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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허장
전 광 용
울타리 밑에 개나리가 한두 송이, 비 온 뒤의 물기를 머금고 노랗게 봉오리를 벌렸다. 마치 새봄의 화사한 교향악의 서곡이라도 장식하려는 것만 같다.
꽃과 더불어 흘러간 일들이 되살아온다. 현숙(賢淑)은 그 격심한 경쟁률 속에서도 대학의 새로운 배지〔徽章〕를 달고 의기양양하던 감격이 불현듯 벅차오름을 느꼈다.
그럴수록 가슴속의 공허는 더욱 그 구멍이 커지는 것만 같았다.
목욕탕에서 돌아온 현숙은 경대에 마주 앉고 있다.
머릿속은 여전히 개운하지 않다. 좌우로 머리를 흔들어본다. 골속이 흔들리지는 않으나, 텁텁한 기분은 도무지 가라앉질 않는다.
간밤 수면 부족의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어저께의 일이 머릿 속에 감아붙어 헝클어진 실뭉치가 꽉 차 있듯 헷갈리는 답답증을 가셔낼 수가 없다.
1
곰곰이 따져보아야 약학과(藥學科)를 전공으로 택했던 것은, 어머니의 권유에 순종했던 결과만은 아닌 것 같다. 확실히 선택의 결과는 너무 공리적(功利的)이었음에 틀림없다. 그 책임은 또한 자신에게로 돌릴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생각도 곁들었다.
대학 지원을 앞두고, 자기는 얼마나 남몰래 고민하여왔던 것인가…… 어쩌면, 남자들과 한자리에 얼려 똑같은 조건 속에서 여자라는 핸디캡 없이 서로 겨루어보겠다는 부질없는 경쟁심이 선행(先行)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과외 공부를 마치고 난 현숙은 영희(英喜)와 함께 교문을 나섰다. 찬 바람이 목덜미를 스쳐 지나간다. 며칠 후면 겨울 방학이 시작된다지만, 그런 것에 관심을 돌릴 겨를도 없이 마음속은 조바심으로 설레었다.
“얘, 현숙아……”
나란히 걷고 있던 영희가 현숙을 건너다보며 말문을 열었다.
“응……”
현숙은 대답과 동시에 고개를 영희 쪽으로 돌렸다.
“넌 대체 무슨 과(科)를 할 테냐?”
“뭐 말이냐?”
현숙은 영희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은 아니면서 일부러 능청을 부려보았다.
“얘두, 어느 과를 지원하겠냐 말이야?”
“응, 그거…….”
“그거가 다 뭐야. 뻔히 알면서두…….”
“글쎄…….”
빤히 쳐다보는 영희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사실 현숙이로선 즉석에서 똑 잘라 대답할 답변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어코 약학과를 할래?”
“아직은, 몰라.”
“그럼?”
“좀더 생각해봐야겠어.”
“음, 아직 심사숙고의 단계에 있단 말씀이군.”
“그런 것도 아니지만…….”
“그럼 입학시험이 다 끝난 다음에 정할 작정이야?”
“애두, 넌 늘 빈정대기만 하니.”
싱글벙글하는 영희를 건너다보면서 현숙은 일부러 눈을 흘겼다.
“그걸 가지구 큰 비밀이나 되는 것처럼 감추니까 그렇지.”
“감추기는 누가 감춰…… 넌 어디로 했니?”
“내가 체육과(體育科)를 간다는 건 온 반 안이 다 알고 있는 건데, 뭐……”
“참, 그랬던가…….”
그제야 현숙은 얼마 전 담임 선생이 물으실 때 체육과라고 대답하던 일이 생각났다.
“그렇게 힘들이면서 대학 공부를 해선 뭐허니?”
“그럼…….”
“여자에게는 그저 대학이 해방의 마지막 시절이야. 어차피 시집만 가면 고생 구멍이 훤한걸.”
“하지만, 놀자구만 대학을 갈 수 있니?”
“그야 생각할 나름이지…… 재학 중에 우등을 하구, 무슨 상을 타구, 장안이 법석하던 우리 언니두 시집가고 나니 별수 없더라. 집 안에 틀어박혀 어린애 기저귀 주무르기는 매한가지구…….”
현숙은 아무 대답할 말이 없었다. 영희의 현실적인 논법(論法)이 수긍되지 않는 바도 아니지만, 그러한 관점 한 가지로 모든 척도(尺度)를 삼을 수만은 없을 것 같았다.
