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가 힘들면 엄마의 부엌을 생각한다
신경숙
음식은 사람에 대한 배려와 접촉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보면 깻잎은 마음을 건네기에 참 좋은 음식이에요. 깻잎을 먹다 보면 자연스 럽게 그렇게 되죠. 한 장 떼서 그 사람의 숟가락 위에 얹어줄 수 있고, 다른 반찬 위에 올려주기도 하니까요. 떼다가 잘 안 되면 옆에서 같이 떼어주죠. 아니면 아래쪽 깻잎을 눌러주기도 하고요. 여러 장 올려주다 보면 서로 기분도 좋아지는 특별한 느낌이 있잖아요.
지난해 나온 제 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도 깻잎을 넣었어요. 주인공인 윤미루하고 정윤이 깻잎을 떼서 서로의 밥숟가락 위에 얹어주는 장면이었죠. 정윤이 처음으로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타인에게 말한 것도 올려준 깻잎에 밥을 싸서 먹던 그 밥상이었어요. 밥상에서 서로를 향해 마음을 열게 만든 게 깻잎이었죠. 그래서 '우리 사이엔 깻잎이 소통의 도구 같았다'고 느끼고요.
깻잎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기도 해요. 저 어렸을 때는 텃밭에다가 쑥갓이며 깻잎이며 풋풋한 것들을 참 많이 심었어요. 그중에서 깻잎이 제일 예쁘더라고요. 바람이 불면 깻잎향이 솔솔 났죠. 아이들은 대부분 그런 냄새를 싫어한다고 하던데 저는 참 좋았어요. 깻잎에 밥을 싸서 주먹밥을 만들어 먹으면 밥알 사이로 푸릇한 향기가 새어나왔어요. 겨울에도 깻잎을 먹으려면 장아찌를 담갔지요. 깻잎을 하나씩 똑똑 따서 따뜻한 물에다 씻어 말린 후에 차곡차곡 개요. 그걸 된장 담글 때 사이사이에 넣어두면 된장향이 깻잎에 사악 배는 거죠. 된장에 박힌 깻잎은 시인 허수경 씨가 우리 집에 왔을 때 제가 많이 퍼줬어요. 엄마가 시골에서 많이 보내주시거든요. 그건 어디에도 없는 맛이에요. 한번 보내주시면 어찌나 많이 보내주시는지, 말려도 소용없어요. 제가 워낙 깻잎을 좋아하니까 혹여나 떨어질까 싶어서 잔뜩 해주시는 거죠.
저희 집이 육남매인데, 제 위로 다 남자 형제들이라 제가 주로 엄마하고 부엌에 있었어요. 엄마가 담근 걸 그릇에 담기도 하고 옆에서 자잘한 일을 돕기도 했죠. 엄마는 시골 분이라 그런지, 누군가에게 말로 '사랑한다'고 표현하지 못하세요. 사랑한다는 그 마음을 전한 것은 말이 아니라 음식이었죠. 제가 열다섯 이후로 엄마하고 떨어져 살았거든요. 시골집에 가면 엄마가 따뜻한 음식을 차려주셨어요. 제가 딴 방에 있으면 "이리 건너와라" 하세요. 딴 말씀은 별로 없이 상을 차려주시면서 먹으라고 하셨어요. 그게 "네가 와서 좋다, 사랑한다"라는 말이었던 거죠. 제가 먹고 있는 걸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셨지요.
어렸을 때 엄마는 다른 건 몰라도 아침밥을 안 먹고 학교에 가면 굉장히 속상해하셨어요. 아침부터 엄마하고 실랑이하지 않으려면 지각을 하더라도 밥은 먹고 가야 했어요. 안 먹고 가면 기어이 학교에까지 밥을 싸오셨어요. 십 리 떨어진 곳을요. 그 거리를 왕복하려면 엄마가 언제 밥을 드시고 언제 일을 하시겠어요. 그러니까 늦어도 먹고 나서는 게 엄마를 돕는 거죠. 뜨거운 밥을 빨리 먹으려면 찬물에 마는 게 가장 좋았어요. 그럴 때 같이 먹기 제일 편한 게 깻잎이에요. 뜨거우면서 차가운 밥 위에 얹힌 향긋한 깻잎 한 장에 급한 마음이 어느새 달아나버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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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은 먹을 때뿐만 아니라 만드는 중에도 위로하고 쓰다듬어주는 힘이 있어요. 저는 엄마의 사랑을 도마질 소리로도 느꼈거든요. 살면서 힘들다가도 어느 날 고향집에 돌아가면 다음 날 아침 제일 먼저 듣는 소리가 엄마의 도마질 소리였어요. 아침 선잠에 그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누워서도 엄마 손이 다보여요. 엄마는 신기하게도 칼 하나, 도마 하나로 모든 요리를 다 하시죠. 요즘에는 마늘 찧는 기구도 따로 나오고 야채 모양내는 도구도 있지만, 엄마는 어슷어슷 잘근잘근 뚝딱 잘도 만들어내시죠. 온 가족이 함께 살지 않는 사람은 대부분 알 거예요. 도마질 소리만 들어도 행복해지는 그 마음을.
