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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디-빠〗의 삼세실유론 연구
- 삼세실유론을 둘러싼 타학파의 비판에 대한 반론을 중심으로 -
황 정 일 / 동국대학교 강사
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아비달마디-빠 「수면품」의 구성적 특징과 내용
Ⅲ. 아비달마디-빠의 타학파 비판
1. 삼세의 유무에 관한 4가지 설에 대한 비판
2. 비유자에 대한 비판
3. 세친 및 대승불교에 대한 비판
4. 외도 비판
Ⅳ. 나가는 말
국문 요약
디빠는 순정리론과 마찬가지로 세친의 구사론을 반박하기 위해 지어진 논서이므로, 그 구성은 구사론과 같다. 그러나 순정리론이 구사론의 내용을 답습하고 있는 반면에, 디빠는 구성방식이나 내용에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구사론이 유부 4대 논사의 설을 시작으로 하여, 유부의 삼세실유론을 비판하고 있다면, 디빠는 불교내의 타학파인 비유자나 분별론자 등의 4학파를 거론해 비판하고 있다.
외도학파의 비판과 관련해서는 세우의 삼세실유설이 샹캬의 25제설과 와이셰시까의 극미집합론을 배격하는 가장 수승한 설이라고 한다. 이는 세친이 법구의 설뿐만 아니라 세우의 설도 샹캬의 전변설로 몰아가고자 하는 것에 대한 반증과 더불어 유부와 와이셰시까의 극미론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디빠까라는 세친을 대승의 공성론자로 하여, 대승불교로 전향한 세친을 비판하고 있다. 순정리론에서도 대승 공론자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세친을 그와 같이 비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디빠까라는 세친이 구사론 저작 이후, 실제적으로 대승으로 전향했을 뿐만 아니라, 유식의 삼성론을 저작한 대승론자이기 때문에 그를 설일체유부로부터 타락한 대승의 공성론자라고 비판한다.
* 주제어
삼세실유, 비유자, 분별론자, 전변설, 극미론, 공성론자
Ⅰ. 들어가는 말
설일체유부(이하 유부로 약칭함)는 부파불교를 대표하는 학파일 뿐만 아니라, 불교 교리를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대표적인 학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반면에, 많은 학파로부터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유부의 독특한 존재론에 있다. 즉 ‘說一切有部(Sarvāstivādin)’라는 학파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부는 ‘일체의 법(sarva)이 과거‧현재‧미래의 삼세에 실유한다(asti)’는 삼세실유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 학설은 유부의 초기 논서인 식신족론에서부터 논의되기 시작해 대비바사론에 이르러 구체화된 사상이다. 그러나 이 학설은 여러 학파로부터 크고 작은 비난을 받게 되는데, 직접적인 비판은 세친(Vasubandhu)의 구사론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즉 세친은 구사론 「수면품」에서 대비바사론에서의 4대 논사의 설을 서두로 하여, 그 문제점을 지적함과 동시에, 유부 정통설로 인정받는 세우(Vasumitra)의 설마저도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중현(Saṃghabhadra)은 구사론의 반박 논서인 순정리론을 저술하여, 세친 비판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삼세실유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에 이르는데, 이것이 삼세실유론을 둘러싼 논쟁의 일단이다.
삼세실유론을 둘러싼 비판과 반박 이후, 이와 관련한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는데, 이것이 바로 다빠까라(Dīpakāra)가 저술한 아비달마디-빠(Abhidharmadīpa 이하, 디빠로 약칭함)이다. 디빠가 저술될 당시는 유부 세력이 급격히 쇠퇴하고, 반면에 정량부(正量部)나 중관‧유식학파와 같은 대승불교의 세력이 증가하고 있었다. 따라서 유부의 심세실유론은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에 이르는데, 이에 디빠까라는 타학파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자신도 변용하면서 유부의 정통설을 재확립하고자 했다. 이는 순정리론의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는 중현의 사상을 계승하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사상을 전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이전에는 구체적으로 논해지지 않은 대승학파들 뿐만 아니라, 샹캬(Saṁkaya), 와이셰시까(Vaiśeṣika) 등의 외도학파에 대한 비판도 전하고 있다.
이에 본 연구는 유부의 삼세실유론에 대한 세친과 중현의 논쟁이 디빠에서는 어떻게 논구되어져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구사론이나 순정리론에서는 구체적으로 다뤄지지 않았던 대승불교 및 외도에 대한 비판을 통해, 당시의 사상적 경향을 논구해 보고자 한다.
Ⅱ. 아비달마디-빠 「수면품」의 구성적 특징과 내용
삼세실유설을 비판한 구사론 「수면품」과 이를 반박한 순정리론의 「변수면품」은 구성적 형태가 같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중현이 세친의 비판을 인용해, 일대일 대응방식으로 반론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빠의 「수면품」은 앞의 두 논서와 달리, 구성적으로나 내용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에 삼세실유설과 관련한 아비달마디빠의 「수면품」의 구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유부의 타학파 비판 [삼세의 유무에 관한 4가지 설]
2. 유부 내부 비판 [유부 4대논사의 설]
3. 세우의 삼세실유론의 증명 [작용과 동일기체성]
4. 실재의 특성 [승의·세속·양(兩)·상대(相待)]
5. 삼세실유의 논증
1)경증1 [과거·미래색의 존재]
2)경증2 [과거·미래업의 존재]
3)경증3 [본무금유(本無今有)의 의미와 베다와 샹캬비판(1)]
4)이증1 [비유의 소연]
5)이증2 [과거·미래의 경험]
6. 샹캬학파 비판(2) [전변설비판]
7. 와이셰시까학파 비판 [존재의 변이(變異)]
8. 비유자 비판(1) [과거·미래의 비존재]
9. 대승불교비판 [존재의 의미]
10. 비유자 비판(2) [과거·미래의 업과 가유(假有)]
11. 세친에 대한 비판(1)
12. 유부의 정의 [분위, 작용, 세력에 근거]
13. 대승불교로 전향한 세친에 대한 비판(2) [3자성설 부정]
1.
