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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넴 여인의 아이 죽음(18-20)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리는 중에도, 때로는 뜻하지 않는 어려움이 닥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믿음의 진가는 평온할 때보다 고난을 당할 때 더 빛이 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18그 아이가 자라매 하루는 추수꾼들에게 나가서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렀더니 19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머리야 내 머리야 하는지라 그의 아버지가 사환에게 말하여 그의 어머니에게로 데려가라 하매 20곧 어머니에게로 데려갔더니 낮까지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있다가 죽은지라(18-20)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해 수넴 여인에게 기적적으로 아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던 시대에 이 수넵 여인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대접함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우상인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만이 살아계신 참 신이라고 믿었던 의미입니다.
그러나 수넴 여인마저도 가망 없는 자신에게 생명을 주실 것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아이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전했을 때, 처음에는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 시대가 어둡고 불신이 가득하면 아무리 개인이 노력해도 신앙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교회와 상관없이 혼자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습니다.
엘리사의 예언대로 하나님께서 수넴 여인에게 아이는 하나님의 선물로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렇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을 또 데려가십니다. 기적처럼 생긴 아들이 자라던 어느 날 갑자기 죽었습니다. 하루는 아이가 자기 아버지가 추수하려 나간 사이,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며 비명을 지릅니다. 아버지는 일꾼들을 시켜 그의 어머니에게로 보냅니다. 아이에게 손도 써보지 못하고 정오쯤에 어머니의 무릎에서 아이는 죽고 맙니다.
‘정오’란 시간 표현은 아이가 발병한 지 한나절도 못되어서 급작스럽게 죽었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침 잘 먹고 아버지와 추수하러 갔던 아이가 갑자기 업혀 오더니 손써 볼 틈도 없이 정오 무렵에 품에서 죽은 것입니다.
수넵 여인은 두 가지의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하나는 아직 어린 아들의 죽음 자체에 대한 고통이며,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왜 아들을 얻는 기쁨을 주시고는 이렇게 무참하게 빼앗아 가시는지, 그 뜻을 알 수 없어서 겪는 고통입니다. 수넵 여인은 아들의 죽음을 순순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엘리사을 찾아가는 수넴 여인(21-28)
문제가 발생하면 지체 없이 하나님 앞으로 달려 나가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희망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 희망을 멈추지 않고 나가면 어려운 현실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또한 그 어려운 과정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됩니다.
21그의 어머니가 올라가서 아들을 하나님의 사람의 침상 위에 두고 문을 닫고 나와 22그 남편을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사환 한 명과 나귀 한 마리를 내게로 보내소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달려갔다가 돌아오리이다 하니 23그 남편이 이르되 초하루도 아니요 안식일도 아니거늘 그대가 오늘 어찌하여 그에게 나아가고자 하느냐 하는지라 여인이 이르되 평안을 비나이다 하니라 24이에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몰고 가라 내가 말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위하여 달려가기를 멈추지 말라 하고 25드디어 갈멜 산으로 가서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멀리서 그를 보고 자기 사환 게하시에게 이르되 저기 수넴 여인이 있도다 26너는 달려가서 그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27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안은지라 게하시가 가까이 와서 그를 물리치고자 하매 하나님의 사람이 이르되 가만 두라 그의 영혼이 괴로워하지마는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 하니라 28여인이 이르되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 하니(21-28)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것들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가져가시는 것이 당연한데도 우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든 경우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절대 행복도 절대 불행도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방인인 수넴 여인의 태도를 보면서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⑴ 엘리사를 찾는 수넴 여인(21-24)
수넴 여인은 죽은 아들을 엘리사의 방으로 데리고 올라가 엘리사의 침상에 눕히고 문을 닫고 나와 다른 사람들이 아이에게 접근할 수 없게 합니다. 그러고는 남편을 불러 자신에게 종 한 사람과 나귀 한 마리를 주어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달려갔다 올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갈멜산에 머물고 있는 엘리사를 만나기 위해 다녀오겠다고 말합니다. 남편은 초하루도 아니고 안식일도 아닌데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는 것에 대해 걱정합니다.
