이처럼 버려지신 가운데 그분의 피 한가운데 누우십니다. 얼굴은 피로 덮였고 눈은 반은 감으신 채 기진맥진하십니다. 입이 조금 열린 채 가슴은 팔딱이지도 않으며 심장은 멈춘 것처럼 쇠약해지셨습니다.
예수님, 나의 사랑하는 예수님,
저를 차라리 당신 곁에서 죽게 해주십시오.
하지만, 죽어가시는 당신 곁에서 저는 침묵으로나마 엉겁결에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신의 고통이 제 마음에 쓰며들어, 이제 저는 그 고통에 저 자신을 내맡깁니다.
눈물이 제 눈시울에 마릅니다.
저는 이 가공스러운 죽음의 공포와, 모든 것을 버리시고 스스로 낮추신 당신의 무한하신 그 사랑을 두고 일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하고 당신과 함께 탄식합니다.
그 숭고하신 피는 나의 사랑하는 예수님의 심장에서 스며 나옵니다.
고통에 충만된 분위기와 극단적인 쓰라림, 또 그분이 끝까지 버티시는 처절한 싸움에서 그 피가 그분의 심장에서 내몰리고, 모든 구멍에서 짜내어져 아래로 흘러내리면 그로써 땅은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숭고하신 피여, 처음으로 흘려주신 피여,
그 피를 내가 담으리로다.
내 심장의 잔으로 나 너를 담으리로다.
너, 그 피는 그분이 혼자서 흘리시게 된 부인할 수 없는 사랑의 증거가 아니던가.
너를 통하여 나는 내 스스로를 비출 것이며, 죄로 더럽혀진 모든 영혼들을 너를 통하여 비출 것이며 또한 너를 아버지께 봉헌하리로다.
그 피는 하느님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피로서, 흘러내려서야 땅을 깨끗이 하는 피로다.
그 피는 인간이 되신 하느님 아드님의 피로서, 우리의 죄로 손상된 정의를 바로잡은 뒤 하느님의 옥좌로 올라갈 피로다.
그리고 그 속죄는 그야말로 충분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정의가 바로잡혀졌을 때라도 예수님의 고통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아니, 예수님은 그분의 거리낌 없고 자비심에 찬 그 사랑을 결코 멈추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분 사랑의 무한하신 증거를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들 때문에 그분이 얼마나 큰 모욕을 당하셨는지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의 구원사업이 얼마나 넘치는 것인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 정의의 무한하심이 그 값진 피의 무한한 가치를 아쉬워하신다던가 또 그것으로 진정되신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들을 위해 고초를 겪으신 그 사랑으로 일이 다 끝나지는 않았다는 것을 불 보듯 환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분이 그 단계에서 그치지 않으시고 십자가상의 수치스러운 죽음에 이르기까지 두고두고 고초를 당하시겠다는 것을.…
아마 어떤 성직자나 속이 알찬 사람이라면, 그분을 올리브 동산에서 죽음의 공포로 밀어 넣으신 그 사랑의 어느 단편(斷片)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또 존중할 줄도 알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살면서 하늘나라보다도 세상일에 더 마음을 쓰는 사람은, 죽음과 싸우시는 그분의 극한투쟁을 한번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고통으로 기진하신 가운데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죽으시는 그분을 뵈며 그 거룩하신 피와 그 끔찍한 고뇌를 눈앞에 대면하여 가슴을 쳐봐야 할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분의 사랑의 마음에 다 보답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의식을 회복하신 그분은 다시금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그분 마음의 절규에 기꺼이 따르십니다.
그분은 그분의 죽음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절규에 따르십니다. 이것이 그들을 구원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그분에게 사형선고를 주실 때 하늘과 땅은 그분의 죽음을 보고 싶어 안달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분의 지극히 존귀하신 머리를 숙여 몸을 내어맡기십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십시오. 그러나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한 천사를 보내시어 예수님을 위로해주십니다.
불굴의 강력하신 하느님, 우주의 전능하신 하느님께 드려지는 한 천사의 위로나 도움이란 어떤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그분은 고난에 견딜 수 있게 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들의 약점을 취하십니다.
그분은 고통으로 충만되시고 죽어가는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피땀으로 얼룩지시며 죽음의 공포 속에 내맡겨지시는 끝없는 사랑의 놀라운 화신이 되십니다.
아버지께로 향하신 그분의 기도에는 두 가지 원의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분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그분의 원을 들으심은 그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위하여 그분의 죽음을 원하십니다.
