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년도 | 내용 |
---|---|
1542년 | 경북 의성현 사촌리 외가에서 태어나다. 아버지 류중영,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
1545년(4세) | 글을 읽기 시작했다. |
1547년(6세) | 대학을 배웠다. |
1549년(8세) | 맹자를 읽었다. |
1554년(13세) | 동학(東學)에서 중용과 대학을 강독하였다. |
1555년(14세) | 향시에 합격하다. |
1558년(17세) | 부인 전주 이씨를 맞이하였다. |
1560년(19세) | 10월에 관악산 암자로 들어가 맹자를 공부하였다. |
1562년(21세) | 9월 도산에서 퇴계(退溪)선생에게 근사록(近思錄)등을 수업하다. |
1563년(22세) | 가을에 진사생원 동당초시에 합격하다. |
1564년(23세) | 7월 생원회시에 1등, 진사에 3등으로 합격하다. |
1565년(24세) | 태학(太學)에 들어가다. |
1566년(25세) | 10월 별시문과 병과급제 하였다. 11월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선임되어 벼슬길에 오르다. |
1567년(26세) | 4월에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에 임명되다. |
1569년(28세) | 성균관전적을 거쳐 공조좌랑에 임명되다. 10월에 성절사서장관 겸 사헌부감찰이 되어 명나라 수도 연경에 가다. |
1570년(29세) | 3월에 홍문관 부수찬지제교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에 임명되고 다시 수찬이 되다. 가을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사간원정언에 임명되다. 이조 좌랑에 임명되다. |
1571년(30세) | 3월에 병조좌랑이 되다. |
1572년(31세) | 홍문관수찬에 임명되다. 9월에 원접사종사관으로 의주에서 반조사를 맞이하다. |
1573년(32세) | 2월에 이조좌랑에 임명되다. 7월13일에 아버지 류중영이 돌아가시다. |
1575년(34세) | 홍문관부교리와 이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다. |
1576년(35세) | 1월에 원지정사(遠志精舍)가 완성되다. 4월에 사간원헌납에 임명되다. 다시 사헌부에 장령에 임명되다. |
1577년(36세) | 2월에 여강서원(廬江書院)의 퇴계선생 봉안문을 짓다. 10월에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에 임명되다. |
1578년(37세) | 군기시정, 홍문관응교, 사간원사간으로 이어 임명되었다가, 8월에 홍문관응교로 다시 임명되었다. |
1579년(38세) | 4월에 통정대부, 승정원동부승지지제교 겸 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에 임명되었다. |
1580년(39세) | 특명으로 상주 목사(尙州牧使)에 임명되다. |
1582년(41세) | 봄에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다. 7월에 우부승지를 거쳐 겨울에 특명으로 도승지에 임명되다.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에 승진되다. 왕명으로 황화집(皇華集) 서문을 지어 올리다. |
1583년(42세) | 1월에 흥문관 부제학이 되다. 회재 이언적 선생의 구경연의(九經衍義)의 발문을 짓다. 2월에 북방 오랑캐의 국경침범에 대한 봉사(封事)를 올리고 국경 방위책 5조항을 올리다. 10월에 경상도 관찰사로 임명되다. |
1584년(43세) | 8월에 왕명으로 문산집 서문을 지어 올리다. 자헌대부 예조판서 겸 동지경연춘추관사홍문관제학에 임명되어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
1585년(44세) | 3월에 왕명으로 정충록(精忠錄) 발문을 지어 올렸다. |
1586년(45세) | 야은 길재 선생의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의 후면 기문을 지었다. 옥연서당이 완성되다. |
