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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보수적인 경제학자 스티븐 렌즈버그의 글입니다. 저는 4년전, 이글을 읽고 경제학을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생각할 거리가 많은 글입니다. 사실, 이글은 저에게 통렬한 자극을 주었습니다.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아마추어 번역이어서, 번역이 썩 훌륭하지는 않습니다. 아래에 영어 원문도 퍼왔습니다. 영어가 편하신 분은 영어로 읽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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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환경주의자가 아닌가?
경제학이라는 과학과 생태학이라는 종교
스티븐 렌즈버그
내 딸은 4살 때 두 번째의 졸업장을 받았다. 딸은 두 살 때 콜로라도주에 있는 유아원의 아기방에서 최우등생으로 졸업했다. 곧 우리가 뉴욕주에 돌아왔을때 내 딸은 유태인지역센터 (Jewish Community Center)의 유치원에 입학하여, 2년 뒤에 졸업하였던 것이다.
유치원의 졸업식은 '지구의 친구들'이란 제목이었는데, 나는 여기서 네 살 짜리와 다섯 살 짜리들로부터 안전한 에너지원, 대중교통, 그리고 재활용의 중요성에 대해 설교를 들었다. 계속 반복되는 주문은 '이 지구에 사는 특권에는 지구를 돌볼 책임이 따른다'는 뜻으로 '특권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이었다. 물론 미국 헌법을 기초한 토마스 제퍼슨 (Thomas Jefferson)은 이 지구에 사는 것이 특권이 아니라 양도될 수 없는 천부적 권리라고 생각하였겠지만, 아마도 제퍼슨은 유치원에 다닌 적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나는 전에도 딸에게서 이런 이야기들을 몇 번 들었고, 딸애의 이러한 세뇌는 가끔씩 풀어주면 된다고 치부해 왔다. 그런데 책을 읽을 나이도 되지 않는 어린애들이 이러한 정치적 교리를 반복하여 암송하는 것을 듣다보니, 나는 선생님에게 한마디 해야 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유치원 선생님은 종교에서의 교리문답 같은 이러한 이야기에서, 어떤 점이 맘에 들지 않는지를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하였다. 나는 대답하기를 거절했다. 환경주의가 점차 개인을 침해하는 국교와 같은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서, 우리 반대론자들은 우리들이 정상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듣는데 대해 점차로 민감해지고 있다.
내 딸 유치원의 순진한 환경주의는 전설, 미신, 종교의식이 강압적으로 주입된 혼합이다. 이는 종교적 원리주의 중에서도 가장 문제 있는 일파들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나쁜 종교에 대한 처방은 좋은 과학이다. 점성술에 대한 처방은 과학적 방법이며, 순진한 창조론에 대한 처방은 진화생물학이며, 순진한 환경주의에 대한 처방은 경제학이다.
경제학은 상호 경쟁하는 선호를 다루는 학문이다. 환경주의는 "선호"의 문제를 "도덕"의 문제로 비약시켜 과학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다. 자연녹지를 개간, 포장하여 주차장을 만들자고 하면, 자연녹지를 좋아하는 사람과 편리한 주차장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야기된다. 분쟁이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은 정치 및 경제제도를 변화시켜 자신의 선호를 관철하려고 시도한다. 한쪽은 승리하고 다른 한 쪽은 패배해야 하기 때문에 이 싸움은 치열하고 때로는 가혹하게 진행된다. 이 모든 것들은 통상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지구의 날'이 제정된 이후 25년 동안에, 새롭고 추잡한 현상이 나타났다. 한 편이 자기의 선호는 정의롭고 다른 쪽의 선호는 악하다는 확신을 하게 된 것이다. 경제학이라는 과학은 이러한 도덕적인 우월성을 주장하는 행위를 피하지만, 환경주의라는 종교는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경제학은 우리로 하여금 근본적인 대칭성을 직시하게 한다. 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쌍방이 동일한 자원을 서로 다른 방법으로 사용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잭(Jack)은 질(Jill)의 주차장 대신에 자연녹지를 원하고, 질은 잭의 자연녹지 대신에 주차장을 원한다. 문제를 이와 같이 설명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볼 때 중립적이며, 잭과 질의 어느 한 쪽에 더 높은 도덕적인 위치를 부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대칭성의 문제를 좀 더 깊이 살펴보자. 환경주의자들은 주차장을 건설하기로 하는 결정은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자연녹지는 주차장에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들은 옳다. 그러나 주차장을 건설하지 "않기로" 하는 결정도 "마찬가지로"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우리가 오늘 주차장을 건설하지 않는다면, 내일 주차할 수 있는 나의 기회는, 내일 자체가 한 번 지나가면 영원히 사라지듯이 역시 돌이킬 수 없이 사라진다. 내일보다 먼 미래에 주차할 수 ?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라진 나의 기회를 적절히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환경주의자들은 우리가 자연녹지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를 우리 자신보다는 미래세대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미래세대가 주차장 보다 자연녹지를 상속받는 것을 더 좋아하리라고 생각할 어떤 이유가 있는가? 이는 정직한 태도를 요구하는 과학적 연구에서 가장 먼저 제기되어야 할 의문중의 하나이다.