천사가 예수님을 경외심으로 가득 찬 눈으로 뵈었을 때, 거기에는 피와 먼지가 구별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영원한 경지가 있었음을 저는 믿습니다.
천사는 그분께 겸허한 흠숭지례(欽崇之禮)로 하느님 뜻에 순종하는 힘을 바쳐드렸으리라 저는 믿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또 그분 스스로 자원하신 그 잔을 마시며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잔을 비우기로 죄인들의 이름으로 간청하십니다.
그분은 또 우리의 영혼이 그분의 영혼과 같이 비탄에 젖어 있을 때, 오직 기도로만 하늘의 위로를 청하도록 가르치고자 기도하셨습니다.
그분, 우리들의 힘이신 그분은 우리 편에 서실 준비가 되시고, 황송하게도 우리들의 모든 재난을 몸소 짊어지시기로 작정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이제 당신께서는 잔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도 다 마셔야 하십니다.
이제 당신께서는 그 가공할 죽음에 봉헌되시는 것입니다.
저는 당신과 삶이나 죽음에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떨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살아서는 당신께 내적으로 또 사랑으로 일치하여 따르다가, 당신과 더불어 그 환희에 이르기 위하여 골고타에서 당신과 함께 죽고자 합니다.
비애와 박해를 함께 받으며 저는 당신이 가시는 길을 수행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어느 날엔가는 저는 하늘의 그윽한 영광 속에서 당신이 겪으신 그 혹독한 고난을 찬송하고 감사하는데 합당한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께서는 힘차게 또 불굴의 모습으로 땅에서 몸을 일으키십니다.
이제 그분은 다시, 이 피의 희생을 그토록 갈망으로 희구하시는 그 예수님이십니다 ― “그 갈망과 희구여.”
그분은 흐트러진 머리를 가다듬으시고, 피로 얼룩진 얼굴을 말리시고 용감하게 그리고 결연하게 올리브 동산의 출구 쪽을 향하여 걸어가십니다.
어디로, 예수님, 어디로 가시는지요?
공포와 진저리, 노여움과 낙담, 회의와 경악으로 마비되시고 얽매여지셨던 당신의 영혼이 아니셨는지요?
당신 위에 덮친 그 어마어마한 죄악의 산더미 아래 벌벌 떠시던 당신을 제가 어찌 보지 못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당신께서는 그 힘차고 결의에 찬 모습으로 어디로 가시는지요?
어떤 섭리에 몸을 맡기시려하십니까?
여기서 당신은 제게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무기가 되어 나의 승리를 도왔도다. 내 정신이 인성의 나약함을 이겼도다.
기도를 통해 힘이 솟아난 나는 이제 모든 것을 맞서게 되었도다.
나의 모범을 따라, 내가 한 것처럼 너희도 하늘과 담판을 벌릴지어다!”
세 사도들은 아직도 자고 있습니다. 거기에 예수께서 가까이 가십니다.
밤이 깊은 지금 그들은 온갖 흥분과 또 앞으로 있을 처참하고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상황을 예감하고 피곤에 지쳐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습니다.
그들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악몽에 빠져, 흔들어 깨워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고 잠에 빠져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동정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
하지만 자기 제자들로부터도 버림받으신 것이 못내 서운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잠시 그 자리에 서셔서 다시 부르십니다.
“아직도 자고 있느냐?”
예수님의 발자국소리에 깬 세 사람은 겨우 눈을 뜹니다.
“그만하면 넉넉하다” 고 하시고 예수님은 말씀을 계속하십니다.
“자, 때가 왔다. 사람의 아들이 죄인들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일어나 가자.
나를 넘겨 줄 자가 가까이 와 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나의 벗이요 제자인 너희는 자고 있구나. 그러나 나의 원수들은 깨어서 나를 잡으려한다.
너, 베드로야, 너는 나를 죽음에까지 따라 올 힘이 있는데도 자고만 있느냐? 물론 너는 걸핏하면 약점을 드러내곤 했다. 그러나 이제 괜찮다. 너의 약점을 나는 벌써 알아들었고 너를 위하여 기도도 했느니라. 네가 통회했다면 나는 너의 힘이 되어 줄 것이고, 너는 나의 양들을 돌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너, 요한아, 너 또한 자고 있느냐? 너는 아까까지만 해도 너를 그렇게도 사랑하는 내 심장의 고동을 세고 있더니, 너도 자고 있느냐?
모두 일어나거라. 이제 가자! 더 이상 자는 시간이 아니다.
