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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청(淸) 강희제(康熙帝, 1661~1722)
1661년(순치 18년) 아버지가 죽자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로 즉위하여 1722년(강희 61년)까지 61년간 재위함으로써 중국 역사상 가장 긴 재위기간을 가진 황제이다. 즉위 초에는 어린 나이로 인해 병부상서 오배 등의 네 명의 보정대신들에게 국정을 일임하였다. 만주족의 예법에 따라 1667년(강희 6년), 14세에 친정을 시작하였으며 2년 뒤에 발생한 오배의 난을 평정하여 실질적으로 조정을 장악하였다. 이후에는 1673년(강희 12년)에 8년 동안 지속된 삼번의 난을 평정하고 이어 1683년(강희 22년)에 대만을 청나라에 복속시켰으며 북방의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만주와 연해주 쪽의 국경을 확정하였다. 한편 1696년(강희 35년)에는 청나라에 대항하던 몽골 오이라트로 친히 원정하여 중가르의 칸 가르단의 군사를 격파하여 북방을 안정되게 하였으며, 1721년(강희 60년)에는 가르단을 지원했던 티베트에 군대를 보내 정복함으로써 티베트를 청나라 영토에 편입시켰다. 이렇듯 강희제는 오배의 난과 삼번의 난과 같은 재위 전반기의 위기를 극복하고 대외 정책에서의 외교적, 정치적 성공을 거둠으로써 강력한 절대 황제권을 수립하였다.
강희제는 단호한 외정과는 달리 내정에서는 선정을 베풀었는데 황하와 장강의 치수에 성공하여 농사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으며 전란의 와중에도 세금을 줄이고 인두세 역시 영원히 동결하여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주었다. 한편으로는 《강희자전》, 《고금도서집성》 등 대규모 편찬사업을 벌여 당대의 문화발전과 현대 중국어 어법의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지배층인 만주족과 피지배층인 한족을 고루 등용하여 조정의 화목을 꾀하였다. 또한 중국 역대 황조 중 마지막 태평성대인 강건성세(康乾盛世)를 일으켜 아들인 옹정제(雍正帝), 손자인 건륭제(乾隆帝)까지 태평성대가 지속되었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자 명군, 즉 천고일제(千古一帝, 천 년에 한 번 나올 만한 황제) 또는 연호를 따서 강희대제(康煕}大帝)로 칭송받으며 아직도 많은 중국인에게 크게 존경받는다.
그는 당시 서양에서 역시 절대 왕정을 수립한 루이 14세, 러시아 근대화에 박차를 가한 표트르 1세 등 업적이 많은 유럽의 여러 군주들과 더불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통치자였다. 또한, 황후 4명 등 총 64명의 후비(后妃)와 잉첩(媵妾)을 거느려서 청나라의 역대 황제 중 가장 많은 후궁을 둔 황제이며 아들 35명과 딸 20명을 두어 중국 역대 황제 중 가장 많은 자식들을 둔 황제이기도 하다.
1654년(순치 11년) 5월 4일 북경 자금성의 동쪽 후궁 동육궁 중 하나인 경인궁(景仁宮)에서 순치제의 후궁인 강비 동가씨에게서 태어났다. 현엽은 강비 동가씨의 유일한 소생이라, 태어나면서부터 경인궁에서 어머니에게 금지옥엽처럼 키워졌다. 현엽은 어릴 때부터 학문에 남달라 책을 읽으면 바로 암송하고 그 뜻을 능히 꿰뚫어 즉시 풀이하였고 궁술에 뛰어나 말을 타면서 토끼를 바로 쏘아 맞히는 등 문무를 겸전하여 부황 순치제와 조모인 효장태후의 총애를 받았다. 5살 때부터 제대로 황자들이 배우는 학문을 배우는데, 인시(寅時, 새벽 4시)에 일찍 일어나 부황과 조모 그리고 적모(嫡母)인 황후, 모비에게 문안을 올리고 진시(辰時, 아침 8시)에 나가 밤늦은 술시(戌時, 저녁 8시)까지 문연각에서 스승의 지도 아래 공부하였다.