환경주의자들의 또 다른 논리는, 주차장을 건설하려는 사람에게는 선호가 아니라 이윤이 동기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반론을 할 수 있다. 첫째, 주차장 개발업자의 이윤은 고객의 선호 때문에 나타난다. 따라서 환경주의자와 분쟁하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볼 때 주차장 개발업자가 아니라 주차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둘째, 이 논리는 어찌되었건 이윤에 대한 선호가 자연녹지에 대한 선호보다 도덕적으로 열등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는 바로 이러한 논리에서는 포함되지 않아야 할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행위인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돌이킬 수 없다'는 주장, '미래세대'에 대한 주장, '이윤이 아닌 선호'의 주장들은 모두 정직한 태도로 따져보면 허물어지고마는 엉터리 구분법에 근거하고 있다. 그런데도 왜 일부 환경주의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반복하는가? 아마 그들은 정직하게 따져보는데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많은 경우 그들은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전제하에서 "출발하고", 사람들을 자신들의 대의에 따르도록 하는 신성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지성적으로는 정직하지 못한 선전을 널리 퍼뜨릴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과학의 특징은 한 논리를 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성실하게 따라가는 것이다. 반면 어떤 종류의 종교의 특징은 논리에 호소하는 듯 하다가도, 결론이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흐르면 재빨리 후퇴해 버리는 것이다. 환경주의자들은 산림의 중요성에 대한 수많은 통계를 인용하고는 곧바로 종이를 재활용하는 것이 좋은 생각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정반대의 결론도 역시 똑같이 좋은 생각이다. 우리가 쇠고기를 재생하는 기술을 발명한다면 소의 숫자는 증가하지 않고 감소할 것임이 확실하다. 만약 목장 주인으로 하여금 더 많은 소를 사욕하도록 하려면, 당신은 쇠고기를 더 많이 먹어야 한다. 종이를 재활용하면 제지회사는 나무를 심을 인센티브가 적어지고 따라서 산림은 줄어들 것이다. 만약 당신이 큰 산림을 원한다면,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종이를 가능한 한 많이 낭비하거나, 벌목산업에 대해 보조금을 주자고 로비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환경주의자들에게 말해 보라. 나 자신의 경험으로 말하자면, 당신은 가가호호 돌아다니는 전도사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하면서도, 자신은 신의 계시를 확실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짓는 미소와 유사한 표정을 보게 될 것이다.
이는 환경주의자들, 적어도 내가 만났던 환경주의자들은 산림을 유지하는데 대해 실제로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관심이 있었다면, 그들은 재활용의 장기적 효과를 진지하게 조사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그렇게 할 의사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진정한 관심은 재활용의 종교의식 그 자체이지 그 결과가 아니기 ?문이다. 자신이 희생하고, 또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욕구는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충동이다.
환경주의자들은 발암성이 있는 살충제의 사용을 금지하자고 주장한다. 그들은, 살충제가 금지되면 과일과 야채가 더 비싸지고, 사람들은 과일들을 덜 먹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암 발생률이 증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간과한다. 그들이 암 발생률을 진정으로 감소시키기 원한다면, 그들은 이러한 효과를 감안해야 한다.
환경주의는 종말론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그들은 생물이 멸종되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결과가 초래되므로, 감히 멸종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위험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예상하지 못한 결과는 반대의 효과를 가져 올 수도 있다. 경제학이 주는 교훈중의 하나는 우리가 잘 모를 때는 실험이 상당히 유용하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멸종의 효과를 전혀 모른다면, 일부의 생물종류를 일부러 소멸시켜, 나타나는 결과를 관찰하면 많은 가치 있는 지식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정말 과학자들이 멸종의 효과를 모르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정말로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신들의 목적에 부합할 때는 전혀 몰랐다고 "능청을 떨고", 자신들의 주장이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올 때는 발을 빼버리는 환경주의자들의 태도이다.
1992년 10월 전혀 새로운 종의 원숭이가 아마존 우림지역에서 발견되었고 언론들은 이를 우림지역이 반드시 보존되어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며 떠받들었다. 나 자신의 생각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는 오랫동안 이 원숭이에 대해 알지 못하고 살아왔고, 한번도 그 원숭이가 없어서 섭섭해 본 적도 없다. 그것이 발견됨으로써 나의 삶이 풍요롭게 된 것은 아니며, 만약 그 원숭이가 발견되지 않고 멸종되었으면, 내가 굉장히 섭섭해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다른 생물들이 있는데, 아마도 그것은 내가 동물원이나 또 어린이 동화책에서 보았던 정답던 기억 때문일 것이다. 한 예는 사자이다. 나는 사자들이 사라진다면 정말 유감일 것이며, 이들을 보존하기 위해 내 자신이 연간 약 50달러를 지불할 용의가 있다. 그러나 나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지불할 의사는 없다. 만약 당신이 사자에 대해 나보다 관심이 적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차이를 용납하며 당신을 죄인이라며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사자에 대해 나보다 더 관심이 많다면, 나는 당신이 내가 지금 보이고 있는 예의를 나에게 보여 주기를 원한다.
