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8년 전에 쓴 글의 일부를 손질해 올리려하니 구멍이 숭숭 뚫려 건질 내용이 별로 없네요. 그러므로 모잡지에 실렸던 앞부분은 대충 보아주시구요. <서른 잔치는 끝났다> 부분만 잘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중해, 렘브란트, 소매물도의 저물무렵이 아무런 관련없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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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시집여행] 최영미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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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은 세상에 어떻게 알려지는가? >
-최영미 시인을 중심으로 (1995년 4월 9일 02:22에 쓰다.)
말[言]로 절寺(=집)을 짓는 시(詩)인은, 글(詩)로 알려진다.
이건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결론이다. 그러나, 이런 결론만
내세운다면 이 에세이는 더 이상 이야기를 진행시킬 필요가 없다. 바
로, 시인은 '글'로만 알려지지 않는다는 데 오늘날 세태의 한 특징을
말해준다. 여기서 알려진다는 말의 정당함에 대해 말하자면, 지난(至
難)한 말꼬투리 잡기가 이어지겠기에 간략히, 정리해 보겠다.
글에는 흔히 말하듯 '작가 내면(內面)의 글과 외면(外面)의 글' 이 있다 .
작가 내면의 글은, 한 작가가 착상을 해서 어떤 이미지와 구조로 얼개를 짜서
발표하기 이전의 작품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바로 자기 자신이 독자
가 되어 비록 자신의 글일지라도 읽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 글은 외면의 글이 돼버린다.
그리고 한 작가가 보는 모든 타인의 글들은 이미 글
스스로의 자생적 '생명력'을 지닌 채 생산자인 작가의 의도(?)야 어찌
됐든, 세상에 읽혀지고 비평을 입고, 어떤 작품은 시류에 굽힘이 없이
당당한 생명력을 보여주고, 어떤 작품은 사장(死葬)되고 만다. 이것은
글의 숙명이다.
글은 말할 것도 없이 사람이 쓴다. 그래서 "글은 사람이다" 라는 명제
는 최초로 정의 되고부터 아직까지도 유효하다. 옛부터 사람의 됨됨이를
신언서판(身言書判)으로 가렸다. 한낱 화장실 벽에 휘갈겨 쓴 낙서에서
조차 쓴 사람의 심리적 기저를 알아낼 수 있다. 이처럼 글은, 인간을 드
러내 보여주는 몇 안 되는 수단 가운데 중요한 하나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을,"자신의 연속적 표현"이라고 말한 사
람도 있다. 그 표현 가운데 두드러진 것이 글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글을 쓴다는 행위는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지금까지
나는 지극히 상식적이고도 원론적인 이야기를 주절거렸다. 어쩌랴.
이렇게 상식적이고 원론적인 이야기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나의 깜냥이다.
그런데 제목처럼 -최영미 시인을 중심으로 시인의 알려짐을 고찰해
보고자하는데 주인공은 언제 등장시킬 것인가? 바로 지금 등장시키겠다.
(흠, 잘 모르는 사람에 대해 말하려니 어렵군!)
바로 위에 속내 말로 한 '잘 모르는 사람'에 밑줄을 하나 그어야겠다.
최영미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읽기 전에 나는 잡지에 발표
된 시를 몇 편 읽었다. 그리고 시와 시인에 대해 관심이 갔다.
그의 시에는 경쾌함이 있었다. 경쾌함은 흔한 재능은 아니라는 내 평소의 생각에 따라.
그리고 교보문고에서 채 바코드의 잉크가 굳기 전에 시집을 샀다. 바로 그날로, 주
목할 시인이 나타났다고 통신 게시판에도 메모를 하나 남겼다.
그로부터 1개월여.
겁나는 광고(?)가 실리기 시작하면서 최영미 시인의 시집이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현상을 지켜보았다. (이건 나의 직업이 출판동네이다 보니 밥
안 굶을려고, 가장 관심 두는 분야이다.)
겁나는 광고라함은, 내가 출판 광고의 허상과 진실을 좀 알기에 하는 소리이다.
출판 광고의 진실과 허상이라고 하지 않고 허상을 앞에 내세우는 것은,
출판 광고는 현실의 거개의 광고가 그렇듯 허상을 부풀리고 있다. 어떤
이는 생존의 최소한의 반응방식으로 출판 광고를 말하지만, 현실적으로
진단해 볼 때 왜곡되고 소모적인 경우가 너무 많다. 내가 시대착오적으로 "책
은 책으로 광고"해야 하며, 사실 이상으로 부풀릴 필요가 없다고 말하 면,
좀 멍청한 짓일지 모른다.