7살 때인 1660년(순치 17년)에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순치제의 4남 이 죽자 뒤이어 황태자 자리에 올랐으나 공식적으로 선포되지 않았다. 현엽이 황태자에 지명된 이유는 어머니 동가씨가 승은공 동도라의 딸로 개국공신 집안 출신이고 당시 모든 후궁들 중 품계도 가장 높았으며 당시 순치제의 황후였던 효혜장황후(孝惠章皇后)가 아들이 없자 총명한 현엽을 눈여겨보던 순치제는 그를 황태자로 삼은 것이다. 순치제는 억지로 혼인한 효혜장황후를 멀리하였고 오히려 궁녀 출신의 동악씨를 총애하여 현비(賢妃)로 삼아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가 사는 승건궁(承乾宮)을 찾았다.
그 해 11월에 자금성 안에 천연두가 퍼지고 현비 동악씨가 천연두에 걸리자 순치제가 총애하던 현엽을 동악씨의 양자로 주려 했으나, 효장태후와 생모인 동가씨가 황위 계승자인 현엽이 천연두에 옮을 것을 염려하였기에 이에 완강히 반대하여 실패하였다. 그러나 현엽이 갑자기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맸으며 다행히 얼마 안 되어 나았다. 그리고 두 달 뒤인 1660년(순치 17년) 12월, 동악씨는 결국 차도가 보이지 않고 죽자 순치제는 즉시 동악씨를 효헌단경황후(孝獻端敬皇后)로 추서하고 태묘에 그 신주를 모셨다. 그리하고 나서, 순치제는 이례적으로 자신이 총애하던 태감을 오대산에 있는 청량사(淸凉寺)에 보내어 동악씨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동악씨는 출신이 높은 귀족 집안이 아닌데 황후에 봉해지고, 서출 출신의 죽은 황자가 이례적으로 황태자의 작위를 받자 만주족과 한족 대신들의 반대가 매우 컸다. 반대가 심하고 황태자였던 자신의 4남을 잃은 슬픔까지 겹쳐 순치제는 1661년(순치 18년) 1월 하순, 제위에서 물러나 이미 자신의 태감이 있는 오대산 청량사로 출가하고, 주지 옥림수(玉林秀)에게서 행치(行痴)라는 법명을 받았다.
당시 대신들은 순치제에게 빨리 돌아오라 종용하였으나 순치제는 끝내 듣지 않고 머리카락을 자르기까지 하였다. 〈세조장황제실록〉에 따르면 순치제는 다시 황궁으로 돌아왔고 회궁 도중 천연두에 걸려 1661년(순치 18년) 2월 5일 24세의 나이로 붕어하여 황위가 유고 상태가 되었다. 당시 황태후이자 순치제의 어머니 효장태후는 순치제가 붕어하자 매우 놀라며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조정의 최고 신료인 영시위내대신(領侍衛內大臣) 6인과 각지의 친왕·군왕들을 불러들였다. 그 중 미리 지어진 유조에 따라 조정의 수장인 정황기 출신의 감국대신 겸 이부상서 색니, 양황기 출신의 병부상서 오배, 정백기 출신의 형부상서 소극살합, 역시 양황기 출신의 호부상서 알필륭에게 일단 황궁을 봉쇄하고 궁인들에게 입단속을 하게 하였다.
