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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인생
시편 127:1-5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창조절 제2주일이다. 여러분이 함께 하는 예배의 자리에 하나님의 마음이 함께 하시길 바란다. 지금 예배드리는 공간이 최선의 예배당이길 소망한다.
어제 저녁 내내 마음이 불편하였다. 서울연회 감독이 독단적으로 올린 대면예배 요구와 개시 공문 때문에 여론이 들끓었다. 아마 기사를 읽은 분들도 있을 것이다. 다음(DAUM)에서 무려 2시간 만에 댓글이 6천개가 달렸는데, 욕설 투성이였다. 서울연회 감독이 감리사들과 먼저 회의를 했는데 대부분 반대하니까 혼자 일방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온 사회의 본이 되어야 할 교회가 무례를 저질렀다고 생각하여, 나라도 먼저 사과를 드린다.
예배는 대면이건, 비대면이건 하나님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내 믿음이 스스로 자신을 가두는 독선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 믿음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인 평화, 기쁨, 자유, 사랑을 이웃과 나누어야 한다.
코로나19로 새벽기도회로 모이지 못하지만, 내일이면 시편 150편을 마친다. 올해 2월 3일에 제1편을 시작했는데, 어언 마지막에 이르렀다. 참으로 감사드린다. 2013년에 이어 두 번째로 나눈 시편이었다. 색동교회는 시편을 사랑한다. 작년 수요기도회는 ‘내 영혼의 보물’ 시편 19가지를 공부하였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시편은 인생의 ‘희노애락’을 골고루 담고 있다. 하나님의 복, 은총, 보호, 평화가 주제이다. 물론 그 배경에는 근심, 질병, 슬픔, 두려움이 있다.
지금 내가 인생의 순례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누구에게나 인생은 만만치 않다. 기도 없이 인생이 가능할까? 그런 의미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누구나 시편을 순례하는 사람이다.
1)
오늘 본문 시편 127편은 성전에 올라가며 부르는 순례자의 노래 중 8번째이다. 본문은 불과 5절이지만, 두 개의 지혜의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가지 주제 중 하나는 가정이고, 또 하나는 자식에 대한 것이다. 가족과 자녀의 문제는 누구든지 늘 하는 일용할 기도제목이요, 평생 씨름하는 내용이다.
나는 평소 가정심방을 할 때는 늘 시편을 본문으로 삼아서 하나님의 교훈을 찾는다. 시편에는 인생 이야기의 전부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지혜를 두루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시편은 기도문이고, 찬양곡이며, 인생 서사시이다.
1절을 함께 읽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1).
시편은 한 마디로 ‘하나님은 내 집과 성의 수호자가 되신다’고 말한다. 가정의 행복과 공동체의 안전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보호와 복에 달려있다. 어떠한 일도 인간의 힘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만약 이루어져도 모래성일 뿐이다. 매사에 하나님의 은혜와 간섭이 요청된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부모의 수고와 헌신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다 된다면 무슨 걱정이 있을까? 성경은 그것만으로는 온전하지 않다고 말한다. 유감스럽게도 가정이든, 개인의 경우든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참 많다. 따라서 행복한 인생이 선물인 까닭은 내 인생의 주인인 나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생의 길이조차 너무나 짧다. 살만하면 곧 늙고, 행복할 만하면 누군가가 떠난다. 이루어 놓은 성과는 쉽게 흔들리고, 든든했던 관계도 끊어진다. 내가 아는 어떤 수집가는 평생 열정적으로 귀한 물건을 모았는데, 늙으니 다 짐이 되더라고 했다. 하고 싶어서 한 일도 스스로 정리가 쉽지 않다.
만약 하나님이 붙잡아 주지 않으시면 인간이 세운 공적은 무효가 된다. 그러니 누구나 은총이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누구나 하나님이 부둥켜안아 주셔야 한다. 개인과 가정의 운명은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한다. 한 나라의 역사도 하나님의 간섭과 보호가 있어야 한다.
헬무트 틸리케 목사가 쓴 <세계를 부둥켜안은 기도>란 책이 있다. 주기도문 설교집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는 소소한 일상의 일이 있는가 하면, 세계사의 시각에서 바라봐야할 문제가 있다. 아무 염려가 없는 어린이들이 있는가 하면, 어른들을 노심초사하게 만드는 문제들도 있다.’ 그러면서 틸리케는 문제를 부둥켜안으라고 한다. 부둥켜안는 일이 바로 기도이다.
