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숙공 윤 관 (尹 瓘) 1040(정종 6)~ 1111(예종 6)
고려의 문신이자 무신으로 파평면 금파리에서 출생하였으며 광탄면 분수리에 묘가 있다. 자는 동현, 호는 묵재, 본관은 파평, 고려 태조를 도운 삼한공신 신달의 고손이며 검교소부소감을 지낸 집형의 아들이다. 출생과 관련된 비화로 아버지 문정공이 용마를 타고 하늘을 날으는 꿈을 꾼 후에 부인 김씨에게 태기가 있어 낳았다고 한다. 일찍 학문에 눈이 트여 잠시도 책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특히 오경을 즐겨 봤다고 한다. 일곱 살 되던 해 뽕나무를 소재로 하여 칠언절구의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술에도 일찍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073년(문종 27) 문과에 등과하여 습유 . 보궐을 지냈고, 1087년(선종 4)에는 합문지후로서 출추사가 되어 광주,충주,청주를 시찰하였다. 그뒤 좌사낭중으로 재직중이던 1095년 10월 숙종이 즉위하자 요나라에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렸다. 이어 1098년(숙종 3) 동궁시학사로서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숙종의 즉위를 통고하였고 이듬해 자치통감을 기증받고 돌아왔다. 이어 우간의 대부 한림시강학사가 되었으나 당시 좌간의 대부와 친척이었으므로 사간인 어사대와 같이 있을 수 없다는 중서성의 상소에 따라 해임되었다. 1101년에는 추밀원지주사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왕명에 의하여 진사시를 주관하였으며 이어 어사대부가 되었다. 이듬해 이부상서 동지추밀원사를 거쳐 지추밀원사 겸 한림학사승지가 되었다. 1104년 2월 동북면행영도통으로 임명되어 이때부터 훗날 자신의 명성을 떨치게 된 여진 정벌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당시 북쪽 국경인 압록강에서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경계로 그 위쪽 지역에 살고 있던 여진족은 고려를 상국 혹은 모국이라 하여 조공도 바치고 더러는 귀화도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점차 국경 일대에 새롭게 일어난 동여진이 그 세력을 확대하고 고려의 국경 요새 등을 잠식하기 시작하였다. 1103년 부족장에 우야소가 그 자리에 올랐을 때에는 그 세력이 함흥 부근까지 들어와 주둔할 정도였다. 이리하여 고려군과 우야소의 여진군은 일촉즉발의 충돌 상태에 놓였으며, 1104년 초 완안부의 기병이 먼저 정주관 밖에 쳐들어왔다. 이에 숙종은 무력으로 여진 정벌을 결심하고 문하 시랑평장사 임간을 시켜 이를 평정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여진군에게 패퇴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왕명을 받고 여진 정벌의 길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추밀원사로 있던 2월 21일 정벌의 책임자로 임명받고 전장에 나가 3월에 여진과 싸웠으나, 이번에도 여진의 강한 기병부대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여 아군의 태반이 죽고 적진에 함몰되는 패전의 장수가 되었다. 결국 임기응변으로 화약을 맺고 일단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패전 뒤 왕에게 전투력의 증강과 기병의 조련을 진언하여 같은 해 12월부터 여진 토벌을 위한 준비 확장에 전력을 기울여 나갔다. 그 결과 신기군,신보군, 강마군으로 구성된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창설하였다. 이와 같이 군제를 개편하고 군사들을 훈련시킴과 동시에 양곡을 비축하여 여진 정벌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1107년(예종 2) 여진족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어느 변방의 긴급보고를 접하게 되었다. 이때 원수가 되어 왕으로부터 지휘관을 상징하는 부월을 하사받고 17만 대군을 이끌고 정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휘하에 5만 3,000명을 거느리고 정주에 도착한 뒤 육지와 바다로부터 공격 하였다. 이같이 기세등등한 고려군의 위세에 눌린 여진군이 동음성으로 숨자 정예부대를 동원해서 이를 격파하였으며, 여진군이 숨은 석성을 공격하여 적의 태반을 섬멸시켰다. 