1587년(46세) | 퇴계선생의 문집을 편차(編次)하다. |
1588년(47세) | 10월에 형조판서에 임명되고 예문관제학을 겸하다. 성균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를 겸하였는데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
1589년(48세) | 봄에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다. 6월에 효경대의(孝經大義) 발문을 지어 올리고 7월에 정부인 이씨가 별세하다. 10월에는 특명으로 이조판서에 임명되다. |
1590년(49세) | 5월 29일에 대광보국 승록대부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되다. 6월에 광국공신 3등에 오르고 풍원부원군에 봉해지다. |
1591년(50세) | 2월에 특명으로 이조판서를 겸하였는데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좌의정에 승진되고 겸직은 전과 같았다. 형조정랑 권율을 의주목사로, 정읍현감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각각 천거하여 발탁하였다. 7월에 홍문관 대제학을 겸하게 하다. |
1592년(51세) | 도체찰사로 임명되다. 4월 30일에 왕을 모시고 피난길을 떠나다. 6월에 풍원부원군에 서용되다. 영의정에 다시 임명되고 훈련도감 도제조로 임명되다. |
1594년(53세) | 인재를 널리 구할 것과 군국기무(軍國機務) 10가지를 건의하다. |
1596년(55세) | 군사를 훈련하는 규칙을 정하여 각 도에 내려 보내다. |
1598년(57세) | 10월 9일 영의정을 체면하다. 11월 19일 파직되다. 12월 5일 삭탈관직 되다. |
1599년(58세) | 2월 16일 하회로 돌아오다. |
1600년(59세) | 퇴계선생 연보를 초하였다. |
1601년(60세) | 3월 5일 백씨 겸암선생이 돌아가시다. 8월 21일 어머니 정경부인 김씨가 돌아가시다. |
1602년(61세) | 신종록(愼終錄), 영모록(永慕錄), 상례고증을 짓다. 4월에 염근(廉謹)청백리에 녹(綠)하다. |
1604년(63세) | 3월에 다시 부원군에 봉해지다. 7월에 호성공신 2등에 봉하고 충근정량효절협책이란 호를 하사하다. 징비록 저술이 완성되다. |
1605년(64세) | 지행설, 제왕기년록을 짓다. 4월에 큰아들이 죽다. 9월에 서미동으로 이사하다. |
1606년(65세) | 3월에 서미동에 초당을 짓다. 조명설(釣名說)을 짓다. |
1607년(66세) | 5월 6일 정침(正寢)에서 조용히 운명하시다. |
1614년 | 병산서원 위판(位版)을 봉안하고 석채례(釋菜禮)를 행하다. |
1620년 | 여강서원(廬江書院)의 퇴계선생 사당에 배향하다. |
1627년 | 남계서원(南溪書院)에 봉안하다. |
1629년 | 문충공(文忠公)이라 시호를 내리다. |
1631년 | 도남서원(道南書院)에 위판을 봉안하다. |
1643년 | 삼강서원(三江書院)에 위판을 봉안하다. |
1689년 | 빙계서원(氷溪書院)에 위판을 봉안하다. |
류성룡 선생이 직접 손으로 쓴 기록과 임진왜란과 관련되는 문건, 자료 등 11종 22점이 일괄 보물 160호로 지정되어 있다. 처음에는 징비록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국보로 별도 지정되어 제외되었다. 문적의 목록은 『진사록』 1책(보물 160-1).『난후잡록』 2책(보물 160-2).『근폭집』 2책(보물 160-3).『중흥헌근』 1책(보물 160-4).『군문등록』 1책(보물 160-5).『정원전교』 2책(보물 160-6).『정조어제당장서화첩제문』, 『부록 채제공발문』 2책(보물 160-7).『당장시화첩』 1책(보물 160-8).『당장서첩』 1책(보물 160-9).『서애구주대통력 갑진년』 1책.『서애구주대통력 병오년』 1책.『서애구주대통력 갑자년』 1책.『서애구주대통력 병신년』 1책.『서애구주대통력 정유년』 1책(보물 160-10).「호성공신록권」 1축.「광국공신록권」 1축(보물 60-11) 등 16종 19권이다.
