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날개의 새” 원효대사의 반전…그는 원래 ‘칼의 달인’이었다
입력 2022.01.19 05:00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건 날아가는 새의 두 날개와 같다.”
풍경1
한국 불교사에서 우뚝 솟은 봉우리 중
딱 하나를 꼽는다면 누구일까요.
불교계에서는 원효 대사(617~686)를
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원효 대사는 열 두 살 때 부모를 모두 잃었다. 아버지는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중앙포토]
(上) 원효 대사는 무예 뛰어난 화랑 출신…“날아가는 새의 두 날개처럼”
원효(元曉)를 우리말로 하면 ‘첫 새벽’입니다.
그러니 원효 대사는 ‘새벽 대사’였습니다.
『삼국유사』에는 당시 신라인들이 그를 순우리말로
“새벽”이라 불렀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까닭이 있었습니다.
‘새벽 대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걸출한 인물이었습니다.
원효는 신라 진평왕 39년(617년)에 태어났습니다.
진평왕의 왕비 김씨는 ‘마야(摩耶) 부인’이었습니다.
선덕 여왕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석가모니 붓다의 어머니 이름은 ‘마야데비(Mayadevi)’였고,
통상 ‘마야 부인’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니 신라의 왕비가 붓다의 어머니 이름을 본따서
똑같은 호칭을 썼습니다.
이것만 봐도 신라의 국가적 지향이 ‘불국토(佛國土) 건설’임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디지털로 복원한 황룡사와 9층 목탑. 당시 경주 안에서는 어디서나 이 탑이 보였다고 한다. 원효는 황룡사로 출가했다고 전해진다. [사진 문화재청]
원효의 고향은 지금의 경북 경산이었습니다.
출생부터 험난했습니다.
원효의 부모는 만삭의 몸으로
밤나무 골짜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산기가 찾아와 길에서 출산을 해야 했습니다.
원효의 아버지는 입고 있던 윗옷을 벗어 밤나무에 걸고
임시로 앞을 가렸습니다.
노상에서 힘겹게 원효를 출산한 어머니는
며칠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붓다의 출생이 떠올랐습니다.
둘은 태몽도 닮았습니다.
인도의 마야 부인은 흰 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왔고,
원효의 어머니는 유성이 품속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서 아이를 가졌습니다.
경주의 황룡사지. 남아있는 주춧돌의 크기만 봐도 당시 사찰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사진 경주시]
출산을 위해 친정으로 가던 마야 부인은 룸비니의 들판에서
무우수 나뭇가지를 붙들고 싯다르타를 낳았습니다.
노상 출산 후 7일 만에 마야 부인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원효는 날 때부터 결핍을 안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낳다가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부재’는
원효의 유년기에 존재론적 결핍감을
강하게 안겨주지 않았을까요.
세계 종교사에서도 그런 예가 있습니다.
불교를 세운 붓다는 어머니를 일찍 잃었고,
동정녀 출생의 예수는 친아버지가 없었고,
이슬람교를 세운 무함마드는 유복자였습니다.
다들 삶과 죽음, 존재의 상실을 깊이 체험하며
성장기를 보내지 않았을까요.
그 와중에 그들이 던졌을 삶과 죽음에 대한 물음은
남들과 다르지 않았을까요.
원효 역시 삶과 죽음에 대한 물음을
수도 없이 자신에게 던지며 자랐겠지요.
풍경2
원효 대사가 창건한 경기도 여주의 신륵사 전경. 원효는 삼국통일 후 전쟁의 상처에 허덕이는 민중을 위해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 불교를 알렸다. [중앙포토]
진평왕 때는 고구려ㆍ백제ㆍ신라의 삼국이 영토 확장을 위해
치열하게 전쟁을 치르던 시기였습니다.
원효가 열두 살이 됐을 때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서현(김유신의 아버지) 장군과 함께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하다가
원효의 부친 설이금은 전쟁터에서 전사했습니다.
열두 살 때 원효는 고아가 된 셈입니다.
그런 원효를 할아버지가 거둔 것으로 보입니다.
원효는 아버지를 여읜 열두 살 때 화랑이 됐습니다.