“체육과에 들어가 율동이나 하구 춤이나 실컷 추다가 쓸 만한 놈팽이나 얻어걸려 시집가면 그만이지…… 그 다음부터 다 뻔한 코스야.”
영희는 말뚱히 쳐다보며, 내 주장이 어떠냐는, 마치 동의를 구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글쎄 그것도 살아가는 한 방법이겠지만…….”
“하기야 너 같은 수재의 갈 길이야 따로 마련돼 있지 않겠니……”
영희의 말속에는 얼마간의 비꼬임이 섞였다고 현숙에게는 느껴졌다.
현숙은 낮에 담임 선생인 김(金) 선생이 하시던 말을 되새기고 있다.
“어때, 인젠 결정 됐어?”
“아니요, 아직도……”
“뭘 그렇게 주저하구만 있어.”
“오늘 다시 집에 가 상의해봐야겠어요.”
“글쎄 상의하는 것도 좋지만, 본인의 의사는 어떤가 말이야?”
“저, 자신으로도 아직 명확한 방향을 세우지 못했어요.”
“지원 마감도 임박했는데, 아직도 머뭇거리고 있으면 어떻게 해.”
“저, 선생님 생각은 어떠세요?”
현숙은 긴장됐던 기분을 늦추면서 선생님의 입술을 지키고 있다.
김 선생은 현숙의 얼굴을 훑듯이 말끄러미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현숙의 경우같이 특별히 뛰어나는 특질이 없이 모든 과목이 평균적으로 좋은 경우가 전공(專攻)을 가려내기 가장 힘들단 말이야·…‥”
현숙은 묵묵히 듣고만 있다. 김 선생은 담배 한 모금을 길게 빨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어때, 그 속에서도 비교적 소질이 엇보이는 분학을 전공하면?”
김 선생은 현숙의 의향을 기다리며 말끔히 쳐다보고 있다.
“글쎄요…….”
맥 빠진 이런 대답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밖에 단안을 내릴 만한 자기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도 하였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집에 가서 상의도 하고 본인으로도 잘 생각해봐요. 누가 뭐라 해도 본인의 의사가 가장 중요한 것이니까…….”
“네, 알겠어요.”
“창창한 앞길이야 쉬 예단할 수는 없지만, 우선 소질이 좀 나은 쪽으로 택하는 것이 가장 무난할 거야.”
복도로 걸어 나오면서도 현숙은 도무지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평생을 세속적인 명리(名利) 영달(榮達)에 초탈(超脫)하여 자기의 자존(自尊)을 고수하면서 문필 생활을 일관하여 온 아버지의 말년에서 받은 바 충격이 너무나 컸기에 현숙으로서는 선생님의 권유에 그대로 추종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적인 부담 능력에 꿀려서 어머니의 승강이질 앞에 가장(家長)으로서의 체모마저 유지될 수 없는 아버지, 그 아버지의 현실적인 생활상을 뻐저리게 느끼며 목격 해오지 않았던가.
이제는 자기 깐의 세상을 보는 안목(眼目)이 어느 정도 기준이 서간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는 현숙으로서는, 이제 다시 계속하여 아버지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 또한 그러한 세습적인 상속은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한 태도가 거의 노골화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보다도 혼자서 자활(自活)할 수 있는 실리적 (實利的)인 과를 택하라는 어머니의 생각도 일리가 없는 바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2
집에 돌아온 현숙은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서 최종 결정을 내리려고 마음먹 었다.
“아버지……”
“응……”
아버지는 보고 있던 석간신문에서 눈을 돌리며 이쪽을 건너다보고 있다.
“저, 학교에서 지망 학과를 빨리 결정하라는데……”
“글쎄, 네 생각은 어떠냐?”
“제가 뭘 알아요.”
현숙으로서는 우선 이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너, 엄마는 뭐라든?”
“어머니……”
현숙은 아버지 물음에는 곧장 대답을 하지 않고 옆방에 있는 어머니를 불렀다.
“왜들 갑자기 호출이냐.”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서며 남편과 딸을 번갈아 둘러보고 있다.
“어머니, 나 대학 어디로 가면 좋아?”
“글쎄, 그런 건 너 아버지더러 의논하렴.”
어머니는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면서 자리에 앉았다.
“모두, 서루 미루기만 하면 어떻게 해. 내일까지 꼭 결정지으라는데…….”