이 전투에 135개 처에 달하는 적의 전략적인 거점을 점령하였고, 적의 전사자 4,940명, 그리고 생포 130명이라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즉시 조정에 승전보를 올리고 탈환한 각지에 장수를 보내 국토를 확정하고 그 주변에 9성을 축조하였다. 이어 남쪽에 사는 백성들을 이곳으로 이주 시켜 남도 지방민들이 국경지방 일대에 개척하며 살게 하였다. 새로 성을 구축한 곳과 이주 규모는 함주에 이주민 1,948가구, 영주에 성곽 950칸과 이주민 1,238가구, 웅주에 성곽 992칸과 이주민 1,436가구, 복주에 성곽 774칸과 이주민 680가구, 길주에 성곽 670칸과 이주민 680가구, 공검진에 이주민 532가구 등이다. 이 6성 이외에 이듬해 진양 등지에 3성을 더 쌓아 이른바 "윤관의 9성" 설치가 완결되었다. 오랑캐 땅을 개척한 것이 사방 700여 리에 달했고, 선춘령에 경계비를 세워 고려의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이렇게 고려군이 함경도 일대를 석권하게 되자, 그곳을 근거지로 웅거하던 완안부의 우야소는 1108년 다시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가한촌의 전투에서 포위당하였으나 부하 척준경 등의 도움으로 겨우 구출되었으며, 영주성의 공방전에서도 자신의 일사분란한 지휘 아래 역시 척준경의 용맹과 지략으로 군사들의 일심단결로 적을 패주시켰다. 3월 30일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부하들과 함께 포로 346명, 말 96필,소 300두 등의 전리품을 앞세운 채 개경으로 개선하여 "문하시중"으로 봉해졌다. 한편 전투에 패한 여진은 서쪽으로 강력한 요나라와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와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여진족은 조공을 바치고 끝까지 배반하지 않는 조건 아래 평화적으로 성을 돌려주기를 애원하였다. 여진이 적극적으로 강화교섭에 나오자 당시 고려 왕인 예종은 육부를 소집하고 9성 환부를 논의하였다. 예부낭중 한상이 반대하였으나 나머지 28명이 환부에 찬성하는 등 육부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대신들은 화평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여진을 공략할 때 당초에 한 통로만 막으면 여진의 침입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고려의 예측이 맞지 않았다는 점, 둘째 개척한 땅이 수도에서 너무 멀어 안전을 기할 수 없다는 점, 셋째 근거지를 잃은 여진족의 보복이 두려웠다는 점, 마지막으로는 무리한 군사 동원으로 백성들의 원망이 일어나리라는 점 등이었다. 그리하여 다음해 7월 3일 회의를 열고 9성 환부를 결의하여 7월 18일부터 9성 철수가 시작되었다. 결국 자신이 장병들과 더불어 목숨을 걸고 경략하였던 9성 일대의 땅이 아무 의미없이 다시 여진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더욱이 여진정벌에 대한 패장의 모함을 받고 문신들의 시기 속에 관직과 공신호조차 삭탈당하였다. 아무 명분 없는 전쟁으로 국력을 탕진하였다 하여 처벌하자는 주장까지 대두되었고, 회군해서는 왕에게 복명도 하지 못한 채 사저로 돌아 갔다. 반대파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계속 상소를 올려 그의 사형을 주장하였다. 임금은 하는 수 없이 그들을 달래기 위하여 윤관의 관직과 공신의 호를 빼앗기에 이르렀다. 이후 예종이 재상이나 대간들의 주장을 물리치며 비호해 준 덕으로, 1110년 다시 시호가 내려졌으나 사의를 표하였다. 말년을 우울한 심정으로 서재에 파묻혀 평소 좋아하던 경서를 읽으며 지냈다. 그러다 1111년 5월 "호국일념의 뜻을 받들어 나라를 위해 끝까지 분투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쓸쓸히 눈을 감았다. 많은 선비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을 정도로 어진 성품과 학식을 겸비했다고 전한다.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후대에 일가를 이루었다. 1130년 예종의 묘정과 조선 문종대에 이르러 왕의 명으로 숭의전에 배향되었다. 파주 여충사에 봉사하고 청원의 호남사 등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처음에 문경이었으나 후에 문숙으로 고쳐졌다. 척지대업을 이룩한 해동명장이라는 명성으로 지금까지 후대에 널리 추앙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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