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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65
2월13일[연중 제6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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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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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83fPavNvOM0
[도미니코수도회 김상태 사도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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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도 예수님처럼 큰 꿈을 꾸고, 큰 그림을 그립시다!>
수도 생활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수련자 시절 수련소 공동체는 한 주에 한 번 오후 소풍을 다녔습니다.
한 달에 한 번은 하루 소풍을 갔는데...늘 버스타고 다녔습니다. 다들 배낭에는 점심 식사를 위한 식자재며 버너며 식기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무등산이나 송광사, 선암사, 보성, 해남 등등을 참 많이도 다녔습니다.
다들 기다리던 점심 식사 시간, 짐들을 펼쳐놓는 순간, 수련자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쌀을 안 가져왔다든지, 양념에 잘 재어놓은 제육볶음을 안 갖고 온 경우가 많았습니다.
수련장님 눈치를 보며 이 일을 어떡하지? 야 네가 당번인데, 정신 똑바로 안차리냐? 하면서 서로 수군거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오늘 제자단 가운데서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장거리 전도 여행을 떠나는 날이었는데, 제자들 가운데 빵 당번이 깜빡하고 빵 챙기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다들 배에 올라타고 배가 호수 한가운데로 나아가는 순간에야 제자들은 아차 하고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상황을 파악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참교육을 시키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신 이유는 깜박하고 빵을 챙겨오지 못한 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불신앙과 완고함, 미성숙을 질타하시는 것입니다.
불과 며칠 전에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게 하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기적을 목격한 제자들은 환호성을 올렸고, 스승님이 세상만사를 지배하시는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능력과 지혜로 충만하신 메시아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탄 배 위에 앉아 계시는데, 웃기게도 제자들은 오늘 하루 먹을 양식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와 세상 만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큰 꿈을 꾸시고, 큰 그림을 그리시는데, 제자들은 발등의 불도 끄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의 상태와 깊이는 어느 정도인지 잘 돌아볼 일입니다. 눈앞에 당면한 일에만 치중하고 혈안이 된 나머지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큰 계획은 안전에도 없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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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vyvX3Gk08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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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욕망과 세상 걱정과 충돌하면 영적인 말씀임을 확신해도 좋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육적으로 알아듣고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수군거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4천 명을 먹이시고 5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그들을 다 먹이고 남은 빵조각도 4천 명은 일곱 바구니, 5천 명은 열두 바구니로 더 많은 이들을 먹일 때 더 많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제자들은 빵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의 영적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선 육체적 걱정을 내려놓으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닐까요? 누구나 욕망하는 것만 보이고 들리기 때문입니다. 영과 육은 반대입니다.
영적인 말씀을 간직하려면 육체적 걱정이 없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듣는 말이 영적인 말인지, 육적인 말인지. 영적인 말씀은 반드시 내 육체의 욕망과 세상의 걱정과 충돌합니다. 이것을 보며 그것이 나에게 유익한 말씀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플레이밍 핫’은 리차드 몬타녜스가 매운맛 치토스를 개발하는 과정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떨어진 신발을 껌으로 붙이고 학교에 다닐 정도로 가난하게 살고 아내가 길거리에서 아기를 업고 음식을 파는 돈만으로는 월세도 낼 수 없었습니다.
리차드는 멕시코계 미국 이민자 2세이고 공부도 못하고 문제아였기 때문에 고등학교도 못 나왔습니다. 80년대에 이런 사람을 취직시켜주는 데는 흔하지 않았습니다. 리차드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펩시콜라 자회사인 치토스 과자 공장 청소부로 취직합니다.
리차드는 펩시코의 회장인 로저 엔리코의 “CEO처럼 생각하라”는 말에 영감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청소만이 아니라 기계 설비에 관해 공부도 하였습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백인 관리자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고 열심히 일하며 이러저러한 많은 제안을 합니다. 하지만 펩시의 재정 악화로 공장의 문을 닫아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다른 노동자들은 다른 일거리를 찾아 공장을 나갔습니다. 그러나 리차드는 사장처럼 생각하려고 했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시장 개척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맛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아들이 매운 것을 매우 잘 먹는 것을 보고는 “저거야!”라고 무릎을 칩니다.