임진왜란을 겪은 서애 류성룡은 철저하게 준비하여 다시는 임진왜란과 같은 전란을 겪어서는 안된다는 차원에서 자신의 경험과 교훈을 남기고자 쓴 책이다. 징비란 시경(詩經)에 나오는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豫其懲而毖後患)”라는 뜻이다.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과의 관계, 명나라의 구원병 파견 및 제해권의 장악에 대한 전황 등이 가장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어 임진왜란 당시 경제, 정치적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1633년에도 셋째 아들인 수암(修巖) 류진(柳袗)공에 의해 “서애선생문집” 간행시 그 속에 수록되었으며 필사본은 조수익(趙壽益)이 경상도관찰사로 재임하던 인조 25년(1647)에 16권 7책으로 간행하였다. 숙종 21년(1695)에는 일본 경도 야마토야(大和屋)에서도 중간되었고, 1712년 조정에서 “징비록”의 일본 유출을 엄금한 명을 내리기도 했다.
국보 132호로 지정되어 징비록이 가진 가치를 새삼 알 수 있게 한다.
류성룡의 시문(詩文)을 그의 아들 류진이 합천군수로 있을 때 간행한 목판본으로 20권 11책이다. 권 1∼2는 시(詩), 권 3∼4는 주문(奏文) ·소(疏) ·차(箚), 권 5는 차(箚), 권 6은 서장(書狀), 권 7∼8은 계사(啓辭), 권 9는 정문(呈文) ·서(書), 권 10∼12는 서(書), 권 13∼16은 잡저(雜著), 권 17은 서(序) ·기(記) ·논(論) ·발(跋), 권 18은 발(跋) ·전(箋) ·명(銘), 권 19는 제문(祭文) ·비갈(碑碣), 권 20은 묘지(墓誌) ·행장(行狀) 등이 수록되어 있다.
본집 1책을 줄여 10책으로 한 것도 있으며, 또 별집 4권이 있어 시(詩) ·소차(疏箚) ·계문(啓文) ·정문(呈文) ·서(書) ·잡저(雜著) ·비변잡록(備邊雜錄) ·주의(奏議) ·기사(記事) ·발(跋) ·서후(書後) ·명(銘) ·제문(祭文) 등 원집에 누락된 유시문(遺詩文)을 수록하여 모두 24권 13책으로 된 것도 있다.
상례에 대한 의견을 적은 책인 상례질의(喪禮質疑)와 임진왜란과 관련된 책인 난후잡록(亂後雜錄), 근폭집(芹曝集), 운암잡록(雲巖雜錄), 진사록(辰巳錄)이 있다. 조상을 잊지 않도록 하는 내용의 종천영모록(終天永慕錄), 풍수와 관련된 신종록(愼終錄)이 있으며, 의학서적의 일종인 침구요결(鍼灸要訣)과 병중에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수양과 관련된 책인 관화록(觀化錄), 군사적 의견이 담긴 군문등록(軍門謄錄) 등이 있다.
류성룡과 관련된 유물이 전체적으로 1967년 보물 제 460호로 지정되었다. 류성룡이 사용하던 유물이 보물 460-1호로, 재산의 나누어주는 문서인 서애선생모부인곤문기(西厓先生母夫人昆文記)가 보물 460-2호, 그리고 조정에서 내린 문서류가 보물 460-3호로 지정되었다.
류성룡이 직접 사용하던 유물은 7종류인데, 류성룡이 도체찰사 때 입었던 갑주(甲胄) 1구(具), 가죽신인 혁화(革靴) 1족(足), 상아홀(象牙笏) 1개, 갓끈 4종(種), 금관자(金貫子) 1개와 옥관자(玉貫子) 6개로 관자 2종, 유서통(諭書筒) 1개, 동국지도 서애선생 수택본(東國地圖西厓先生手澤本) 1점 등이다.
서애선생모부인곤문기 1축은 류성룡의 어머니가 재산과 노비를 자식에게 나누어 주면서 쓴 분재기로 크기는 가로 362㎝, 세로 67.2㎝이고 한지에 행서체로 기록되어 있다.
