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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정리되는대로 올릴 것입니다.
서초문인협회 안동 문학탐방
일시:2015년 10월 13일 화요일
탐방지:영호루, 법흥사지 칠층전탑,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 임청각, 월영교, 석빙고, 병산서원, 하회마을
* 안동 영호루
서초문인협회에서 금년 가을 문학탐방은 경상북도 안동으로 갔다. 맨 처음 간 곳은 안동 영호루다. 버스 정류장에서 산길을 따라 올라가니 야트막한 산정에 영호루가 있다. 영호루는 팔작지붕 건물로 고려시대의 누각이다. 계단을 따라 2층 누마루로 올라갔다. 높은 주초 위에 둥근기둥을 세워 누마루를 짓고 사방에 난간을 설치했다. 1820년 영호루를 중수할 때, 안동부사로 있던 김학순이 쓴 낙동상류 영남명루洛東上流 嶺南名樓라는 현판이 크게 걸려 있다. 그외 영호루에 대하여 시를 지은 이황, 정몽주, 정도전을 비롯한 여러 역사적인 훌륭한 인물들의 친필 글이 걸려 있어 그 분들과 눈앞에 마주 선 느낌이다. 사방 벽면에 모두 시판 12점, 제영 1점, 현판 2점이 걸려 있다. 영호루의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려시대 김방경 장군이 원종 15년 1274년 일본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영호루에 들러 지은 시가 전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홍건적의 난 때에는 공민왕이 이곳에서 군사를 지휘했다는 기록도 있다. 1367년 공민왕이 내린 현판을 걸기 위해 확장하였다. 아침 햇살이 서서히 누마루를 밝히며 산의 나무들 사이로 안동 시가지가 보인다. 저 아래로 낙동강도 보인다. 원래는 저 건너 낙동강변에 영호루가 있었다. 여러 차례 홍수로 유실된 것을 복원해오다가, 1970년 현재 위치에 철근콘크리트로 새로 지었다. 영호루라는 현판이 두 군데 걸려 있는데 북쪽에는 공민왕의 친필 글씨가, 남쪽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글씨 현판이 걸려 있다. 한글로 쓴 '영호루'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글씨 현판을 보며 남쪽 긴 계단을 내려왔다.
*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
다음으로 탐방한 곳은 안동 법흥사지 칠층 전탑이다. 중앙선 철길이 지나는 안동댐 옆에 있다. 이곳에 안동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전탑이 서 있다. 철길 옆으로 난 허름한 차도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니 안동 고성 이씨 탑동파 종택인 기와집 바로 앞에 칠층 전탑이 우뚝 서 있다. 좁은 공간에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탑이 우람하다. 이 전탑은 7층의 높은 층수에 높이 17m, 기단너비 7.75m의 거대한 탑임에도 매우 안정된 자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규모가 웅장하고 장대하다. 위로 치솟아 올라 있는데도 육안으로 보아도 정말 안정감이 든다. 비례가 아름다워 국보 제16호로 지정되었다. 전탑이라는 이름이 생소하다.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만든 벽돌을 이용하여 쌓아 올린 탑을 말한다.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법흥사에 속해있던 탑으로 추정한다. 1단의 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을 튼튼하게 쌓아올렸다. 기단의 각 면에는 화강암으로 조각된 8부중상과 사천왕상을 세워놓았다. 기단 남쪽 면에는 계단을 설치하여 1층 몸돌에 지은 불상을 모시는 감실 방을 향하도록 하였다. 탑신은 진한 회색의 무늬 없는 벽돌로 쌓아 올렸다. 지붕돌은 위 아래 모두 계단 모양의 층단을 이루는 일반적인 전탑 양식과는 다르다. 지붕에 기와를 얹었던 자취가 있는 것으로 보아 목탑을 모방하여 전탑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기단의 윗면을 시멘트로 발라 놓아 아쉬움이 있지만 국내에 남아있는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이 칠층전탑으로 인해 안동을 전탑의 고장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니, 안동에서는 아주 소중히 여기는 역사유적이다. 몇 년 전에도 안동에 문학탐방을 왔었지만, 그때는 알지 못했던 안동의 새로운 역사유적을 알게 되고, 전탑에 대하여 배우게 되어 흐뭇하다.