따라서 본 항목에서는 디빠의 구성적 특징과 내용을 이전의 두 논서에서는 볼 수 없는 몇 가지 쟁점을 중심으로 논구해 보고자 한다. 우선 1번 항목은 전개순서에 따른 차이를 볼 수 있다. 즉 구사론은 유부의 삼세실유론을 전개할 때, 가장 먼저 삼세실유론의 2가지 경증과 2가지 이증을 거론하고, 그 다음으로 유부 4대논사의 설을 비판한다. 그러나 디빠는 삼세의 유무와 관련한 4가지 설, 즉 첫 번째는 일체가 있다고 하는 정통 유부의 설, 두 번째는 분별론과 비유자, 세 번째는 대승의 공성론자, 그리고 마지막은 뿌드갈라론자를 먼저 거론하고 있다.
2번 항목은 유부의 4대논사와 관련 것으로 디빠까라는 법구(Dharmatrāta)설을 샹캬의 전변설로 보고 있다. 이는 세친이 구사론에서 비판한 바이지만, 중현은 순정리론에서 법구의 설 역시 세우와 다르지 않다고 반론하고 있다. 하지만 디빠까라는 선학(先學)인 중현과 달리, 법구의 설은 샹카의 전변설과 같다고 하여, 세친의 비판을 받아들이고 있다. 즉 “그 [법구]는 실체가 상주함에도 불구하고 [삼세의] 모습[相]이 생하기도 하고, 혹은 색(色)이 취집(samudāya)하여, 각각 별도의 [세의] 위치에 있는 모습으로 전변하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고 한다. 이는 법구의 설을 샹캬의 전변설과 극미집합론적 관점에서 비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또한, 디빠까라가 세우의 설이 정통 유부의 설임을 주장하면서 “세 번째의 상좌 세우(Vasumitra)가 [샹캬학파의] 25제설을 축출하는 것이며, 극미집합론을 파하는 것이다.”고 하는 것과도 부합한다. 물론, 이 문장에서의 극미집합론을 주장한 이가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디빠까라가 승의공경(勝義空經, Paramārtha-śūnyatā-sūtra)에서 “눈[眼]은 생하면서 어디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다.”고 하는 ‘눈의 적집’, 즉 극미집합의 문제는 베다와 샹캬를 겨냥한 비판이다. 그러나 디빠에서 샹캬의 설로 언급된 ‘눈의 적집’과 관련한 부분은 구사론에서는 사명외도(邪命外道, Ājīvikavāda), 즉 와이셰시까로 되어 있다. 여하튼, 이 주장에 근거하는 한, 법구의 설은 샹캬의 전변설뿐만 아니라, 극미집합론의 문제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된다. 그러나 이것과 관련한 디빠까라의 비판은 위에서 언급한 내용 이외에는 없어, 그 진위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또한 각천(Buddhadeva)의 설에 대해서도 “존자 각천도 외도(外道)의 견해에 빠져있기 때문에 채용될 수 없다.”고 하여, 그의 설을 고행외도(苦行外道, tīrthya-pakṣa)의 설과 같다고 비판하고 있지만, 이 역시 구체적인 비판의 내용은 볼 수 없다. 따라서 이 두 논사에 대한 비판은 이전의 논서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디빠까라만의 비판이지만, 그 진위를 알 수는 없다. 다만 추측컨대, 법구나 각천이 유부논사이면서도 비유자에 가까운 사상을 갖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혹은 중현과 디빠까라는 유부내에서도 계통을 달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해를 달리하고 있는 것은 않은지 추측해본다.
2.
다음으로 4번 항목은 실재의 특성, 즉 존재를 네 가지 종류 -승의유(勝義有)·세속유(世俗有)·양유(兩有)·상대유(相待有)- 로 나눈 것이다. 이는 우리가 지각을 통해 어떤 대상을 볼 때, 그 대상은 각각 4종류로 알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구사론에서는 승의·세속만 거론되어 있고, 대비바사론에서는 이와 관련해, 2·3·5종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실물이나 실유, 시설(施設)이나 가유, 그리고 상대유 등은 거론되고 있지만, 양유(兩有, ubhayathā)는 찾아 볼 수 없다.
또한 순정리론에서는 승의와 세속에 근거해, 실유와 가유를 건립하고 나아가 그것을 다시 4종류 -실물유(實物有)·연합유(緣合有)·성취유(成就有)·인성유(因性有)- 로 나눈다. 여기서 실물유는 승의유, 연합유와 인성유는 세속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지만, 양유와 상대유에 해당하는 것은 없다. 물론, 순정리론에서도 상대유를 언급하고 있지만, 그것은 유여사가 주장한 것으로 중현에 의해 비판받고 있다.