현재의 정치적 환경에서는 미국 정부는 미국인의 복지를 우선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 금언으로 받아들여진다. 또한 공기 오염은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나쁜 것이라는 말도 종종 금언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미국인들은 세계은행 (World Bank)의 수석 경제학자가 공해산업을 제3세계로 이전시키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했을 때, 이구동성으로 환영해야 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에게는 이는 미국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후생을 증가시킬 수 있는 명백한 기회이다. 부유한 국가의 사람들은 더 맑은 공기라는 사치를 위해 소득을 희생할 여유가 있다. 반면 가난한 국가의 사람들은 소득을 증가시키기 위해 기꺼이 좋지 않은 공기를 마시려 한다. 그러나 세계은행의 경제학자가 제안한 내용이 언론으로 흘러 들어 갔을 때, 일부 환경단체들은 발끈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오염은 죄악의 한 형태이다. 그들은 우리의 후생을 개선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려고 한다.
여기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환경문제에 대해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안하더라도 그것이 환경주의자들의 도덕적 우월감을 고양시키지 않는 한, 환경주의자들은 그 제안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벌목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살충제를 사용하고, 계획에 따라 멸종시키고, 멕시코에 공해를 수출하는 것 등은 환경주의자의 교리문답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대중 교통수단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촉매 컨버터를 사용하고, 계획에 따라 연료절약기준을 마련하고, 미국 북서부지역에서 산업을 수출하는 것 등이 환경주의자들의 절대적인 교리의 일부이다. 환경주의자들의 해결책들은 실제적인 유용성이 아니라 환경주의의 교리에 일치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분류되는 것이다.
1992년 대통령선거를 몇 주 앞둔 시점에, 조지 부시 대통령은, 정부의 간섭을 줄여야 한다는 공화당의 후보였으면서도, 물을 절약한다는 명목으로 판매되는 샤워꼭지의 종류를 제한하는 법안에 서명하고 이를 널리 선전했다. 미국인권연합 (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 만약 이 법이 허용되는 샤워꼭지의 종류를 제한하지 않고 허용되는 기도서의 종류를 제한했더라면, 평상시에는 줏대 없는 부시 대통령조차도 서명을 거부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거부하지 않았더라도 미국인권연합이 들고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학이란 과학에서는 일반 기도서에 대한 선호와 강력한 샤워 물줄기에 대한 선호 사이에 어떤 기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고 시사하는 내용이 없다. 오히려 정반대로, 경제학적 사고방식을 가지면 이 둘 사이에는 어떤 근본적인 차이도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샤워꼭지 법안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물을 낭비하는 샤워를 막는 법률은 소수 종교를 탄압하는 법률이라기보다는 혼잡을 막는 법률에 가까운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이 법률은 이기적인 개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피해를 끼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안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부시 대통령이 법안을 서명하게 된 동기라면, 그는 그때 엉터리 경제학의 제물이 된 것이며, 그의 삶을 살펴보면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쓰레기 투기행위나 기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를 금지하는 데는 정당한 경제적 이유가 있다. (물론 이도 지나치면 곤란할 것이다. 복잡한 슈퍼에 들어가는 행위는 다른 모든 고객들에게 피해를 주지만, 아무도 그것을 법률로 규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미국의 대부분 지역에서 물을 사용하는 행위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물 값을 "지불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신이 물을 낭비하며 샤워를 한다면 물값을 상승시켜 물을 구입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지 모르나, 당신의 샤워는 구입자에게 주는 피해와 정확히 동일한 액수만큼 판매자에게 이익을 준다. 당신은 "판매자"보다 구입자를 더 좋아할 ?만, 물 사용을 억제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이는 "모든" 물건의 소비를 제한할 논리가 되어버리며, 이 중에는 에너지 절약형의 샤워꼭지도 포함될 것이다.
다른 강압적인 이데올로기처럼 환경주의도 특히 어린이들을 표적으로 삼는다. 내 딸이 유치원에서 초등학교로 전학한 후, 선생님은 내 딸에게 종이컵을 버리지 말고 씻어 사용하여 자원을 보존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나는 딸에게 시간도 역시 값진 자원이고 또 시간절약을 위해서는 컵 몇 개를 버릴 가치가 있다고 설명하였다. 선생님은 내 딸에게 대중교통이 에너지를 절약하므로 좋은 것이라고 가르쳤다. 나는 딸에게 자가용의 안락함을 위해서는 에너지의 일부를 희생할 가치가 있다고 설명하였다. 선생님은 내 딸에게 자연녹지가 쓰레기 매립장으로 변하지 않도록 종이를 재활용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나는 딸에게 쓰레기를 일일이 분리하지 않는 사치를 위해 일부의 자연녹지를 희생할 가치가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 모든 경우에 딸애의 다섯 살 짜리 두뇌는 나의 논리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딸이 주입식 교육을 몇 년 더 받으면 그 선생님처럼 마음이 굳어져 마침내 나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게 될까봐 걱정하고 있다.