* 안동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
안동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은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 바로 앞에 있다. 얼핏 보면 한데 묶인 유적 같지만 엄연히 다르게 분리된다. 원래 이 집터는 신라시대 고찰인 법흥사가 있던 자리다. 그런 연유로 지금도 이 집 앞에는 국보 제16호로 지정된 7층 전탑이 서 있는 것이다. 안동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은 1984년 1월 10일 중요민속자료 제185호로 지정되었다. 고성이씨 탑동파의 종가집으로, 조선시대 양반집의 면모를 두루 갖춘 집이다. 산자락 아래 안온한 위치에 넓은 규모로 기와집들이 들어서 있다. 안동댐 입구에 있는 임청각을 좌측으로 보고, 법흥동 영남산 동쪽 기슭의 넓은 대지에 들어서 있다. 칠층 전탑 앞에서 담장 너머로 바라보았다. 안채는 1685년 고성이씨 탑동파의 파조인 이적의 증손 이후식이 건축하였다. 그리고 그 손자 이원미가 사랑채와 대청인 영모당을 완성하였다. 대청의 북쪽에 사이를 두고 배치되어 있는 북정北亭은 1775년 현재 소유자의 7대조인 진사 이종주가 건립한 것이다. 1824년에 대대적으로 수리를 하였고, 1991년에는 정침을 개축하였다. 연못 뒤에 보이는 건물은 별당 형식으로 지은 것으로, 당호를 영모당永慕堂이라고 한다. 안동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은 도시 속에 있으면서도 한적한 산간 저택의 정취가 풍겨난다. 특히 연못, 화단 등을 조성하여수려한 자연경관과 함께 조화가 잘 이루어진 중요민속 자료다. 오늘은 청명한 가을 하늘과 울창한 너무들이 종택을 더욱 빛내고 있다.
* 안동 임청각
임청각은 신세동 칠층 전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다. 칠층 전탑에서 걸어서 갔다. 임청각 고택이나 전탑이나 모두 일제강점기의 피해를 겪으면서도 오늘날까지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소중한 가치의 문화재들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전돌로 만든 신세동 7층 전탑과 임청각은 일본인이 만든 철길 곁에서 아픈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고택 옆에는 조금 전에 다녀온 고성이씨 소종가도 있다. 이곳은 500년 역사를 지닌 안동 고성이씨의 대종택이다. 임청각은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살림집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한옥이다. 임청각이라는 당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귀거래사 구절 중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는 싯구에서 임臨자와 청淸를 택한 것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임청각은 귀래정, 영호루와 함께 안동 고을의 명승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높이 솟은 대문과 긴 담장이 고택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케 한다. 조선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원의 여섯째 아들 영산현감 이증이 이곳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최초로 여기에 자리잡은 것이다. 이후 이증의 셋째아들로 중종 때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이 지은 별당형 정자이다. 이 고택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1858~1932) 선생의 생가이기도 하다. 대대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대문에도 '국무령 이상룡 생가'라는 문패가 크게 걸려 있다. 안으로 들어서니 전통 한옥이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곳곳을 둘러보았다. 안방채와 사랑채 등 그 옛날의 생활상을 재현하며 잘 보존되고 있다. 원래는 99칸의 집이었으나 지금은 70여 칸만 남아 있다. 임청각의 별당 군자정은 목조 건물로는 보기 드물게 임진왜란을 겪은 오래된 건물이다. 군자정 대청에는 이현보 등의 시판이 걸려 있으며, 안동 임청각의 현판은 퇴계 이황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군자정은 丁자형의 누각으로 된 별당 건축으로,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된 대청이 남향으로 앉아 있고, 그 왼쪽에 온돌방 4칸이 연접하고 있다. 마루에 앉아도 보고, 정원을 걸어도 보고, 가을 모과가 떨어져 주워도 보고, 포근한 고향집에 온듯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나왔다.
* 안동 간고등어 중식
안동은 간고등어로 유명한 곳이다. 안동은 내륙지방이어서 바다의 소산물을 먹으려면 염장이어야 가능했던 시절에 고등어를 저장하여 먹던 풍습이 오늘날에도 이어오는 것이다. 몇 년 전에 안동 문학탐방 왔을 때도 헛제사밥 메뉴로 나오는 간고등어 요리를 맛있게 잘 먹었다. 오늘도 간고등어 요리로 중식을 한다. 낙동강변에 안동 간고등어라는 음식점 팻말이 크게 보이는 식당이다. 그리 짜지 않은 간고등어로 아주 맛있게 점심식사를 했다. 중식 후에는 길을 건너 가서 낙동강을 눈앞에서 보며 보람된 시간을 가졌다.