이와 같이, 디빠는 존재의 분류와 관련해, 이전의 논서에서 볼 수 없는 자신만의 독특한 분류법을 보이고 있다. 특히 순정리론에서 유여사가 주장한 상대유를 받아들인 것이나, 양유를 주장한 것은 디빠까라가 중현의 사상을 답습한 것만은 아닌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Ⅲ. 아비달마디-빠의 타학파 비판
1. 삼세의 유무에 관한 4가지 설에 대한 비판
이 주제는 위의 본문에서 잠시 언급한 것으로, 본 항목에서는 이와 유사한 것을 서술하고 있는 순정리론과 비교해, 구체적으로 논해보고자 한다. 우선 삼세의 유무와 관련해, 디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일체는 있다고 [주장하는 부파]와 잠시[少分] 있다고 [주장하는 부파], 일체는 없다고 [주장하는 부파]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無記]이 있다고 하는 4종류의 부파를 생각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해, 디빠까라는 일체가 있다고 설하는 것은 유부라 하고, 잠시 있다고 하는 부파는 분별론자(分別論者, Vibhaja-vādin)와 비유자(譬喩師, Dārṣṭāntika)라 하여, 그들은 잠시, 즉 현재만이 있다고 한다. 또한 일체는 없다고 하는 부파는 방광(方廣, Vaitulika)의 불합리공성론자(不合理空性論者)라 하며, 끝으로 설명될 수 없는 뿌드갈라(Paudgala)를 실유라고 주장하는 것은 뿌드갈라논자(Paudgalika)라 한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설일체유부 : 삼세와 3종의 불변의 실체인 무위의 실유를 주장.
②분별론자와 비유자 : 현재세라는 일부(pradeśa)만의 실유를 주장.
③방광의 불합리한 공성론자 : 일체가 비존재임을 주장.
④설할 수 없는 실체를 주장하는 보특가라 논자 : 삼세와 3종의 불변의 실체 및 보 특가라(pudgala)의 실유를 주장.
이와 같은 디빠의 설은 순정리론에서도 볼 수 있는데, 그것을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설일체유부 : 삼세와 진실한 세 종류 무위의 실유를 주장.
ⓑ증익론자(增益論者) : 진실한 보특가라와 앞서 언급한 제법(삼세법과 세 종류 무 위)의 실유를 주장.
ⓒ분별론자(分別論者) : 오로지 현재법과 과거법으로서 아직 결과를 낳지 않은 업의 실유를 주장.
ⓓ찰나론자(刹那論者) : 오로지 현재 한 찰나 중의 12처의 소의가 되는 법체의 실 유를 주장.
ⓔ가유론자(假有論者) : 현재세에 존재하는 제법 역시 오로지 가유임을 주장.
ⓕ도무론자(都無論者) : 일체법은 모두 공화(空花)와 같은 무자성임을 주 장.
따라서 디빠와 순정리론의 주장을 각각 관계지우면, ①은 ⓐ, ②의 분별론자는 ⓒ의 분별론자, ②의 비유론자는 현재의 한 찰나만을 인정하므로 ⓓ의 찰나론자, ③의 공성론자는 중관 및 유식의 대승불교도들이기 때문에 ⓕ의 도무론자, ④의 보특가라논자는 삼세와 3무위의 실유를 주장함으로 ⓑ의 증익론자(Ādhyāropika, Samāropa)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디빠와 순정리론은 이와 관련해, 두 가지 차이점이 있다.
첫째, 디빠에서는 순정리론에서 언급한 가유론자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이 가유론자가 정확히 어느 학파를 지칭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바로우(Bareau)에 의하면, 설가부(說假部)라 한다.
둘째, 디빠는 순정리론과 달리, 불교내 타학파들을 외도(外道)들과 비교해 비판하고 있다. 즉 불교내 타학파들은 억측을 주장하는 자, 사론(邪論)을 주장하는 자들이라고 하여, 각각 순서대로 분별론자와 비유자는 로까야따(Lokāyatika), 방광의 불합리 공성론자는 절무주의자(絶無主義者, Vaināśika), 뿌드갈라논자는 나형(裸形)의 자이나교도들과 같다고 비난하고 있다.
여기서 로까야따는 한역으로는 순세외도(順世外道)로 번역되는데, 이는 비유자들이 불교 교리를 전함에 있어, 올바른 법성[正理法性]에 근거하지 않고, 세간 속설의 비유[世間現喩]를 들어 설하고 있는 것을 세간에 영합하는 것이라 비난한 것이다. 또한 대승의 불합리 공성론자들은 ‘일체는 공이다’고 주장하므로, 그것은 일체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절무주의자 또는 절멸자(絶滅者)라고 비난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자부는 아뜨만과 같은 뿌드갈라를 설하고 있어, 자이나교도들과 같다고 비난한 것이다.
이와 같이, 타학파와 관련한 두 학파의 서술은 전체적으로는 대동소이하지만 순정리론이 타학파를 사상적 특징에 근거해 명명했다면, 디빠는 멸칭(蔑稱)으로 불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불교내 타학파를 외도와 비견한 것은 다른 부파나 학설에 대한 비판에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비유자를 로까야따와 같다고 한 것은 경량부 세친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으로 보인다.
2. 비유자에 대한 비판
디빠까라는 비유자(Dārṣṭāntika)를 로까야따와 같다고 비난한 뒤, 삼세실유와 관련해 두 가지 측면에서 비판하고 있다.
첫째는 “비유자는 실로 말한다. 원인의 힘(kāraṇa-śakti)에 있어, 본체가 없을지라도[無實體] 생기되어지는 작자가 가설되어진다.”고 하여, 비유자는 비존재로부터 존재가 생기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디빠까라는 “만약 모든 존재의 자성이 이전에 없고서 생한다면, 공화(空華, Kha-puṣpa)가 허공에 피는 것이나 머리묶은 개구리(jaṭāla-dardura)가 있다고 하는 것과 같다.”고 비난하고 있다.