(우리나라처럼 일간지에 출판광고가 크게 나가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미국이나 일본의 유력 일간지에 출판광고가
가끔 실리긴 하지만, 5단통 크기를 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일간지 전면
광고는 사실 미친 짓이다. 뭐든지 크고 요란 벅적거리는 것에만 눈길이 가는
세태를 반영한 출판계의 고육책이라지만, 왠지 있어 보일 것 같은 효과를
주려고 한 짓이지만, 광고의 크기만큼 많이 팔리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보라! 우리가 얼마나 광고라는 귀신에 휘둘려 넋을 빼앗기고
있는지? 현대 문명의 꽃인 광고를 귀신이라고 표현하면, 나만 웃기는 녀석이
된다는 것을 나도 안다. 하지만, 나는 광고의 고전적 개념을 모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고전적 개념이란, 광고는 정보의 제공자로서의 탁월한
기능에 충실할 때 결코 비난하거나 타기할 대상이 아니다. 광고는 즐거
운 동반자일 뿐만 아니라 생활 속의 신선한 에너지이기조차 하다.
바로, 최영미 시인의 시집 논란 현상은 광고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책을 펴낸 출판사로서는 당연히 더 팔기 위해 이런저런 광고의
방법을 찾으려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여기라함은, 작품 속을 들여다보는 행위보다 가십성 이야기와 시인의
전력 시시비비 현상이 벌어짐을 말한다. 어느 날 문득, 유명해진다는 건
당사자로서는 정말 신나는 일일 게다. 아니,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아
니 그럴 거야! 아니 모르겠다, 아니 알만은 해! (이거야 원! 무명인
나는 순전히 관념적일 수밖에 없군. 흠∼.)
아, 여기서 어쩔 수없이 나는 당연히 나의 사견을 담을 수밖에 없다.
나는 시인은 시로서 먼저 알려졌으면 하는 나의 어줍잖은 바람 말이다.
시로 알려지려면, 아마도 시집을 낸 뒤 어디 산 속에라도 칩거를
해버려서 시에 대한 세평이 알려진 뒤 내려오면 될까? 그럴 수는 없겠
지. 왜냐면, 시인이 시집을 내봤자, 세상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
을 테니까! 그러면 숨은 시인만 빙충이가 되겠지. 시인이 빙충이 돼서야
안되지.
아무리, 오늘 이 한국이라는 터전에서 시인의 목소리가 요란한 신한국
(!)플래카드에 가리고, "경제를 살리자는 데, 우째"에서 밀려 날지라도, 침
몰하는 잠수함 속의 토끼의 기가 죽어서야 쓰겠는가? 아니다.
아,그러고 보니 여기쯤에서 최영미 시인에 대한 반사적인 생각이 물
결치는군. 그래, 세상에 아직도 시인이라는 족속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우짜든동 널리널리 알려져라 멀리멀리 퍼져라 하고 외쳐주고도 싶
은 생각이 팍팍 드는걸 어쩔 수 없군.(오! 모순이여!)
저,1930년대 李箱, 金素月 60년대 김수영, 신동엽처럼 또한 80년대의
허다한 시인 군상처럼 그리고 곱씹음이 필요하게 시집을 판 서정윤, 이해인,
도종환 시인 등등처럼 어쨌든 시인이여 널리널리 알려져라 하고 말하고 싶지만,
여기서 잠깐, 이 꿀꿀한 에세이의 결론을 유보하고 한마디해야겠다.
80년대 시인이 알려지는 방식은 참으로 차분하게 톺아볼 필요가 있
다. 아마도 시인이 시로 알려지지 않는 못된(?) 풍토는 80년대를 자양
으로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 연장선상에서, 실명을 거론해 뭣하지만,
1993년에 작고한 천상병 시인 또한 진지한 작품과 삶의 접근보다는, 시인
들의 초상(肖像)을 왜곡시킬 소지가 다분하게 있는 이야기로 알려진 바 있다.
