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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나해 12월31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7일
[수도회] 생명과 빛이신 말씀을 품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1요한 2,18-21
† 복음 요한 1,1-18
★ 요한 1서는 ‘그리스도의 적들’에 대해 언급하며 그들이 신앙인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다고 말한다. 이제 그들이 보여 주는 거짓에 홀리지
않고 진리 안에서 친교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제1독서).
★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에 생명을 주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 곧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복음).
◈ 오늘의 묵상
“그 순간 서희는 자신을 휘감은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침내 조국이 일본에게서 독립했다는 소식을 들은 주인공 최서희의
심경을 절묘하게 표현한 문장입니다. 문득 이 구절이 떠오른 것은, 가는
해에 모든 아쉬움을 다 담아 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한 해의 마지막에 우리는 모든 것이 제대로 해결된 깨끗한 마무리를
보게 되기보다는, 고민과 문제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일본 미쓰하라 유리의 ‘하얀 길’이라는 짧은 시
한 편이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오랫동안 헤매다/ 마침내 바른길 찾아오면/ 길은 아무 말 하지 않아/
칭찬도 나무람도// 짐 될까/ ‘돌아왔니’ 한마디조차//
(중략) 걸어온 길보단/ 지금부터 걸어갈 길이/ 늘 중요하니까.”
한 해의 짐을 다 내려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으려 마음먹습니다.
새해에는 많이 들었으되 새기지는 못했던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모든
존재자는 참되다.”(Omne ens est verum)라는 명제를 ‘살아 보고자’
합니다. 이는 세상과 사람들 안에서 참된 것과 선한 것을 알아보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대단한 결심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얼마 전 흥미진진하게 본 미국 드라마가 생각납니다. 정파나 거대 자본에
봉사하거나 대중의 선정적 관심에 영합해 상업적 성공을 얻는 뉴스가
아니라 사회를 깨어 있게 하는 보도를 하려는, ‘불가능한’ 과업에 도전하는
한 방송국이 주인공인 이 드라마의 첫 회의 제목은 이랬습니다. ‘우리는 막
(진실한 보도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우리가 진심으로 결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실천의 출발점일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참되고 선한 삶의 기쁨을 마음껏 체험하는 새해가 되기를
빕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하느님 예찬(禮讚)-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나해 12월31일 수요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7일
(뉴튼수도원 51일째), 1요한2,18-21 요한1,1-18
제1독서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18-21
복음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의 시작입니다. 1,1-18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하느님 예찬(禮讚)-
한 해의 끝날이 감격스럽습니다.
도반(道伴)의 성탄축하카드 서두 부분이 생각납니다.
"잘 지내시는지요? 어느덧 2014년도 허무하게 가네요. 한 해의 막바지에
설 때마다 늘 연례행사처럼 되뇌는 말,'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는가?“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그러나 허무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전에 '절망'이란 단어가 없듯이, 제 삶의 사전에 '허무'란 단어도 이미
사라졌습니다. 허무가 아닌 저에겐 충만한, 감사와 은총으로 가득한 한
해였습니다. 나라는 극심한 내홍을 겪었고 겪고 있는 중이지만
저와 수도원은 하느님이 눈부시게 활약하신 해였습니다.
제 삶의 여정이나 수도여정에 있어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 해였습니다.
하느님이 제 삶의 문장에 주어가 되시어 맹활약한 해였습니다.
하여 저절로 강론 제목은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이라고 정했고,
하느님을 자랑하리라 작심했습니다.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호언장담하던 저를 하느님은 더 겸손해지라고, 더 비워 낮아지라고,
요셉수도원을 자치수도원으로 승격시키면서
원장직을 내려 놓아 주심과 동시에 안식년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수도원 밖을 순례하라는 특별한 선물을 주시니 '안식년'은 '순례년'이
되었습니다. 하느님 아닌 아무도 예상 못한 하느님의 특단의 조처였습니다.
하여 난생 처음 외적 순례 중 많은 일들을 체험했습니다.
성지가 있어 성인이 아니라 성인이 있어 성지입니다.
수도원이 있어 수도자가 아니라 수도자가 있어 수도원입니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기에 제가 수도원을 떠나 머문 곳 역시 모두
수도원이었습니다.