유부에 있어, 삼세실유란 제법이 고유의 자성을 갖고 과거, 현재, 미래에 실유한다는 것이다. 즉 미래의 존재 A가 현재의 A', 과거의 A''로 간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A라는 존재가 삼세에 동시에 공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A가 작용에 따라 그 존재상태가 달라짐을 의미한다. 특히, 디빠까라는 삼세에 동일의 기체를 가지고, 동일의 의지처에 있어서 움직임으로써 삼세의 구별이 논증된다고 하는 동일기체성(同一基體性, ekādhikaraṇya)과 동일의지처(同一依止處, ekādhiṣṭhāna)로 논증하고 있다. 이에 반해, 과거와 미래에는 법체가 없으며, 그 법체가 없어도 현재의 법체가 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비유자의 주장이다. 즉 비유자는 유부의 자성을 부정하고 자성이 없어도 원인의 힘에 의해 제법이 생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디빠까라는 자성이 이전에 없고서 어떤 것이 생한다고 하는 것은 원인이 없어도 결과는 생할 수 있다고 하는 모순에 빠진다고 비판한다. 즉 없음(abhāva, 無)에서 어떻게 있음(bhāva, 有)이 나올 수 있냐고 비난하여, 그러한 주장은 공화가 허공에 핀다고 하는 것과 같은 허무맹랑한 설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과거의 업도 존재하지 않고 미래의 업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에 대한 비난이다. 즉 만일 과미무체(過未無體論)를 주장한다면, 현재의 존재도 부정하게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과거, 미래의 인과(因果)가 없기 때문에 현재의 결과도 인정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주장은 석녀(石女)의 자식이 요정(妖精, vyantara)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것과 같이 터무니 없는 주장이라고 비난한다.
또한 비유자가 과거는 실유로서의 체성(dravy-ātman)이 없는 것이지, 가유로서의 체성(prajñapty-ātman)은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 가유는 실유의 상이 아닐뿐만 아니라, 이미 과거와 미래는 실유의 상으로 성립하기 때문에 그것을 가유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비난한다. 다시 말해, 과거의 업이 원인이 되어 현재의 결과가 있는 것인데, 과거의 업을 가유라 한다면, 현재도 가유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현재도 가유가 되기 때문에 현재의 실유성도 없게 되며, 결국 과미무체론은 현재도 부정하게 되는 모순에 빠진다는 것이다.
3. 세친 및 대승불교에 대한 비판
디빠에서는 세친을 경량부나 비유자 또는 대승론자로 비판하고 있지만, 그가 그러한 학파의 소속은 아니고, 그러한 학파의 사상과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들과 결부되었다고 해서, 그들의 사상이 세친의 사상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들과 결부된 사상을 제외한 디빠에서 구사논주(俱舍論主, kośakāra)라 하여, 구체적으로 이름을 거론한 것만을 보면, 총 15회 나온다. 그리고 이것을 분석해 보면, 모두 14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거론되고 있는데, 이 중에서 「수면품」에서 언급되는 것은 총 3회이고, 삼세실유론과 직접 관련된 부분은 2회 나온다. 첫 번째는 실체와 작용의 관계에 대한 것이고, 두 번째는 유식의 3자성 및 대승공론자의 무자성론에 대한 비판이다.
3_1. 실체와 작용의 관계
세친은 유부의 실체와 작용의 관계에 대해, “무엇이 장애해서 과거, 미래에 눈[眼]이 실유로 있다고 하면서,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없는가” 라고 비판한다. 이에 디빠까라는 현재의 눈도 색을 볼 수 없을 수 있는데, 이것은 등불과 같은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을 경우라고 한다. 즉 현재의 눈도 어둠 속에서 등불이 없는 불완전한 조건에서는 색을 볼 수 없듯이, 과거와 미래의 눈이 작용하지 않는 것은 조건이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세친이 일체가 항상 존재한다고 하면서 조건이 불완전하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다는 지적에 대해, 디빠까라는 그러한 의미에서 일체가 항상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즉 삼세에 조건이 갖추어져 있어도 충족하지 않는다면 -연(緣)을 만나지 못하는 - 그 조건은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부의 삼세실유론은 시간을 실체시 하지는 않는다. 다만, 삼세에 다르마(dharma)가 있다는 존재론적 의미에 근거한다. 따라서 현재란 과거·미래에 있는 무수한 조건들, 즉 원인들이 있어 현재의 연을 통해 작용을 일으키는 것을 말할 뿐, 어떤 특정화된 시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삼세에 제법이 항상 있지만, 과거는 작용이 끝난 유위법이, 미래는 아직 작용하지 않는 유위법이, 현재는 지금 작용하고 있는 유위법이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삼세에 모두 유위법이 있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이 동시에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비유컨대, 허공에 아무리 많은 양전하(+)와 음전하(-)가 있다고 하지만, 그것들 모두가 동시에 스파크(spark)를 일으키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부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세친은 다시 작용의 존재론적 측면에서의 비판을 이어간다. 즉 작용이 현상적으로 드러난 모습[相, lakṣaṇa]인지, 실체(dravya)인지를 묻고, 나아가 작용과 자성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를 문제삼고 있다. 이에 디빠까라는 “법성(法性)은 실로 난해하다.”고 전제한 뒤, 미래법이 현재로 생기하는 것은 내외의 조건이 갖추어져 공능(功能, sāmarthya)을 획득한 법이 결과를 이끄는 것을 작용이라고 한다. 그러나 세친이 이에 대해, 그렇다면 실체와 작용은 다르지 않은 것으로 실체로서의 자성을 버리는 과실에 빠진다고 비난한다.