* 안동 낙동강 월영교
낙동강변 도로를 따라 걸어서 갔다. 도시와 산을 잇는 낙동강 월영교 月映橋가 장관이다. 즉 달빛이 비치는 다리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목조 나무판 다리가 낙동강 위에 길게 놓여 있다. 차량은 통제구역으로 사람들만이 왕래한다. 2003년 개통 되었다. 길이 387m, 너비 3.6m로 국내에서는 가장 긴 목책 인도교다. 약간의 오르막으로 진입하는 다리의 구조가 독특하다. 멀리 안동댐이 보인다. 한가운데에는 월영정月映亭이 있다. 월영교란 명칭은 안동댐 건설로 수몰된 월영대가 이곳으로 올 때 월곡면 음달골이라는 지명을 참고하여 주민들의 공모로 지어졌다. 이곳은 낙동강을 감싸는 산세와 안동댐으로 울타리를 친 형상이다. 밤 하늘에 달이 뜨면 천공으로부터 내려온 달은 강물에 흐르고, 달빛은 가슴속에 파고든다. 시간이 허락되면 밤의 정경도 보고 싶지만, 해 아래 걷는 월영교만으로도 가슴 훈훈한 달빛 정경이 눈에 선연하다. 월영교는 이런 고운 자연풍광을 드러내는 조형물이지만, 또한 이 지역에 살았던 이응태 부부의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다. 조선 중기의 여인이 먼저 떠난 남편을 위해 머리카락을 뽑아 한 켤레의 미투리를 지었는데, 그 지어미의 애절하고 숭고한 사랑을 기념하고자 미투리 모양으로 월영교 다리를 건설하여 2003년에 개통하였다. 그들의 아름답고 애절한 사랑을 기념하는 다리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는 월영교 목조 다리를 걸으며 그들의 숭고한 사랑을 배우고 있다. 달빛 드리운 월영교에 다시 한번 와보고 싶다.
* 안동 석빙고
낙동강 월영교를 걸을 때, 산자락 아래 왕의 무덤 같은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왕의 무덤이 아니고 석빙고였다. 월영교를 건너 수변 산책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서 산길을 올라 식빙고에 도착했다. 웅장한 화강암 석빙고는 길이 12.5m, 너비 6.1m, 높이 5.4m다. 얼음을 저장하려고 만든 창고다. 조선시대 영조 13년 1737년에 축조한 이 석빙고는 낙동강에서 많이 잡히는 은어를 국왕에게 진상하기 위해 축조되었다.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게 되자 1976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한 것이다. 입구를 북쪽 옆으로 낸 것이 특이하다. 봉토도 오롯하하여 겉으로 보기에는 커다란 고분 형상이다. 저 아래로 월영교가 보인다. 석빙고는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고 입구의 돌문에서 들여다 보았다. 안으로 계단이 있고 중앙에 물이 강으로 흐르도록 만든 배수로가 있다. 4개의 홍예를 세워 천장을 지탱해 주고 있으며 천장 곳곳에는 환기 구멍이 있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05호로 지정되었다. 그 옛날 우리 선조의 지혜가 돋보이는 유적지다.
* 안동호반 나들이길
월영교를 건너 석빙고를 갈 때도, 올 때도 안동호반 나들이길을 걸어서 갔다. 잘 조성해 놓은 산책로다. 곳곳에 안동에 관한 역사자료도 전시해 두었다. 연극배우 이주실이 고등학교 동창생인 서초문협 이운정 시인을 따라 동행해서, 나도 그분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가을 햇살이 내리는 길도 아름답고, 낙동강 물빛도, 월영교도 모두 이방인에게 주는 축복의 선물이다.
* 안동 병산서원
병산서원에 왔는데 먼저 반기는 것은 우람한 산이다. 낙동강을 딛고 우람하게 일어서서 외객을 반긴다. 석양이 내리는 긴 강변 모래사장이 해변을 연상케 한다. 다시 산을 뒤로 하고 병산서원으로 갔다. 입구의 정원이 아름답다. 병산서원은 경상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동에 있다. 1978년 3월 31일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말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으로 풍산유씨의 사학이었는데, 선조 5년 1572년에 유성룡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병산서원 마루에 앉아 보니 기와지붕 위로 솟구쳐 오른 산이 더욱 아름다운 풍경이다. 광해군 5년 1613년 정경세가 중심이 되어 지방 유림이 유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를 창건하고 이곳에 위패를 모셨다. 철종 14년 1863년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사원으로 승격되었다. 병산서원은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쓰러지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다. 제향공간으로 존덕사,·신문,·전사청이 있고, 강학공간으로 입교당,·동재,·서재가 있으며, 부속건물로 장판각,·만대루,·복례문, 주사 등이 있다. 유성룡의 문집을 비롯하여 각종 문헌 1,000여 종 3,000여 책이 소장되어 있다. 뒤켠으로 가 보니 배롱나무가 선비의 향기를 머금고 있다. 서초문인협회 회원 기념사진을 찍고 떠나 왔다.
* 안동 하회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