그때부터 리차드는 적은 월급으로 타서 팔 수 없는 과자들을 공장에서 사 와서 집에서 이러저러한 양념을 버무려가며 실험합니다. 아내도 아이들도 적극 도와주어 양념을 과자에 입히는 과정까지 완성합니다. 그러나 공장장은 신제품 개발에 돈이 얼마나 드는 줄 아느냐며 나무랍니다.
리차드는 멈추지 않습니다. 반대가 심할수록 왠지 CEO처럼 생각하는 게 맞는다고 여기고 다시 일어섭니다. 그는 로저 엔리코 회장의 전화번호를 몰래 알아내 직접 전화를 겁니다. 회장 비서는 회장에게 리차드의 말을 믿고 전화를 연결해 줍니다. 아마도 사장처럼 생각하는 청소부라 여긴 것 같습니다.
회장은 그의 말을 믿어주고 만든 것을 맛보고는 시장성이 있을 것 같아 일단 그 공장에서만 시험적으로 만들어보라고 합니다.
본사의 마케팅 이사는 그런 것을 위해 1원도 쓰지 않습니다. 몇 주가 지났지만, 아무도 매운맛 치토스를 사지 않았습니다. 청소부가 헛된 생각을 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의 자녀들 또한 아빠를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그 맛을 알게 하겠다고 공장 직원 모두가 매운맛 치토스를 차에 싣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러 다녔습니다. 그랬더니 조금씩 잘 팔리게 되었고 6개월 뒤에는 전 미국으로 생산이 확대되었습니다. 회장은 마케팅 이사를 경질하고 리차드를 마케팅 이사 자리에 앉힙니다.
우리 안에 들어온 어떤 말씀이 나를 움직일 때 이것이 하늘에서 오는 뜻인지, 나의 뜻인지 구별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말씀은 반드시 세상과 육신과 반대되어 충돌을 일으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육체가 힘들어지고 세상의 박해가 심해진다면 그건 멈추어서는 안 되는 영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은 세상의 박해를 반드시 받을 것이라 예고하셨습니다.
꺼진 촛불을 계속 켜는 마음으로 나아간다면 반드시 영적인 열매와 육적인 열매, 세상에서의 영광까지 다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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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5년간의 뉴욕 생활을 마치고, 오늘부터 댈러스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다른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채워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시작을 하는 제게 페이스북에서 좋은 글을 소개 해 주었습니다. “홀로 된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홀로 된다는 것은 외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이 세상의 것들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이 세상의 것들에 오염되지 않는 것이다.” 내 마음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면 뉴욕에 사는 것도, 댈러스에 사는 것도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늘 그렇듯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면 그곳은 어디나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지난 5년간의 뉴욕 생활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제 앞에 펼쳐질 댈러스의 시간들에도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으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새롭게 첫발을 내딛으려고 합니다.
