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3일(연중 제7주일) 어른, 자비로운 사람 사울은 하느님이 직접 선택하신 이스라엘의 첫 임금이다(1사무 9,16-17).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하느님은 그를 임금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셨다. 그가 하느님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 말씀을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사무 15,11). 하느님은 사울 몰래 새로운 임금을 준비하셨는데, 그가 다윗이다. 다윗은 사울 왕실에 들어가게 되고 필리스티아인 장수 골리앗을 돌팔매로 쓰러트리면서 영웅으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그 이후 많은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러자 사울은 다윗을, 아들 같은 그를 시기했고 급기야 반란죄를 덮어 씌어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오히려 다윗은 사울을 두 번이나 손쉽게 죽일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하느님이 선택하신 왕이기 때문이었다. 하느님이 선택하신 사람, 하느님의 소유는 정당방위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다윗은 자신의 안위에 대한 부분까지 하느님께 완전히 복종하는 사람이었다. 사울은 결국 전투에서 사망했다. 죽일 수 있고 또 죽여야 하는 그를 살려 준 다윗의 행동은 하느님이 죄인을 대하시는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사울은 요즘 말로 ‘찌질한’ 사람이었다. 아들뻘 되는 다윗을 시기해서 갖가지 방법으로 죽이려고 했으니 말이다. 사울에게는 인간적인 것과 세상 것이, 다윗에게는 하느님 말씀이 더 소중했다. 그런데 과연 이런 사울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지 나에게 묻는다. 이 정도 나이를 먹었으면, 신앙생활을 이 정도 했으면 어른답고 좀 더 인내하고 너그럽게 베풀 줄 알고 그래야 하지 않을까? 사제는 입만, 수녀는 귀만, 다른 교우들은 발바닥만 천국 간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이 정도 하느님 안에서 살았으면 좀 거룩해졌어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이 자비로우신 거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루카 6,36). 원수를 사랑하고, 자신을 미워하는 이에게 잘해주고, 자신을 학대하는 이를 위해 기도하고, 뺨을 맞으면 다른 뺨을 내밀고, 겉옷을 달라면 속옷도 주고, 달라면 주고, 제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말라고 하신다. 한마디로,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라는 뜻이다(루카 6,31). 과장된 표현들이지만 그 뜻은 분명하다. 이웃에게 너그러워지라는 주님의 명령이다. 거기에 더해 좋아하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 이념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 이방인들에게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이 정도 살았으면 이웃을 위한 삶이 몸에 익을 때도 됐는데 말이다.
이웃을 위한 행동 중에 가장 쉬운 게 자선이다. 자동이체 해놓으면 신경 안 써도 된다. 실제적인 노력 봉사도 그렇다.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봉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밥 먹으며 하루를 돌아보면서 보람을 느낀다. 그러다 보면 누가 누구를 도운 건지 모를 때도 있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어려운 봉사는 자신의 시간과 마음을 내주는 것일 거다. 바쁜 중에 시간 내기가, 그것도 별로 보람도 없어 보이는 일에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내주기가 쉽지 않다. 거기에 골치 아프고 앞뒤 맞지 않는 남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바쁘기는 하지만 솔직히 그 정도 시간도 못 낼 정도는 아니다. 내 계획을 조금 바꾸거나 그날 잠을 좀 덜 자면 된다. 하느님은 당신 자녀들을 자꾸 귀찮게 하신다. 하기 싫은 일을 하게 하시고, 시간을 낼까 말까 갈등하게 하신다. 하느님은 우리를 꼬여내신다. 더 선한 세상으로, 더 자비로운 나로 탈바꿈하라고 초대하신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살지만 더 이상 여기에 속한 사람이 아니란 걸 잊지 말라는 뜻이겠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건 예수님의 명령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간절한 바람으로 들린다. 제발 우리가 입은 하느님의 자비를 세상에 보여주기를 바라신다.
예수님, 저 혼자만 열심히 사는 것으로는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제 삶이 온전히 이웃을 위한 선물일 때 저는 주님을 닮아 거룩합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1코린 9,22).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그 혼인 잔칫집 포도주가 떨어지지 않게 챙기셨으니, 저와 아드님이 하나가 되는 기쁨을 잃지 않게 도와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