수도원을 떠나 우선 감행한 것이 국내 순교 성지 순례 였고 1차로 수도권
주변의 성지 순례에 이어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성주간이 지난 부활주일
다음 월요일부터는 20여일의 단식기도 순례 피정을 했습니다.
2차례에 걸쳐 수녀원 연피정을 지도했고, 사랑하는 수도형제들이
사제서품 25주년 은경축(7.11일) 행사도 마련해 줬습니다.
2011년 수도서원 25주년 은경축, 2012년 수도원 설립 25주년, 2013년
요셉수도원에 파견된지 25주년 등 저에겐 참 의미있는
'25'라는 숫자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25주년을 맞이 해 쓴 제 좌우명 같은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자작 고백시를 봉헌하는 마음으로 다시 나눕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 불러 주신 이 자리에서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定住)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1년생 작은 나무가
이제는 25년 울창한 아름드리 하느님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언제나 그 자리에 불암산(佛巖山)이
되어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며 살았습니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행복한 산이 되어 살았습니다.
이제 25년 연륜과 더불어 내적으로는 장대(長大)한
'하느님의 살아있는 산맥(山脈)'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歡待)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親交)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기도하고 일하며 살았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고 세상을 위해 기도하며
끊임없이 일하면서 하느님의 일꾼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戰士)로, 주님의 학인(學人)으로,
주님의 형제(兄弟)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정말 수도원을 떠난 안식년 중에도 이렇게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떠남의 여정-이제 다시 시작이다-(2014.3,22 강론)'이 예언처럼 적중된
해였습니다.
하루하루 흐르는 강물처럼 살았습니다만 늘 하느님 안에 정주했습니다.
이어 8.20일부터 10.8일까지 50여일 동안, 루르드-800km 2000리의
산티야고까지의 도보-파티마 순례중에도 매일미사를 드렸고,
강론을 써서 홈페이지에 올렸습니다.
수도원에 있을 때는 물론이고, 수도원을 떠난 안식년 중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언제 어디서든 성무일도는 물론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강론을
올리며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저를 통해 하느님이 이루신 놀라운 기적입니다.
11.11일부터는 미국의 사막같은 뉴튼수도원에서 내적순례중이고
오늘 12,31일은 '뉴튼수도원 51일째' 되는 날입니다.
참 위태로운 것이 살다보면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그날이 그날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일상의 늪'에 빠지거나 '시간의 감옥'에 갇힌
무력한 수인이 되어 세월의 풍화작용에 몸과 맘도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마련입니다.
떠남의 여정은 그대로 '살기위한' 탈출의 여정입니다. 이래야 매일매일이
새 하늘, 새 땅의 새날이요, 바로 매일 미사와 강론이 이를 가능하게
해줬습니다.
-압바 포멘은 압바 피올에 대해
'그는 날마다 새롭게 시작했다(Each day he made a new beginning)'
고 말했다.-
사막교부의 말씀대로, 날마다 다시 일어나 '초보자(beginner)'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겸손이요 진정한 영성가입니다.
아주 간단한 영성생활의 지침입니다.
어제 새해를 축하한다는 아프리카의 수도형제에게
"Every day is a new day to me(매일이 나에게는 새날이다)"라
화답하면서 자족했던 일도 생각이 납니다.
"자녀 여러분,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 모두의 경각심을 일깨웁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를 깨어 마지막처럼 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 거룩하신 분으로부터 성령의 기름을 받아 진리를 알았으니
거짓 없이 깨어 진리대로 지금 여기를 살라는 말씀입니다.
같은 사도의 다음 복음 말씀도 연상되어 은혜로웠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바로 이 말씀이 복음 중의 복음이요, 말씀의 은총이 우리를 참 사람으로
살게 합니다. 말씀은 하느님이자 그리스도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된 신비가 성탄의 신비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된 것은
사람이 하느님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란 교부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얼마나 존엄한 품위의 사람인지요. 한 번의 성탄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평생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안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신
성탄의 신비는 계속 일어납니다.