서정주 선생님은 ‘국화 옆에서’라는 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하느님께서는 제가 댈러스에 올 수 있도록 오래전부터 준비해 주셨습니다. 2012년입니다. 12년 전에 댈러스에서 사목하던 동창 신부님이 제게 대림특강을 부탁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중견사제 연수를 마치고 3개월간 쉬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다리에 골절을 당하는 사고가 있었고, 그때는 갈 수 없었습니다. 6년이 지난 2018년입니다. 이번에도 동창 신부님이 특강과 미사를 부탁했습니다. 신부님은 한 달간 휴가를 간다고 했습니다. 저는 당시에 안식년 중이었기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2018년 12월 27일 저는 댈러스로 가서 2달 정도 있다가 왔습니다. 2022년 6월입니다. 미주지역에 있는 서울대교구 사제모임이 댈러스에서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뉴욕의 가톨릭평화신문에 있었기에 댈러스로 갔습니다. 4년 전에 2달 머물렀기에 교우들도 알고,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2022년 11월입니다. 저는 댈러스에 신문홍보를 하려고 갔습니다. 댈러스 신자분들은 신문을 구독해 주었고, 후원금도 주었습니다. 지난 12년 동안 저는 3번 댈러스 한인성당에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교구의 인사이동으로 댈러스 한인성당의 본당신부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앞으로 제게 주어진 날들을 감사드리면서 지내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했던 것처럼 ‘달릴 길을 다 달릴 수 있도록’ 노력하려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선순위’를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빵이 적다고 걱정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으면 다른 것들은 하느님께서 다 채워주신다고 하십니다. 댈러스에서 지내는 제게 예수님께서는 우선순위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기도입니다. 뉴욕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새벽에 일어나면 먼저 기도하는 시간을 갖으려 합니다. 물질의 십일조도 중요하지만 시간의 십일조도 중요합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새벽에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으려 합니다. 둘째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말씀으로 하루를 열고, 말씀으로 하루를 마감하려고 합니다. 셋째는 표징입니다. 교우들의 말을 경청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 교우들과 함께, 교우들과 더불어 친교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가 되도록 하려합니다. 넷째는 실천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실천이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비난하셨습니다. 그들은 말을 하지만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과 행동이 함께하는 사제가 되도록 노력하려합니다. 아! 이제 또 새로운 시작입니다. 부족한 저를 위해서 기도 부탁드립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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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8,14-21: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15절). 유다인들에게 누룩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악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조심하라는 누룩의 의미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데 방해되는 인간성의 병폐, 부패의 요소들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누룩이란, 예수님께 어제 복음에서 요구한 메시아적인 징표이다. 그것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현세적인 태평성대를 바라는 것이다. 헤로데의 누룩이란 권력과 부귀를 통한 자신의 영달을 말한다. 지상에서의 권세와 재력과 무력으로 획득할 수 있는 현세적인 승리, 현세적인 안락이었다. 이러한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신다. 이것도 모르고 제자들은 빵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만을 생각하면서 그 빵이 없으면 굶주린다는 생각밖에 못 하고 있으며, 예수님은 그들을 깨우쳐 주신다. 몇 번이나 빵의 기적을 상기시켜 주신다. 당신과 함께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그것을 여러 가지 행적으로 보여주셨으나 백성도(6,14-15), 종교와 정계의 지도자들도(2,6.16.24; 3,6.22; 6,16; 7,5) 친척들도(3,21.31-35), 고향 사람들도(6,1-6), 그리고 제자들도(4,13.40; 6,52; 7,18; 8,17-21) 이해하지 못하였다. 모두 눈먼 소경들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시는 뜻으로 베싸이다의 소경을 고쳐주신다(8,22-26). 소경처럼 시력을 되찾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게 된다(8,27-30). 오늘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의욕을 가지고 현세적인 누룩을 갖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 나는 지금 어떠한 누룩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가? 아니면 주님과 함께 있음을 깊이 느끼며, 자신과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켜나가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는 삶의 누룩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악표양의 누룩을 모두 버리고 진정으로 삶의 질을 높여갈 수 있는 누룩의 모습을 갖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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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사천 명을 먹이신 놀라운 일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들도 빵을 나누고, 또한 남은 빵을 모으며 이 기적에 직접 참여하고도 주님의 권능을 의심합니다. 그들은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을 먹일 빵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체험한 기적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닌 데도, 그들은 불안해하며 수군거립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놀라운 권능을 보고도 왜 여전히 주님의 권능을 의심하고 불안해할까요? 자신이 체험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삶 가운데 주님의 놀라운 일을 체험하면서도, 막상 비슷한 어려움에 맞닥뜨리면 주님의 권능을 믿지 못하고 불안해하며 두려워합니다. 주님 체험에 대한 기억이 그토록 강렬한데도, 계속 돌이켜 생각하거나 쇄신하지 않으면 쉽게 잊어버립니다. 