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 가능케 하는 ‘성부·성자·성령의 이름으로’
■ 자비의 끝
1980년대 말 오스트리아 빈 신학 대학에서 신부수업을 받던 시절, 우리는 삼삼오오 그룹별로 특히 성가를 많이 불렀다. 아예 신학원 전용 성가집이 있었다. 거기에 전통 성가는 물론, 떼제 성가, 개신교 성가, 성령성가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성무일도를 바칠 때나, 그룹 나눔 때 함께 성가 몇 곡을 부르다 보면, 어느새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과 위로로 충만해지곤 했다. 그중 지금도 흥얼거려지는 가사가 있다.
“주님 선함, 끝이 없네, 끝없어.
주님 자비, 멈추지 않아.
아침마다 새롭네, 아침마다 새로워.
크도다 주님 자비.”
사실 이 가사는 애가서 3장을 개사한 것이다.
“주님의 자애는 다함이 없고 그분의 자비는 끝이 없어 아침마다 새롭다네. 당신의 신의는 크기도 합니다”(애가 3,22-23).
나는 아직 뭘 모를 때 신나게 불러댔던 저 노랫말이 뜻하는 바를 요새 겨우 알듯하다. 나이를 먹음에 비례하여 주님의 자비가 점점 진하게 체감되기 까닭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지난 방한 일정 마지막 날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 때, 교황이 전한 핵심 메시지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는 것’(마태 18,22 참조)이었다.
오늘 날 남북 긴장국면의 뿌리인 ‘동족상잔’의 해법치고는 너무도 일방적이고 단순한 말씀이었다. 그 깊은 뜻을 알 리 없는 기자들이 나에게 그 의중을 물어왔던 기억이 새롭다.
■ 카인의 징표
죄인인 우리들이 오늘 경탄해 마지않는 주님의 자비는 성경 첫대목의 주제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아담이 하느님의 명을 거역한 이후 바로 그 아들대에서 형제간 살인극이라는 비극이 발생한다.
죄는 방치할 경우 급속도로 확산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알려져 있듯이 그 끔찍한 살인자는 카인이었다.
결국 카인은 시기 끝에 동생 아벨을 죽인 죗값으로 인해 ‘떠돌이’ 신세의 형을 받고 낯선 곳으로 추방된다. 그때 카인이 하느님께 청한다. “제가 다른 곳에 가면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저를 보호해 주십시오”(창세 4,14 참조).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보호받는 증표’를 주시며, “아니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나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을 것이다”(창세 4,15) 하고 말씀하셨다.
벌을 주시되 끝까지 살 길을 열어주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조치였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아들 ‘에녹’을 낳았고 새로운 도시를 만들며 건실한 지도자로 변신했다고 한다. 주님의 자비가 그와 함께 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설명이 필요한 대목이 있다. 카인은 인류 서열상 아담과 이브 다음으로 넘버3인데, 성경을 보면 딴 동네에 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더라는 얘기가 나온다.
이를 우리는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 한마디로 여기서 얘기하는 ‘아담’은 집합명사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담’은 땅에서 나온 존재, ‘아다마’의 의미로써 개인명사가 아닌 집합명사다. 하느님께서 태초에 사람을 딱 한 명만 만들었겠는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사람들 중, 한 가족에게 일어난 이야기에 해당되는 것이다.
■ 형제 갈등의 시종
그렇다면 카인은 어떻게 해서 친동생 아벨을 죽이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그 발단은 그 둘이 하느님께 바친 제물의 차이였다.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창세 4,3-4).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제물은 반기시지 않고 아벨의 제물은 반기셨다. 왜 그러셨을까? 성경을 얼핏 읽으면, 따로 그 이유가 안 밝혀져 있다. 하지만 사실 이 내용 전체를 가만히 뜯어보면 성경 본문 속에 그 이유가 이미 드러나 있다.
아벨은 ‘맏배’를 바쳤다고 했다. 이를 통해서 아벨은 무언가 “가장 좋은 것을 바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카인이 예물을 바칠 때는 ‘땅의 소출’이라고만 했다. 땅의 소출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이라는 표현은 안 썼다. 오히려 그다음 대목에 카인의 마음에 있던 실체가 드러난다.
카인이 풀이 죽어 화가 나 있으니까 하느님께서 말을 붙이신다. “네가 마음을 잘못 먹었다. 네가 마음을 잘 먹었으면 그럴 리가 없다. 네 죄가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노린다”(창세 4,7 참조).
바로 이것이었다. 카인은 지금 뭔가 마음보를 잘못 썼던 것이다. 제물을 바치면서 흔히 우리가 잘못 먹는 마음은 무엇인가? “아깝다!”는 것이다. “뼈 빠지게 일했는데 아깝다. 그러니까 알이 실한 놈은 남겨두고 찌끄러기를 바치자!” 바로 그 마음이 하느님께 읽혔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신약시대에 와서 카인의 예물을 하느님께서 반기시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기를 ‘믿음의 차이’라 하였다. 히브리서를 보면,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하면서 아벨은 믿음으로 제물을 바쳤다고 강조한다.
“믿음으로써, 아벨은 카인보다 나은 제물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히브 11,4).
여기서의 믿음은 추상적인 믿음이 아니라 실질적인 믿음이다. 아벨에게는 “하느님이 모든 것을 챙겨주신다. 하느님은 좋으신 분이다”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카인은 이와 대조적으로 “아깝다.
하느님이 과연 챙겨주실까? 교회 다니면 밥 먹여 주나? 내가 많이 내서 망하면 하느님이 날 챙겨주실려나? 그냥 적게 내서 챙겨야지”라는 식의 생각뿐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카인이 마음을 잘못 먹으니까, 하느님께서 아벨의 제물만을 반기신 것은 당연한 조치였다. 그럼에도 카인은 원인은 관심 밖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아벨이 미워 죽을 노릇이 되었다.
이를 카인은 도저히 도저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결국 카인은 아벨을 들로 꾀어내 살해했던 것이다.
■ 카인의 통한
외롭습니다. 언제나 낯선 곳 타향살이의 신세가 이토록 처량할 줄이야.
고달픕니다. 뿌리는 대로 거두지 못하는 끝없는 잔머리 굴레의 잔혹함이란.
그립습니다. 내가 죽인 나의 동생 아벨! 이 세상 그 어떤 의리보다 진한 한 핏줄임이 세월이 흐를수록 슬픔으로 저며 옵니다.
꿈마다 소스라칩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물음이 천둥처럼 들려오고, 슬그머니 가슴 후미진 곳에 묻어두었던 죄책이 잠꼬대를 해대는 탓에.
눈물로 미련을 뿌려댑니다. 돌이킬 수만 있다면,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그럼에도 오늘 제 노래는 애오라지 감사이올습니다. 시방 나는 주님께서 그어주신 그 징표의 광채로 미래를 사는 존재! 놀라고 감사하도다.
그것이 십자 성호였다네. 모든 것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였다네.
차동엽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