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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20. 묵상글 (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 성령과의 내통.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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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20.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성령과의 내통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 에페소서의 말씀에 의하면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두 가지 방도로 우리 인간을 움직이십니다.
‘성령을 통하여’와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그렇게 우리의 내적 인간이 굳세어지면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게 하시고 우리가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사랑을 기초로 삼아 살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성령과 우리의 믿음의 합작 또는 합력인 셈인데
이렇게 합작하고 합력하면 최강일 것입니다.
그 사랑이 최강일 것입니다.
우리 사랑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될 것이기에 최강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방법을 쓰지 않기에 그렇게 사랑을 원하면서도
사랑이 노상 실패로 끝나기 일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내적 인간이
하느님의 힘으로 굳세어지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첫 번째는 되는 것, 곧 성령을 통하여 되는 것이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내적 인간이 하느님의 힘으로 굳세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내적 인간이란 허우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러므로 내적 인간이 굳세어지는 것도 떡대가 크고 힘세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내면이 옹골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힘으로 우리가 옹골차게 되는 데에
한몫을 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성령을 통해 하느님 힘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도록
우리 내면을 여는 또는 마음의 문을 여는 역할을 합니다.
믿음이란, 말하자면, 논에 물꼬를 트고
마음의 빗장을 여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물꼬를 트면 그 물꼬가 비록 작아도 도랑의 물이 우리 논으로 콸콸 들어오듯
우리 믿음이 성령과 내통하면 하느님의 힘이 우리 안으로 콸콸 들어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과의 내통이 믿음이고,
우리 믿음이 성령과 내통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뿌리내리게 되며 그리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초로 삼아 무엇이든 사랑으로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하면 우리가 그리 원하는 사랑을 실패 없이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사랑으로 시작하고 사랑으로 끝맺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시작하고 하느님의 힘으로 끝맺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바자회를, 우리의 오래된 기도문으로 시작하고자 합니다.
성무일도 본기도에 있는 기도입니다.
“주님 간구하오니, 저희가 할 일을 일러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어,
오늘 모든 일을 당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시작하고
시작한 것을 당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끝마치게 하소서.”
오늘 강론은 바자회 개막 미사 강론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눔을 한 것에 대해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도움을 청합니다.
봉사자 특히 남자 봉사자의 도움을 청합니다.
아침 바자회를 열고 저녁 바자회를 닫을 때
힘쓸 남자 분, 한두 분이라도 계시면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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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20.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엉뚱하게도 세상에 “불”을 지르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평화의 왕”일진데, 어찌하여 분열을 일으키실까? 그것은 세상이 거짓 평화에 물들어 있고, 그 속에 어둠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분열은 파괴를 위한 분열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분열이요, 어둠으로부터 오는 분열이 아니라 빛으로부터 오는 분열입니다.
그렇습니다. 분열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분열 안에서 빛과 어둠을 보는 눈이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카오스 위에 머무르는 영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창세기> 1장 2절의 말씀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2)
우리는 카오스 속에서 빛과 어둠을 보아야 합니다. 분열이 없는 것이 평화인 것이 아니라, 정의가 이루어진 것이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화의 왕이신 당신께서는 오늘도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십니다.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금은보석의 선물더미가 아니라, 수술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 가슴을 뜨겁게 했던 이 불은 성령에 의해서 타오르는 ‘말씀의 불혀’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교회 안이나 밖이나, 이 불을 싫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이미 가진 기득권으로 빛을 짓누르고 공격합니다. 자신들의 어둠이 들통 나는 것을 막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의와 거짓은 물러가기보다 오히려 불을 꺼버리려 온갖 술수를 부리기 일수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50)
사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피의 세례’로 전도활동을 완성하시고, 성령으로 우리의 죄를 씻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저희에게 ‘피의 세례’를 베푸시며,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타올라야 할 이 ‘성령의 불’과 ‘피의 세례’는 하나의 큰 도전입니다. 그것은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들이나 딸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결코 갈 수 없는 도전입니다. 결코 양 다리를 걸칠 수도, 두 주인을 섬길 수도 없는, 자신의 목숨마저 내 걸어야 하는 도전입니다. 그것은 불로 어둠을 태우고 자신을 분열시켜야 하는 일이요, 모순과 부조리, 불의와 거짓을 진실 되게 마주하고, 거짓된 자신과 세상과 맞서야만 하는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속셈과 생각을 갈라냅니다.”(히브 4,12)
그렇습니다. 오늘도 ‘말씀의 불’은 우리를 갈라놓고 분열시킵니다. 오늘도 ‘말씀의 불세례’는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분열시킵니다. 그것은 우리를 당신과 일치시키기 위하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흔히 분열을 불안해하고 회피하려 하지만, 분열은 피하고 덮어버려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바로 그 분열을 통하여, ‘말씀의 영’께서는 우리 주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십니다.