많은 것을 체험하고도 이를 계속 기억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 버리고, 그런 체험을 전혀 하지 않은 사람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주님의 권능을 체험하여도 그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라는 예수님의 꾸짖음을 듣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체험은 축복입니다. 어떤 계기로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결심하는 은총을 체험하지만, 그 체험이 단단한 믿음과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회개하기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갑니까? 기억하려는 부단한 노력이 마침내 구원으로 이끕니다. 미사 가운데 언제나 최후의 만찬과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듯이, 우리 삶에서 베푸신 주님의 은총을 늘 기억합시다. 그 기억이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열고 의탁하게 하는 용기와 희망을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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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기억’의 문제가 아니다.>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8,14-21)
14절의 ‘잊어버려’ 라는 말과 18절의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라는 말씀 때문에, 제자들이 ‘빵의 기적을 체험한 일을 기억하지 못해서’ 혼난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기억력이 부족한 것을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믿음과 이해가 부족한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여기서 “기억하지 못하느냐?”는 “깨닫지 못하느냐?”입니다. 열두 제자가 모두 건망증 환자였던 것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는가?”에 관한 이야기, 즉 신앙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기억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 6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요한 6,26-27)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셨을 때, 사람들은 그 기적에 열광하면서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는데(요한 6,15), 아마도 그때 열두 제자도 군중의 그 분위기에 휩쓸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군중과 분리시켜서 호수 건너편으로 보냈습니다.(마태 14,22; 요한 6,22) ‘기적의 빵’을 받아먹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은, ‘빵’만 보고 그 빵을 주신 ‘예수님’은 보지 않았기 때문에, 즉 ‘육신을 배부르게 하는 빵’만 생각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 등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 그저 날마다 배불리 먹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태도는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한테 혼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빵이 없는 것을 걱정해서 혼난 것이 아니라, 군중이 그랬던 것처럼 육신의 배고픔만 생각하고 영혼의 구원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혼난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이 빵이 없어서 걱정한 일은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내긴 하지만, 걱정 자체는 크게 잘못한 일도 아니고, 그렇게 혼날 일도 아닙니다.
‘빵의 기적’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과 그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깨닫지 못해서 예수님을 올바르게 믿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 그런 것이 진짜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신 것은, 당신을 ‘생명의 주님’으로 계시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그 ‘기적의 의미’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려면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입니다.(요한 6,51)
예수님 말씀에서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라는 말씀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하느님께서 주신 복’이라고 착각하는 사고방식에 물들지 않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에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파 사람들은 지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을 ‘하느님의 복’이라고 생각했고, 가난하게 사는 것을 ‘하느님의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잘살고 있는 것을 자랑하면서 잘난 체했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겼습니다. <당시에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파의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신자들도 처음에는 그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재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모두 모아서 보면, 사람들의 사고방식과는 완전히 반대쪽에 있는 가르침들입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가르침(마태 6,24),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라는 가르침(루카 6,20),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기가 더 쉽다는 가르침(마르 10,25)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가르침들을 불편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지상에서(현세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하는 생활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하는 생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상에서의 생활을 완전히 무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신앙생활의 기본 원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빵만으로’라는 말은, ‘빵’도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빵은 유한한 육신의 생존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말씀’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요한 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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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십니다.