조정은 그 해 2월 7일에 순치제의 붕어를 공식 발표하였고, 국상을 준비하였다. 2월 17일에 효장태후는 순치제에게 세조(世祖)라는 묘호와 장황제(章皇帝)의 시호를 올리고 순치제의 시신을 효릉(孝陵)에 안장하였다. 뒤이어 순치제의 유조를 낭독하니 현엽을 황태자로 책봉하라 쓰여있었다. 유조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 짐의 아들인 강비 동가씨 소생의 제3황자 현엽은 연치가 겨우 8살이나 그 용모가 단정하고 영민하니 이 나라 종묘사직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고로 현엽을 황태자에 책봉하여 다음 황제에 올리도록 하라. 27일 동안 상복을 입다가 그 뒤 옷을 대례복으로 갈아입고 즉위식을 치르도록 하라. 특히, 영시위내대신 색니, 소극살합, 알필륭, 오배는 조정의 원훈이자 개국공신으로 짐이 언제나 신뢰하던 대신들이니 충성을 다하여 신제를 보좌하고 정무를 처리하라.”
이에 따라 8살의 황태자 현엽을 청나라의 새 황제로 추대하니 이가 청나라의 제4대 황제인 성조 강희인황제(聖祖煕仁皇帝)이다. 어머니 강비 동가씨를 황태후에, 당시 순치제의 황후였던 효혜장황후 역시 황태후로 격상하고, 조모인 효장태후는 태황태후로 격상하였으며 이듬해인 1662년에 연호가 순치(順治)에서 강희(康煕)로 바뀌었다. 이 새로 정한 연호인 강희의 ‘강’(康) 자는 안녕과 평화, ‘희’(煕) 자는 조화와 흥성을 뜻하므로, 강희는 바로 평화로운 조화를 뜻한다.
만약 효장태후가 빨리 영시위내대신을 부르지 않고 수수방관하였다면, 황궁에 보위를 놓고 쟁탈전이 일어났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효장태후는 이를 신속히 대처하고 황태자 현엽을 제위에 올려 화를 막을 수 있었다. 황위에 오를 당시 정치적으로 매우 급변적이던 상황과 8살이라는 정치를 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가 악재로 작용하여 제왕학 수업도 제대로 받지 않은 채 즉위하였으나 자신이 평생 황제로 살아야 할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틈틈이 제왕학 수업을 지속하면서 일찍 정치를 깨닫기 시작하였다.
1662년(강희 원년)에 중국 서남부 운남으로 쫓겨가 겨우 명맥만 유지한 남명(南明)의 황제 영력제가 청군 및 평서왕 오삼계에게 버마에서 처참히 죽임을 당해(6월 1일, 음력 4월 15일), 명나라의 황통을 이어받고 청나라에 비협조적인 여러 한족에게 은밀히 지지받던 남명은 명나라 멸망 후 18년 만에 이렇게 멸망하였다.
친정과 오배의 난
효장태황태후
강희제는 8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아직 친정은 할 수 없었다. 본래 어린 황제가 즉위하였으면 황태후나 태황태후가 수렴청정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미 황태후였던 자화황태후(慈和皇太后), 즉 강희제의 생모인 효강장황후 동가씨는 강희제가 등극한 지 얼마 안 되어 병에 걸리고 2년 만인 1663년(강희 2년)에 24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다른 황태후이며 강희제의 적모인 인헌황태후(仁憲皇太后), 즉 순치제의 황후인 효혜장황후는 황태후 서열로는 효강장황후보다 위였으나 엄연히 위에 시어머니인 효장태황태후가 있어서 수렴청정할 권한은 쥘 수 없었다. 대신들 사이에서 수렴청정할 것이라 예상하던 효장태황태후는 수렴청정을 직접 하는 대신 네 명의 보정대신들에게 정책 최고 의결권을 내렸다. 그리하여 보정대신들이 그를 보필하였다.