하여 우리 모두는 하루하루 은총과 진리가 충만한,
하느님의 영광이 환히 빛나는,
새 하늘, 새 땅의 새 날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은 당신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네."(1요한4,9).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생명과 빛이신 말씀을 품음/ 기경호(프란치스코)신부님
2014년 나해 12월31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7일
제1독서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18-21
복음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의 시작입니다. 1,1-18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요한 1,17)
생명과 빛이신 말씀을 품음
한해의 마지막 날 우리는 영원으로 초대하는 요한복음의 시작을 듣는다.
요한복음의 머리말은 로고스의 선재와 강생, 창조와 구원행위 등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요한복음의 전체 내용을 알아차리도록 이끌어주는
핵심어 역할을 한다. 요한은 예수님의 족보를 전한 공관 복음사가들과는
달리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아버지 안에서 이루어진 영원한 탄생을
서술하고 있다. ‘말씀’은 창조되지 않고 이미 영원 속에 절대적으로 계셨고
(반과거형),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며, 아버지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하느님이셨다(1,1). 여기서 말하는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나 예수님의
말씀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전인격을 가리킨다.
세상 창조는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다. 이렇듯 ‘말씀’이 하느님의 창조행위에
동참하였으므로 모든 창조 활동은 성부와 성자의 공동행위이다(1코린 8,6).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1,3-4). ‘말씀’은
모든 것의 원천으로서 우리가 충만한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주신다.
아울러 말씀은 인간이 걸어가야 할 참된 길을 가리켜주는 ‘빛’이시다(8,12).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 하면서 자신을 따라오는 이들은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8,12).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으나 어둠 속에 살아가는 이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깨닫지 못하였다(1,5). 여기서 ‘깨닫다’는 과거형인데
‘비치다’는 현재형으로 쓰였다. 이는 과거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1,14)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배척했으나 ‘빛’은 지금도 여전히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3,19) 인간을 비추고 있음을 뜻한다. ‘어둠’은 하느님을 거부한
세상, 하느님의 빛으로 비추어지지 않은 세상을 가리킨다. 사실 영혼의
어둠으로 타락하고 눈먼 인간 자신이 곧 ‘어둠’이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참빛이시고(1,9) 충만하신 분이셨으나(1,16)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1,10), ‘맞아들이지 않았다.’(1,11)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빛이 아니지만 ‘빛을 증언하러 왔으며’(1,8),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음을 알려주었다(1,16).
오늘의 말씀에 비추어 우리 삶을 돌아보자! 성탄 시기의 핵심 영성인
교환의 신비를 통하여 우리는 모든 것을 거저주신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창조 이전부터 영원성을 띠고 존재하신 말씀이신 예수님의
전인격이 매순간의 나의 삶에서 드러나는가? 혹시 나는 뿌리도 없고 가야
할 방향도 모르면서 세상의 어둠이 주는 ‘어둠’에 맛들이며 헛되고 헛된
것을 좇고 있지는 않은가?
모든 것이 말씀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생겨났다면 나도 나의 삶을 통하여
모든 창조의 근원인 예수님의 창조행위에 동참하여야 하지 않을까? 왜
우리는 어둠을 비추는 빛을 알아보지도 맞아들이지도 못한 채 스스로
‘어둠’인 채 서성대는 것인가? 이 성탄시기에 사람이 되어 오신 말씀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주어진 은총과 진리에 감사하며 빛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한해의 마지막 날 물리적 시간의 끝에서 아쉬워 하기보다 창조
이전부터 영원히 계시는 그분을 더 그리워 하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인천] 마무리
2014년 나해 12월31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7일
제1독서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18-21
복음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의 시작입니다. 1,1-18
드디어 2014년의 마지막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오늘의 새벽 묵상
글을 쓰고 난 뒤에 다른 해와 마찬가지로 2014년 한 해 동안 쓴 묵상
글들을 모아서 제본할 것입니다. 그러면 책꽂이에 ‘2014년 새벽을 열며’
라는 제목으로 제본된 총 824페이지의 책 한 권이 또 꽂히겠지요.
흐뭇하면서도 아쉬움이 남기도 합니다. 이제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인데 그
시간들을 충실하게 보내지 않은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항상 12월 31일에
갖게 되는 심정입니다. 이렇게 후회할 것을 왜 그리 충실하게 생활하지
못했는지....