누룩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누룩은 빵을 만들 때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하는 발효제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이런 누룩에 비유하신 적도 있습니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마태오 13,33)
하늘 나라와 같은 좋은 누룩이 나에게 작용한다면 내가 지닌 선한 요소들을 더욱 부풀어 오르게 할 것입니다. 선함과 이타심이 악습과 이기심을 누르게 될 것입니다. 반면 좋지 않은 누룩이 나에게 작용한다면 어떠하겠습니까?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지닌 형식적이거나 세속적인 누룩이 내 마음 깊이 뿌리박혀 있는 의심과 불신, 이기심을 더 부풀어 오르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자상하게 가르치시는데도 제자들은 빵이 없다고 걱정합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미 두 차례에 걸쳐 빵을 많게 해 주셨음을 상기시키지 않으십니까? 그런 예수님과 함께 있다면 걱정과 불안이 없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빵이 없다고 수군대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누룩이 필요합니다. 우리 안에도 좋은 누룩이 발효하여 의심과 불안, 이기심이 희망과 이타심으로 승화하도록 주님에 대한 굳은 믿음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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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이 구절을 그리스어 원문에 더욱 가깝게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빵들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배 안에 제자들과 함께 있는 빵은 한 개뿐이었다.’ 이를 중심으로 이 구절을 살펴보면, ‘빵들’과 ‘빵 한 개’가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먹을 음식인 빵들을 챙기지 않았는데, 어째서 배 안에 빵 한 개가 남아 있던 것일까요? 도대체 그 빵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마르코 복음사가가 이 빵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빵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음식이 아닙니다. 먹는 빵이었다면 제자들이 “빵이 없다.”라고 말하지 않고 ‘빵이 한 개밖에 없다.’ 하고 서로 수군거렸을 것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있는 그 빵 한 개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두고 빵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그분께서 바로 누룩 없는 빵 곧 파스카 음식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온전하게 믿어 그분을 누룩 없는 빵으로 받아들이라고 일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도 ‘누룩’ 때문에 걱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걱정과 제자들의 걱정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악한 영향력이 미칠까 걱정하시지만, 제자들은 지금 먹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걱정합니다. 같은 말 속에서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하나의 걱정이 영적인 것이라면, 다른 걱정은 육적인 것입니다. 하나의 걱정이 구원과 관련된 것이라면, 다른 걱정은 의식주와 관련된 것입니다. 과연 이 두 가지의 걱정에서 우리는 무엇에 주안점을 두어야 하겠습니까? 육적인 것에 마음을 써서 우리 안에 계신 빵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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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8,14. 17)
우리가 흔히 자주 쓰는 표현 중 하나가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동상이몽이란 한 자리에서 같이 생활하면서도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뜻으로, 겉으로는 같이 행동하면서도 속으로는 각기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죠. 오늘 복음에서 드러난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이 동상이몽의 상태입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함께 동고동락했으면서도 스승과 제자의 생각이 너무 다릅니다.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 연꽃 한 송이를 들어 사람들에게 보이자, 그 많은 제자 중 한 사람인 ‘마하가섭’만이 그 뜻을 깨닫고 미소를 지었다는 ‘염화시중의 미소’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에게는 당신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는 마하가섭이라는 제자라도 있었지만, 예수님에게는 그런 제자가 없었으니,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난감하고 당혹스러웠을까 싶습니다. 부처님은 연꽃을 들고 설법하셨는데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기들이 가진 빵이 부족하기에 예수님께서 누룩 이야기를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누룩은,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다.”(마태13, 33) 는 비유에 나오는 역동적인 순기능을 하는 누룩이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생각한 부정적인 의미의 누룩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과월절 예식을 누룩에 빗대어 설명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자만은 좋지 않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린다는 것을 모릅니까?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1코린 5,6-8) 이처럼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묵은 누룩은 급속히 번져 가는 악을 뜻하며 이것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려는 뜻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염려하신 것은 ‘악의 파급력과 확장성’ 그리고 ‘종교적 위선’ 등을 조심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삶은 그 당시 대표적인 악의 본보기들이며, 그들의 거짓되고 위선적인 나쁜 생각들과 악을 조장하는 말과 행동이 세상과 세상의 사람들에게 미치는 나쁜 영향력에 중독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악의 경향은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듯, 누룩이 빵을 부풀어 오르게 하듯 그들의 나쁜 성향과 생각들의 파급력과 확장성을 조심하라는 경고라고 느껴집니다. 