그가 이 설교를 한 시기는 2차 대전의 막바지에 독일 스투트가르트 시내 위로 연합군의 폭격이 계속되던 때였다. 그는 방공호와 폐허가 된 교회의 잔해 위에서 설교하였다.
“온 세상이 주님의 손 안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그 세상을 하나님께 들어 올릴 때, 세상은 우리 손 안에도 들어있습니다. 바로 그 기도로 이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는 것, 그보다 더 위대한 일이 있을까요?”
틸리케는 기도하는 인생을 말한다.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한다. 그것은 시편의 주제이기도 하다. 시편 전체를 가장 잘 요약한 것이 바로 주기도문이다.
2)
2절을 함께 읽자.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2).
인생에서 의미 있는 일은 노동이다. 평생 직장에서 일하는 것과 평생 가정에서 살림을 사는 것은 모든 소중한 노동이다. 노동은 인생의 고달픈 의무이지만, 동시에 인생의 희망찬 보람이다. 시편은 인간에게 있어서 모든 노동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고 단언한다.
누구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직업을 소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한다고 해도, 사람이 억지로 할 수 없는 일도 많이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노동은 어떤 특징이 있는가? 중요한 것은 모든 수고는 참된 안식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노동의 가치는 바로 안식 때문에 빛난다. 노동만 하면 노예에 불과하다. 안식을 누려야 노동이 가치가 있는 법이다.
우리는 하루의 시작을 아침부터라고 여긴다. 그러나 성경에서 창조의 뜻에 따르면 하루의 시작은 저녁이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3).
그리스도교에서 한 주간의 시작은 월요일이 아니라 일요일이다. 하루의 시작을 저녁으로 삼는 것은 삶의 주도권, 일상의 주도권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 있음을 선언한 것이다. 저녁에 쉼이 먼저고 그 다음에 아침이 되어 일한다.
더 놀라운 것은 2절 후반부에 있는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2).
만약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면 어떨까? 밤이 점점 두려워 질 것이다. 사흘만 제대로 잠을 못자면 지옥과 같다. 그래서 고문 중에는 잠을 못 자게 하는 방법도 있다. 잠조차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잠을 자고 싶어도 못자는 사람이 많다. 행여 내일 아침에 깨어나지 못한다고 불안해한다면 과연 달게 잠들 수 있을까?
색동교회 한 여자어린이는 잠들기 전에 큰 소리로 이렇게 인사한다고 들었다.
“엄마, 아빠 안녕히 주무세요. 우리 집에 있는 모든 것들아 다 잘 자거라.”
아이는 잠을 축복한다. 참 아름다운 모습이다.
잠은 하나님께 내 인생을 다 맡길수록, 안심할수록 잘 잔다. 그는 이미 은총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잠자는 습관에 불과한 것인지, 하나님의 은총의 질서 속에 참여하는 일인지는 분명히 다르다.
시편은 말한다. 잘 자고, 잘 노는 사람은 그것도 은총이다. 노동할 수 있는 기회와 함께 휴식할 수 있는 자유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경에 따르면 안식의 참 목적은 하나님의 시간을 거룩하게 지키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위험에도 불구하고 대면예배를 강행한다고 하나님의 뜻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다. 이웃을 위험에 빠뜨릴 지도 모르면서 어찌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코로나19로 맞은 위험한 시대일수록 안식의 정신을 잘 지켜야 한다. 그것은 거룩함이고, 쉼이며, 하나님이 주신 복 있는 시간이어야 한다. 안식의 목적은 노동을 위한 충전이 아니다. 안식은 그 자체로 목적이며, 복되고, 거룩한 일이다.
3)
시편은 내 속에서 나온 내 자녀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3).
기업은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자녀들의 존재를 의미하며, 상급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복을 뜻한다. 농경사회에서 아들이 많은 가족은 유리하다. 성문에서 벌어지는 법적 다툼에서도 아들들이 많으면, 목소리가 크면 유리하다. 물론 무자식이 상팔자란 말도 있다.
내 인생에서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선물을 생각해보라! 자녀뿐이 아니다. 모든 자녀는 다 부모에게서 왔다.