이런 아내의 요구에 남편은 초하루나 안식일처럼 특별히 선지자를 찾아가 신탁을 받는 날도 아닌데, 왜 엘리사에게 가려느냐고 반문하며 만류합니다. 원래는 예배와 교훈을 얻기 위해서는 선지자의 집에 나아가는 날은 정해져 있었습니다(참고, 아모스 8:5; 민수기 28:9-15). 하지만 그 여인은 남편의 염려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형식적인 종교 규례에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나귀를 타고 갈멜산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녀에게는 오로지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에게 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수넴 여인과 남편의 관계를 보면, 남편에게 말하는 22절은 전체적으로 청유형(請誘形) 문장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수넴 여인이 엘리사에게 다녀올 수 있도록 매우 공손하게 남편에게 요청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남편에게 예의 바른 아내였던 것입니다. 반면에 23절을 보면 이 수넴 여인은 남편이 가지 말라고 말리는 말을 듣고는 아무 설명 없이 다녀오겠다는 인사만 하고 바로 출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수넴 여인은 예의 바른 아내인 동시에 매우 독립적이고 의지가 강한 인물로 보입니다.
여기서 수넴 여인은 ‘달려가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급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집을 출발하면서 그녀는 사환에게 자신을 배려해서 나귀 모는 속도를 늦추지 말라고 합니다. 도리어 최대한 빨리 가자고 재촉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며 간절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갈멜산으로 재촉한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볼 수 없었던 믿음입니다. 이방여인이었던 수넴 여인에게서 찾아 볼 수 있었습니다.
⑵ 수넴 여인의 원망(25-28)
수넴 여인이 갈멜 산에 도착했을 때, 엘리사가 먼저 알아봅니다. 선지자는 게하시를 보내 수넴 여인에게 남편과 아이의 안부를 물어보라고 합니다.
여기서 ‘평안하냐?’는 안부를 묻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게하시의 안부 인사를 들은 여인은 그냥 간단한 인사만 하고는 가던 길을 멈추지 않고 지나칩니다.
수넴 여인의 목적은 엘리사를 만나는 것이 기에 곧장 산으로 달려가 엘리사를 만나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를 만나자마자 그의 발을 끌어안습니다. 여기서 발을 안는 것은 자신을 낮추고 애원하는 행동입니다. 이런 행동은 구약에서는 여기에만 나오지만, 아카드 문헌에는 온갖 도망자나 간구자들이 복종이나 굴복을 나타내고 탄원하기 위해 왕의 발을 안는 예들이 매우 많이 나옵니다.
이런 갑작스런 행동을 본 게하시는 수넴 여인을 제지하려고 하였지만, 엘리사는 그대로 두라고 합니다. 그녀가 마음이 아프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만 무슨 내용인지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시지 않아 자신도 모른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엘리사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수넴 여인의 행동을 보며 매우 큰 비극이 닥쳤다는 것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에게 매우 날카로운 어조로 자신이 아들을 구한 적이 있느냐, 나를 속이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느냐며 원망의 말을 쏟아냅니다. 이 말은 자신이 구하지도 않은 아들을 주어서 삶에 희망과 기쁨을 품게 하고는, 이제 이처럼 무책임하게 아들을 죽게 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아들 잃은 비통함과 하나님에 대한 배신감에서 오는 아픔을 토로한 것입니다.
또한 이 말은 엘리사가 아들을 얻게 했으니 아들의 죽음도 책임지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말 속에는 엘리사라면 다시 이 아들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이 들어 있기도 할 것입니다. 그녀는 아픔을 쏟아놓기 위해 엘리사를 찾은 것이 아니라, 아들을 살릴 희망이 있기 때문에 먼 길을 급하게 달려온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수넴 여인은 아이가 죽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람라면 그 아이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믿음은 희망을 갖게 하고 그 믿음은 기적을 가져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문제만 커질 뿐입니다. 무릎 꿇고 하나님께 달려가야 합니다.
엘리사의 동행을 요청하는 수넴 여인(29-31)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방법을 찾습니다. 때로는 일시방책적인 해결책으로 더 큰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 방법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이방인 수넴 여인은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얍복 강가에서 기도한 야곱처럼 정말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29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이르되 네 허리를 묶고 내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라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인사할지라도 대답하지 말고 내 지팡이를 그 아이 얼굴에 놓으라 하는지라 30아이의 어머니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 엘리사가 이에 일어나 여인을 따라가니라 31게하시가 그들보다 앞서 가서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았으나 소리도 없고 듣지도 아니하는지라 돌아와서 엘리사를 맞아 그에게 말하여 아이가 깨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29-31)
수넴 여인의 말을 듣고 아이의 죽음을 알게 된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자신의 지팡이를 들고 급히 아이에게 가서 지팡이를 아이의 얼굴에 놓으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허리를 묶는다’는 것은 달려가는데 방해가 되지 않게 하라는 것으로 급하게 뛰어가라는 뜻입니다.