물론 그들은 드러내놓고 그들의 나쁜 의도를, 생각을 표현하지 않았기에 그들의 위선과 간계를 더욱더 조심하라는 말이며, 이는 또한 우리에게도 말과 행동이 달라서는 안 된다, 는 것을 경고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실상 우리는 세상적인 가치와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고 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영적인 양식을 갈망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느님의 말씀과 성체로 양육되기보다는 먹고사는 데 집착하고 재물과 돈을 충분히 가지지 못해 삶이 불만족스럽고 불평으로 원망으로 가득 차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적 삶이기에 늘 세상의 누룩이 아닌 하늘나라의 누룩이 되도록 늘 깨어 조심하라는 주의의 말씀입니다. 사실 제자들의 어리석음은 분명 빵의 기적을 통해서 보이지 않지만 늘 우리 가운데 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했으면서도, 아직도 세상적인 빵을 말씀하신다고 이해했던 것은, 결국 그들의 속내가 여실히 드러난 것입니다. 겉은 예수님과 함께하면서도 그들의 속내는 스승의 가르침과 삶과는 전혀 다른 세상적인 것에 관심이, 생각이 머물러 있었다는 뜻입니다. 마음도 굳어 있고, 같은 곳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딴것에 시선과 마음이 쏠려 갈라져 있는 제자들을 향해서 그러기에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 는 당신의 말씀에 빵이 없음을 걱정하는 제자들을 보고 주님께서는 몇 가지 부정적인 언사로 한탄하시며 꾸짖습니다.
어떤 의사가 이렇게 말했더군요. 『나는 그동안 환자들을 만나면서 나의 생활방식을 바꾸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스승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로 많은 환자들이 입에 담는 ‘만약’ 이란 두 글자입니다. 나와 만난 환자들은 지난 일을 회고하고, 그때 반드시 해야 했는데 하지 못했던 일을 후회하면서 보냅니다. 그런데 그렇게 후회의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오히려 습관처럼 쓰는 ‘만약’이란 말을 ‘다음에’ 라는 말로 바꾸어 쓰는 것입니다. 다음엔 그런 바보 같은 행동을 하지 않을거야, 이렇게 한다면 과거의 후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동시에 당신의 소중한 시간과 정열을 현실과 미래에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습관에 젖어 사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보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8,17~18) 이는 결코 허투루 듣고 잊어버릴 말씀이 아니라 우리 또한 명심해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깊은 뜻을 헤아려야 한다고 봅니다. 얼마나 마음이 답답하시고 허하셨기에 주님께서 이토록 추궁하듯이 쏟아내셨겠습니까? 성서에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느냐?’는 표현이 무려 17번이 나온다고 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듯이 동일한 표현을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고, 한번 보는 것보다 마음을 열고 본 것을 기억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오관)을 통해 듣고 보고 만진 것을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낫고 중요하다는 뜻이라고 봅니다. 흔한 표현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멀고도 가까운 거리가 머리에서 심장(=마음)까지라고 하듯이 신앙은 이성으로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으로 이해하고 깨닫지 않으면 제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시고 보여 주신 그 모든 말씀과 행동이 단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마음과 하느님 나라를 깨닫도록 하신 것임을 명심해야 하리라 봅니다. 마음이 아니고서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느낄 수 없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이며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주님 당신이 깨우쳐 주시는 사람은 행복하옵니다.”(화답송 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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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매서운 겨울밤, 급하게 운전해서 병원에 가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도로 한가운데에 거대한 나무가 쓰러져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법이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아주 쉽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실제 캐나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아버지가 임신한 딸이 출산한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가는 중이었고, 또 한 아들은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병원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운전하는 차 앞으로 거대한 나무가 쓰러져 있는 것입니다. 둘은 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은 힘을 합해서 나무를 옮기려고도 했지만, 둘이 들기에는 너무나 무거워서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이 둘은 목적지인 병원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 둘은 서로 반대편 방향으로 가고 있었고, 그래서 차 열쇠를 서로 교환한 뒤에 상대방 차에 올라타서 목적지를 간 것입니다.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차를 바꿔타면 아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상황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군가가 불가능한 상황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주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으로 나아갈 힘과 지혜를 주십니다. 