마음속에는 고구려를 향한 깊은 복수심도 있었겠지요.
열여섯 살 때(선덕여왕 1년)는 무술제 경연대회에서 장원도 했습니다.
원효는 무예가 상당히 뛰어났습니다.
특히 검술 실력이 빼어났다고 합니다.
이듬해에는 조부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원효는 화랑으로서 전쟁에도 수차례 참여했습니다.
처절한 전장과 숱한 죽음을 목격했겠지요.
부모의 죽음, 조부의 죽음, 전쟁터의 죽음을 겪은
원효는 삶을 무상함을 절감하며 출가의 길로 들어섭니다.
당나라 유학을 함께 떠나려고 했던 원효(왼쪽) 대사와 의상 대사의 진영. [중앙포토]
자신이 살던 집을 희사해
‘초개사(初開寺)’라는 절을 세웁니다.
또 어머니가 자신을 낳다가 돌아가신
밤나무골 불땅고개 옆에 ‘사라사’라는
절을 지어 모친의 혼을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입산수도의 길을 떠났습니다.
풍경3
원효는 자신이 쓴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 있는 사람이 하는 일은 쌀로 밥을 짓는 것과 같고,
어리석은 사람이 하는 일은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밥을 먹어 배고픈 창자를 위로할 줄 알면서도
진리의 불법(佛法)을 배워서 어리석은 마음을 고칠 줄은 모르네.”
이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자기도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것은
날아가는 새의 두 날개와 같다.”
저는 여기서 원효의 ‘출가 이유’를 읽습니다.
그가 찾는 것은 삶을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모래로 밥 짓는 삶에서
쌀로 밥 짓는 삶으로 바꿀 수 있게끔
지혜의 눈을 갖추는 일이었습니다.
경주 황룡사의 절터는 당시 신라가 불교 국가였음을 한눈에 보여준다. [사진 경주시]
그뿐만 아닙니다.
원효는 나와 남을 모두 이롭게 하는 삶을 꿈꾸었습니다.
훗날 그가 깨달음을 이룬 후에
왜 하필 시장통 하층 민중의 삶으로 들어갔는지
그 이유가 ‘새의 두 날개’에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풍경4
삼국시대 때 중국은 당나라였습니다.
당나라와 인도는 머나먼 거리였습니다.
당시 중국 승려들은 목숨을 걸고서
서역을 거쳐 사막을 건너 인도로 갔습니다.
인도 땅에 있는 붓다의 말씀,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교 경전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인도로 가는 길은 산적과 도적도 많았고, 지형도 험준했습니다.
당시 중국에서 인도로 10명의 승려가 갔다면
고작 2명만 살아서 돌아왔다고 합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돌아온 승려들은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교 경전을
한문으로 모두 풀었습니다.
원효 대사가 남긴 글 '발심수행장'. 지금도 불교 출가자들이 이 글을 배우고 있다. [중앙포토]
중국 승려들이 한문으로 번역을 끝낸 다음에는
산스크리트어 불교 원전을 없애버렸습니다.
그만큼 뜻이 통하게 정확한 번역을 했고,
중국화한 불교 경전에 자부심이 컸다고 합니다.
그러니 당나라에는 신라에서 구할 수 없는
귀한 불교 경전들이 있었고,
깊은 안목을 가진 고승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원효는 그런 당나라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었습니다.
34세 때 여덟 살 아래인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오릅니다.
당시에는 서해안 뱃길이 막혀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원효와 의상은 육로를 통해
고구려를 거쳐 요동 땅까지 갔습니다.
거기서 그만 고구려의 국경수비대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원효와 의상은 신라의 첩자로 의심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고구려ㆍ백제ㆍ신라가 서로 첩자를 보내 정탐을 했고,
삼국이 다 불교 국가였기에 승려로 위장하기가 수월했습니다.
그러니 의심을 살 만도 했습니다.
원효 대사는 중국과 일본에도 이름이 크게 알려졌던 당대의 고승이었다. [중앙포토]
두 사람은 감옥에 갇혀 수십 일간 고생한 끝에
다시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다고 당나라 유학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수요일 연재〉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출처] “두 날개의 새” 원효대사의 반전…그는 원래 ‘칼의 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