극단적 환경주의자들이 어린이들의 마음을 파고 들 때 사용하는 가장 파렴치한 술책은, 자신들의 정통성에 도전하는 모든 것을 선과 악 사이의 투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토요일 아침에 방영되는 만화영화에서는, 오염이 유용한 활동의 필수적인 부산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염시키는 행위 그 자체만을 위해 오염시키는 악당을 등장시킨다. 이는 이 비난받을 거짓말을 영원히 지속시키는 행위이다. 미국의 정치적 전통에서는 반대자의 인격을 손상시키면서까지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전통은 그 설득하는 대상이 어린아이일 경우에 더욱 철저하게 준수되어야 한다. 환경주의자들은 마침내 양심도 저버린 것인가?
경제학은 가장 좁게 해석하면 가치가 배제된 학문이다. 그러나 경제학은 또한 생각하는 방법의 하나이고, 이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공식적인 논리를 초월하는 어떤 영향을 미친다. 인간이 가지는 관심의 다양성이 그 주제이기 때문에, 경제학 분야는 관용과 다원주의 같은 가치들이 자라나는 기름진 토양이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경제학자들은 다양한 선호, 생활방식, 의견에 대하여 유난히 개방적인 태도를 가진다. '직업윤리' 라든가, '절약의 미덕'과 같이, 가치판단을 전제로 하는 진부한 문구들은 경제학과는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인간행동을 이해하는 것이며, 이해한다는 것은 배려하는 것과 크게 멀지 않다.
졸업식장에서의 대립 이후, 나는 딸애의 선생님에게 편지를 보내 종교논쟁을 하자는 그녀의 요청을 내가 왜 거절했는지를 설명하였다. 편지에 수록된 의견들 중 일부는 직업적인 의견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편지는 무엇보다도 경제학자들이 평소에 상대방에게 베풀고, 또 상대방으로부터 기대하는 그러한 수준의 관용을 요청하는 편지이다. 그래서 나는 경제학적 사고방식이 한 경제학자의 사고를 어떻게 형성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예로서 이 편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레베카 선생님 귀하:
우리가 콜로라도주에 살았을때 내 딸 케일리(Cayley)는 반에서 유일한 유태인 어린이였습니다. 또한 회교를 믿는 애들도 두셋 있었습니다. 가끔씩, 그리고 특히 성탄절이 가까워지면 선생님들이 이 종교적 다양성을 잊고는, 기독교를 믿는 애들에게만 적합한 말씀을 했습니다. 이런 말씀은 드물었고, 또 우리는 집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은 서로 다른 것을 믿는다고 설명하여 해결하였으므로, 우리는 처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아이들 앞에서, "산타가 여러분 집에 오지 않으면 여러분은 아주 나쁜 어린이라는 뜻입니다"라고 이야기 한 것을 듣고 나서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이 말은 산타가 분명히 찾아오지 않을 회교 집안의 어린이가 듣는 앞에서 언급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우려를 선생님들께 전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사과했고 더 이상의 사건은 없었습니다. 나는 그 선생님들이 어떤 주의를 주입시키려는 의도가 전혀 없는 착하고 솔직한 분들이었고, 또 그 사건은 선생님들이 한 지방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사람들이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을 접해보지 않아 순진하게 의식 없이 한 말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아마 올해 유태인지역센터(JCC)에서 우리가 부닥쳤던 문제의 저변에도 동일한 종류의 별 뜻 없는 순진함이 깔려있었을지 모릅니다. 콜로라도주에서 케일리의 선생님들이 종교에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던 것처럼, JCC의 선생님들도 정치에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으셨는지도 모르지요.
저는 그 다양성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히고자 합니다. 우리는 환경주의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환경주의자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우리는 환경주의를 회교원리주의 또는 마약전쟁과 유사한 일종의 집단 히스테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재활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딸에게 재활용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딸에게, 재활용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사람이나 재활용을 강요하는 사람은 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저는 케일리의 콜로라도주 선생님들에게 우리가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알려준 것과 같은 목적으로 이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 선생님들 중 일부는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을 접한 적이 없었지만 곧바로 적응했습니다.
콜로라도주 선생님들은 자신들이 전파하던 믿음을 우리와 몇몇 가족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즉각 사과하고 중지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저에게 기독교 정신의 어떤 부분에 대해 동의하지 않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해 우리의 견해를 바꿀 수 없고, 또 그렇게 할 권리도 없으며, 특히 우리 애에게 다른 견해를 반복적으로 주입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했을 뿐입니다.
저는 제가 유치원 졸업식에서 선생님과 대립했을 때 선생님께서 보이신 반응과 이 사실을 비교해 봅니다. 선생님께서는 애들에게 가르친 내용의 어떤 점에 대해서 제가 동의하지 않는지 알고 싶어 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질문을 하실 선생님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환경주의 내용은 기독교의 교리만큼이나 우리에게는 생소합니다. 저는 콜로라도주 선생님들과 함께 자세한 신학적 논쟁을 벌일 의사가 없었고, 그들은 감히 저에게 논쟁을 하자고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단지 그들에게 그 문제를 더 이상 전혀 거론하지 말라고 요청하였고, 그 문제는 종결되었습니다.