엄마의 소리는 무척 빨랐어요. 무채 써시며 다다다, 다다다. 마늘을 찧으시며 콩콩콩, 콩콩콩. 엄마는 칼 하나로 이렇게 자르고 저렇게 찧으면서 모든 걸 만들어내셨어요.
우리나라 말이 가장 품격 있게 살아 있는 게 요리책이기도 하죠. '어슷어슷' '잘근잘근' '쫑쫑쫑' '보글보글' 같은 부사라든지, '끓는다' '곤다' 라는 동사를 보면 잃어버린 우리말이 음식과 함께 살아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어요.
언젠가 한 행사에 초청받아 갔는데 절 소개하시는 분이 "한국 작가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부엌을 소설 속에 갖고 있는 작가"라고 하셨어요. "누구에게 들은 말씀이냐"고 여쭤봤더니, "어느 평론가에게 들었는데, 내 생각에도 맞는 말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시골집 엄마의 부엌에서 듣고 보고 맛봤던 기억이 소설 속에 살아나서 그런가봐요.
- 신정선, 『맛있다, 내 인생』(예담, 2011) 24~30P에서 발췌.
첫댓글 이 글을 읽다가 시인 유병록이 고등학교 때, 백일장 나가서 썼던 詩 <식구>가 떠올라 적어 봅니다. 이 시는 <국어시간에 시 읽기>라는 책에도 수록되기도 했었던 시입니다.
매일 함께 하는 식구들 얼굴에서
삼시 세 끼 대하는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때마다 비슷한 변변찮은 반찬에서
새로이 찾아내는 맛이 있다
간장에 절인 깻잎 젓가락으로 집는데
두 장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아
다시금 놓자니 눈치가 보이고
한번에 먹자 하니 입 속이 먼저 짜고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데
나머지 한 장을 떼내어 주려고
젓가락 몇 쌍이 한꺼번에 달려든다
이런 게 식구겠거니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내 식구들의 얼굴이겠거니
안녕하세요, 에세이 포럼 12기에서 공부하고 있는 손훈영입니다.
선생님이 올려주시는 영양가 높은 글들, 잘 읽고 있습니다.
'맛있다 내 인생'은 신경숙의 단행본인가요 아니면 음식을 주제로 한 여러명의 글이 함께 실린 것인가요.
신경숙을 좋아해 시중에 깔리면 거의 다 사는 편인데 '맛있다 내 인생'은 생소하네요.
먼저, 반갑습니다.
그리고 <맛있다, 내 인생>은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신정선이 쓴 명사들의 음식이야기입니다. 그 중에 소설가 신경숙의 글이 실린 것이고요. 제가 출처를 밝히면서 헷갈리게 한 것 같아, 방금 전에 수정했습니다. ^^
덧붙여, 제가 올리는 글들, 그리 영양가가 높진 않습니다. ^^
칼로리만 조금 높을 뿐입니다. ^^
살다가 힘들면 저도 엄마의 부엌을 생각합니다.
부지런한 어머니는 남들보다 먼저 부엌문을 열었지요.
이른 아침, 삐걱하고 정지문 소리가 들리면 저도 이불 속에서 빠져 나와
어머니의 치맛자락에 붙어 마을 우물가로 향했지요.
앉은뱅이 항아리를 이고 우물가로 가는 어머니의 발걸음...
그 뒤를 따랐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어머니의 바지런한 피를 물러받아서 고맙게 여기고요.
나무로 만들었던 그 정지문은 식구들의 입과 같았습니다. ^^
맞습니다. 정지문은 세상의 아침을 여는 문이었습니다.
엄마는 그 문 안에서, 세상의 아침을 맞을 가족들을 위해 정갈하게 식사를 준비했었죠.
어쩌면, 그 문 안에서 이뤄지는 모든 소리들은 가족을 향한 호흡이었을 겁니다.
휴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부엌에서 엄마 도마소리가 나면 푸근하면서도 행복했던 오랜 기억이 납니다.
신경숙님의 깻잎을 얻어 먹고 싶어 침이 고입니다. 밥 한 공기쯤은 금방 뚝딱일 낀데...
그 도마 소리는 엄마가 들려주는 한 편의 교향악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
저도 더불어 그 깻잎, 얻어 먹고 싶습니다. 밥 한 공기, 더 추가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