어제는 장례미사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청년인데, 교통사고로
주님 곁으로 너무 빨리 가고 말았지요. 이 청년이 교구에서 봉사활동도
많이 해서 교구 청년 담당 신부님과 함께 장례미사를 다녀왔지요. 미사를
끝내고 함께 차를 타고 오는데 이 신부님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사고 나기 전에 힘들다고 하면서 제게 만나자는 전화를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너무 바빠서 잠깐 시간 내서 고작 커피 한 잔 마신 것이
끝이네요. 이야기를 들어주지 못한 것이 너무나 후회되고 미안하네요.”
살아가면서 후회를 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항상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동반하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요. 문제는 상당수의 후회를
줄여나갈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해야 할 것들을 미루지 않는 것,
특히 사랑의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길 때 후회는 크게 줄어들 수
있습니다.
오늘 12월 31일이 2014년의 마지막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특별한
날처럼 느껴지는 것처럼, 매일 매일을 내게 남은 마지막 하루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면 어떨까요? 오늘 하루가 지상에서 사는 마지막 날이라고 한다면
말 한 마디도 아끼고 정성껏 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려고 온 몸으로
표현할 것이며, 나를 위한 삶이 아닌 남을 위한 삶을 살겠지요. 아직도
많은 시간이 있다는 생각에 후회를 계속 남기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고
전해줍니다. 말씀으로 세상으로 창조하신 하느님이시지요. 그 하느님께서
이제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였습니다.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또한 그 사랑에 힘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나약함과 보족함으로 인해 후회할 것을 계속 남기지만,
우리 구원을 위해 오신 주님과 함께 하면서 그 안에서 힘을 얻어나간다면
후회할 일을 줄여 나가게 되고 더불어 구원의 큰 선물도 얻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2014년 오늘 특별히 잘 마무리 하시고, 주님께서 큰 선물로
주신 밝아오는 2015년을 기쁘게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불완전함은 우리 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존재의 자연스러운 부분이다
(타라 브랙).
가장 좋은 것이 되십시오(발타자르 그라시안, ‘피자 열아홉 조각으로 지은
집’ 중에서)
무엇이 되든 가장 좋은 것이 되십시오.
그대 만일 언덕 위에 소나무가 될 수 없다면
골짜기의 섶나무가 되십시오.
그러나 냇가의 가장 좋고 아름다운 나무가 되십시오.
만일 소나무가 될 수 없다면
보기 좋은 관목이 되십시오.
그대 만일 관목이 될 수 없다면 작은 풀이 되십시오.
그리하여 길가를 보다 아름답게 만드십시오.
만일 그대가 꼬치고기가 될 수 없다면 농어가 되십시오.
그러나 호수에서 가장 팔팔한 농어가 되십시오.
우리들 모두가 선장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선원이 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부에게 무언가 할 일은 있습니다.
큰일이 있는가 하면 작은 일도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대 만일 큰 길이 될 수 없다면
아주 작은 오솔길이라도 되십시오.
그대 만일 태양이 될 수 없다면 별이 되십시오.
실패와 성공은 크기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되든 가장 좋은 것이 되십시오.
너무나 마음에 드는 시입니다. 어떤 것이 되는가는 중요하지 않지요.
무엇이 되든 내 삶 안에서 좋은 것이 될 때, 그 삶이야 말로 가장 성공한
삶이 아닐까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청주] 생명, 그리고 빛|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나해 12월31일 성탄 8일 축제 내 제7일(요한1,1-18)
제1독서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18-21
복음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의 시작입니다. 1,1-18
생명, 그리고 빛
한 해의 끝자락에 왔습니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라는 목표를 세우고
살았지만 부끄러움이 큽니다. 거창하게 시작했으나 열매는 초라합니다.
그래도 돌아보면 큰 은총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컸습니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주님의 수난과 고통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기쁘면 기쁜 대로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내 감정의 기복에서 왔다 갔다 한
것이지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시며 당신의 품에 머물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좋아서 호들갑 떨 것도, 좋지 않아서 실망할 것도 없는
주님의 품을 내 마음대로 들락거리면서 인상을 찌푸리고 투덜대기도 하고,
언제 그랬냐 싶게 속이 보이도록 웃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좀 더 진중하게
주님의 마음을 읽고 주님의 품을 그리워하는 한 해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을 살 수 있는 은총을 감사하고 내일의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기쁨에 목말라 했으면 좋겠습니다.