아무에게 인사하지도 받지도 말라는 것 역시 위급한 상황임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최대한 빨리 가서 아이 얼굴에 자신의 지팡이를 놓으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선지자의 지팡이는 선지자의 능력의 상징이며 지팡이를 통해 엘리사의 능력이 아이에게 임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수넴 여인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엘리사를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엘리사가 가야만 아이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는, 그가 반드시 가야 한다고 매달린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수넴 여인은 자기주장과 의지가 매우 확고한 여성입니다. 이렇듯 단호하게 매달리는 수넴 여인의 모습을 보고 엘리사도 결국 그 여인을 따라 나섭니다. 여기서 본문은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뒤를 따라갔다고 표현함으로써 이 일에서 수넴 여인이 주도권을 갖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엘리사보다 먼저 도착한 게하시는 시킨 대로 주인의 지팡이를 아이 얼굴 위에 놓았지만, 아이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습니다. 숨소리도 없고 생명의 징후를 나타내는 어떤 움직임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게하시는 엘리사에게 돌아와 아이가 깨어나지 않는다고 보고합니다. 엘리사의 지팡이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팡이는 단지 지팡이를 쓰는 사람의 신앙을 표시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게하시가 하나님께서 아이를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으면 그 지팡이는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지팡이가 아무런 효과도 없었던 것은 게하시의 믿음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수넴 여인은 문제 해결을 위해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자신의 아이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다른 어떤 수단이나 사람을 의지할 수 없었습니다. 형식적인 믿음은 있지만 열매가 없을 것입니다. 그의 삶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비아냥거립니다. 그것은 세상은 썩을지라도 성도들만이라도 썩지 않길 원하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종교는 결코 거룩함도 능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을 향해 어두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 달라고 아우성치는 것입니다.
죽은 아이를 살린 엘리사(32-37)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살다가 힘든 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너무 쉽게 낙심하거나 낙담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에게만 진정한 위로와 소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능히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어려운 사정을 아뢰고 해결 받아야 합니다.
32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33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34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의 입에,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대고 그의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35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 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36엘리사가 게하시를 불러 저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하니 곧 부르매 여인이 들어가니 엘리사가 이르되 네 아들을 데리고 가라 하니라 37여인이 들어가서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아들을 안고 나가니라(32-37)
엘리사는 자신의 침상에 누워 있는 아이를 보고 여호와께 기도하고 아이의 몸에 자신의 몸을 올려놓는데, 입과 입, 눈과 눈, 손과 손을 대고 아이 위에 누웠습니다. 엘리사는 지팡이 대신 자신을 아이에게 올려놓은 것입니다. 이런 행동은 열왕기상 17:21에서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이를 살리는 모습과 유사합니다. 엘리야는 아이의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기도했고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엘리사가 이렇게 하자 아이의 몸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잠시 내려와 집 안을 돌아다닌 뒤 다시 올라가 아이 위에 엎드리니 아이가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여기서 재채기를 한 것이나 눈을 뜬 것은 게하시가 지팡이를 올려놓았을 때 아무 반응이 없었던 것과 대조됩니다. 이렇게 살아난 아이는 다시 엄마 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수넴 여인은 죽은 아이가 살아난 것을 보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엘리사도 엘리야처럼 사람을 살리는 놀라운 권능을 행함으로 엘리야의 확실한 후계자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려 준 사건(열왕기상 17:17-24),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신 사건(마가복음 5:35-43) 그리고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살려 주신 사건(요한복음 11장) 등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통해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임을 다시 깨닫게 해줍니다. 이미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시는 능력은 우리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크신 능력으로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입니다. 엘리사의 기도는 들으시고 수넴 여인의 죽은 아이를 살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태에 놓여 있더라도 회복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당신을 하나님께서 치료와 회복이 필요한 부분이 어디입니까?
엘리사는 이 일로 확실한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시대적인으로 믿음을 찾아보기 힘든 상황에서 이방인 출신인 수넴 여인은 믿음을 보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누가복음 18:8)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는 믿음은 미지근한 믿음이 아니라 이 여인처럼 끝까지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상황을 볼 때, 해결자이신 하나님께서 항상 가까이 계십니다. 수넴 여인처럼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이 당신에게 나타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