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단상 22/24절기節氣]철부지들의 세상!
인근 임실군 지사면에 사시는 향토사학자 교장선생님을 일요일 오후 아버지와 함께 만나 뵈러 갔다. 작은어머니의 외종오라버니이니 사돈이라 할 수 있겠다. 은퇴하신 지 22년이 되었으니 89세(옛날로 치면 극노인極老人인데 동갑 사모님와 함께 밭농사를 맹렬히 지으신다. 아직도 약주를 한 자리에서 소주 3병이나 드시고, 트럭도 몰고 다니신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은퇴 후부터 저작著作활동에 몰입, 30여권의 책을 펴냈다. “우천, 이것 한번 읽어보소”하며 건넨 책이 『아리랑과 한(韓)민족 종교』(110쪽, 2016년 발행)이다. 흥미가 있어 단숨에 읽었다. 오랜 세월, 아리랑 관련한 책들을 섭렵한 후 성찰한 저서로, 그분만의 독특한 해석을 선보였다. “아리랑이야말로 다분히 종교적 의미를 띠고 있다. 누군가를 부르는 것같기도 하고, 무엇인가를 호소하는 것같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의 원시종교나 민족종교의 뿌리인 듯하다” 아리랑의 어원과 유래가 고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대단한 연구이자 유의미한 시각이다.
중국에서 동북공정東北工程 일환으로 고구려를 자기네 지방정권이라 우기고, 우리 민족의 오랜 서정민요 '아리랑'을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려 작업을 했다. 어림짝도 없는 일. 유네스코는 2102년 ‘아리랑’을 한국의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일본은 ‘기무치’를 유네스코에 무형문화유산 등재 신청을 했으나, 우리의 김치를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문화’라는 이름으로 유산목록에 당당히 올렸다. ‘아리랑과 김치’야말로 한국인의 원초적 DNA라는 것을 유네스코가 공인한 것이다. 당연한 귀결이지만 깨소금맛이다. 아무튼, 아리랑하면 나는 무조건 맨먼저 님 웨일즈의 『아리랑』이 떠오른다. 우리의 자랑스럽지만 이름없이 사라져간 무명의 독립투사 김산, 그 이름을 그 책이 없었다면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일제강점기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알지 못하나, 나라를 잃은 비감悲感을 담지 않았을까.
아리랑 이야기를 하고자 한 게 아니다. 그날 사모님이 한 보따리 주신 ‘울금’에서 비롯된 24절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이름은 들어보았지만 처음 본 울금은 모양새나 냄새가 생강과 비슷하다. 카레의 주원료인 강황薑黃의 다른 이름이라 하여 사전을 찾아봤다. 엄밀하게 말하면 울금과 강황은 조금 차이가 있다한다. 둘 다 커큐민이라는 성분이 풍부해 항암, 항염치료와 인슐린 분비를 촉진하여 당뇨증상 개선에 효과가 크다고 했다. 무엇보다 인도에서 즐겨먹는 카레는 치매 예방에 최고라 하여 인도사람들은 치매를 앓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설명이었다. 그저 생강과의 향신료香辛料로만 알고 있었던 울금과 강황의 재발견이었다. 이 귀한 식물뿌리를 엄청 많이 주신 덕분에, 나는 초저녁내내 칼로 잘게 잘라 건조기에 넣어 밤새 건조시키는 노력을 했지만, 마음은 즐거웠다. 선생님 부부는 죽어라고 밭농사를 지어 수확물들을 주변 일가친척과 지인들에게 나눠주는 즐거움을 즐기고 계신 분들이다. 요즘말로 ‘그들의 즐거움 There Plesesure’이다. 이 귀한 울금을 우리 동네에선 심는 것을 못보았다. 어찌 아니 고마운 일인가. 그저 황감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사모님의 말씀이 귀에 꽂혔다. “서리가 너무 일찍 와(10월 17일 64년만에 한파가 몰아닥치며 서리가 내렸다) 울금 줄기가 다 시들어버렸어. 지금쯤 영양분이 줄기에서 뿌리로 쏙쏙 내려가야 하는데 망쳤어. 어제가 상강霜降이니 첫 서리가 이때쯤 와야 하는데 일주일도 더 먼저 내려 피해가 크다”고 하신다. ‘아하, 서리가 너무 일찍 내려 울금, 생강 등 농작물 피해가 크구나’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덧붙인 말씀은 “머이거나 ‘제철’이 있는 것인데, 시방 세상은 기후가 뒤죽박죽이여”하시는 게 아닌가. 농촌에서 제철이란 24절기節氣를 말함이렷다. 봄이 선다는 입춘立春을 시작으로 우수雨水, 경칩驚蟄, 춘분春分, 청명淸明, 곡우穀雨, 입하立夏, 소만小滿, 망종芒種, 하지夏至, 소서小暑, 대서大暑, 입추立秋, 처서處暑, 백로白露, 추분秋分, 한로寒露, 상강霜降 , 입동立冬, 소설小雪, 대설大雪, 동지冬至, 소한小寒, 대한大寒이 그것. 도회지 생활이야 24절기가 피부에 와닿을 까닭이 거의 없으나 농촌에서는 24절기를 모르면 농사를 지을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어떻게 ‘철’을 모르고 농사를 짓겠는가 이 말이다. 흔히 말하는 ‘철부지不知’는 철을 모르는 것을 빗댄 말이다. 농경사회를 오래 전에 벗어난 21세기 대한민국은 온통 철부지들의 세상이다. 공영방송의 ‘꽃’인 기상캐스터들은 더구나 철도 모를 터인데, 절기일만 돌아오면 속담을 인용하며 “오늘은 모기도 입이 삐뚤어진다는 처서입니다” 등의 멘트를 앵무새처럼 날리고 있다. 물론 그들의 잘못이나 무식이 아니기에 한심하다고 비난할 일은 아니다.
사모님의 말씀이 귀에 꽂혀 새삼스레 24절기의 의미를 생각하는데, 10년도 더 전에 썼던 졸문이 떠올라 밝힌다. 시간 나는 대로 한번쯤 읽어봐 주시면 정말 고맙고 좋겠다. http://yrock22.egloos.com/10495. 이 새벽, 졸문을 찾아보게 한 교장선생님과 사모님의 평강平康을 빌며 결혼 80주년도 기념하도록 해로偕老하시면 좋겠다. 오늘 아침엔 아버지께 오뚜기 카레밥을 해드려야겠다.,
첫댓글 우천, 글감이 뛰어남세.
범상치 않는 분들의 이야기를 감성을 양념쳐서 맛갈나게 설명하시네.
교장샘 ^맹렬히 몰입^이라는 말이 참 맘에 와 닿는군.
우천 벗님도 항상 건승하시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