요한복음 사가는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3-5). 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빛인 생명이 주어졌지만
어둠에 가리어졌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하느님의 계명을
사는 것이 생명이건만 그 참 생명을 깨닫지 못하고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요한1,10-11). 그러나
그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밝게 비추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얻게 됩니다
(요한1,12).
따라서 빛을 받아들이는 눈, 생명을 받아들이는 삶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육안으로는 그 생명을 볼 수 없습니다. 영적인 눈이 뜨여야 영적인 그분의
생명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삶은 이 세상의 삶이 아닙니다.
영원한 삶을 누리도록 허락된 우리들에게 이 세상에서 보내는 몇 년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원히 살기 위해서라면 이 세상에서의 몇 년은
잃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성 세실리아).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1요한2,17).
생명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명이, 하느님의 법칙이, 하느님의
뜻이 삶 안에 녹아나는 것입니다. 생명은 곧 빛입니다. 생명의 빛이 우리
모두를 비추도록 은총을 갈구하는 오늘이기를 빕니다. 한 해를 감사하고
새해를 주님의 이름으로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복 많이 받으십시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착각이면 어떤가? 긍정적이라면
2014년 나해 12월31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7일
제1독서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18-21
복음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의 시작입니다. 1,1-18
< 착각이면 어떤가? 긍정적이라면. >
‘인간의 두 얼굴’이란 EBS 다큐에서 ‘긍정적 착각’이란 말을 처음 듣게
되었습니다. 착각은 부정적인 의미만 있는지 알지만 사실 긍정적 착각을
이용해 병을 치료하는 ‘플라시보 효과’와 같은 것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사람은 믿는 대로 되는 존재기 때문에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더 긍정적인
일들이 현실화 됩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야구대표팀이 금메달을 획득한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준결승전인 일본전에서 한국은 8회 말 터진 이승엽
선수의 극적인 역전 2점 홈런으로 감격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홈런을
치기까지 극심한 슬럼프를 겪던 이승엽 선수는 경기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타석에 들어서면서 머릿속에 자신이 홈런을 치고 두 손을 번쩍 들고
그라운드를 도는 상상을 했다.”
사실 우리는 부정적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긍정적으로
착각하게 만들어야 되는지도 모릅니다. 믿는 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긍정적인 착각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물 위를 걸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스도만 믿으면 이 세상에서 물 위도 걸을 수 있다는
착각이 결국은 현실이 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 믿음은
착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착각이면 어떻습니까? 인간은
착각이 현실이 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제작진은 긍정적 착각이 아이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알아보는
실험을 하기로 했습니다.
초등학생 4학년 150명을 대상으로 긍정적 착각도를 측정한 후, 긍정적
착각도가 가장 높은 아이들 5명과 긍정적 착각도가 평균인 아이들 5명을
데리고 한 가지 프로젝트를 실시하기로 했습니다. 각각 5명의 아이들이
한 팀이 되어 ‘준비된 종이상자를 20분 동안 되도록 높이 쌓아야 한다.’
는 간단한(?) 임무가 그것입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아이들에게 이
종이상자 쌓기는 처음부터 실현이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제작진이 아이들 모르게 계속해서 상자를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금방 포기할 줄 알았던 아이들. 그런데 놀랍게도 긍정적 착각도가 높은
아이들은 미션 수행 도중 어려운 난관에 부딪혀도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상자가 무너져도 다시 쌓으면 된다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하며 서로를 격려하며 최선을 다해 상자를 쌓았습니다.
반면 긍정적 착각도가 평균인 아이들은 똑같은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포기하고 좌절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상자 쌓기 결과, 긍정적 착각도가
높은 아이들은 7층을 쌓은 반면, 평균인 아이들은 2층을 쌓는데
그쳤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실험 후 아이들의 인터뷰였습니다. 이미
쌓아 놓은 게 다 넘어졌다는 것이 너무 아깝지 않았냐는 질문에 긍정적
착각도가 높은 아이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다시 쌓으면 되잖아요!”