“대체 너 담임 선생은 뭐라 하시든?”
어머니가 먼저 물었다.
“문과(文科)를 하면 어떠냐구요.”
“글쎄, 그것도 괜찮겠다만, 그건 선천적 재질을 타고나야만 한다. 노력도 노력이지만…….”
“얘, 그런 궁상 띤 소리 좀 작작해라.”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가 거센 목소리로 불쑥 사이에 끼어들었다.
“괜한 소리…….”
“괜한 소리긴…… 그래 기집애가 할 일 없어 제 애비같이 허구헌 날 그 바둑판 같은 원고지만 메꾸어가겠니, 누구 하나 장하다는 사람도 없이…….”
“이 사람은 척하면, 왜 그 죄 없는 원고지만 들구 나서는 거요.”
아버지는 시무룩해서 신문을 뒤적이며 어머니 쪽은 보지도 않고 말한다.
“그저 자식새끼 굶어 죽이게 꼭 알맞지.”
어머니는 발끈 상기되어 대꾸를 하고 있다.
“사람두…… 그래 이 집에서 누가 길거리에 나앉게 됐어?”
“에구, 그저 깡통 차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지…….”
“또 저런 밥버러지 같은 소리를…….”
어머니와 아버지의 대화를 들으면서 현숙은 그 새에 끼여 어쩔 바를 몰라 했다.
“얘, 여자란 별수 없느니라.”
아버지는 현숙이를 바라다보며 말을 또박또박 이어갔다.
“시집만 가면 남편 덕으로 먹고살아야지. 그래도 아무개의 부인이랄 때가 여자로선 행복할 수 있는 거야…….”
“에이구, 선화당 서겠소.”
아버지는 어머니의 옆 찌르는 말은 듣는 등 마는 둥 말을 계속했다.
“그저, 누구의 남편이라고 부인 위주의 가정이 된다면, 남 보기엔 허울좋아도 집안 살림이란 엉망이 되기 일쑤고…… 그나 그뿐인가, 남편이란 주눅이 들어 제구실도 바루 못하게 되면 빛 좋은 개살구처럼 겉만 번지르르하고 안속은 엉망이 되기 일쑤란 말이야. 봐라, 신문에도 가끔 나지 않니…….”
“얘, 느 아버지 생각은 이젠 아주 낡아빠진 구식이다. 요샌 부부간이 같이 벌어서 서로들 잘살기만 하드라…… 여자도 이젠 자활할 수 있는 기술 하나씩은 배워둬야지.”
“글쎄 주부는 역시 집 안에 있어야 한 대두……”
“당신, 그런 호랑이 담배 먹던 때 이야기 좀 작작 해요…… 여자두 밖에 나가 활동을 해야지……”
“그게 바루 집안 망치는 시초라니까…….”
“망치긴…… 그래두 집 안에 틀어백혀 골골 창자를 쥐어짜는 것보담야 낫지.”
“음…….”
아버지는 큰기침을 하며 돌아앉는다. 그러나 어머니는 조금도 양보가 없다.
“얘, 그저 아무 말두 말구, 약학과를 해서 면허장(免許狀) 하나라두 타놓아라…… 바쁜 목에라도 써먹게……”
“글쎄, 너 모녀 생각대로들 해라만, 여자란 남들이 보통 하는 가정과(家政科)나 택하여 대학 맛이나 보다가, 재학 중에라도 좋은 혼처가 있으면 결혼하는 게 그저 상책이니라.”
“에구, 그 고생살이를 그렇게 일찍 시키면 뭐하겠수. 시집가는 날부터 그 꼴인데…….”
“그럼, 평생 데리구 있구려…….”
아버지는 참다못해 농이 어린 웃음을 터뜨리고야 만다.
“그럴 수도 없지만…….”
어머니도 그 이상 더 버티어나가지는 못하는 것만 같다.
현숙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다 한국 여성이 처한 현실적 조건을 몸소 체득하고 거기서 우러나는 의견을 얘기하는 것이라고 느껴졌다.
그러나 어찌 보면 아버지는 기성 생활의 타성을 이어받은 소극적인 생각이고, 거기 비하면 어머니는 현대적인 직업여성을 가장 이해할 수 있는 적극적이고도 실용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아무튼 이러한 집안에서의 상반되는 양친의 견해에다 자기로서의 생에 대한 자세라 할까, 적어도 자기 삶의 미래의 지표를 냉철히 응시하는 계산이 종합된 현명한 답으로 채택된 것이, 지원 마지막 날에 입학 원서에 기록된 약학과의 전공 선택이었다.