세상 것에 집중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 대한 믿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배 안에 빵이 한 개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장 먹을 빵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을 이미 보았습니다.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나누어주는 것을, 또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던 기적을 이미 체험했습니다. 이 기적을 기억하고 있다면, 빵 하나만 있음으로도 충분하다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지금의 부족함만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누룩이 빵을 부풀리는 것처럼, 마음 안에 있는 허영, 가식, 탐욕, 권력욕, 교만 등의 작은 죄악들이 점점 부풀려서 주님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걱정 역시 주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작은 누룩이었습니다. 이것이 부풀어서 주님을 보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부족함을 채워줄 누군가가 바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특히 가장 힘센 주님께서 우리 편이 되셔서 함께하시기에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걱정이 크면 클수록 우리를 도와주시고 함께하시는 주님을 볼 수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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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밥 세상>
마르코 8,14-21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그때에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밥 세상>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마르 8,17)
벗
먹일
밥보다
나
먹을
밥이
앞서니
배고픈 세상이요
나
먹을
밥보다
벗
먹일
밥이
앞서니
배부른 세상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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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너희의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누룩은 부풀리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이스트나 베이킹 파우더와 같은 일종의 발효제입니다. 그래서 빵과 술을 만드는 원료로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누룩과 비슷하다. 어떤 부인이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마태13,33)고 하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누룩에 비유하기도 하셨습니다. 이 말은 누룩이 좋은 것에 들어가서 부풀리면 그만큼 좋은 것으로 부풀려지듯이 나쁜 것도 부풀려지면 나쁜 것이 그만큼 커진다는 말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고,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고,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회당에서는 제일 높은 자리를 찾으며, 길에 나서면 인사받기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마태23장 참조)이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율법 준수에만 구원이 있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구원을 소유와 지배, 권력의 화려함에서 찾았습니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사이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말은 그들의 사고방식에 물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주장, 자기 주체성과 자존감, 소신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똥고집이 된다면 문제입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의견이 절대적인 것처럼 행동하거나 우기는 것은 주님을 슬프게 하는 완고함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마르8,15)
필리피서 3장 7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주님을 얻기 위하여 자기 것을 모두 버린 바오로 사도를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내 몸에 젖어있는 바리사이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삶의 자세, 하느님을 잘못에 대해 벌주시고 나를 감시하시는 분으로 생각하는 시각, 재물에 대한 욕심, 부귀영화에 대한 동경, 기도는 하지 않으면서도 자동차에 십자가나 묵주를 매달고 있으면 하느님께서 보호해 주려니 생각하는 태도, 허영, 가식 등의 누룩은 버리고, 하느님 말씀의 누룩을 부풀려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줄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말씀하시고 결국에는 빵의 기적에 관한 얘기를 상기시키시면서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8,21)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겠습니까?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느냐?” 아니면 “때가 되면 알리라.” 어떻게 받아들이든 능력의 예수님, 구원자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근심, 걱정에 싸여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마음과 마음이 통하기가 그렇게도 어려웠으니, 우리와 주님 사이의 통교는 오죽하겠습니까? 주님과 깊은 만남에 이르는 길이 아직도 멀기만 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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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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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결핍을 채우시는 선>
오늘의 야고보서는 하느님은 우리를 유혹하시고 악에 넘어가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선을 선사하시는 분이라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유혹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유혹을 당한다고도 합니다. 유혹을 받고 싶지 않은데도 당한다는 뜻이지요. 그 탓을 유혹자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와에게, 그리고 하와가 뱀에게 돌리듯 말입니다.