긍정적 착각도가 높은 아이들은 실험외적인 요인에 대한 원망이나 불안
등에 대한 어떤 불신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만 아이들이 보여준
것은 타인에 대한 신뢰와 협조, 그리고 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자신이 잘 해내고 이겨낼 수 있다는 긍정적인 믿음’ 이것이 바로 아이들이
보여준 긍정적 착각이었습니다. 미국 UCLA대 셀리 테일러 교수는 ‘긍정적
착각이 동기 부여에 매우 효과적이며 장기적으로 성공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학생 때부터 등수를 먹이는 경쟁 사회에서는 끊임없이
다른 아이들에게 지기 때문에 생각이 부정적으로 될 가능성이 훨씬 크고
그런 아이들이 자라나는 나라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가끔 상대가 잘못 착각하고 있는 것을 반드시 바로잡아 주어야만
한다는 지나친 의무감을 갖기도 합니다. 그래서 굳이 그것을 밝혀내어
사람들 간의 사이를 벌려놓기도 합니다. 사실 어떤 착각들은 그냥 묻어두는
것이 더 좋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 굳이 오류를 바로잡지 않고 그대로 두었던 것
한 가지가 나옵니다. 바로 초대 교회 때 성행했던 종말 임박설입니다.
바오로도 그렇고 오늘 요한도 곧 그리스도의 재림이 올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자녀 여러분,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그리스도의 적’이 온다고 여러분이
들은 그대로, 지금 많은 ‘그리스도의 적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압니다.”
아마도 요한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한 이들은 영지주의자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영지주의자들로부터 지금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종파들까지 단 하루도 그리스도의 적이 없었던 때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 초대교회의 재림임박설에 대해 그렇게 착각하고
살도록 그대로 두었던 이유는 그런 착각이 꼭 나쁘지만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세상의 심판이 곧 닥쳐온다는 믿음이 있다면 지금의 교회는
지금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커다란 성당을 짓는데 돈을 쓰기 보다는
조립식 건물에 살더라도 가난한 이들을 더 많이 돕겠고, 죄의 생활을 하는
이들은 또한 당장 오늘이 될 지도 모르는 심판 때문에 회개하여 올바른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긍정적인 착각이라면 하느님도 굳이 바로잡아
주려고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오늘이 진짜 마지막 날일 수도
있습니다.
배우 강부자씨가 SBS ‘좋은 아침’에 출연해 남편 이묵원씨의 외도를
알고도 모른 척 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남편이 나가서 사흘씩이나 어떤 여자하고 호텔에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다. 여자가 누군지 알지만 추궁하지 않았다.”
강부자씨는 “그는 방송국에 나랑 있다가도 다섯 시만 되면 그 여자와
사라지더라. 다 알았는데 이 남자와 더 이상 안 살 거면 떠들어도 된다.
하지만 난 이 남자와 끝까지 살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말 안했다. 그 때가
우리 아들이 아장아장 걸을 때였다”고 회상했습니다.
이어 “예를 들어 쥐를 쫓아갈 때 막다른 골목에 쥐가 부딪치면 노려보며
뒤돌아선다. 그러니까 쥐도 도망갈 구멍을 줘야하는데 남편이
바람피웠다고 몰아세우면 안 된다. 그냥 넘어가 줘야한다. 어차피 아들이
있는데 자기가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야지 뭐하겠냐”고 넘겨 버렸다고
합니다.
사실 강부자씨의 얼굴을 보면 평상시에도 근심이 많고 매우 슬퍼 보입니다.
아마도 많이 참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한 거번에 9명의 남자에게 대시를
받았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던 강부자씨가 그 9명 중 선택한 한 명이
이묵원씨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기가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외도를
했다면 아기를 키우는 아내 입장에서는 더 분통이 터졌을 터인데도 참고
또 참았던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이미 지긋한 나이가 든 부부로써 서로를
위해주며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묵원씨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느껴서 가정으로 다시 돌아왔을 것입니다. 강부자씨는 이묵원씨가
한 일을 자신이 모른다는 착각을 심어주면서 이묵원씨가 스스로 뉘우치고
돌아올 시간을 준 것입니다. 착각이라는 것이 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긍정적인 착각이라면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2015년은 주님의 해(Anno Domini)거든요.
2014년 나해 12월31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7일
제1독서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18-21
복음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의 시작입니다. 1,1-18
2015년은 주님의 해(Anno Domini)거든요.