하오니, 주님! 이 칼의 불꽃이 우리 안에 활활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
주님!
당신은 제게 사랑의 불을 지르십니다.
제 속의 어둠을 태워 새로운 살이 돋게 하시고,
이기심을 태우고 자비가 돋게 하소서
무관심을 태우고 사랑이 돋게 하시고,
이제는 제게서 사랑의 분열을 일으키소서. 제가 중병에 걸린 까닭입니다.
제 살을 가르고 어둠을 몰아내시고,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고 정의와 불의를 가려내소서.
제 안에서도 이 세상에서도 당신 영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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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20.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평화를 누리려면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모두를 하나로 만듭니다. 일치를 이루게 합니다. 그러나 분열을 거쳐 불순물을 제거하고 가슴과 가슴을 통해서 하나가 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이 원하는 것과 천상의 바람이 충돌하게 되고 마음의 분열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랑은 하늘을 희망하기 때문에 고단한 과정을 감당하면서 쌓아 올립니다. 사랑은 끊이지 않는 길입니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분심이 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행복해지리라고 기대했는데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시니 당황하게 됩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분심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집중하려고 노력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번거로워도 우리 안에 계십니다”(토마스 머튼). 사실 진정한 평화를 얻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고한 믿음이 평화를 줍니다. 평화는 단순히 외적인 안정상태와는 다릅니다. 죄악의 더러움을 깨끗이 태워버려야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도 평안치 못하리라 했습니다.” 평화는 주님 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집안 식구라 하더라도 주님 안에서 평화를 찾는 사람이 있고, 세상에서 평화를 찾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서로의 의견을 달리할 수 있고 그러다 보면 마음이 갈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내면에 숨어있는 속셈을 가려내어 거짓 평화를 무너뜨립니다. 결국, 각자의 사람에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본인이 책임져야 합니다.
미카 예언자는 온 백성의 타락을 슬퍼하며 말했습니다. “경건한 이는 이 땅에서 사라지고 사람들 가운데 올곧은 이는 하나도 없구나….그들의 손은 악을 저지르는데 이력이 나 있고 관리와 판관은 뇌물을 달라 하며 권력자는 제가 원하는 것만 지시한다……이제 그들에게 큰 혼란이 일어나리라. 친구를 믿지 말고 벗을 신뢰하지 마라. 네 품에 안겨 잠드는 여자에게도 네 입을 조심하여라. 아들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딸이 어머니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대든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그러나 나는 주님을 바라보고 내 구원의 하느님을 기다리리라. 내 하느님께서 내 청을 들어주시리라”(미카7,1-7). 사실 하느님 평화 안에 머무는 과정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와 구원의 시대를 기대하는 만큼 인간적인 욕심을 버려야 하는 갈등의 시기를 감당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 하더라도 영혼이 세속이라는 습기에 젖어 들면 영혼의 불이 타오를 수 없습니다. 열정의 불이 타오르기를 희망합니다.
평화를 원하십니까? 평화를 구하십시오! 다른 사람이 나의 평화를 깬다고 생각하지 말고 참 평화를 위하여 일하십시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미워하기에 앞서 내 마음속에 있는 욕망과 무질서를 미워하고, 다른 사람의 불의를 미워하고 폭군을 미워하기에 앞서 내 마음 안에 있는 그것들을 미워해야 합니다”(토마스머튼). 그리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참 평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분열을 두려워 마십시오. 오히려 내 마음의 악을 떨쳐버리고 사랑함으로써 평화를 누리십시오. 예수님은 평화를 넘치도록 주십니다. 예수님을 차지하여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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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20.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는 손 편지를 많이 썼습니다. 편지의 머리글이 유난히 생각나는 친구가 있습니다. 신학생 때 봉사활동을 가서 만났던 학생입니다. 신학교에 있을 때도 가끔 편지를 보내주었고, 군대에 있을 때에도 위문편지를 보내주곤 했습니다. 정갈한 글씨의 편지를 읽을 때면 군 생활의 어려움이 봄에 눈이 녹듯이 사라지곤 했습니다. 언제나 첫 문장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이라는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름다운 머리글입니다. 지금은 손 편지를 쓸 필요가 거의 없지만 가끔은 정성어린 손 편지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수도자가 되어서 사랑하는 마음을 하느님과 이웃들에게 전하는 수녀님이 늘 건강하기를 기도합니다.