천상병 시인의 절망적 상황과 슬픔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보다는 그저, 기이하게
조차 보이고 희화적인 면만을 그로테스크하게 보여주는 짓거리들이
횡행하는 풍토를 우리는 묵묵히 무감각하게 보아왔다. 이건 어쩌면 장
면을 바꿔말해 볼 성질의 것이지만, 시인을 왜곡시키는 현상들은 도저에
지천으로 깔려 있다.
시인을 둘러싼 널널한 잡소문들이 독자 관객의 눈을 가리고, 시를, 작
품을 작품으로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들에 더 이상 휘둘려서는 안되겠
다. 그것은 바로 '시인에게 있어서 소중한 <진정성의 아이덴티디>'를 위
해하는 행위가 된다.
내가 최영미 시인이 아니라서 잘은 모르지만, 인간이라는 보편적 감성으로
말한다면, 아마도 "제발 냅둬유!" 하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쩌면 잘 모르겠다는 전제를 하고 또 하나의 폭언을 퍼부은
논리의 오류를 범했는지 모르겠다.(이처럼 사람에 대해 말하는 건 어렵다.
아! 나만 그런가? 스포츠신문을 비롯한 신문들은 광고에서, 기사라는
이름의 글에서 잘도 단정적이고 확실하다는 듯 어떤 이야기들을 잘도 조잘대는데…….)
이제 별 씨알도 영양가도 없는 널널한 글을 끝내며 이런 생각을 내 맘대로 해본다.
시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우선 시를 읽자. 시속에서 시인을 읽자. 그리고
시를 빠져나와 자신을 읽고 인간을 읽자. 그리고 상대 시인에 대한
우정을 보내자. <나는 왜 아버지를 잡아먹었나?>라는 막 돼 먹은 제목의
책이 있는 이 땅이지만, 시를 쓰는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자. (쿵∼
이게 구호로 부르짖는다고 제대로 될 리는 없다는 건 잘 알지만…….)
무엇보다도 뜬소문과 부풀린 말의 '강간성 광고' 속에 머물지 말고,
시인의 다음 시를 기다려보자. 다른 사람이 아무도 안 그래도, 난 그러겠다.
그리고 조용히 하겠다.(흠……. 대체 무슨 상관이람.)
마지막으로, 시로 하여 끓는 가슴으로 지새던 날들에 거듭 읽어본 시
하나를 인용한다.
[詩,부질없는 詩]-----------정현종
시로서 무엇을 사랑할 수 있고
시로서 무엇을 슬퍼할 수 있으랴
무엇을 얻을 수 있고 시로서
무엇을 버릴 수 있으며
혹은 세울 수 있고
허물어뜨릴 수 있으랴
죽음으로 죽음을 사랑할 수 없고
삶으로 삶을 사랑 못한다면
슬픔으로 슬픔을 슬퍼 못하고
시로 시를 사랑 못한다면
시로서 무엇을 사랑할 수 있으랴
보아라 깊은 밤에 내린 눈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아무 발자국도 없다
아 저 혼자 고요하고 맑고
저 혼자 아름답다.
사족: '80년대 '운동'하던 친구들은 "이것도 詩냐?"고 노려보던 눈빛에
나는 "그렇다!"고 한 말에서 나의 정체성이 다 드러날 수는 없다.
그러면 그때 그대와 나
골목골목 굽이굽이
상처를 섞고 흔적을 비벼
너의 심장 가장 깊숙한 곳으로
헤엄치고프다, 사랑하고프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내'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는 아도니스(Adonis). 사랑과 미(美)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Aphrodite =비너스 Venus)의 애인으로 사랑 받는 사내 아도니스. 그러
나, 여기서 '신화 속의 사내 아도니스'에 대해서는 그만 이야기한다.
신화야 찾아 읽어보면 그만이니까. 이제 내게는 신화의 상징만 필요할
뿐! 신화 세계 속에 빠져, 그들이 자유로운 영혼을 간직한 인간이 되어
벌이는 환상과 경이로움에 온전하게 빠져들지 못하는 나의 잡다함에
대한 서러움이여! 나는 가끔 신화를 읽을 때면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그건 그렇다 치고 여행을 계속해야지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이 시를 첫머리, 너의 인생에도/한번쯤/휑한 바람이 불었겠지. 하는
첫 구절을 보고, 가슴이 써늘해진다. 휑한 바람/휑한 바람……. 사람이 세
상에 태어나 살면서 날이 날마다 꽃밭을 꿈길을 거니 듯 한결같이 살기
는 어렵다하더라도 휑한 바람 스치는 인생은 되지 않아야 할텐데.