유아세례가 일반적인 서양에선 어른 영세를 의아해할 정도로 모릅니다.
어른이 어떻게 영세를 받느냐고 어린이들이 니코데모처럼 질문을 합니다.
새사람이 된다는 건 인생 방향전환이며 새로운 세상을 열고 입적하는 거지요.
내년엔 새 세상 구경하시면 어떨까요.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던 세상이요.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하느님 자녀 되는 특권을 갖는다고 성경에 있거든요.
곧 예수님 탄생 후 AD 2015년, 역사의 가늠 점이신 분을 새롭게 느낍시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요한 1,12~13)'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한해의 끝자락에 서서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한해의 끝자락에 서서
한해의 끝자락에 서서 지난날들을 되돌아봅니다. 참으로 금쪽같이 소중한
시간이었는데, 어찌 그리도 허송세월하며 보낸 순간들이 많았는지...
하느님 앞에, 벼랑 끝에 내몰린 이웃들 앞에 이렇다하게 내어드린 것도
없는데 또 세월은 어찌 그리도 속절없이 빠르기만 한지...
생각할수록 부끄러운 한해입니다. 생각과 말만 앞섰지 행동이 전혀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정녕 쥐구멍이라고 들어가고 싶은 한해의 마지막
페이지입니다.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못했던, 그래서 하느님 앞에
송구스런 날들이었습니다.
다시 되돌이킬 수만 있다면 컴퓨터 리셋 하듯이 좋지 않은 기억들 싹 밀어
지워버리고 새롭게 시작하고픈 연말입니다.
그러나 좀 더 곰곰이 생각해보니 마냥 힘겹고 서글픈 날만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돌아보면 상처와 허물투성이의 날들, 때로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듯한 날들이었지만 때로 구원자 예수님께서 당신 사랑의
빛을 가끔씩 비춰주셨습니다. 참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인해 그래도 견딜만한 한해였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자꾸만 어둠속으로 파고드는 우리를 지속적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심연의 어둠 속에 앉아있는 우리를 향해 일어나 밖으로
나오라고 외치시고, 때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손수 손을 잡아 생명의
광장으로 이끌어내셨습니다.
아무리 부끄럽다, 송구스럽다, 한심하다, 자책하지만, 돌아보니 그분의
충만함으로 인해 우리는 은총에 은총을 입었습니다. 은총을 받고 또 받은
은혜로운 한해였습니다.
비록 때 묻고 얼룩진 우리, 상처입고 흠투성이의 우리 날들이었지만
그분의 현존, 그분의 빛으로 인해 우리 삶도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강렬한 광채로 인해 제 삶도 작은 빛이나마 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뜨거운 사랑으로 인해 우리 인생은 매일같이 화사한
봄날로 변화되었습니다.
힘겹다, 외롭다, 죽겠다고 외쳐대지만 곰곰이 돌아보니 참으로 많은
감사꺼리들이 머릿속을 맴돕니다. 언제나 혼자라고 생각했는데...가만히
생각해보니 결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다들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찬찬히 헤아려보니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숨어서 선행을
쌓는 이들, 조용히 하늘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각자를 당신 눈동자보다 더 귀히 여겨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의 감각이 너무 무뎌져 미처
깨닫지 못하지만 언제나 우리의 등 뒤에서 우리를 든든히 떠받치고 계시는
자비하신 하느님이 동행하십니다.
결국 이 한해의 끝자락에 우리가 드릴 기도는 감사의 기도뿐입니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요한복음 1장 16절)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성탄 팔일 축제 내 제7일
2014년 나해 12월31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7일
제1독서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18-21
복음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의 시작입니다. 1,1-18
명동 교구청에서 지내면서 늘 듣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명동 성당에서
타종하는 ‘삼종기도’를 알리는 종소리입니다. 지금 이 시간도 창문 넘어
삼종소리가 들려옵니다. 지난 1년 많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것들은 더 잘 들렸고, 제가 무심하게 스치고 지나간 것들은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많은 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깨어있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 하느님께서 보내 주시는 뜻을 읽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들려주시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제 방에는 탁상용 달력이 있습니다. 빈칸들에는 지난 1년간 제가 해야
했던 일, 저와 함께 하셨던 분들과의 만남, 제가 하고 싶었던 일들이
빼곡하게 적혀있습니다. 1월에는 할아버지 기일이 있어서 어머니가
사시는 의정부 집엘 다녀왔습니다. 2월에는 ‘주교, 사제, 부제 서품식’이
있었습니다. 3월에는 제가 살았던 적성 성당에 사순 특강을 다녀왔습니다.