저는 몇 가지 이유에서 현재의 상황을 콜로라도주에서 접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콜로라도주에서는 문제가 가끔 우연히 그러한 얘기가 나온 것 뿐이었습니다. 반면 JCC에서는 하나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반복적으로 주입시키고, 글자 그대로 애들이 할 말과 안할 말을 정해주고 있었습니다. 둘째, 선생님들께서는 이 세상에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셋째, 저는 솔직히 말해 제 딸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보다 환경주의자가 되는 것을 훨씬 더 걱정하고 있습니다. 넷째, 현재 우리는 앞뒤가 막힌 전제군주가 기독교를 강요할 위험을 겪고 있지 않지만, 환경주의에 관해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곳 지방정부는 저에게 신약성경을 보내지는 않지만, 저에게 재활용함을 보내고 있습니다.
비록 저는 이 문제들에 대해 토론을 벌이지 않기로 맹세했지만, 우리가 토론을 벌일 때 선생님께서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듯한 한 가지 의문에 대해 대답하고 싶습니다. 특권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데 제가 동의하냐고요? 대답은 아니요 입니다. 저는 책임이란 사람들이 그것을 자발적으로 부담할 때 비로소 발생한다고 믿습니다. 저는 또한 서로간에 실제로 계약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데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책임'에 대해 설교하는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뭔가 좋지 않은 일을 꾸미고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제 딸에게 그런 사람을 조심하라고 말합니다. 비록 그들이 다른 면에서는 많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유치원 선생님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스티븐 렌즈버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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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I Am Not An Environmentalist:
The Science of Economics Versus the Religion of Ecology
Excerpt from
The Armchair Economist: Economics & Everyday Life
by Steven E. Landsburg
(pp. 223-231)
At the age of four, my daughter earned her second diploma. When she was two, she graduated with the highest possible honors from the Toddler Room at her nursery school in Colorado. Two years later she graduated from the preschool of the Jewish Community Center, where she matriculated on our return to New York State.
At the graduation ceremony, titled Friends of the Earth, I was lectured by four- and five-year-olds on the importance of safe energy sources, mass transportation, and recycling. The recurring mantra was "With privilege comes responsibility" as in "With the privilege of living on this planet comes the responsibility to care for it." Of course, Thomas Jefferson thought that life on this planet was more an inalienable right than a privilege, but then he had never been to preschool.
I'd heard some of this from my daughter before and had gotten used to the idea that she needed a little deprogramming from time to time. But as I listened to the rote repetition of a political agenda from children not old enough to read, I decided it was time for a word with the teacher. She wanted to know which specific points in the catechism I found objectionable. I declined to answer. As environmentalism becomes increasingly like an intrusive state religion, we dissenters become increasingly prickly about suggestions that we suffer from some kind of aberration.
The naive environmentalism of my daughter's preschool is a force-fed potpourri of myth, superstition, and ritual that has much in common with the least reputable varieties of religious Fundamentalism. The antidote to bad religion is good science. The antidote to astrology is the scientific method, the antidote to naive creationism is evolutionary biology, and the antidote to naive environmentalism is economics.
Economics is the science of competing preferences. Environmentalism goes beyond science when it elevates matters of preference to matters of morality. A proposal to pave a wilderness and put up a parking lot is an occasion for conflict between those who prefer wilderness and those who prefer convenient parking. In the ensuing struggle, each side attempts to impose its preferences by manipulating the political and economic systems. Because one side must win and one side must lose, the battle is hard-fought and sometimes bitter. All of this is to be expected.
But in the 25 years since the first Earth Day, a new and ugly element has emerged in the form of one side's conviction that its preferences are Right and the other side's are Wrong. The science of economics shuns such moral posturing; the religion of environmentalism embraces it.
Economics forces us to confront a fundamental symmetry. The conflict arises because each side wants to allocate the same resource in a different way. Jack wants his woodland at the expense of Jill's parking space and Jill wants her parking space at the expense of Jack's woodland. That formulation is morally neutral and should serve as a warning against assigning exalted moral status to either Jack or Jill.
The symmetries run deeper. Environmentalists claim that wilderness should take precedence over parking because a decision to pave is "irrevocable." Of course they are right, but they overlook the fact that a decision not to pave is equally irrevocable. Unless we pave today, my opportunity to park tomorrow is lost as irretrievably as tomorrow itself will be lost. The ability to park in a more distant future might be a quite inadequate substitute for that lost opportunity.
A variation on the environmentalist theme is that we owe the wilderness option not to ourselves but to future generations. But do we have any reason to think that future generations will prefer inheriting the wilderness to inheriting the profits from the parking lot? That is one of the first questions that would be raised in any honest scientific inquiry.*
Another variation is that the parking lot's developer is motivated by profits, not preferences. To this there are two replies. First, the developer's profits are generated by his customers' preferences; the ultimate conflict is not with the developer but with those who prefer to park. Second, the implication of the argument is that a preference for a profit is somehow morally inferior to a preference for a wilderness, which is just the sort of posturing that the argument was designed to avoid.
It seems to me that the "irrevocability" argument, the "future generations" argument, and the "preferences not profits" argument all rely on false distinctions that wither before honest scrutiny. Why, then, do some environmentalists repeat these arguments? Perhaps honest scrutiny is simply not a part of their agenda. In many cases, they begin with the postulate that they hold the moral high ground, and conclude that they are thereby licensed to disseminate intellectually dishonest propaganda as long as it serves the higher purpose of winning converts to the cause.
