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은 나를 위로하여 주었다.
수박이 나를 위로하여 주다니 무슨 이야기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일까?
접하시는 분들은 고개를 갸우뚱 하실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1967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가 시작되는 이야기다.
1967년 1월 내가 군 복무를 마치고 직장을 구할 때까지 고향에 있을 때이다.
집에 있던 1년 사이 내가 지은 수박이 부모님께 죄 지은 심정으로 살던 나에게
베풀어 준 은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수박에 관한 이야기를 돌아보려니 자연히 태어난 곳부터 말해야 할 것 같다.
어떤 표현을 빌려 이야기해도 언뜻 이해가 되지 않을 것 같아 쉽게 말하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내가 군 제대를 하고 집에 온 29살이 되었을 때야 전기 불이 들어왔다.
그만큼 오지였다. 마을 이름도 숯 골이다. 이름대로라면 산속 오지이니까 숯을 구워 파는
곳이었나 할 것 같은데 나는 우리 마을에서 숯을 구워 파는 것을 보지 못했다. 주로 논 밭
작물을 심어서 사는 곳이었다. 자연히 부모님도 논에 벼를 심고 밭에 작물을 심어 생계를
유지하셨다.
그런데 내가 수박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마을 사람 대부분이 수박을 심어 주로 소득을 얻었던
기억 때문에 그렇다. 한 30 여 가구가 사는 마을이었는데 논 밭 작물은 먹고 살기도 바쁜 정도
였고 수박이 주로 소득 원이었고 나무를 장작으로 만들어 팔기도 하였지만, 민둥 산이 거의였던
시대라 그것도 소득 원이라 하기는 그랬다. 그 밖에 왕골을 심어 돗자리를 만들어 파는 정도였고
그 외는 내세울 것이 없다. 왕골을 벨 때는 왕골 껍질을 베껴 주고 속을 가져다 여러 가지 생활
도구를 만들어 쓰기도 하였다.
부모님은 워낙 가난하셔서 농작물은 생계 유지에도 바쁜 정도였기에 수박이 유일한 소득 원
이었고, 그래서 밭에 수박을 심어 지극 정성으로 키우셨다. 그런데 농부의 자식인 나는 외아들
이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지게를 짊어질 줄도 모르고 자랐다. 오직 죽지 않고 살아주기 만을
비는 부모님의 바람으로 공부 이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겨우 돕는 일이라 곤 벼 이삭이
피는 때에 가끔 참새 쫓는 일이 전부였다.
어쩌다 부모님 도울 양으로 지게를 짊어 보면 지게가 뒤로 넘어져 짐을 쏟기만 했다.
부모님은 그렇게 철만 되면 밭 대부분에 수박을 심으셨다.
첫 번째로 기억나는 것은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님이 그 무거운 수박을 광주리에
이시고 집에서 30 리가 되는 군산 농산물 시장에 가셔 팔고 책상을 사다 주신 기억이다.
하루는 어머님이 ‘아가. 엎드려 공부하니 힘들지. 오늘은 엄마가 우리 아들 책상 하나를
사주려 한다. 그러니 너는 텃밭에 풀이나 좀 뽑아줄래‘ 하시는 것이었다. 어머님 말씀을
듣고 나는 좋아서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모른다. 그 무거운 수박을 이시고 그 먼 거리
까지 가서 팔아 책상을 사 오시는 일이 얼마나 힘드신 일인가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루 종일 들뜬 마음으로 어머님 오시기 만을 기다리고 있던 나는 어둑해질 무렵 저 멀리서
오시는 어머님을 뵙고 쫓아가니, 책상이 어찌나 큰지 깜짝 놀랐다. 아니 어떻게 저 큰 것을
이고 오셨단 말인가. 어머님은 책상을 내려놓으시고 시원한 물 한 그릇 들이키시더니
‘아가. 엄마가 새 책상을 사 주려 했지만 워낙 비싸서 헌 책상을 사왔다. 이제 공부 더 열심히
할 것이지.‘ 하셨다. 그때는 몰랐지만 나는 그 책상으로 대학에 가서 서울에 올라오기 전까지,
제대하고 1년 여 취직 시험을 대비 공부하는 그때까지 그 까만 책상에서 어머님의 고마움을
새기며 공부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수박 농사를 하면 원두막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수박 밭에는 원두막이
있어 수박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어야 했다. 주로 아버님이 지키셨는데 아버님은
협심 증이 있으셨다. 당시만 해도 ‘수박 서리’라는 풍습이 있었다. 지금이야 남의 수박 밭에서
수박 한 개만 훔쳐도 절도죄가 되겠지만, 당시는 그게 지나가는 습관으로 치부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 밭에 수박 서리 하는 사람들이 닥쳤다. 아버님이 인기척이라도 하셨으면 도망
갈 것인데 협심 증이 계셨던 아버님은 아무 말씀도 못하시고 지켜 만 보고 계셨단다. 남의 것을
몰래 훔치는 일이니까 조용히 익은 것 한 두 개만 따 가면 되는데, 몰래 하는 것이고 빨리 해야
하니까 넝쿨째 뽑고 가는 게 문제였다. 큰 손해 없이 지나간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그 후부터 가끔은 누나가 지키기도 했다. 내가 고등학교 때에는 친구들을 데리고 오기도 했고
여름방학 때 대학을 같이 다닌 송 병 숙이란 동창을 집으로 데려오기도 했는데, 그 여대생 친구가
구두를 신고 왔는데 돌아간 후 논두렁에 찍힌 구두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던 기억이 지금 소식도
모르지만 가끔 생각이 난다.
