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박해 1791 정조
신유박해 1801 순조
기해박해 1839 헌종
병오박해 1846 헌종
병인박해 1866 고종
신해-정조
신유-순조
기해-헌종
병오-헌종
병인-고종
신해박해
1791 정조, 최초의 천주교도 박해사건.
신해진산사건 이라고도 불림.
1791년 윤지충의 집안에서 폐제분주의 문제가 일어남.
윤지충은 독실한 천주교인으로 그의 모친상을 당하였을 때, 신주를 모시지 않고 제사를 드리지 않음.
천주교의 의식에 따라 모친의 상을 치루게 되는데 여기서 부터 발발되는 박해이다.
신유박해
1801년 순조, 신유년에 있었던 천주교 박해사건.
신유사옥이라고도 불림.
18세기 말 천주교가 확산되자 보수적 집권 세력들은 자신들의 지배체제에 위협을 느껴 천주교탄압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특히 천주교에 관대했던 정조가 죽고, 나이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는 사교/서교를 엄근/근절하라 지시했다.
청나라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전도하던 이승훈을 비롯하여
남인에 속하는 권철신, 홍낙민, 이가환, 정약종 및 중국인 신부 주문모등이 사형에 쳐애졌다.
이러한 참상을 베이징에 있던 주교에게 보고하던 황사영은 참살 당했다.
이 박해로 천주교도 약 100여명이 처형, 400명이 유배되었다.
기해박해
1839년 헌종때 일어난 천주교 박해사건,
기해사옥이라고도 불린다.
신유박해와 마찬가지로 천주교를 배척하기 위한것이었으나, 이면적으로 사파인 안동김씨의 세도를 빼앗으려는 벽파의 풍양조씨가 일으킨것이다.
종교를 가식적으로 의탁한 정치적보복. 천주교의 요인인 동시에 남인의 요인인 인물들이 많이 처형됨.
기해박해로 나타난 현상은 이제까지의 세도파이던 안동김씨가 몰락하고 풍양조씨가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로써 조씨의 세도정치는 1849는 헌종이 죽고 철종이 들어 설 때까지 계속되었다.
병오박해
1846년 헌종, 김대건의 체포를 계기로 일어난 천주교 박해사건.
김대건은 1846년 5월13일 서울을 떠나 황해도 연안의 백령도해역으로 나가 청나라 배에 지도와 서신들 탁송하고, 귀로에 순위도에 들렀다가 우연한 일로 포졸들에게 체포된다.
체포된 김대건은 등산진/옹진을 거쳐 해주감영으로 끌려가 심문을 받는데, 그의 신분이 밝혀지자 해주감사는 일의 중대성에 놀라 곧 그를 서울로 압송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그는 국사범으로 다루어져 심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천주교가 사학이 아님을 주장하고 천주교도인들에 대한 탄압의 중지를 요구하는 한편, 세계의 정세를 알려 정부당국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김대건은 국가에 대한 반역과 사교의 괴수라는 죄목으로 군문효수를 언도받고 9/16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 함쩨 잡혀있던 교인들 중 배교한자들을 제외한 현석문/임치백/한이형/남경문/우술림/김임이/정철염 등 8인의 남녀교인들은 9/20 사형에 처해였다.
병인박해
1866년 고종, ~1871년까지 계속 되었던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
이 박해는 4차례에 걸쳐 전개되었다.
첫번째는 1866년 봄에, 두번째는 1866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세번째는 1868년, 네번째는 1871년으로 이어져 도합 8,000여 명 이상의 순교자를 내었다.
10월에 7척의 군함을 이끌고 프랑스 선교사들의 학살 책임을 묻는 무력시위를 벌이게 되어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생하였다.
이 병인양요로 말미암아 박해는 제2단계에 들어가게 되는데, 대원군은 국가적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면서 천주교도를 통외초구(通外招寇)의 무리로 내세워 수많은 천주교인을 처형하였다. 이 때 대원군은 양이의 발자국으로 더럽혀진 땅은 그들과 통하는 무리의 피로 씻어내야 한다고 주장하여 처형지는 주로 서울과 해안지방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병인박해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천주교는 1886년 한불조약 이후 다시 회복하게 되었으며, 1968년에는 병인박해 기간중에 순교한 24명이 복자(福者)로, 1984년에는 성인(聖人)으로 오르게 되었다.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기록은 1890년 주교 뮈텔(Mutel, 閔德孝)이 자료를 모아 간행한 『치명일기』가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