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시루
노천족욕탕
금강공원 끝자락에 붙은 해양자연사박물관을 찾아가느라 오랜만에 동래 온천장을 들어섰다. 멀리 서쪽으로 쇠미산을 뉘엿뉘엿 넘고 있는 만추의 석양이 도시를 곧 어둠속으로 몰아넣을 시간대였다. 전성기의 영화는 어디로 가고 온천장은 벌써 수십 년째 쇠락한 상권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다. 가까이 지내던 성당 교우들 얼굴이 떠오르면서 그들 삶의 터전인 업소들마저 사라져 더욱 애잔한 느낌이 든다. 이미 노년에 접어든지도 오래일 텐데 그들은 지금 어느 하늘 아래서 힘겨운 여생을 보내고 있을까.
몇 년에 한 번 꼴로 이 골목을 지날 때마다 노천족욕탕 시설을 만나면서 기초단체가 참으로 엉뚱한 곳에 세금을 쏟아 붓는구나 싶었다. 이용객이라곤 전혀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랬던 족욕장이 오늘은 말 그대로 콩나물시루였다. 이들은 남녀칠세부동석도 모르고 자랐던 것일까. 할배 할매 60여명은 숫자 파악이 어려울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 앉아 족욕을 즐기고 있었다. 전후좌우로 너무 붙어서 옆에 마련된 신발장에 벗어둔 신발이 아니고선 사람숫자를 가늠할 수 없었다.
온천동은 그 유명한 온천 때문인지 다른 동보다 규모가 컸다. 산성을 오르는 도로에서 시작되어 옛 고속버스터미널이 있던 곳까지다. 동네 전체가 금정산 자락에 붙어 있어 계절의 변화에 따라 마을이 아름다웠다. 온천동은 40여 년 전 미남로터리를 물고 있는 3동 쪽에 고층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스카이라인이 바뀌었다. 이곳에선 더 이상 금정산 조망이 되지 않았다. 그러자 1~2동도 다투어 초고층 아파트 건설을 위한 재개발에 매달린 결과 남쪽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초초고층으로 하늘을 찔렀다.
일제 때부터 동래온천과 함께 명성을 떨친 동래별장만 원형대로 남아 옛 영화를 말해주고 있었다. 원래 사찰이었던 곳을 매입해서 앉힌 온천성당은 40여 년 동안 증개축을 계속해오다가 서울 명동성당처럼 건축양식을 바꾸어 새로 신축했다. 부지도 주변 땅을 사들여 반듯하면서도 넓어져 유럽의 성당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80년대 후반, H사목회장은 철제 I빔을 잔뜩 싣고 와 성당 마당을 2층으로 만들었다. 2층 마당은 성전 출입구와 같은 높이가 되어 계단을 오르지 않아도 되었다.
H회장이 부산에선 기계 산업을 가장 크게 펼치고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장림공단과 포항까지 기계공장이 다섯 군데나 된다고 했다. 37년생 H회장은 젊은 날, 한양대학 기계과를 나와 현대그룹에 입사했고 정주영 회장은 그를 눈여겨본 모양이었다. 어느 날 정 회장은 H를 불러 현대를 그만두고 나가서 개인사업을 하라며 그룹 차원에서 도와주었던 것.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 일으킨 사업이지만 외환위기 파고를 넘지 못하고 무너졌다. 포항공장 전기요금 납기를 좀 늦출 수 없겠느냐고 나에게 다급하게 물어온 게 신호탄이었다.
지역재벌이라 할 만큼 풍족한 삶을 누리며 성당 교우들에게도 많이 베풀던 그가 하루아침에 거지신세가 된 것이다. 빚잔치를 끝낸 H회장이 덕계 다리목 옆에 순댓집 식당을 바로 열었다. 발 빠른 변신이었다. 그는 무거운 고무 앞치마를 두르고 도마 위에다 순대를 쓸었다. 성당 사목위원들이 단체로 찾아갔을 땐 함께 노래방도 체험했고 H회장은 트럼펫을 연주했다. 젊은 날부터 익힌 솜씨였다. 그는 식당에서 화장실로 통하는 좁은 공간에다 전기스탠드를 설치해놓고 틈만 나면 성경 필사에 매달리고 있었다.
나는 사목회 총무로서 5~6년 세월을 함께 하면서도 그의 필체는 몰랐는데 보기 드문 명필이었다. 마흔 초반부터 20여 년 거주한 온천동.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인생의 봄날이 나도 그때였던 것 같다. 직장에서 맡고 있던 보직상 86아시언게임과 88서울올림픽 부산지역 경기장 전력확보 총괄책임자로 조직위와 본사 담당자로부터 많이도 시달렸지만 지나고 보니 그때가 인생의 화양연화였다. 딸아이 혼배미사를 올린 자리에서 어머니를 떠나보내는 영결미사를 봉헌해야 했다. 한국 근대사 격동기를 온몸으로 살아내신 어머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