이에 디빠까라는 어떤 사물이 존재할 때에는 위치(avasthā)와 힘(śakti), 시(時, valā), 존재(sattā), 작용(kriyā)이 생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각각에 대해 논하고 있다. 즉 위치란 힘의 적집과 작용에 의존하는 것이며, 힘이란 실체에 따르는 것이다. 또한 이 힘은 작용에 의해서 획득되어진 공능을 말한다. 따라서 작용에 의존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공능이고, 작용이란 미래의 과를 이끄는 실제적인 활동이다. 또한 시란 시간으로 그때의 경우는 현재를 말하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물질적 형태란 극미의 특수한 적집이고, 존재[有, sattā]는 현상적으로 드러난 것을 말로 표현한 가설유(prajñapti-satya)라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내외의 조건과 원인들이 모여서 눈 앞에 결정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현재이며, 그것은 미래의 과를 현재로 이끄는 작용에 의한 것이라 한다.
3_2. 유식의 3자성
디빠까라는 유식의 3자성을 비판함에 앞서, 특이할 만한 표현을 한다. 즉 “여기에 설일체유부로부터 타락한 방광론자(方廣論者, Vaitulika)는 말했다.” 라는 것이다. 방광론자는 앞서 본문에서 밝혔듯이, 순정리론에서 언급한 도무론자, 즉 대승공론자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대승으로 전향한 세친을 지칭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뒤의 서술에서 “이것들은 또한 구사논주가 [3]세에 어리석어 낙인(烙印)이 찍인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고 하는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여하튼 디빠에서의 방광론자는 본 내용을 포함해 5번 언급된다.
①불타의 생명연장(有多修行)은 삼매력(samādhi-bala)에 의한 것이라고 설한 대덕(세친)의 구사론은 Vaitulika-śāstra의 입문서이기 때문에 무시되어져야 한다.
②일체법의 무자성을 주장하는 불합리한 공성론자로서 Vaitulika.
③이처럼 사상적 편견을 갖는 사론적(邪論的) 성격의 Vaitulika는 절멸자에 해당된다.
④‘인연에 의해 생겨난 것(pratīya-samutpanna)은 무자성’ 이라고 잘못 분별(kalpayati)한 Vaitulika.
⑤설일체유부에서 타락한(Sarvāstivāda-vibhraṣṭi) Vaitulika로서 세 자성(trisvabhāva)에 대해 분별한 이.
①은 붓다는 삼매의 힘에 의해서 자유롭게 수명을 늘릴 수 있다고 하는 대승불교의 불타관에 대한 비판이고, ②와 ③은 유부 이외 당시의 4가지 학설을 비판할 때 나오는 것으로, 비유자와 뿌드갈라논자 등과 같이 사론을 주장하는 학파와 같다고 비난하는 부분이다. ④는 “연(緣)에 의해서 생한 것은 자성으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중관학파의 주장에 대한 비판이고, ⑤는 바로 3자성을 주장한 세친에 대한 비판이다. ④는 다음 항목에서 다루기로 하고, 우선 여기서는 ⑤번 항목을 중심으로 논하고자 한다.
1.
디빠에서의 3자성에 대한 논란은 앞서 언급한 설일체유부로부터 타락한 방광론자들이 자신들도 3자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즉 유부가 자성을 주장하듯이 자신들도 3가지 자성을 분별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디빠까라는 “세간에는 어리석은 마음에 의해 염오된 분별로 가득차 있으나, 현명한 마음에 의해서 파악된 분별이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은 주장은 디빠까라의 독자적인 주장이지만, 삼성론(三性論, Trisvabhāva)의 제 14게송에는 이와 유사한 내용이 있다. 즉 “망상되어진 대상은 [주·객의] 두 종류이기 때문에, 그 [두 종류가] 비유(非有)라고 하는 하나의 존재(bhāva)이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들에 의해서 망상되어진 자성(변계소집성)은 두 가지 [있을 지라도] 하나의 것을 본질로 한다.”고 하는 것이다. 즉 분별되어진 것은 주·객의 2종류를 말하는 것으로, 어리석은 자들에 의해서 분별되어진 것은 결국 하나의 자성, 즉 분별되어진 허구적 존재인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parikalpita-svabhāva)이라는 것이다.
이 두 게송을 전제로 보면, 유식은 허구적 존재인 변계소집성을 자성으로 보지만, 그 역시 허망분별에 의한 것으로 무자성임을 말하고자 한다. 하지만 디빠까라는 그와 같은 분별은 말 그대로 어리석은 사람들(유식학파)에 의한 분별로, 현명한 사람들에 의한다면, 무자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더불어 디빠까라는 “너희들에 의해서 설해진 3성설은 이미 무시되어졌다. 이와 같이 그 밖의 올바르지 못한 분별도 단념될 수 있을 것이다. 이상 이것들은 또한 구사논주가 [삼]세에 어리석어 [무지의] 낙인을 찍은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고 비난하고 있다. 즉 변계소집성 뿐만 아니라, 의타기성(依他起性, paratantra-svabhāva)이나 원성실성(圓成實性, pariniṣpanna-svabhāva) 역시 어리석은 사람들에 의한 분별로, 세친 역시 이러한 어리석음에 빠져 있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그러나 디빠까라가 3자성에 대해 ‘이미 무시되어졌다’고 하지만, 디빠에서는 이것과 관련해 논한 곳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3성설에 대한 비판도 본문에서 논한 것 이외에는 찾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는 구사론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디빠까라는 왜, 세친을 유부에서 타락한 방광론자로 비난하고 있을까.