현숙이도 자기 나이 또래의 다른 친구들이 예사로 하는 것처럼, 재학 중의 혼담에는 일절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친구가 어쩌다가 농조로 좋은 신랑감이 있다는 이야기를 집안 식구의 분위기에서 예사롭게 끄집어내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혼담이라는 것을 마치 불순하고 추잡한 일같이만 여기어, 어떤 때는 내심 모욕감과 더불어 혐오증까지 느껴가며 반발하였던 것이다.
그만큼 결혼이라는 것이 당시의 자기로는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진 절박한 것으로는 여겨지지 않았었다. 동창생 중 누가 약혼을 하였다 해도 그저 그렇거니 하고 남의 일처럼 한쪽 귀로 흘려보냈던 것이다.
또한 그러한 태도가 고고하고 자랑스럽게만 여겨지기도 했었다.
어머니처럼, 그 시절에는 여자로서는 드물게 다닌다는 전문학교를 졸업하고도, 자기의 전공이나 기능은 살릴 길 없이 남편의 시중을 들고 자식들의 치다꺼리에 얽매이고, 극단으로 말하면 거의 노예처럼 집안 살림을 꾸려가는 데 혹사되어 심신이 지쳐가는 것을 보면, 결혼이라는 데 대한 염증마저 솟구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숙의 마음속에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버지 말대로, 결혼이란 반드시 하여야 할 것인가, 결혼을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것일까, 그러한 문제와 대결하여 적극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대학 졸업 이후의 일이었다.
3
자기가 좋다고 택하여 들어간 대학이지만, 학창 생활의 환희를 마음껏 느낄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일류 고등학교의 우수한 남학생들과의 격심한 경쟁에서 몇 안 되는 여학생 속에 끼여 입학하였다는 것이 자랑스러워,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 마음대로 될 것으로만 느껴졌다. 자기가 하는 일에는 불가능이라는 것이 없을 것같이 푸른 하늘을 훨훨 날고만 싶은 희망에 찬 꿈에 잠겼었다. 부모들도 자기를 더한층 대견스럽게 여겨주는 것으로 마음에 겨울 정도의 만족을 느끼기도 했다.
그것이 차츰 남학생에게 지지 않겠다는 암암리의 경쟁심리 속에서 고된 강의를 지탱해나가기에는 벅찬 감이 느껴져왔다. 아무래도 여자로서는 힘에 달리는 경우를 체험하지 않을 수 없게끔 되었다.
약냄새가 코를 찌르는 실험실에서 신경이 지칠 정도의 실험 과정을 감내해나가는 사이에, 간혹 이렇게 고된 학창 생활이 종국에 가서 자기에게 무엇을 가져다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칠 때는 한 가닥의 회의가 싹트지 않을 수 없었다.
오히려 심한 경쟁률도 없이 자기가 가고 싶은 과를 마음대로 택하여 학과에 대한 과중한 부담도 없이 가벼운 기분으로 학교엘 다니는 영희가 부러웠다.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얼려서 영화 구경이니 음악 감상이니 파티니 하고 경쾌한 심정으로, 마치 꽃동산의 나비처럼 기분 내키는 대로 몰려다니는 그들을 볼 때마다 번져오는 선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말하자면, 그들이 말하는 청춘의 엔조이 대열(隊列)에서 자기만 동떨어져 예외자로 따돝림을 받는 것 같은 고독감마저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는 분명 여자다. 그리고 남들과 같은 평범한 여자임에 틀림없다. 남들보다 다소라도 뛰어난 것처럼 생각되었던 자긍(自矜)도 날이 갈수록 엷어지고, 자기가 아는 것이란 보잘것없는 적은 것이라는 심정 이 자꾸만 앞을 가려왔다.
장차 내가 무엇을 하려고 이러는 것일까, 그는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버둥대고 있었다.
거기다, 졸업반에서는 약제사 면허 시험 때문에 일반 대학생의 졸업 시험 준비 이외의 힘든 고비를 하나 더 치러야만 했기에 코피를 쏟으면서까지 남모르는 고생을 하였었다.
무엇 때문에 하필 이런 코스를 인생의 초입에서부터 택하였을까 하고, 제 자신에게 반문하기도 했다.