'어떻게 태어난 사람이더냐!' 이 고즈넉한 지구에 인간으로 태어난 행복한
운명에 내 진작부터 감읍(感泣)한 적이 그 몇 번이던가? 허나 허다한
일상은 '휑한 바람, 허망한 꿈'에 질척거리지 않기를 소망하건만,
허무/우울/슬픔/고독/피로/이별/타성/의욕부진/권태……. 등등 사악한 것들에
쉽게 물들어 지치게 만드는지 원! 살아, 정녕 구원은 없는 것인지!
(일가친척, 큰어머니를 비롯하여 한 누나와 정겨운 성당 친구들은 모두
들 "예수 믿는 것이 구원이다!" 고 자주 내게 들려주지만, 나는 아직은
믿음이 가지 않는다. 믿는 것으로 하여 얻는 구원은 거부하고 싶은 내
지지리도 못난 신앙심 때문에 그러한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내게 삶은
대체로 명료하지 않다. 아직도 휑한 바람이 불고 있다. 좀 슬프게. 그
러나 어설프게 좌절하거나 체념하지는 않는다. 내게도 희망은 가끔 내
지친 어깨를 두드려준다. 힘내!).
'상처가 호수처럼 괴어 있을까' 시인이 툭 던지는 이런 시구에서 그
비유가 참신하다든지 기법이 어떻다느니 하는 교언(巧言)은 사실 나는
관심 없다. 아니, 그런 교언들은 가치 없다고 본다. 이런 시구의 문제는
'진정성이다'. '삶의 무게가 실린 진정성의 깊이와 넓이'에 의해 감동
이라는 추(錘)의 흔들림과 울림이 전해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 한 편의 시 속 화자(話者)에 의지하여 그 심안(心眼)을 헤아리기는
좀 어렵다. 그래서 한 시인의 시 몇 편이 필요하다.
그러나 최영미 시인이 첫시집의 제목으로도 삼고 싶어했다는
시 <마지막 섹스의 추억>을 필요로 하는
'그 시'로 했을 경우엔 말이 달라진다. 나를 포함한 사람
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묘한 존재라서, '자신이 이해하기 편한 방식으로
만 세상을 재고, 어쩌면 그렇게도 고정관념의 늪을 그리도 잘 헤매는
지' 모르겠다. 모르긴 몰라도, 나의 아둔한 직관이랄까 동물적인 감각
(?)으로 생각하건대, <서른, 잔치를 끝났다>란 시집을, 내용을 같이 하
면서 당시에 시집 제목을 <마지막 섹스의 추억>으로 했더라면,
시집의 판매가 3배는 더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몇 가지 당혹스런 고정관념과 가십성 루머들이 조금
더 횡행했으리라. 그 시집 발간 출판사에 이시영 시인이 있어 그것
을 조율했음을 퍽이나 다행으로 생각한다. 왜? 그것은 시집 속에 들어
있는, 진정성을 담보하는 '자기 목소리가 당당하게 담긴 시'를 곡해하
기 쉬운 장치를 피해간 것이기에.
詩 (全文)
나는 내 시에서
돈 냄새가 나면 좋겠다
빳빳한 수표가 아니라 손때 꼬깃한 지폐
청소부 아저씨의 땀에 절은 남방 호주머니로 비치는
깻잎 같은 만원권 한 장의 푸르름
나는 내 시에서 간직하면 좋겠다
퇴근길의 뻑적지근한 매연가루, 기름칠한 피로
새벽 1시 병원의 불빛이 새어나오는 시
반지하 연립의 스탠드 켠 한숨처럼
하늘로 오르지도 땅으로 꺼지지도 못해
그래서 그만큼 더 아찔하게 버티고서 있는
하느님, 부처님
썩지도 않을 고상한 이름이 아니라
먼지 날리는 책갈피가 아니라
지친 몸에서 몸으로 거듭나는
아픈 입에서 입으로 깊어지는 노래
절간 뒷간의 면벽한 허무가 아니라
지하철 광고 카피의 한 문장으로 똑 떨어지는 슴슴한 고독이 아니라
사람 사는 밑구녁 후미진 골목마다
범벅한 사연들 끌어안고 벼리고 달인 시
비평가 하나 녹이진 못해도
늙은 작부 뜨듯한 눈시울 적셔주는 시
구르고 구르다 어쩌다 당신 발끝에 채이면
쩔렁! 하고 가끔씩 소리내어 울 수 있는
나는 내 시가
동전처럼 닳아 질겨지면 좋겠다
나는 이런 시가 좋다. 내가 좋아하는 '김수영 시인'의 감성을 보는
것 같아 좋고,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시라고 본다. 게다
가 도발적이면서도 페이소스가 넘친다. '시인'이라는 종자도 하도 여러
가지가 있고 제각각 '시로 쓰고자 하는 것'도 다 다르지만, 이 <시>를
보면 그 솔직 담백함이 느껴진다. 이런저런 이론을 찍어다가 최영미 시
인의 시를 평할 것도 없이 '솔직 담백함'을 보여주는 시의 '도발'은 그
리 낮춰볼 재능이 아니라고 본다. 잠깐 위에서 '김수영 감성'을 말했지만
자꾸만 나는 최영미 시인의 어법에서 김수영의 체취를 느낀다.