이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정도의 추측이 가능하다. 하나는 세친이 구사론을 저술할 당시에는 대승과 관련이 없었지만, 디빠까라 시대에는 이미 대승으로 전향한 세친의 유식설과 관련한 논서들이 전해졌다는 것이다. 둘째는 중현이 “세친은 상좌(上座)와 가까이하였으며, 상좌는 괴법론(대승)과 가까운 자” 라고 말하였는데, 그 후 실제로 대승 유가행파로 전향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세친은 구사론 저작 이후, 실제로 대승 유가행파로 전향해 삼성론과 같은 유식 관련의 많은 논서를 저작했다. 그리고 그 전향에 앞서 그에게 많은 사상적 영향을 미친 것은 경량부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경량부적 사상에 영향을 받아 저술된 구사론은 그가 유가행파로 전향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세친의 구사론을 대승의 입문서라고도 비판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디빠까라가 유식사상과 관련해 3성설만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그것이 유식사상의 핵심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유식의 존제체계를 지탱하는 3성설을 비판하는 것만으로도 유식사상의 근간을 무너뜨리고 유부의 자성론을 건립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2.
④와 관련한 대승공론자의 설을 디빠까라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연(緣)에 의해서 생한 것은 자성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315게송)
“무자성(niḥsvabhāva)·무아(nirātmaka)인 원인(hetu)에 의해서 생하는 것은 실로 자성은 아니다. 왜냐하면, 여러 원인에서 각별하게 [자성은] 성립되지 않고, 부분으로도, 별도의 곳에서도 결코 [성립되지] 않으며, 원인이 집합할지라도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성질이 없기 때문이다.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은 어떠한 자성에 의해서도 생기지 않기 때문에 자성은 없다. 자성이 없는 것을 어떻게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시화륜(施火輪)과 같이 자성은 없기 때문에 모든 법은 무아이다고 [방광론자는 주장한다].
이는 정통 유부가 결과를 생하게 하는 원인도 연(緣)도 실유이며, 자성을 가진 것일 뿐만 아니라, 인과 연에 의해서 생겨난 것도 실재로서 일반적 인식에 의해서 인식되어진다고 하는 것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이다. 위와 같이 일체법은 연기에 의해서 생하는 것이므로 무자성이고 무아라는 주장은 용수(龍樹)의 중론을 대표하는 말이지만, 디빠까라가 인용한 부분과 일치하는 부분은 없다. 다만, 무자성론의 게송은 중론의 제1장 3, 10, 11과 제24장 18게송에 유사하게 나오고 있다. 특히, 11게송에서 “여러 가지 연(pratyaya)들이 분리돼 있든 결합해 있든 그 속에 결과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연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연에서 나올 수 있겠는가.” 라는 부분은 위의 “여러 원인(kāraṇa)에 있어서도 특별히 [자성은] 성립되지 않고” 하는 등의 부분과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여하튼, 디빠까라는 대승 공론자의 주장에 대해, “존재하는 것은 자성으로서 존재할 뿐이다.”고 전제한 뒤, 승의제(勝義諦)와 속제(俗諦)의 두 존재방식으로 반론하고 있다. 즉 여러 연에 의해서 생한 것은, 속제에 있어서는 본체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그것은 숲과 같이 모인 것이라 한다. 그리고 승의제로서의 존재는 자성으로, 그것은 변하지 않고 여러 연 등에 의해서 상태·세력·형태·운동 등이 생하는 근간이 된다고 한다. 즉 속제는 집합하고 있는 존재라면, 승의제는 그 집합을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에 승의적 존재란 반드시 작용을 가진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주장은 순정리론에서도 볼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이제(二諦)를 의지해서 이 두 가지를 해석하니, 이제란 곧 세속제와 승의제이다. 많은 것에 의거해서 하나를 세우는 것을 세속제라 하고, 계체를 안립하는 것을 승의제라 한다. -중략- 세속제의 법은 유(有)를 얻음을 생이라 하고 유를 잃음을 멸이라 한다. 승의제의 법은 작용이 일어남을 생이라 하고 작용이 쉬어짐을 멸이라 한다. 유를 얻는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으로 의지한 바, 여러 연이 집합하여 하나의 유를 합하여 세우는 것을 말하며, 작용이 일어난다고 말함은 모든 실물이 여러 연이 합할 때에 과를 이끄는 작용을 말한다.”
즉 여기서도 세속제는 여러 연의 화합한 상태, 즉 숲 등과 같은 것을 말하지만, 승의제는 그것을 본질을 이루는 것, 즉 색 등의 자성을 말한다. 또한 세속제의 생멸은 존재상태(유)를 얻거나 잃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여러 요소들이 결합해 새로운 존재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승의제는 새로운 존재를 얻거나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속제 존재의 근본이 되는 요소 자체로서, 그것 자체는 만들어지거나 소멸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삼세에 항상 존재하지만, 작용의 유무에 따라, 과거, 현재, 미래의 분위를 달리할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세속제에 근거하는 한, 가유, 무 등의 의미는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승의제인 자성에 근거한 것이다. 즉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유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유에서 가법이나 없는 것 등의 말 등이 성립할 수 있다고 하는 것으로, 이는 대승의 공론자들이 주장하는 무자성, 공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라고 할 수 있다.
4. 외도 비판
디빠에서 삼세실유론과 관련해 비판하는 대표적인 외도는 샹캬와 와이셰시까의 두 학파이다. 이는 디빠까라가 “이들 4가지 일체유론(유부 4대 논사의 주장) 중에서 3번째의 상좌 세우(世友, Vasumitra)의 [설이] [샹캬]의 25제설을 몰아내는 것이며, [나아가] 극미집합론(와이셰시까)을 무너뜨리는 것이다.”고 하는 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이에 본 항목에서는 이 두 외도학파에 대한 비판을 통해, 유부의 삼세실유론의 본의를 논구해 보고자 한다.