고인이 되신 어머니께서 제게 당부하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나친 음주를 삼가라고 하였습니다. 어른들에게 공손하라고 하였습니다.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제게 부족한 것들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영성지도를 받았던 신학생들이 찾아 올 때가 있었습니다. 저도 3가지 덕담을 해 주곤 했습니다. 늘 건강하기를 기원해 주었습니다. 언제나 기쁘게 살기를 기원해 주었습니다. 가능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를 기원해 주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분명 아플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고, 화가 날 때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다 지나 가는 것이니 하느님께 의탁하면서 지내기를 바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의 교우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이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인사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안다면, 하느님의 사랑과 함께 한다면 이 세상의 시련과 고통을 겨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파부침주(破釜沈舟)’라는 말이 있습니다. 항우는 진나라를 치기 위해 직접 출병하고, 그 군대가 막 장하를 건넜을 때입니다. 항우는 갑자기 타고 왔던 배를 부수어 침몰시키라고 명령을 내리고, 뒤이어 싣고 온 솥마저도 깨뜨려 버리고 주위의 집들도 모두 불태워버리도록 했습니다. 이제 돌아갈 배도 없고 밥을 지어 먹을 솥마저 없었으므로, 병사들은 결사적으로 싸우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순신 장군도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이 말은 풍전등화와 같은 조선을 구하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파부침주와 사즉생 생즉사’와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가정도, 이웃도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가정도, 친구도, 이웃도 갈라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하신 말씀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돈 때문에 가족과 친구와 이웃과 갈라서는 사람들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체면 때문에 장애인인 자녀를, 치매에 걸린 부모님을 모른 척하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욕망과 욕심 때문에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당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단체들이 있고, 세례를 받은 신앙 공동체이지만 때로 분열과 갈등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뜻을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선배들이 ‘새롭게 부임하는 본당에서는 적어도 6개월은 그냥 지켜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6개월만 지켜보면 자신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이 문제입니다. ‘재물, 명예, 욕심’이 앞서면 가족이라 해도, 친구라 해도, 이웃이라 해도 갈라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면 아무리 성격이 달라도, 오랜 갈등이 있었다 해도, 원한과 미움이 가득했다 해도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는 가가 중요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머물려고 모든 것을 해로운 쓰레기로 여기노라.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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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20.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하루에 14시간씩 공부하고 자기 계발에 힘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그 모습을 보고 주변에서 “자네는 무엇을 하려고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라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자기 계발을 하다 보면 뭐든 될 수 있겠죠.”
어느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애초에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 것만큼 쓸모없는 짓도 없다.’
어떤 목표 없이 그냥 무작정 공부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분명한 목표가 있다면 공부하는 내용과 자기 계발의 방향이 제대로 설 수 있게 됩니다. 막연하게 아무거나 공부한다는 것만큼 무식한 것이 어디에 있을까요?
열심히 중국어 공부를 했는데 일본어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떨까요? ‘일본어 필수’인데, 이제까지 공부한 것이 아깝다면서 계속 중국어만 공부하겠습니까?
분명한 목표를 세워야 편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준비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말고….’ 식의 준비는 스스로 더 힘들게 할 뿐입니다. 이는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분명한 목표 없이 사는 우리는 아닐까요? 잘못된 목표를 세워서 주님과의 관계가 더 힘든 것은 아닐까요?