자신을 더 쓰라리게 채찍질하는 것이 좀더 진지한 삶을 이룩하려는 인간으로의 성실한 태도라고 자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곧 남성들에게나 필요하지, 자기 의사보다는 남편의 의사에 추종하여 살기 마련인 현실적인 조건 아래에선 여자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하는 반발이 치솟아옴을 어쩌는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들어선 길을 이제 방향을 바꾸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다. 이제는 이왕 정해진 길이니 좌절하지 말고 골인하여 자격증(資格證)을 탈 때까지는 우선 제일 단계의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그것이 지금의 자기로서의 삶의 보람이다. 그 다음은 또 그때에 맞다다라 할 일이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격려하기도 했다.
주위의 쉽게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이러한 자기독려(自己督勵)는 점차 도를 가하는 자학(自虐)으로 이끌려졌다.
4
졸업 증서에 겹쳐 약제사 자격증을 수여받은 순간은, 그사이의 모든 숨은 쓰라림이 한꺼번에 풍선처럼 가셔져가는 것을 가슴 시원히 의식했다.
중도에서 굴하지 않고 초지일관하여 자기가 지향하였던 제일 목표에 도달하였다는 것, 그것은 비길 바 없는 삶의 보람 같기만 했다.
현숙은 무거운 짐을 푼 것처럼 거뜬한 기분으로 거리에 나섰다.
졸업식이 지난 후 친구들이 모인 댄스파티에 참석하여도 춤을 출 줄 모른다거나 자기만이 보이 프렌드 없이 왔다거나 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아무 비굴감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충실하게 학창 생활을 지속하여온 자기의 인생에 대한 성실성의 반영이라고 해석하여, 자위 이상의 자긍을 스스로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여학교 성적도 신통치 않았고, 대학에서도 쉬운 방향으로만 살아가려는 방법으로 일관한 몇몇 친구들이 재학 중에 사귄 남성들과 사랑이 깊어지고, 그 연분으로 자기들의 안목에 따르는 조건이 구비되어 재빨리 시집가는 것을 볼 때마다, 그렇게 다져먹은 마음속에서도 허전한 감정이 움터 나옴을 막는 수가 없었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풀어뜨린 머리는 아직 물기를 머금은 채 윤기가 번지르르하다.
얼굴은 양 뺨의 토실한 탄력과 더불어 여학교 때보다 별로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눈 가장자리에 가는 주름이 서리기 시작하고, 이마가 더 벗어진 것이 유난히 거슬리게 눈에 뜨인다.
루주나 아이섀도는 물론 짙은 화장이라곤 거의 한 일이 없지만, 한두 줄의 엷은 주름을 메우기 위하여 화장도 짙게 하고 싶고, 이마의 머리카락도 앞쪽으로 슬쩍 내려 빗어야겠다는 생각이 얼핏 머릿속을 스쳐간다.
한참 잊었던 어제 일이 또 뭉클 가슴속으로 치켜 오른다.
5
결혼 문제, 그것은 아무리 무관심 한다 해도 인간 일생의 중대한 일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게끔 되어온 자신을 현숙은 거의 부정할 수 없게끔 되었다. 졸업이라는 것이 그러한 사고 방향으로 이끌어오는 가장 큰 분수령이 되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결혼을 한다면 하는 그것대로 대상의 선택 문제가 벅찬 마음의 부담으로 느껴져왔다. 왜냐하면 운명입네 하고 자기 앞에 주어지는 조건 그대로 수동 태세를 가지거나, 그렇잖으면 제비 뽑듯이 소극적인 관여로서 체념할 수는 없는 문제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결혼을 하지 않으면 않는 대로 무슨 뚜렷한 지표가 있고 필연적인 이유가 천명되어야 할 것만 같았다. 무턱 대고 안 간다는 식의 안가¹하고도 막연한 삶의 방도는 이제 취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결국 자기 자신도 아버지의 사고방식대로, 계집이란 나이 차면 으레 시집을 가서 남편을 섬기고 아기를 낳고 그저 그렇게 사느니라는 지극히 평범한 방법 그것을 되풀이하는 무난한 코스에 이미 무의식중에 접어든 것이 아닌가 하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은 충동도 야릇한 불안과 함께 겹쳐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실지에 있어서는, 그러한 중대 문제의 당사자인 자기 자신보다 왜 주위의 사람들이, 아니 자기 자신이 아닌 남들이 더 서둘러 대는 것일까.