(정말 뜬금 없이 주책 맞은 발언일지는 모르지만, 나는 최영미 시인에게
'김수영 문학상'을 주지 않은 것을 매우 유감으로 생각한다. 그의 시집은
응당 그런 상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다고 본다. 특히, 시에 대한 대중적
인 영향면에서 보면, 이전의 '서정윤/이해인/도종환(접시꽃 당신)'등등
일군의 베스트셀러 시인군에서 분명 다른 측면의 기여를 높이 사 '김수
영 문학상'을 받을만하다고 그때나 지금이나 생각한다. 허나, 나는
그런 상을 주는 사람이 아니니 안타깝다. 오호! 내가 좋아하는 시인 김수영 이름으로
시상되는 '김수영 문학상'이 꼰대들만의 잔치가 돼서는 안 된다.
우리 집 (全文)
평생 당신이 갖지 못한 것만 꿈꾸신 아버지
자잘 토실한 근심들로 광대뼈만 움푹 살진 어머니
아랑곳없이 쑥 쑥 뽀얗게 자라
처녀티 폴짝 벗고도
징그럽게 애비 꿈, 에미 잠 축내는
아귀 같은 딸년들 하나, 둘, 셋
대책 없이 엉겨 덜그덕거리는 푸대자루
이런 시를 읽고 쿡쿡 웃으면 분명 실례이다. 아버지/어머니의 '풍경'
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딸년들 가운데 '둘, 셋'은 좀 억울해 할지도 모르
겠다는 생각이 들어 큭큭 웃음이 난다. 하난 분명 푸대자루겠지만…….
시인은 때로 자신과 관계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내용을 시로 쓸
때 그저 평범한 일상인으로 그리지 못하는 운명을 타고 났다.
시인을 둘러싼 행간 너머 '한숨처럼 신세타령처럼 비꼼처럼 자조풍(自嘲風)의
탄식'이 들린다. 그러나 그 푸대자루엔 언젠가 무엇인가 채워지리라.
푸대는 채우기 위해 있는 것이지, 전시용품이 아니다. 대책 없는 젊은
날들을 위해 건배라도 제안하고 싶은 시다.
그런 한 '푸대자루'의 생활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노래랄 수도 있는
시 <혼자라는 건>을 인용하면서 여행의 귀로로 접어든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얼마든지 앞으로, 외오 돌아가거나 에둘러서 언제고 다시 할 수
있다는 것을 덧붙여둔다.
그것은 제목은 그래도 이 땅의 피가 뜨거운
'젊은 시인의 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살아서 끝나는 건 없다.
'서른'에 끝내야 할 잔치는 온전한 것이 못된다. 또한
말장난으로 듣지 않기를 바라며 한마디하자면, '생명이 있는 한 잔치
를 끝낼 수 없는 게' 시인의 삶이다. 왜? 역설의 아룸다움으로!
<혼자라는 건>에서와는 달리 시인이 순대국밥을 담담히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고 기원해 주고 싶다.
혼자라는 건 (全文)
뜨거운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혼자라는 건
실비집 식탁에 둘러앉은 굶주린 사내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고 식사를
끝내는 것만큼 힘든 노동이라는 걸
고개 숙이고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들키지 않고 고독을 넘기는 법을
소리를 내면 안돼
수저를 떨어뜨려도 안돼
서둘러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허기질수록 달래가며 삼켜야 한다는 걸
체하지 않으려면
안전한 저녁을 보내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