4_1. 샹카학파 비판
삼세실유론과 관련한 샹캬학파에 대한 언급은 유부 4대 논사 중 법구(法救, Dharmatrāta)의 유부동설(類不同說, bhāvānyathātva)이 샹캬의 전변설과 같다고 비판함으로써 시작한다. 이는 구사논주로 불리는 세친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중현의 주장을 배격하는 것으로, 디빠까라가 반드시 중현의 설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없는 단서를 제공한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했다. 그러나 정말 법구의 설이 샹캬의 전변설과 같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다. 사실, 법구설은 대비바사론에서 처음 언급된 이후 많은 논서 등에서 언급되어 왔지만, 구사론 이전까지는 이러다할 비판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비바사론(鞞婆沙論)에서는 법구설과 대동소이하게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친은 법구의 설을 샹캬의 전변설로 치부하고 나아가 세우의 설마저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법구설에 대한 세친의 비판은 세우설을 비판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중현이 법구설을 옹호한 것은, 세친이 법구설을 근거로 세우의 설마저 샹캬의 전변설로 치부하고자 한 포석에 대한 사전 방어였다면, 디빠까라는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 있는 법구설을 비판함으로써, 정통 유부의 학설이 샹캬의 전변설로 비판받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였다고 생각한다. 즉 법구가 비유를 든 우유나 낙 등의 비유는 샹캬가 전변설을 주장할 때, 주로 사용하는 비유로 이로 인한 오해의 소지를 불식시키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디빠까라는 “눈[眼]은 근본원질(pradhāna)로부터 와서, 또한 그곳 [근본원질]으로만 간다”고 하는 샹캬의 주장에 대해 비판한다. 디빠까라에 의하면, 이 주장의 요지는 하나의 원인이 항상 존재하면서 자신의 생(生, jāti)은 버리지 않으면서 각각 특수한 변화를 갖는 아뜨만(ātman)으로 존재하고, 존재하고 나서는 다시 각각 특수한 결과를 가진 아트만으로 전변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이미 존재한 것에는 제2의 존재는 있을 수 없다는 비판이다. 즉 우유 중에 낙 등의 전변이 있고, 종자 중에 씨앗 등의 전변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미 생한 것이 다시 생하는 모순을 갖게 된다고 하여, 샹캬의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 satkāryavāda)을 비판하고 있다.
또한 샹캬의 비판과 관련해 특이한 점은, 세친이 구사론에서 승의공경에서 설한, “눈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고 어디로 가서 적집하는 것도 아니다.”는 주장을 통해 유부의 경증(經證) 1을 비판한 것에 대해, 디빠까라는 이 경은 샹캬와 베다(Veda)의 학설을 차단하기 위해 설한 것이라고 한다. 즉 베다가 눈은 태양으로부터 생해, 또한 그것이 생한 태양으로 돌아간다는 등과 같은 주장을 비판하기 위해 설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디빠까라는 경량부 세친이 이 경을 샹캬가 아닌, 유부의 경증 1을 비판하는 근거로 삼는 이유는 세친이 유부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한 의도적인 집착으로 보고 있다.
4_2. 와이셰시까학파 비판
디빠까라는 와이셰시까와 관련해, 먼저 전체와 부분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즉 “그릇의 파편 중에는 항아리의 실체성은 없고, 실[糸] 중에는 천[布]의 실체는 없다. 그릇의 파편과 실의 결합으로부터 [항아리나 천의 실체가] 생기는 것이다.”고 한다. 이는 와이셰시까의 7범부론 중의 하나인 내속(samavāya)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내속이란 둘 가운데 하나가 파괴되지 않고는 분리되지 않는 관계를 말한다. 이는 연결(saṃyoga)과 달리 내속에는 한 편이 다른 한 편에 내속된다. 예를 들면, 전체나 부분의 관계로 물단지가 그 부분에 내속한다는 것은 우리가 물단지를 부술 때 전체가 사리진다는 뜻이다. 즉 우리가 부분을 분리시키고자 한다면, 전체는 반드시 파괴된다.
그러나 와이셰시까에 의하면, 항아리와 옷감의 원인인 항아리의 파편이나 실에는 결과인 항아리나 옷감에 대해, 원인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시 말해, 항아리나 옷감은 그 원인인 항아리의 파편과 실로 만들어졌지만, 결과에 그 원인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앞서 말한 샹캬의 인중유과론과 대비되는 것으로, 와이셰시까는 인중무과론(因中無果論, asatkāryavāda)을 주장한다. 따라서 와이셰시까에 있어서, 실과 옷감은 개별적 실재성을 갖는 것일 뿐, 어떤 인과성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와이셰시까의 주장은 한편으로는 원인 없이도 결과가 생할 수 있다는 주장이 된다. 이는 앞서 언급한 비유자의 주장과 같은 것으로, 이에 디빠까라는 와이셰시까학파를 비판하는 말미에 비유자를 언급해, 그와 같은 인과론은 공화(空華)가 허공에 핀다고 하는 것과 같다고 비난한다.
