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외출 중
햇살이 길 위에 조용히 내려앉은 오후였다. 바람은 막 피어난 계절의 향기를 가볍게 실어 나르고 있었고, 도시의 창문들은 저마다 반짝이는 빛으로 하루의 표정을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특별한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를 급히 만나러 가는 길도 아니었다. 다만 마음이 집 안에 오래 머물러 있기엔 너무 맑은 날이었다.
거울 앞에서 옷을 고를 때부터 오늘은 조금 다른 기분이 스며 있었다. 검은빛 원피스 위로 흐르는 꽃무늬는 마치 밤하늘 아래 피어난 봄꽃 같았고, 옅은 분홍빛 소매는 오래 간직해 온 소녀의 감성을 닮아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머리를 묶고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를 사랑하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위한 미소였다.
밖으로 나오자 거리의 나무들이 연둣빛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속도로 지나갔지만 그녀의 걸음은 이상하리만큼 느긋했다. 젊은 날에는 늘 목적지를 향해 서둘러 걸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길 자체를 바라보게 되었다. 꽃이 어디에 피어 있는지,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부는지, 햇살이 어떤 얼굴로 내려오는지를 천천히 느끼며 걷게 된 것이다.
카페 앞에 다다랐을 때 따뜻한 커피 향이 골목 사이로 흘러나왔다. 작은 꽃병 하나 놓인 테이블과 창가의 그림자, 웃음 섞인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오후를 더욱 부드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하얀 잔 위로 피어오르는 김은 마치 마음속 오래된 기억처럼 천천히 번져 갔다.
문득 그녀는 생각했다. 사람은 살아가며 수없이 많은 외출을 한다고. 누군가는 생계를 위해 길을 나서고, 누군가는 사랑을 만나기 위해, 또 누군가는 잊고 싶었던 자신을 다시 찾기 위해 집 밖으로 걸어 나온다. 어쩌면 오늘 자신의 외출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잊고 있던 마음 하나를 다시 만나기 위한 조용한 산책 말이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녀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 젊음은 얼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남아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설렘을 잃지 않는 사람, 작은 꽃 한 송이에도 눈길을 멈출 줄 아는 사람, 햇살 좋은 오후에 괜히 밖으로 나오고 싶어지는 사람은 여전히 청춘 속을 걷고 있는 것이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자 따뜻함이 가슴으로 번져 내렸다. 삶은 늘 완벽하지 않았고, 지나온 날들에는 아픔도 많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안다. 인생은 상처가 없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상처를 안고도 다시 웃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의 외출은 단순한 나들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다시 자신을 사랑하기 위한 작은 의식 같은 것이었다.
햇살은 점점 부드럽게 기울고 있었다. 카페 의자에 앉은 그녀의 검은 드레스 자락 아래로 레이스 그림자가 살며시 흔들렸다. 마치 지나온 세월들이 조용히 흔들리며 “괜찮다”고 말해 주는 듯했다. 세월은 많은 것을 가져갔지만, 대신 깊이를 남겨 주었다. 젊은 날에는 몰랐던 여유와 기다림, 그리고 사람을 바라보는 따뜻한 눈빛까지도.
그녀는 가방을 들고 다시 길 위로 나섰다. 도시는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만큼은 잔잔했다. 바람이 머리카락 사이를 지나갈 때마다 오래된 근심들도 조금씩 흩어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행복은 거창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문득 밖으로 나와 햇살을 마주하는 순간 속에 숨어 있는지도 몰랐다.
걷다 보니 유리창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한때는 세월이 두려웠지만 지금은 아니다. 시간은 얼굴 위에 잔주름을 남기기도 했지만, 동시에 사람의 마음을 더 따뜻하게 익혀 주었다. 그래서 그녀의 미소는 젊은 날보다 오히려 더 아름다웠다. 오래 울어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부드러운 미소였기 때문이다.
길모퉁이 화분에 작은 꽃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꽃을 바라보았다. 꽃은 누가 보지 않아도 피고, 바람이 불어도 다시 고개를 든다. 사람도 어쩌면 꽃과 닮아 있는 존재인지 모른다. 삶이 흔들어도 다시 웃으며 하루를 살아가는 존재.
오늘 그녀는 단지 외출을 나온 것이 아니었다. 삶이라는 긴 계절 속에서 다시 자신을 피워 내기 위해 조용히 길 위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그녀는 알게 되었다. 아직 자신의 마음속에는 설레는 봄이 남아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녀는 다시 웃었다. 햇살 좋은 거리 한복판에서, 지나가는 바람 속에서, 따뜻한 오후의 향기 속에서.
지금은 외출 중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 또한 오랜 침묵에서 벗어나 다시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