원수가 문 앞에 서 있구나. 지금은 어둠의 시간이니, 오너라, 그리고 가자.
나는 기꺼이 죽음을 택할 것이니라.
유다스는 나를 배반하기 바쁘구나.
그러나 나의 발걸음은 단단하고 틀림없이 앞으로 나아가니, 예언이 성취되는 것은 그 어떤 장애도 막지 못하리라.
나의 시간이 왔도다.
인간을 위한 위대한 자비의 시간이.
그리고 이제 일이 벌어져서, 사람의 발소리와 붉은 횃불이 올리브 동산 나무 사이로 가까워지고, 세 제자를 거느리신 예수님은 대담하게 그리고 유유히 발걸음 소리가 나는 그쪽으로 걸어가십니다.
* * *
오, 나의 예수님, 제가 미구의 재앙을 미리 보며 거기서 벗어나려 할 때 제게도 같은 힘을 주십시오.
그 힘을 주셔서 저도 당신처럼, 이 세상 귀양살이에서 당할 모든 고통과 비탄을 평화롭고 조용히 맞게 하여주십시오.
당신의 모든 공로와 고통, 당신의 속죄와 눈물을 하나로 하여주십시오.
그리하여 저도 당신과 더불어 제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노력하고, 당신 피땀과 당신 죽으심의 유일한 원천인 죄를 멀리하게 하여주십시오.
제 안에 있는 것으로서 당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파괴하여 주시고, 당신의 그 고통을 거룩한 사랑의 불로 제 마음에 달구어주십시오.
저를 당신께 친밀하고 달콤한 띠로 단단히 묶으셔서, 당신의 고통에서 제가 달아나지 않게 하여주십시오.
그리하여 저의 삶에 고통이 찾아올 때 당신의 마음 안에서 쉬게 하여주시고, 거기서 힘과 위로를 얻게 하여주십시오.
저는 오직 올리브 동산에 계시는 당신 곁에 머물고자 합니다.
당신 마음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욕심은 제가 갖지 않게 해주십시오.
저의 영혼이 당신의 피에 취(醉)하게 해주시고, 당신 고통의 빵에 익숙하게 해주십시오.…
아멘.
역자 부록 비오 신부 사후의 오상
(1) 비오 신부의 오상은 그 사후에 홀연히 사라져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오상의 비오 신부 ― 비오 신부를 만난 사람들의 증언” (요한 A. 슈그 신부 엮음 / 송열섭 신부 옮김 / 가톨릭출판사 / 1997. 8. 1. 초판)의 21 쪽에 그 경위가 나타나 있다.
“… 그분이 돌아가시기 약 석 달 전에 사실상 오상에서 피가 멈추었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신 후 ― 거의 돌아가시는 순간에 ― 오상이 몸에서 없어졌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자코모 신부가 찍은 사진으로 알 수 있습니다. 시신이 차가워지자, 상처들이 희미해지더니 흔적이 없어져버렸습니다. 그분의 손과 발의 살갗이 핏자국도 없이 아기의 살갗처럼 부드러워지더니 상처들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2) ‘눈물 흘리시는 마리아님’ 을 모신 일본 아키타 성체봉사회의 야수다 테이지(安田貞治) 신부가 쓴
“(秋田の聖母マリア) 아키타의 성모 마리아” (성체봉사회간, 1986)에도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98 쪽).
“이태리 카푸친회의 비오 신부는 20세기의 성흔자(聖痕者)로서 유명했다. 그의 경우는 그리스도와 똑같이 꿰뚫어진 양 수족과 늑간의 상처로부터 출혈이 계속되어 애처로웠는데, 그 오상은 그의 사후 홀연히 사라져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숨을 거둔지 10 분 후에 촬영한 사진을 보면 손과 발바닥은 완전히 희고 매끈매끈하게 되어 있었다.…”
(3) 비오 신부 사후의 오상에 관한 ‘소식’ 은 이태리의 루이지나 시나피 (Luigina Sinapi, 1916-1978)의 삶에 관한 책에 언급되어 있다. 루이지나 역시 투시력을 가진 동정녀였는데, 그녀는 당시의 파첼리 추기경이 교황이 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한 바도 있고(그 후의 비오 12세, 재위 1939-1958), 비오 신부와는 긴밀한 영적 교류를 가졌던 사람이다. 시노 베르가 쓴 그녀에 관한 불어판에서 독일어로 옮긴 책,
Chino Bert: Luigina Sinapi, Liebesopfer für die Welt / Parvis-Verlag / 1989
“시노 베르: 루이지나 시나피, 세상을 위한 사랑의 희생제물” (빠르뷔 출판사, 1989)의 98/99 쪽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보인다.