고문서는 ① 광국공신녹권(光國功臣錄券) 1축, ② 광국공신과녹권(光國功臣科錄券), ③ 노비하사교지 (奴婢下賜敎旨), ④ 도체찰사교서(都體察使敎書), ⑤ 문충공시호교지(文忠公諡號敎旨), ⑥ 중추부판사교지(中樞府判事敎旨), ⑦ 호성공신교지(扈聖功臣敎旨), ⑧풍원부원군교지(豊原府院君敎旨), ⑨ 영의정교지(領議政敎旨), ⑩ 증정경부인교지(贈貞敬夫人敎旨), ⑪ 불윤비답(不允批答) ⑫ 선조제문(宣祖祭文), ⑬ 왕세자(王世子:光海君) 제문(祭文), ⑭ 정조제문(正祖祭文)로 총 14종이다.
선생이 조복 위에 착용하였던 허리띠이다.
선생이 신었던 가죽신인데 크기로 미루어보아 선생의 체격이 장대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선생이 사용했던 투구이다.
선생이 입었던 갑옷이다.
유적
류성룡이 세상을 뜬 후 선생의 유덕을 기리는 수많은 유림들의 도움으로 아들 손자 때에 완성되었다. 현판은 조선 중기의 명필인 미수 허목의 글씨로 당호는 서애선생의 증손자인 류의하대에 개판이 되었으며 당호는 충효당(忠孝堂)이다. 모두 52칸으로 류성룡의 불천위를 모시는 사당과 유물 각인 영모각이 함께 있다. 현재 보물 4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애선생을 배향한 서원이다. 원래는 풍악서당이었으나 류성룡이 주도하여 병산으로 옮겨와 학문을 가르쳤다. 이후 1607년 서애 류성룡이 죽고 6년 후인 1613년에 정경세(鄭經世), 이준(李埈 ), 김윤안(金允安) 등의 유림들이 서원 안에 존덕사(尊德祠)를 세우고 류성룡의 위패를 모시면서 본격적인 서원으로 기능을 가지게 된다. 이후 류성룡의 셋째 아들 류진을 함께 배향한다. 사적 제 260호로 지정되어 있다.
류성룡이 34세 때 은거하면서 병환을 요양하던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서쪽으로 온돌방으로 두었다. 정사 서쪽으로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중층 누각인 연자루가 있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원지정사 방에서나 연자루 누각에서 모두 부용대를 바라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두 건물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배치의 안정감을 주고 있다.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85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용대 오른쪽에 있다. 왼쪽에는 형인 겸암의 정자인 겸암정과 함께 형제의 우애를 확인하는 정(亭)이다. 임진왜란의 회고록인 징비록을 저술하였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애초 류성룡은 이 정자를 지으려고 노력하였으나 재력이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탄허라는 스님이 자청하여 시주하여 지었다고 전해진다.
처음에는 옥연서당(玉淵書堂)이라고 했다. 서당의 방은 완적재(玩寂齋), 마루는 원락재(遠樂齋)이며 정문은 간죽문(看竹門)이다. 정자 옆에는 능허대(凌虛臺)와 보허대(步虛臺)가 있다. 간죽문을 나서면 천혜의 절벽인 부용대 벼랑 3부 능선으로 겸암정까지 당도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그 길을 '층길'이라고 부른다.
중요민속자료 제 88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의정까지 지낸 선생의 묘소는 벼슬이 조금만 높으면 호화로운 묘소와 조경으로 이목을 끌게 하는 당시의 생활태도와는 너무나도 다르게 꾸며져 있다.
선생이 조복 위에 착용하였던 허리띠이다.
선생이 신었던 가죽신인데 크기로 미루어보아 선생의 체격이 장대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
첫댓글 한자명 류성룡柳誠龍을-柳成龍으로...
수정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