요즘 연로하신 부모님 때문에 여러 가정이 어려움을 겪는다. 오래도록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은 가정일수록 연로하신 부모님 때문에 걱정이 많을 것이다. 너무 일찍 부모님을 여읜 자녀는 그런 수고조차 면제를 받는다. 참으로 서운한 일이다.
박이섭 목사님이 쓴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미국 시카고남부교회에서 목회하던 시절인데, 늘 큰집에 어머니가 홀로 계셨다고 한다. 치매가 심해지면서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퍼즐 맞추기를 사다 드렸다. 혼자 시간을 보내니 심심풀이용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며칠 새 다 맞춘 후 또 없냐고 하셨다고 한다.
이번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방법을 생각하여 검은콩 한말, 흰콩 한말씩 사다가 뒤섞어 놓고 검은콩과 흰콩을 구별해 담으라고 함지 두 개와 함께 드렸다고 한다. 어머니는 이번에도 며칠 안으로 다 끝내고 나서 더 없냐고 하시더란다. 그러면 또 그것을 다시 뒤섞어 드렸다고 하였다. 하루는 어머니가 이렇게 말을 하시더란다. “이 나라 농사꾼들은 그래 흰콩 검은 콩을 이리 구별 못하느냐?”
인생이 고달프면, 기도하는 인생이 된다. 인생이 힘들면 하나님을 찾는다. 그런 기회조차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하나님과 무관하게 사는 사람의 인생은 얼마나 황폐한가? 하나님을 잃은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불안한가?
“내가 무력하게 느껴질 때, 어떤 노력도 부질없을 때, 세상이 모두 내게 등을 돌리고 있다고 느껴질 때, 눈물이 터지기 직전, 아마도 그때가 신이 나를 부르는 시간이리라”(<의자놀이>).
코로나19로 어려운 환경이지만 늘 기도하는 마음을 잊지 말라. 그 마음을 잃으면 정말 내 인생이 황폐해 진다. 날마다 가난한 마음으로 은총의 선물을 헤아려 보라.
잠언에서 아굴의 기도를 보라. 여러분이 아주 좋아하는 말씀이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7-9).
기도하는 인생은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다는 것을 믿는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 연약함이 더욱 견고하게 됨을 의지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헤세드)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든 시편의 기도요, 간구이다.
기도는 얼마나 소중한가? 내가 기도문 한 조각이라도 문집을 만들어 나누려는 이유이다. 1994년 내가 독일로 떠날 때 파송하는 예배를 정동제일교회 부속예배실에서 드렸다. 그날 대표기도를 맡은 분에게 나를 위한 기도문을 달라고 하여, 죽 보관하였다. 그는 출판사 사장으로 내가 난생처음으로 <하나된 세상, 하나님 나라>를 거기서 낸 적이 있다.
나는 지난 주간에 그 출판사에 볼 일을 보러 가면서 26년 동안 보관했던 기도문 원본을 돌려주었다. 그 사장 장로님은 내가 기도문 한 조각도 귀하게 여겼다고 치하하더니, 다음날 아침에 이런 문자를 보내주었다.
“이 아침에 드는 생각! (내) 회갑기념으로 시편묵상집을 내야겠어요. 어제 기도문 보고서 우리의 그 이후 삶을 허락해 주신 은총에 대한 보답으로 그리하십시다. 거기에 알맞는 십자가를 각장마다 배치해 주세요. 좋은 책이 될 거 같아요.”
두 번에 걸쳐 어렵게 150편의 시편을 모두 정리할 즈음, 시편묵상집을 내자는 제안을 받으니 기분이 어떨까? 아주 부담스럽고 또 두려웠다. 대답은 천천히 할 예정이다.
사람에게는 동반자가 필요하다. 말씀과 동행하는 일, 기도하는 인생으로 사는 일은 믿음의 순례자의 모습이다. 인생의 기도자는 이렇게 간구하는 사람이다. 하나님, 내 삶의 동행자가 되어 주십시오. 내게 든든한 가족과 신앙의 벗들과 친밀한 친구들을 주소서.
평생 기도하는 인생은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 한결같은 걸음으로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한다. 마치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가 엄마의 손을 꼭 쥐고 걷듯이 천천히 성장하며, 또 늙어가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런 믿음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을 간섭하셔서 늘 하나님이 주시는 질서와 간섭과 은총으로 이끄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첫댓글 설교중에 말씀드린 목판화 선물입니다. 이시후 작품..
정말 감동입니다.. 시후에게 저도 감사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