“… 1968년 8월 23일, 비오 신부는 루이지나의 고해성사 뒤에, 자기는 한 달 뒤에 죽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입밖에 내지 말아요.’ 루이지나는 놀라서 물었다. ‘신부님, 신부님이 안 계시면 우리는 어떻게 하지요?’ 비오 신부는 차분히 말했다. ‘감실 앞에 나가십시오. 당신은 예수님 안에서 나도 보게 될 것입니다!’
비오 신부는 정확히 한 달 뒤인 9월 23일에 운명했다! 그가 죽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루이지나는 그것을 성모님께 여쭈었는데, 성모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교회의 이 어려운 시기에 큰 희생이 필요했습니다!’
그해의 성모님 축일인 10월 11일, 성모님은 루이지나에게 비오 신부의 승천을 보여주셨다. 그녀는 비오 신부가 하늘로 올라가, 환성을 올리는 수많은 영혼의 영접을 받는 광경을 보았다. ‘당신 덕에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날, 그리고 그와 비슷한 기회에 루이지나는 비오 신부가 성모님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오상으로부터는 빛이 다발을 이루어 퍼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러나, 비오 신부의 오상은 그의 사후에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사실을 두고 정말 의견들이 분분했던 것이다.
오상에서 빛을 발하는 비오 신부를 보며 루이지나는 성모님께 그 이유를 여쭈었더니, 성모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비오 신부는 자기의 오상이 하다못해 사후에는 아물었으면 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겸손한 사람이 있는지요. 물론 오상의 상처는 단지 겉으로만 사라졌습니다. 안으로, 뼈 사이로는 여전히 못자국을 볼 수 있고, 심장 역시 뚫어진 채 입니다. 여러분은 그의 유해를 점검할 때가 되면 그것을 볼 것입니다.’”
역 자 후 기
“신비가” 의 명성으로 알려졌던 비오 신부(1887-1968)의 일생은 우리 가톨릭 교회에 세찬 찬반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상식을 뛰어넘는 그의 언행을 경험한 사람들은, 신앙의 실체와 직면하는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신앙의 근본 문제를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교회 일각에서 일고 있던 여러 초자연적 현상의 소문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을 경계하는 사이, 비오 신부에 대한 교회의 시각이 언제나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람들이 비오 신부의 실체를 잘 모르고 있다는 말이 되기도 했다.
이 책은 오스트리아의 프란치스코회 신부 P. Odilo Altmann(1893-1973, OFM)이 쓴 “Pater Pio? Fragezeichen und Rufzeichen”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비오 신부에게 얽힌 물음표(?)와 감탄표(!) 가운데 어느 한쪽에 치우칠 수 없는 현상을 대비하다가, 끝내 감탄표를 확인하는 신중한 과정이 엿보여서, 비오 신부를 말할 때의 당혹감을 읽는 느낌이다.
불과 80 면의 포켓판 원문에 긴 사연이 들어갈 수는 없겠으나, 비오 신부의 등장과 그 뒤의 행장이 조밀하게 소개되고, 특히 끝에 수록된 비오 신부의 “신앙고백”에 해당하는 성시간의 묵상 역시 소중하다. 1961년의 저술이고, 그뒤의 “사태”에 언급할 수 없는 시점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생명력은 그대로 살아있다. 그러나, 어차피 비오 신부에 대한 이야기를 단 한 권의 책에다 다 표현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을 것이다. 비교적 상세한 긴 설명이 있는 반면에, 불과 몇 줄밖에 안되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인 것이 그 사정을 말하고 있다. 사실, 그 몇 줄밖에 안되는 짧은 기사라도 그 당사자들로서는 모두가 엄청난 체험이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비오 신부의 행적을 단순히 “그런 일이 있었다”는, 마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비오 신부를 읽으면 특별한 은총으로 그를 움직이신 주님의 섭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 자신의 말대로, 그가 한 모든 일은 결코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 사제가 주님의 오상을 50 년 이상 몸에 지닌 채, 그 찢어지는 고통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진력했다는 사실은, 그러한 방법을 택하신 하느님의 특별하신 숨결을 직감하게 해주는 세기적 사건이었다. 그 많은 시간을 고해소에 앉아서 그 많은 회개를 일구어 낸 비오 신부는, 과연 “회개를 위한 사도”로서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준 20세기의 위대한 사제였다.