보정대신들은 어린 황제가 훗날 환관들에게 농락될까 봐 순치제 때 설치된 명나라의 동창(東廠, 환관의 수뇌부이며 황제 직속 정보기관)과 비슷한 기구인 십삼아문(十三衙門)을 폐지하여 환관들을 정무에서 축출하고 원래 순치제 때 폐지된 내무부를 다시 설치하여 황제에게 충성스러운 만주족 충복들로 하여금 환관들을 대신하게 하였다. 보정대신은 모두 꽤 상당한 권력을 누렸으나, 그중에서도 병부상서 오배가 제일 권력이 막강하였다. 오배는 백성들의 땅을 불법으로 획책하는 등 갖은 전횡을 일삼았다. 하지만 병권을 틀어쥐고 있어서 오배에 비해 세력이 미약한 대신들이나 아직 친정을 시작하지 못한 강희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일단 강희제는 오배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일부러 장정들을 불러 몽골 씨름을 하도록 하였다. 또한, 틈틈이 제왕학 수업을 잊지 않고 배웠다. 강희제의 그 스승이 바로 명나라의 마지막 진사시(進士試)에서 장원을 한 제세(濟世)였다.
오배
강희제는 오배를 견제하기 위해 또 다른 보정대신인 색니의 손녀를 황후로 맞아들이기도 하였다. 그녀가 바로 강희제의 정궁황후이며 첫 번째 황후인 효성인황후(孝誠仁皇后) 혁사리씨다. 1667년(강희 6년) 7월 14살이 된 강희제는 조상의 예법에 따라 친정을 시작하였고 성인 의례와 함께 정식 즉위식을 치렀으나, 그 해에 자신을 보호해준 색니가 소극살합에게 강희제를 돌봐 달라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소극살합이 권력을 잡으려 하였으나 이에 위기감을 느낀 오배는 소극살합에게 날조된 역모죄를 뒤집어씌워 교수시키고 자신이 조정의 전권을 장악하였다. 오배는 소극살합을 죽이는 과정에서 이에 반대하는 강희제를 강압하여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강희제는 아직 오배의 세력에 대응할 수 없어 굴복하고 말았다. 오배의 이러한 행동은 분명 군주 기만죄(기군죄)였으나 아직 힘이 약한 강희제는 그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다른 보정대신인 알필륭은 오배의 편에 붙었으나 오배의 전횡을 부추기지도 그렇다고 비난하지도 않았다.
선황 순치제의 유조를 받은 고명대신 중 한 명인 소극살합을 죽이고도 계속 더 많은 횡포를 일삼는 오배를 보고 강희제는 군사를 이끌고 선수를 치려 했다. 그러나 조모인 효장태황태후가 이를 말리고 사태를 지켜보라 일렀다. 하루는 소극살합을 죽인 오배가 병을 핑계로 두문불출하는데 강희제가 문병을 갔다. 오배는 강희제에게 위문을 받은 뒤 다시 자리에 누우려 할 때, 그의 품 속에서 단도가 발견되었다. 강희제는 만주족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단도를 찬 것은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전통이라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으나, 분명 오배가 선수를 틈타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을 안 강희제는 치밀하게 오배를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본격적으로 세웠다.
강희제는 색니의 아들 색액도 등을 규합하여 무술 수련을 한다는 명목으로 선복영이라는 이름의 친위병을 양성하였다. 1669년(강희 8년) 5월 16일 오배가 궁정에 알현하려 오자 강희제는 기회를 틈타 선복영을 앞세워 오배를 체포하였다. 강희제는 오배가 군주 기만죄인 기군죄 등 30개의 대죄로 30번 처형되어야 마땅하지만 선황인 태종과 세조를 전투에서 온몸으로 막은 공을 참작하여 가산을 적몰하고 목숨만 보전하게 하고 유배형을 내렸다. 그러나 언제 다시 반기를 들지 모른다는 여러 대신들의 주장으로 귀양을 보내기도 전에 결국 사약을 받아 처형되었다. 강희제는 오배의 죽음으로 뒤숭숭한 조정에 색니의 차남 색액도(索額圖)를 대신으로 삼아 조정을 안정시켰다. 이로써 강희제는 진정한 친정을 하게 되었으며, 신하들에게 막중한 권한을 맡기지 않고 강력한 황권을 확립하기에 이른다.