4월부터 8월까지는 매주 교황 방한 준비 모임이 있었습니다. 9월에는
신학교 지원자 면담이 있었습니다. 10월에는 예전에 알던 지인이 찾아와서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11월에는 사제, 부제 서품자들의 교구장님
면담이 있었습니다. 12월에는 대림특강을 다녔고, 성탄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지난 1년 탁상용 달력에는 무슨 일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는지요?
어떤 분들은 ‘세월호, 쌍용, 강정, 밀양’등과 같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제 막 태어난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정말 많은 소리들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었던 성서 말씀은 요한 사도의 이야기입니다. 전승은 요한
사도께서는 예수님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성모님을 모시고
살았으며, 교회의 귀중한 보물인 요한복음, 요한 서간, 요한 묵시록의
저자라고 합니다. 복음에서 요한은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께서 늘
가까이 데리고 다녔던 제자 중에 한 분이셨음을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셨을 때에도 요한 사도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죽은 소녀를 살려 주셨을 때에도 요한 사도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을 때에도 요한 사도는 함께 있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세상을 떠나실 때에도 요한은 예수님 곁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드렸습니다. 어머니께는 요한
사도를 부탁하였습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 사랑을 받은 만큼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 하느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말씀이셨고, 말씀은
하느님이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태초부터 계셨던 분, 말씀이셨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자칫 예수님에 대한 기록으로 머물 뻔했던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영적인 세계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심오한
철학적인 주제들을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8장에서
우리는 지혜로운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과 15장에서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는 목자이신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우리를 영적인 세계로 인도해주는 안내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사도가 있어서 마음이 든든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요한사도가 있어서 십자가 위에서도 눈을 감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요한사도가 있어서 행복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들 또한 요한사도처럼
주님의 마음을 든든하게 해드려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편히 쉴 수 있도록
해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들 때문에 주님께서 행복할 수 있도록 살아야
하겠습니다.
한해의 끝자락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아멘
2014년 나해 12월31일 수요일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제1독서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18-21
복음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의 시작입니다. 1,1-18
성탄 팔일 축제 제7일(2014년 12월 31일)
아멘
오늘 아침 아직 어두운데 바람마저 붑니다. 어떤 곳에는 눈이 날린다고
합니다. 마음 속 마지막 남은 달력 한 장도 바람결에 따라 흩날립니다.
이제 마지막 한 장을 떼어낼 날이네요. 지나간 달력 숫자들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한 해를 매듭지으며 기억을 떠올립니다. 기억 속의
숫자들은 수학에서 말하는 기호가 아닙니다. 단 하나의 숫자에도 그
안에는 엄청난 삶의 의미가 깊이 새겨있습니다. 어떤 날은 정말 기억하고
싶기도 하지만 어떤 날은 깨끗이 지우고 싶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기쁨과 슬픔, 행복과 고통, 활력과 무미건조함이 서로 날실과 씨실이 되어
삶이라는 천을 만들었음을, 그리고 지금도 계속 짜고 있음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난 일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늘 기억합니다.
그러면 지나간 나날들이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리스도의 빛으로
바라보기에 기억하고 싶지 않는 사건들도 거침없이 떠...올릴 수 있습니다.
직시할 수 있습니다. 오늘 특별히 0416을 떠올립니다. 한 순간에 사라져간
어린 영혼들을 기억합니다. 아직도 차디찬 물속에 남아 있는 9명을
기억하고 기도합니다. 또한 아직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 가족들을 가슴
깊이 생각합니다. 기도합니다. 또 기도합니다.
우리를 위해 태어나신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1-4). 이분이 우리
가운데 계시기에 우리는 희망을 늘 품습니다.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일도
걸어갈 것입니다.
이 묵상글을 마무리하는데 갑자기 함박눈이 내립니다. 이 눈이 모든
분들에게 축복의 의미로 내리길 기도합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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