세 번째 이야기다. 참으로 눈물 나는 이야기를 꺼내려니 이미 하늘에 계신 부모님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1967년 1월 나는 육군 병장으로 제대를 하였다. 이미 나이도 30 살이었고 첫째 딸도 3월에
나서 마음이 조급하던 때이다.
차마 옮기기도 부끄럽고 부모님께 불효한 마음 어디 하소연하기도 그렇지만 나는 고등학교 때
사귀던 여인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내가 가정 형편이 어려워 대학을 가지 못하고 심한
우울증에 걸려 극단적 선택을 하였지만 겨우 목숨을 구했을 때, 병원에서 그녀를 찾으니 아버님이
찾아가 ‘내 아들이 너를 찾으니 내 아들 살리는 마음으로 한 번 와 줄 수 없겠니?’ 하셨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을 갔다가 결국 7년 후 내 아내가 되어 부모님 앞에 나타났고
나의 첫아기를 낳았다. 그러니 그런 불효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가장 급한 것은 내가 얼른
취직을 하여 우리만의 삶을 이어가야 하는데 시험은 11월에나 있다 보니 그때까지는 무언가 하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그 쉬는 동안 나는 수박을 기르기로 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수박 순 하나 딸 줄도
모르는 내가 수박을 기르겠다니 부모님은 얼마나 황당하셨을까? 그러나 다른 도리가 없으니
해보려면 해 보거라 하셨다. 눈만 뜨면 밭으로 달려가 수박에 매달렸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흙은 농부의 노력을 저버리지 않는다 했던가?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키운 수박이
줄기를 뻗고 가지를 치고 꽃을 피우더니 수박이 주렁주렁 열리기 시작했다. 가끔 아버님이
오셔서 자라는 모습을 보시고 지도는 하셨지만 참으로 대성공이었다. 반신반의 하시던 아버님이
하루는 나를 부르시더니 “아니 수박 키울 줄도 모른 네가 내가 지금까지 키운 것보다 훨씬 잘
키웠으니 이게 어찌된 일이냐? “ 하시며 기뻐하시던 모습은 나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겨우
지게에 광주리에 지고 이고 가셔 파시던 수박을 달구지에 싣고 가셔서 팔고 오셨다.
잠시 쉬던 그때 부모님께 미안한 마음을 조금은 달랬던 기억이다. 밤이면 원두막에 가서 지키는
일도 내가 했다.
더불어 하늘의 은덕인가? 나는 할머님이 참으로 내게 잘 하셨다. 나보다 한 살 위인 사촌
형님이 계셨다. 큰 댁은 부자로 사셨지만 우리 집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래서
였던지 할머님은 모든 먹을 것이 생기면 내게 갖다 주시곤 하였다. 오죽하면 큰 어머님께서
같은 손자인데 어찌 어머님은 작은 손자에게만 잘 해주느냐며 따지시기도 하셨단다.
그렇게 잘 해주시던 할머님이 노환으로 백중일 음력 7월 15일에 하늘의 부름을 받으셨다.
원두막에 앉아 흘러가는 달을 보며 빨리 취직을 해야 할 터인데 걱정하며 마음을 달래고
있는데, 마을에서 울음소리가 내 귀에 닿았다. 순간 할머님이 승천 하셨구나 생각하니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원두막에서 실컷 울고 난 후 큰 댁으로 갔다. 얼마나 나를 사
랑하셨던 할머님이셨던가? 그 할머니가 내가 옆에 있을 때 승천하셨으니 할머님을 가까이
한 고마움을 가슴에 묻으며 다행이란 생각이 들고 했다.
나는 지금도 수박을 좋아한다. 두 조각을 가르면 빨간 살 속에 까만 씨가 박혀 얼마나 예쁜가?
달콤함이며 물이 뚝뚝 떨어져 내릴 때 손으로 쓸어내는 멋진 동작이 나를 옛 추억을 생각나게
한다.
내년에는 고향에 내려가 원두막에 앉아 그 예쁜 수박 하나 사서 맛있게 먹어보며
옛 고향 생각을 하고 싶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