그러나 배부른 사람에게 음식 냄새가 유혹이 되겠습니까? 滿腹인 사람은 더 이상 먹고 싶은 것이 없고 갈망이 없기에 근본적으로 欲이 없으며 欲이 없기에 유혹도 없습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족한 사람은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지만 부족함이 있지만 그 부족을 지족할 수 없는 사람에게 갈망과 욕구가 있고 욕구가 있기에 유혹이 있으며 유혹이 있기에 유혹에 넘어가는 죄도 있는 것입니다.
반면 하느님은 자족(自足)하시는 분이시기에 누구에게 유혹을 당하지도 누구를 유혹하지도 않으십니다. 유혹을 하는 것도 결핍, 부족을 채우려는 것이요, 유혹을 당하는 것도 결핍, 부족을 채우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선에 있어서 결핍이 있으신 분이 아니라 넘치는 분이십니다. 프란치스코가 수다스럽게 노래하듯 하느님은 至上 善, 완전한 善, 충만한 善, 모든 善이십니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부족함이 전혀 없는 善이십니다.
그러니 결핍이 있고 자족할 수 없는 우리 인간은 하느님이 무조건적 선의에 의해 은총으로 주시는 것을 고마운 마음으로 그저 받아들이면 선은 선으로서 우리를 만족케 할 것이고, 완전한 만족이 되시는 하느님을 받아 모시면 더더욱 바랄 것이 없는 만족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조건인 결핍을 채우려는, 그것도 스스로 채우려는 욕망을 허용하면 창세기 아담과 하와의 예에서 볼 수 있듯, 오늘의 야고보서가 얘기하듯 욕망에 사로잡혀 유혹을 받고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고 죄를 지어 죽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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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르8,15)
<기억과 머뭄!>
오늘 복음(마르8,14-21)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들의 거짓과 위선을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빵을 만드는 '누룩', 곧 '먹는 빵'에 갇혀 있고, 빵을 가져오지 않은 '빵이 없음'에 머물러 있으면서 서로 수군거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의 '수군거림'과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완고한 마음'과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우둔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이런 꾸지람을 들은 제자들의 모습이 지금 여기에 있는 제자들인 우리의 모습이지 않을까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 완전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고, 그 완전한 결정체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의 공동체 안에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 이 표지인 십자가가 걸려 있고, 또한 매일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제대 위로 내려오시는 '미사'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재현되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미사의 본질적 의미'는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기억하고, 이 사랑 안에 머무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독서(야고1,12-18)에서 야고보 사도가 권고하고 있는 것처럼, 온갖 은총은 '이 기억과 머뭄으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1,16)
'견월망지(見月忘指)' 하지 말고, 곧 십자가를 가리키는 손가락을 바라보지 말고, 매일 미사드리는 사제의 모습을 보지 말고, 그 본질인 '십자가 사랑'과 '살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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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AXbFD6xpF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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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 21)
예수님을 통해
생명을 다시
보게됩니다.
생명의 이 기쁨을
맛보야 할 우리의
시간입니다.
깨달음 곁에는 언제나
사랑의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 곁에는
나눔이라는 깨달음이
언제나 함께
머물러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친히
당신 자신을
나누심으로 참된
깨달음이
되어주십니다.
깨달음의 길은
생명의 길임을
다시 일깨워주십니다.
우리의 허약한 생명을
충만케하시는 분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생명은
결코 우리의 것만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가장 작은
생명에서부터
가장 큰 생명에
이르기까지
생명안에 계시는
생명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가장 잘 아시는
주님께서 생명의 기쁨을
깨닫게하십니다.
생명의 기쁨이란
사랑받는 참기쁨입니다.
당신 생명을 모두 바쳐
우리를 사랑하시는
성체성사의 이 참사랑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며
나누는 것이며
밀알처럼 너를 위해
죽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함께하시는
이 사랑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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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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