삼번의 난
청년 시절의 강희제
오배를 축출한 이후, 강희제는 오배보다 더 막강한 세력인 삼번(三藩)을 염려하기 시작하였다. 원래 번(藩)은 청나라의 특수 행정구역으로 주로 변방에 설치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삼번은 남명에 대비한 것으로 운남, 귀주 지역을 담당한 평서왕의 오삼계(吳三桂), 광동의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복건의 정남왕(靖南王) 경중명(耿仲明)이 관할하였다. 이들은 모두 한족 출신이었으나, 순치제 때 청나라의 중국 통일을 크게 도와 번왕에 책봉됨과 동시에 막강한 군사권과 남해에서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으로 엄청난 돈을 축적하고 있었다. 강희제가 친정을 시작할 무렵 정남왕의 직위는 경중명의 손자 경정충(耿精忠)이 승계하였다. 강희제 즉위 무렵에는 이미 남명이 멸망하고 반청 세력이 일소된 상황이었으나 삼번은 여전히 막강한 세력을 유지하고 자신이 다스리는 지방에서의 행정권, 사법권까지 모두 가지고 있었다. 삼번이 사실상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자 중앙집권제를 강화하려는 청나라 조정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오삼계는 삼번왕 가운데 품계가 가장 높았고 홍타이지의 막내딸이자 강희제의 막내 고모인 화석건녕공주를 며느리로 둔 황실 인척이어서 쉽게 통제할 수도 없는 위치에 있었다. 또한 조정이 걷은 세금 가운데 백은 2천만냥이 오삼계에게 제공되었는데 이는 국가 총 수입의 절반이 넘는 양이었기 때문에 중앙 정부인 조정의 재정에 부담을 주는 원인이 되었다.
평남왕 상가희는 아들 상지신과 불화를 겪자 고향인 요동으로 돌아가고자 은퇴를 요청하며 자신의 작위를 아들에게 물려달라고 상소하였다. 청나라 조정은 은퇴는 허락하지만 작위의 세습은 불허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스스로를 독자적 정치세력으로 여기고 있던 삼번의 왕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오삼계와 경중명은 조정의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 모두 은퇴를 요청하였다. 조정은 이들이 모반을 일이키려한다고 판단하여 대책을 논의하였다. 강희제는 철번을 승인하여도 모반할 것이고 불허하여도 모반할 것이라면 일찌감치 모반을 확인하는 것이 좋다는 이유로 삼번의 철번을 명하였다. 1673년(강희 12년) 7월 철번의 명이 내려지자 오삼계 등은 모반을 결정하였고 그 해 11월 오삼계는 명나라의 갑옷을 입고 영력제의 능에서 반청복명(反淸復明)을 이유로 거병하였다. 그러나, 영력제를 죽인 사람이 다름 아닌 오삼계 자신이었기 때문에 모반의 명분은 공감을 얻지 못하여 명나라 황족을 옹립하지는 못하였다.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중원 이남은 물론이고 섬서 몽골 등 여러 지역의 반청세력이 가담하여 전란이 확대된 후 삼번의 난은 9년 동안 계속 되었다.
강희제는 오삼계에게 조정에 진출해 있던 오삼계의 장남이자 평서왕세자 오응웅을 건네줄 테니 회군하라 권유하였으나 삼번 연합군은 이를 듣지 않고 계속 진군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 오응웅과 그 아들 오세림은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한편, 평남왕 상가희는 오삼계의 호응 요청을 거절하고 이를 강희제에게 알려 자신의 결백함을 입증하고자 했으나, 이에 반발한 아들 상지신이 상가희를 연금시키고 오삼계와 합류하였다.

첫댓글 즐감
중국의 초상화는 전문화사들이 얼굴만 빼놓고 황제가 갖춰야 할 모든 그림을 다 그려놓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황제의 얼굴만 그려서 완성하는 그림으로 일반 사대부에서도 소위 가족도라고 해서 고조(모), 증조(모), 할아버지(모), 아버지(모), 나(부인) 까지 셋트로 그리고 목이 없는 그림도 있는데 나중에 더 그려 넣을 수 있도록 배려(?) 하는 그림들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