The hallmark of science is a commitment to follow arguments to their logical conclusions; the hallmark of certain kinds of religion is a slick appeal to logic followed by a hasty retreat if it points in an unexpected direction. Environmentalists can quote reams of statistics on the importance of trees and then jump to the conclusion that recycling paper is a good idea. But the opposite conclusion makes equal sense. I am sure that if we found a way to recycle beef, the population of cattle would go down, not up. If you want ranchers to keep a lot of cattle, you should eat a lot of beef. Recycling paper eliminates the incentive for paper companies to plant more trees and can cause forests to shrink. If you want large forests, your best strategy might be to use paper as wastefully as possible — or lobby for subsidies to the logging industry. Mention this to an environmentalist. My own experience is that you will be met with some equivalent of the beatific smile of a door-to-door evangelist stumped by an unexpected challenge, but secure in his grasp of Divine Revelation.
This suggests that environmentalists — at least the ones I have met — have no real interest in maintaining the tree population. If they did, they would seriously inquire into the long-term effects of recycling. I suspect that they don't want to do that because their real concern is with the ritual of recycling itself, not with its consequences. The underlying need to sacrifice, and to compel others to sacrifice, is a fundamentally religious impulse.
Environmentalists call on us to ban carcinogenic pesticides. They choose to overlook the consequence that when pesticides are banned, fruits and vegetables become more expensive, people eat fewer of them, and cancer rates consequently rise.* If they really wanted to reduce cancer rates, they would weigh this effect in the balance.
Environmentalism has its apocalyptic side. Species extinctions, we are told, have consequences that are entirely unpredictable, making them too dangerous to risk. But unpredictability cuts both ways. One lesson of economics is that the less we know, the more useful it is to experiment. If we are completely ignorant about the effects of extinction, we can pick up a lot of valuable knowledge by wiping out a few species to see what happens. I doubt that scientists really are completely ignorant in this area; what interests me is the environmentalists' willingness to plead complete ignorance when it suits their purposes and to retreat when confronted with an unexpected consequences of their own position.
In October 1992 an entirely new species of monkey was discovered in the Amazon rain forest and touted in the news media as a case study in why the rain forests must be preserved. My own response was rather in the opposite direction. I lived a long time without knowing about this monkey and never missed it. Its discovery didn't enrich my life, and if it had gone extinct without ever being discovered, I doubt that I would have missed very much.
There are other species I care more about, maybe because I have fond memories of them from the zoo or from childhood storybooks. Lions, for example. I would be sorry to see lions disappear, to the point where I might be willing to pay up to about $50 a year to preserve them. I don't think I'd pay much more than that. If lions mean less to you than they do to me, I accept our difference and will not condemn you as a sinner. If they mean more to you than to me, I hope you will extend the same courtesy.
In the current political climate, it is frequently taken as an axiom that the U.S. government should concern itself with the welfare of Americans first; it is also frequently taken as an axiom that air pollution is always and everywhere a bad thing. You might, then, have expected a general chorus of approval when the chief economist of the World Bank suggested that it might be a good thing to relocate high-pollution industries to Third World countries. To most economists, this is a self-evident opportunity to make not just Americans but everybody better off. People in wealthy countries can afford to sacrifice some income for the luxury of cleaner air; people in poorer countries are happy to breathe inferior air in exchange for the opportunity to improve their incomes. But when the bank economist's observation was leaked to the media, parts of the environmental community went ballistic. To them, pollution is a form of sin. They seek not to improve our welfare but to save our souls.
There is a pattern here. Suggesting an actual solution to an environmental problem is a poor way to impress an environmentalist, unless your solution happens to feed his sense of moral superiority. Subsidies to logging, the use of pesticides, planned extinctions, and exporting pollution to Mexico are outside the catechism; subsidies to mass transportation, the use of catalytic converters, planned fuel economy standards, adn exporting industry from the Pacific Northwest are part of the infallible doctrine. Solutions seem to fall into one category or the other not according to their actual utility but according to their consistency with environmentalist dogma.
In the last weeks of the 1992 presidential campaign, George Bush, running as the candidate of less intrusive government, signed with great fanfare a bill dictating the kind of showerhead you will be permitted to buy. The 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 took no position on the issue. I conjecture that if the bill had specified allowable prayerbooks instead of allowable showerheads, then even the malleable Mr. Bush might have balked — and if he hadn't, we would have heard something from the ACLU. But nothing in the science of economics suggests any fundamental difference between a preference for the Book of Common Prayer and a preference for a powerful shower spray. Quite the contrary; the economic way of thinking forces us to recognize that there is no fundamental difference.
The proponents of showerhead legislation argued that a law against extravagant showers is more like a law against littering than like a law against practicing a minority religion — it is designed to prevent selfish individuals from imposing real costs on others. If that was the argument that motivated Mr. Bush, then — not for the first time in his life — he had fallen prey to bad economics.