구원은 편하게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고난의 시대가 오고 그 시대를 겪어낸 다음 구원이 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조건을 물었을 때,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마르 10,38)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고통을 주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내가 너에게 고통을 줄 거야.”라고 말하면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아닌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이게 뭐지?’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구원의 길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악을 철저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면서 악과 함께해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이 과정 안에서 평화가 아닌 분열이 가져올 수밖에 없고, 어렵고 힘든 고난의 시간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분명한 목표가 필요합니다. 대충대충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분명한 목표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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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을 하더라도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하라(프리드리히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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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20.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자녀다운 삶, 품위 있는 삶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와 회개가 답이다-
참으로 평범하고 한결같은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음이 제일 감사한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일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자녀다운 삶, 품위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의 도움을 청하며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과거의 지난 삶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죽는 그날까지 하루하루의 삶입니다. 몇 가지 떠오른 성경 말씀과 기도문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고백성사 보속 시 가장 많이 써드린 바오로 사도의 말씀 처방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고 어려울수록 이 처방 말씀에 충실해야 내적으로 무너지지 않고 항구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로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 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이른 새벽 일어나 자리에 드는 것도,
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너희에게 헛되리니,
주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그 잘 때에 은혜를 베푸심이로다.”(시편127,1-2)
매주일 미사후 낮기도 대신 바치는 시편입니다. 요즘 며칠간 실감하는 시편 구절입니다. 새벽 일찍 저절로 단잠에서 깨어나 강론을 쓸 수 있으니 참 감사합니다. 엊그제 부터는 참으로 내적 평화 중에 사랑과 감사의 마음에 젖어 지내고 있습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참 특별한 은총입니다. 제 지난 삶도 “간절함”이란 한마디 말로 요약됨을 깨닫고 기뻤습니다.
어제 새벽에 있었던 일도 생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일찍 강론 쓰기를 마친 후 홈페이지에 올리려니 로그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노트북이 오래 되어 원장수사의 다정한 배려로 교체함으로 발생한 일입니다. 하도 답답해 컴퓨터 도사 경지에 이른 원장수사를 기상 전, 한 시간 전에 깨어 도움을 청했으나, 실패했고 아침 미사 후 방법을 찾아냈다 하여 로그인후 강론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아침 산책과 묵주기도를 걸러 보긴 처음입니다. 그래도 형제애兄弟愛에 깊이 감동했고 감사했습니다. 제 행복기도 중 다음 연은 제가 각별히 좋아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그렇습니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좌절과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입니다. 성 베네딕도는 네 희망을 하느님께 두고 하느님의 자비에 절대로 실망하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죽을 때까지 넘어지면 지체 없이 일어나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요즘 들어 수도공동체 형제들이 함께 노래로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 전례기도가 이렇게 감미롭게 느껴지기는 처음입니다. 공동체의 일치는 물론 자녀다운 삶, 품위있는 삶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과 미사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세 말씀 역시 우리의 한결같은 삶에 참 좋은 도움이 됩니다.
1.“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주님은 불입니다. 사랑의 불, 말씀의 불, 성령의 불입니다. 열정이 없으면, 열정의 불이 꺼지면 영성생활은 끝입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당신과의 만남을 통해 열정에 불을 붙여 주시어 끊임없이 한결같은 사랑으로 타오르게 하시니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2.“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 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늘 순교의 죽음을 예감하고 사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이런 세례의 죽음을 앞당겨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순교적, 종말론적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현실의 시련에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모두 비움의 계기로, 겸손의 계기로 삼아 순교적 삶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 베네딕도는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래야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 품위있는 삶이겠습니다.
3.“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거짓 평화, 가짜 평화가 아닌 참 평화, 진짜 평화를 주러 오신 주님이십니다. 결코 값싼 평화는 없습니다. 참 평화로운 삶을 위해 은총과 더불어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진리요 빛이며 생명이십니다. 이런 주님의 도래와 더불어 진리와 거짓,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은 확연히 드러나 분열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에는 파괴적 분열이 아니라 참 평화에 이르는 정화과정 중 창조적 분열임을 깨닫습니다. 어떤 시련과 고난 중에도 진리요 빛이요 생명이신 주님과 하나 되어 살 때 궁극의 승리요 자녀다운 삶, 품위 있는 삶의 성취요 실현입니다.
주님과 일치의 여정 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여기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두 필수 요소가 기도와 회개입니다. 끊임없는, 한결같은 기도와 회개와 더불어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신망애 관계입니다. 오늘 에페소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가르쳐 주시는, 참으로 깊고 아름다운 '교회를 위한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너무 깊고 아름다운 내용이라 다 인용하고 싶지만 일부만 인용합니다. 이 기도문 그대로 이뤄주시는 미사은총입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서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길 빕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깊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 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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