Ⅳ. 나가는 말
디빠는 순정리론과 마찬가지로 세친의 구사론을 반박하기 위해 지어진 논서이므로, 그 구성은 구사론과 같다. 그러나 순정리론이 구사론의 내용을 답습하고 있는 반면에, 디빠는 구성방식이나 내용에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것이 본문 Ⅰ에서 다뤄진 내용이다. 즉 구사론이 유부 4대 논사의 설을 시작으로 하여, 유부의 삼세실유론을 비판하고 있다면, 디빠는 불교내의 타학파인 비유자, 분별론자, 대승공론자, 뿌드갈라론자를 먼저 거론해 비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세친이 유부의 사상을 외도학파인 샹캬나 와이셰시까의 사상과 유사한 것으로 비판한 것에 대해, 그들의 사상을 중심으로 그 문제점을 지적함과 동시에, 유부의 존재론은 그것과 다른 것임을 논증해 보이고 있다. 특히, 세친이 유부의 경증 1을 비판하기 위해 언급한 승의공경에 대해, 이 경이 설해진 목적은 샹캬나 베다와 같이 인중유과론적 인식론을 주장하는 학파를 배격하기 위한 것이라 하여, 그 이해를 달리하고 있다. 특히, 경량부 세친이 이 경에 집착하는 것은 유부로부터 파생된 경량부가 유부의 사상에 타격을 입히기 위한 의도적 집착으로 보고 있다.
다음으로 디빠까라는 존재의 양태를 4가지, 즉 승의유·세속유·양유·상대유로 분류하고 있는데, 특히 양유는 이전의 논서에서는 볼 수 없는 디빠까라만의 독특한 존재론적 특성을 보이는 예이다. 또한 유부의 4대 논사와 관련해서도 디빠까라는 그의 선학인 중현과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즉 세친이 법구의 삼세실유설을 샹캬의 전변설과 같다고 비판한 것에 대해, 디빠까라는 중현과 달리, 세친의 입장에 동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각천의 설 역시도 고행외도와 같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은 이전에는 볼 수 없는 내용들이다.
외도학파의 비판과 관련해서는 유부의 삼세실유론이 설해진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디빠까라는 세우의 삼세실유설이 샹캬의 25제설과 와이셰시까의 극미집합론을 배격하는 가장 수승한 설이라고 한다. 이는 당시의 두 외도학파의 실재론이 유부에게 어떤 형태로든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을 시사한다. 즉 세친이 구사론에서 법구의 설뿐만 아니라 세우의 설도 샹캬의 전변설로 몰아가고자 하는 것에 대한 반론일 수도 있으며, 또한 유부와 와이셰시까의 극미론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디빠까라는 세친을 대승의 공성론자로 하여, 대승불교로 전향한 세친을 비판하고 있다. 순정리론에서도 대승 공론자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세친을 그와 같은 논사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디빠까라 당시의 불교계는 정량부나 중관·유식학파 등의 세력이 커지고 있는 반면에 유부의 세력은 쇠락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세친은 구사론 저작 당시에는 대승 공견(空見)을 가진 상좌부 일파인 경량부와 친연관계를 유지했을 뿐 대승의 공성론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세친은 이후 실제적으로 대승으로 전향했을 뿐만 아니라, 유식의 삼성론(Trisvabhāva-nirdeśa)을 저작한 대승론자이기 때문에 그를 설일체유부로부터 타락한 대승의 공성론자라고 비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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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the Theory of Three Time Periods Exist in Real of Abhdharmadīpa
- With special reference to criticism and counter arguments of other schools around the Theory of Three Time Periods Exist in Real-
Hwang, jung-il
Like 『Abhidharma-nyāyānusāra-śāstra』,『Abhdharmadīpa』is a treatise made to refute the 『Abhidharmakośabhāṣya』of Vasubandhu, therefore its composition is the same to that of 『Abhidharmakośabhāṣya』. However, while 『Abhidharma-nyāyānusāra-śāstra』is following the contents of 『Abhidharmakośabhāṣya』, 『Abhdharmadīpa』is different from it in terms of both the method of organizing and the contents. Firstly, the difference in organizing is that while『Abhidharmakośabhāṣya』starts from the stories of the four great masters of the existence school to criticize their theory of the Three Time Periods Exist in Real, 『Abhdharmadīpa』is criticizing by mentioning Dārṣṭāntika, from another school within Buddhism. Also, it can also be seen that the criticism includes that of Mādhymaka and Vijñānavāda, which has not been discussed before. Especially in terms of the contents, on the issue of 『Paramārtha-śūnyatā-sūtra』mentioned to criticize the minor evidence 1 of the existent school by Vasubandha, it was mentioned to reject the school arguing for the recognition theory of satkāryavāda like Sāṃkhya and Veda, which is a different understanding. These are also his unique arguments that: the existence is classified into four categories, and ubhayathā is mentioned as one of them; the theory of Vasumitra is a theory to reject the theory of existence by Sāṃkhya and Vaiśeṣika in criticizing the outside teachings; the theory of Dharmatrāta is called as a pariṇāmavāda of Sāṃkhya like that of Vasubandhu; and the viewpoint that the theory of Buddhadeva is seen as a tīrthya-pakṣa.
Lastly, in 『Abhdharmadīpa』, it can be seen that criticism on Mahāyāna Śūnyavādaka is came to the surface. Especially, calling Vasubandhu a Vaitulika who has corrupted from Sarvāstivādin, in other words, a Śūnyavāda of Mahāyāna allows to assume the ideological trend of Vasubandhu at the time. In other words, although Vasubandhu was not a Śūnyavāda at the time of writing 『Abhidharmakośabhāṣya』, but he had practically turned into Mahāyāna afterwords, and became a Śūnyavāda who has written『Trisvabhāva-nirdeśa』of Vijñānavāda.
*Key words
Dīpakāra, Kośakāra, Sarvāstivādin, Vibhajyavādin, Dārṣṭāntika, Vaitulik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