There are good economic reasons to outlaw littering and other impositions (though even this can be overdone — walking into a crowded supermarket is an imposition on all the other shoppers, but few of us believe it should be outlawed). But in most parts of the United States, water use is not an imposition for the simple reason that you pay for water. It is true that your luxuriant shower hurts other buyers by driving up the price of water but equally true that your shower helps sellers by exactly the same amount that it hurts buyers. You would want to limit water usage only if you cared more about buyers than sellers — in which case there are equally good arguments for limiting the consumption of everything — including energy-efficient showerheads.
Like other coercive ideologies, environmentalism targets children specifically. After my daughter progressed from preschool to kindergarten, her teachers taught her to conserve resources by rinsing out her paper cup instead of discarding it. I explained to her that time is also a valuable resource, and it might be worth sacrificing some cups to save some time. Her teachers taught her that mass transportation is good because it saves energy. I explained to her that it might be worth sacrificing some energy in exchange for the comfort of a private car. Her teachers taught her to recycle paper so that wilderness is not converted to landfill space. I explained to her that it might be worth sacrificing some wilderness in exchange for the luxury of not having to sort your trash. In each case, her five-year-old mind had no difficulty grasping the point. I fear that after a few more years of indoctrination, she will be as uncomprehending as her teachers.
In their assault on the minds of children, the most reprehensible tactic of environmental extremists is to recast every challenge to their orthodoxy as a battle between Good and Evil. The Saturday morning cartoon shows depict wicked polluters who pollute for the sake of polluting, not because polluting is a necessary byproduct of some useful activity. That perpetuates a damnable lie. American political tradition does not look kindly on those who advance their agendas by smearing the character of their opponents. That tradition should be upheld with singular urgency when the intended audience consists of children. At long last, have the environmentalists no decency?
Economics in the narrowest sense is a science free of values. But economics is also a way of thinking, with an influence on its practitioners that transcends the demands of formal logic. With the diversity of human interests as its subject matter, the discipline of economics is fertile ground for the growth of values like tolerance and pluralism.
In my experience, economists are extraordinary in their openness to alternative preferences, life-styles, and opinions. Judgmental cliches like "the work ethic" and the "virtue of thrift" are utterly foreign to the vocabulary of economics. Our job is to understand human behavior, and understanding is not far distant from respect.
Following our graduation day confrontation, I sent my daughter's teacher a letter explaining why I had declined her invitation to engage in theological debate. Some of the opinions in that letter are more personal than professional. But the letter is above all a plea for the level of tolerance that economists routinely grant and expect in return. Therefore I will indulge myself as an example of how the economic way of thinking has shaped one economist's thoughts.
Dear Rebecca:
When we lived in Colorado, Cayley was the only Jewish child in her class. There were also a few Moslems. Occasionally, and especially around Christmas time, the teachers forgot about this diversity and made remarks that were appropriate only for the Christian children. These remarks came rarely, and were easily counteracted at home with explanations that different people believe different things, so we chose not to say anything at first. We changed our minds when we overheard a teacher telling a group of children that if Santa didn't come to your house, it meant you were a very bad child; this was within earshot of an Islamic child who certainly was not going to get a visit from Santa. At that point, we decided to share our concerns with the teachers. They were genuinely apologetic and there were no more incidents. I have no doubt that the teachers were good and honest people who had no intent to indoctrinate, only a certain naivete derived from a provincial upbringing.
Perhaps that same sort of honest naivete is what underlies the problems we've had at the JCC this year. Just as Cayley's teachers in Colorado were honestly oblivious to the fact that there is diversity in religion, it may be that her teachers at the JCC have been honestly oblivious that there is diversity in politics.
Let me then make that diversity clear. We are not environmentalists. We ardently oppose environmentalists. We consider environmentalism a form of mass hysteria akin to Islamic fundamentalism or the War on Drugs. We do not recycle. We teach our daughter not to recycle. We teach her that people who try to convince her to recycle, or who try to force her to recycle, are intruding on her rights.
The preceding paragraph is intended to serve the same purpose as announcing to Cayley's Colorado teachers that we are not Christians. Some of them had never been aware of knowing anybody who was not a Christian, but they adjusted pretty quickly.
Once the Colorado teachers understood that we and a few other families did not subscribe to the beliefs that they were propagating, they instantly apologized and stopped. Nobody asked me what exactly it was about Christianity that I disagreed with; they simply recognized that they were unlikely to change our views on the subject, and certainly had no business inculcating our child with opposite views.
I contrast this with your reaction when I confronted you at the preschool graduation. You wanted to know my specific disagreements with what you had taught my child to say. I reject your right to ask that question. The entire program of environmentalism is as foreign to us as the doctrine of Christianity. I was not about to engage in detailed theological debate with Cayley's Colorado teachers and they would not have had the audacity to ask me to. I simply asked them to lay off the subject completely, they recognized the legitimacy of the request, and the subject was closed.
I view the current situation as far more serious than what we encountered in Colorado for several reasons. First, in Colorado we were dealing with a few isolated remarks here and there, whereas at the JCC we have been dealing with a systematic attempt to inculcate a doctrine and to quite literally put words in children's mouths. Second, I do not sense on your part any acknowledgment that there may be people in the world who do not share your views. Third, I am frankly a lot more worried about my daughter's becoming an environmentalist than about her becoming a Christian. Fourth, we face no current threat of having Christianity imposed on us by petty tyrants; the same can not be said of environmentalism. My county government never tried to send me a New Testament, but it did send me a recycling bin.