설령 살을 갈라 난 부모라 할지라도 이 문제에는 궁극에 가서는 남인 것이다. 그것은 죽음을 여하히 가까운 자기 자신 이외의 남도 대신할 수 없듯이, 결혼 생활도 아무리 분신(分身)과 같은 육친이라 할지라도 대신하여 치러줄 수는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주위의 모든 것이 거추장스럽게만 느껴진다. 그저 혼자 있고만 싶다. 아무도 자기의 사생활을 간섭하지 말았으면 하는 심정이다.
졸업 후 삼 년의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스물일곱의 고개를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넘겨버렸다. 이제는 자기 자신보다 부모들이, 아니 집안이니 근족²이니 하는 이웃들이 더 서둘러대고 걱정들을 하고 있다.
그것보다는 만나는 사람마다 농인지 진실인지 몰라도, 지나가는 말곁으로 마치 생사에나 관계되는 것 같은 심각한 표정으로 시집 참견을 해주는 데는 참말 고마운 생각이란 눈곱만치도 없고, 성가시고 귀찮기 짝이 없는 일만 같게 여겨졌다.
6
영희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던 날의 일이다. 고등학교 졸업반 담임 선생이었던 김 선생을 그 자리에서 만나 뵙게 되었다.
식이 파한 후 오래간만에 만난 은사를 모시고 다방엘 들어갔다. 학교나 동창생에 관한 이야기가 자연히 화제에 오르게 되었다.
누구는 어디에 취직해 있고, 아무개는 이미 결혼해서 아이가 몇이고 하는 주변적인 이야기로 번지었다.
“그래 현숙인 결혼 안 해?”
김 선생의 담담한 말은 현숙의 가슴을 쿡 찔렀다. 또 걸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도 같은 질문을 자주 받기에 상대는 평범하게 한 말인지 몰라도 듣는 쪽은 성가시고도 귀찮은 일이었다.
“왜 안 해요…….”
대답은 본의 아니게 뾰로통하게 나왔다.
“그럼 언제 할 작정이야?”
숭굴숭굴한 김 선생은 아무 악의 없이 그대로 말을 이어가지만, 현숙은 그러한 이야깃거리에서 피하고만 싶었다. 그러나 묻는 말에는 싫어도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가 있어야 하죠.”
“그래, 대학을 졸업하구 몇 해씩 있어도 상대가 없다면, 원 말이 돼야지……”
“사실이 그런걸요.”
현숙은 되는대로 그저 받아넘겼지만, 김 선생은 점점 진담으로 듣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나이 있는데 결혼은 제때에 해야지…….”
“누가 시집보내주는 걸 안 가나요?”
현숙의 어조는 태연한 것 같으면서 가시가 돋쳐 있었다.
“그럼 내가 보내줄까?”
김 선생은 또 그대로 받아넘긴다.
“참말, 어디 보내주세요.”
“그게, 진심이야?”
“그러믄요.”
“그럼 보내주지…….”
이쯤 되면 현숙이도 그대로 웃어넘길 수밖에 없다.
“가만있자……”
김 선생은 머릿속에서 무엇을 찾는 표정을 짓다가 말을 이었다.
“좋은 후보자가 있어. 아주 좋아.”
“병역은 끝내고…… 직장도 있고…… 내가 곧 서로 만나두록 연락해보지.”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났다.
현숙은 예사로 있는 이러한 경우이기에, 그날 이후 그대로 깡그리 잊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김 선생에게서 좀 만나자는 연락이 왔기에 어저께 나갔던 것이다.
낯선 젊은이와 나란히 앉아 있던 김 선생은 자기를 반기면서 건너편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현숙은 육감에 스쳐지는 것을 느끼며, 언젠가 김 선생을 만났을 때의 농담 같은 이야기를 회상하는 것이었다.
김 선생은 두 사람을 소개하며 인사시켰다. 그러나 젊은이의 성명은 듣는 순간으로 잊혀졌고 김 선생이 연신 이(李) 군이라고 부르는 데서 이씨라는 것밖에 기억에 남지 않았다. 서로의 대화는 대체로 김 선생이 사이에서 유도하였다.
현숙은 젊은이의 질문에는 답변하면서도 자기 편에서 직접으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김 선생의 소개로, 대학 재학 중에 군에 입대하였다가 제대하여 대학을 마치고는 국영 기업체에 직장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의 윤곽을 들었을 뿐이다.