이 책은 흥밋거리로 읽는 책이 아니다. 소설도 아니다. “믿거나 말거나” 하는 식의 기행문도 아니다. 이것은 엄연한 하나의 도큐먼트이다. 어느 날, 교회가 비오 신부를 성인 반열에 올린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그가 존경했던 교부 프란치스코 성인에 못지 않은 광채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이로써 “마치 딴 세상 사람 같았던” 비오 신부의 진가가 드러날 때, 우리는 그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더 가까이 알아모시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오 신부의 “절대적인 신앙”을 눈앞에 보며, 지금까지의 우리는 무엇이었던가 하고 다그친 성찰이 곧바로 회개로 이어지기도 했다. 거기에 뒤따른 것이 사랑이었고, 이 사랑은 자기희생과 봉사를 의미했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역자는 이런 번역작업에는 정말 맞지 않은 사람임을 통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용을 부린 것은, 위의 비오 신부를 우리 주위에 알리는 일은 더 늦출 수 없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역자는 이 책을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 29)”는 말씀을 아직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
대구, 1994. 8.21.
최 옥 식 (바울로)
* 부기. 비오 신부님은 1999년 5월 2일 시복되시고, 이어 3 년 후인 2002년 6월 16일에 시성되셨습니다.
주님께 찬미와 영광!!
비오 신부? ― 의문과 감탄 ―
오딜로 알트만 신부, OFM. 지음
최 옥 식 옮김
P. Odilo Altmann, OFM
PATER PIO? “Fragezeichen und Rufzeichen”
6. Auflage, 1961, DRITTORDENS-VERLAG ALTÖTTING
1. 의문표 1
2. 감탄표 2
3. 생시의 “성인?” 2
4. 고향 그리고 성장기 3
5. 예수 그리스도의 오상(五傷) 6
6. 은총의 성모 성당 7
7. 비오 신부의 미사 8
8. 고해소에 사로잡히다 9
9. 진실한 회개 11
10. 연쇄반응 12
11. 기적의 치유? 14
12. 두 곳에 동시에? 15
13. 카푸친회 수도자의 자선사업 17
14. 이 책이 의도하는 것 18
15. 비오 신부와 성시간(聖時間) 20
역자 부록 32
역자 후기 33
Imprimi potest: Salzburg, am 20. Mai 1961
Fr. Berardus Jäger, O.F.M., Vicarius Ministri Provincialis
Imprimatur: Nr. 3240, Passau, den 6. 6. 1961
Dr. Dachsberger, G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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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비오 신부 이야기(1)
제 1 편 비오 신부? - 의문과 감탄 / P. Odilo Altmann, OFM
제 2 편 비오 신부의 도움 / Herbert Weichselbraun
제 3 편 비오 신부 안내 / Dr. Berta Maria Kiesler
최옥식 바울로 번역
사진 설명 (숫자+: 원서 page 다음 면에 있는 사진의 설명)
4+ 아버지 오라찌오와 어머니 쥬셉파
10+ 산 조반니의 왕년의 작은 수도원과 성당
18+ 젊은 비오 신부
24+ 산 조반니 로톤도
30+ 수도원 정원의 비오 신부
36+ 작은 구 성당 옆의 새 마리아 성당
42+ 새 마리아 성당의 내부
50+ 병원과 새 성당
56+ 유명한 테너 벤야미노 질리, 비오 신부에게 노래를 선사
62+ 비오 신부 첫영성체의 어린이들과 함께
68+ 고뇌의 표정
76+ 산 조반니에 오신 “순방”의 파티마-성모님. 중병이었던 비오 신부의 갑작스런 치유는 성모님의 전구에
힘입었다.
84+ 1959년의 성탄절
90+ 어린이와의 만남
98+ 신부의 안광
104+ 축복하는 비오 신부
* 저자 P. Odilo Altmann(OFM, 1893-1973) 신부:
오딜로 알트만 신부는 오스트리아 티롤 관구의 프란치스코회 소속으로서, 50 여 권의 저서와 2000을 넘는 기고문과 수많은 강론과 피정지도 등으로 잘 알려졌으며, 특히 십자가의 성 요한과 대 데레사의 영성에 깊이 공감한 사제였다. 그의 프란치스칸 수도자 특유의 명랑함과 파격적인 유머는 그를 아주 친근하고 유명한 인물로 만들었다.
“프란치스코회 티롤 관구회보”, 136호, 44-49면, 1973년 5월호에서 발췌
첫댓글 너무 긴 문장이라 읽다가 중도 포기 시간내어서 다음에 마져 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