Although I have vowed not to get into a discussion on the issues, let me respond to the one question you seemed to think was very important in our discussion: Do I agree that with privilege comes responsibility? The answer is no. I believe that responsibilities arise when one undertakes them voluntarily. I also believe that in the absence of explicit contracts, people who lecture other people on their "responsibilities" are almost always up to no good. I tell my daughter to be wary of such people — even when they are preschool teachers who have otherwise earned a lot of love.
Sincerely,
Steven Landsburg
첫댓글 글을 대충 읽어 보았는데, 음... 좀 실망이네요. 너무 허점 투성이이고, 정직한듯 하면서도 정직하지 않다고 느껴지는군요. 왜냐하면, Steven Landsburg가 쓴 이 글에서는 사실에 근거한 주장과 "자신의 가치관"에 근거한 "가치 판단"이 이러저리 섞여 있는데도, 마치 자기 주장들이 대부분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하는 투군요. " Economics in the narrowest sense is a science free of values."라고 시작되는 단락 하나만으로도 논쟁거리지요. 하긴, 제목부터 좀 균형이 잡혀있지 않군요. "The Science of Economics Versus the Religion of Ecology"에서 Ecology는 생태학이라고 번역되고, 환경주의와는 상관이 없지요.
다만, 어떤 환경(예를 들면, 특정한 숲의 일부)을 개발하느냐 아니냐에서 "개발하는 것"이 "보존하는 것"보다 나쁜(?) 선택이다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지요. 한편으론, 왜 "환경 영향 평가"를 하는지, 왜 "대기/수질/토양 환경 기준"이 만들어져 왔는지, 왜 "환경 호르몬"에 사람들이 주의를 하는지, 왜 "기후 변화"를 모른척 하기에는 찜찜한지만 생각해 본다면, 이 글은 몇가지 시사점을 제공하긴 하지만, 경제학자의 과도한 글이라 생각됩니다. 자신이 주장을 뒷받침하기에는 주장이 너무 앞서 나가 버린 거지요. 하긴, 이 글은 전문적인 성격의 글이라기 보다는 잡글이겠죠..
글이 제대로 임자 만난 셈이네요. smallGarden 이 대기환경공학을 공부했으니까.
종이컵 문제는 실제로 우리가 smile 님 집에서 만났을 때 부딪혔던 문제지요? 부부가 모두 시간이 없어서 일회용 컵과 접시를 쓰는 것이 제게 충격으로 받아 드렸던 것은 환경주의자의 관점이었군요. 그러나 환경주의자와 경제주의자,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면 나는 환경주의자의 길을 택하겠습니다.
smallGarden/ 고맙습니다.
1. 제목의 번역은 분명한 오류군요. 제목이라도 수정해야겠습니다.
2. 번거로우시겠지만, 사실에 근거한 주장과 가치관에 근거한 판단을 섞어서 사용한 예를 조금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3. 혹시 잡글의 정의를 '논문이 아닌 글'이라고 두고 사용하셨다면 잡글이라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학자들이 아카데미아에서만 있지 않고 잡글을 써서 학자 아닌 사람들과 소통하려는 의지를 존경합니다.
간단하게 답글 달겠습니다.
1. 먼저, 윗 글에서의 경제학자는 Environmental Sciences(환경과학)라는 학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듯, Environmetalism이라는 단어를 줄기차게 사용하고 있지요. 겨우, 제목에서 Ecology(생태학)라는 단어를 한번 사용하고는 환경과학과 관련 학문들을 한갓 주의(-ism)으로 취급하면서 경제학은 무책임한 환경주의의 해독제(the antidote to naive environmentalism is economics)라고 하고 있군요. 이건 문제가 있지요?
2. 환경문제에 대해서는 보존 또는 보호일변도가 아니라, 공학(Engineering)적 접근이 당연히 있답니다. 위에서 살충제를 예로 드는 부분은 공학적 개념이 거의 없지요?
2. (계속). 예를 들면, 기존의 살충제의 문제점을 보완하면서 병충해를 제어하는 연구는 꽤나 오래 되었죠? 그런데, 살충제를 무조건 사용하지 말자고 하면서 아무 대책이 없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무식하거나 정직하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3. 제가 사용한 잡글의 정의는, 논문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글에서 주장하는 것이 글에서 언급된 관련 자료들로 잘 뒷받침이 되고 있어, 초보적인 비판 정도는 이겨낼 수 있는 글입니다. 즉, 사용하는 표현이나 문체가 문어체냐 구어체냐가 핵심은 아니죠..
smallGarden / 답글 감사합니다. 좋은 지적이라 생각합니다.
smallGarden님의 견해에 대한 저의 소견은 밤(시드니 시간으로)에 시간을 내어서(시간을 낸다는 의미는 성의를 다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달도록 하겠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환경주의를 비난하는 똑같은 방식으로 자기 역시 비난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치중립적인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 경제학자.
똑똑하기는 하나,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