아무 마음의 준비도 없이 나온 걸음이지만, 첫인상이 비교적 괜찮았고 저쪽도 적잖은 호의를 가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젊은이의 마지막 한마디가 자꾸만 귀에 거슬려왔다.
한다는 이야기가, 순조로이 진행되어 만약 결혼을 하게 되면 자기는 직장에 있고 이쪽은 약제사 면허장을 가지고 있다니까 약방을 내어, 서로 같이 벌면, 비록 박봉일지라도 우선 경제 문제는 타개될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다.
현숙은 순간, 가슴에 몽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극히 솔직 담백한 성격이라고 우선은 어느 정도 선의의 해석이 갔다. 그러나 곱씹어 생각할수록 그 말 속에 담겨 있는 꾀죄죄한 남성의 메스꺼움을 금할 길 없었다.
‘이건 나하고 결혼하자는 것이 아니라, 면허장 대상으로 하자는 건가.’
자기의 부질없는 결벽성의 탓이라고 불쾌한 감정을 억누르려고 하였으나 도무지 개운하지 않았다.
현숙은 김 선생에게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다방 문을 나서고야 말았다.
7
졸업 직후, 약제사 면허증은 약방에 명의를 빌려주었었다. 달마다 이만 환씩 받는 돈으로 동생들의 등록금에 보태왔었다.
지난가을에는 집 칸살이를 줄여서 마련한 차액으로 약방을 차려놓았다. 어머니와 함께 노상 거기 나앉아 구겨져가는 집안 살림을 메워가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질구레한 집안 사정을 소위 맞선 자리에서 토로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오히려 남자 쪽의 너무 섬세한 타산이 뻔뻔스럽게만 여겨졌다.
대학에서 국민학교까지 줄지어 다니는 동생들의 학비나마 이 약국의 덕분으로 비교적 쉽게 타개되어, 어머니는 적잖이 숙원(宿願) 달성의 안도를 보이고 있는 요즈음에, 현숙으로서는 앓는 상처에 손이 닿는 것 같은 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현숙은 다시 경대 속의 자기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볼수록 자기 자신이 가엾게만 여겨졌다.
딸에게 약학을 전공시켜 이제 의젓한 약방까지 내어 소원 성취한 어머니의 만족한 웃음 띤 얼굴이 가증스러워지는가 하면, 그 면허장을 큰 밑천으로 알고 혼인의 미끼처럼 생각하는 신랑 후보자의 타산이 더욱 얄밉게만 여겨졌다.
그보다는, 인생을 공리적인 계산으로 따져서, 그것이 더욱 여자가 만일 불행하게 되어도 자기 혼자 자립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미래의 인생 계산서까지 적으나마 염두에 두고 전공을 선택한 데 지나지 않는 자기 자신이 미욱하고 역 겹기만 했다.
결국 아버지가, 여자란 제 손으로 벌 생각을 하지 말고 남편의 품속에서 편안하게 살 것을 생각해야지, 아직 닥쳐오지도 않은 미래의 불행을 예측하고 전공을 택한다는 것은 얼마나 인생을 불안하게 보고, 공리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냐고, 그 특유의 유머로 이야기하던 것을 새삼스러이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현숙은 풀어진 머리대로 경대 앞에서 불끈 일어섰다. 아직 순결하고도 적나라해야만 하는 삶의 출발 지점에서부터 약삭빠르게 이해타산으로만 자를 대고 인생을 계산한 옹졸한 자기 자신이 얄미워 입술을 꽉 깨물었다.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책상 위에 엎드러졌다.
복받치는 울음을 참을 길 없다. 아직 꽃도 활짝 피기 전에 봉오리 때부터 너무 세파의 폭풍에 대한 공포증을 스스로 과도히 예기한 자기 자신을 비웃는 조소가 터져 나왔다.
현숙은 밖으로 나왔다.
‘흥, 인간 거 래의 매개장(媒介狀)……’
그는 코웃음을 퉁겼다.
얼마 후, 존귀한 가보(家寶)처럼 아담한 유리 액자에 넣어 현숙의 방 뒷벽에 소중히 결려 있던, 그의 조그만 사진이 한 귀에 붙은, 약제사 면허장은 유리가 산산조각이 난 채 뜰 구석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끝-
2016년 7월 5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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