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건국과 1차 이념 전쟁(이승만 대 김일성, 공산당 선언)_고성국 박사: 정동수 목사, 사랑침례교회, 킹제임스흠정역성경, 설교, 강해, (2023. 5. 7)
https://m.youtube.com/watch?v=bgL1DYQvVnw
출처 https://band.us/band/63813585/post/4814
대한민국 공산주의자 생성과 사건들!!
■서론(배경):공산주의 탄생
칼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에 따른 공산혁명이1917년 레닌에 의해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성공하게 되었다.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 후 공산주의 관련 서적들이 대거 세계 여러나라에 퍼지면서 그 서적으로 공산주의를 공부하는 열풍이 불게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의 목표는 전 세계를 공산화시키는 것이었고, 얼마 후 청나라가 붕괴되고 혼돈기에있던 중국에서 모택동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자들이 당시 중국을 통치하던 장개석의 국민당정권을 무너트리고 중국마져 공산화하는데 성공을 하게 된다.
■본론: 한반도 유입 배경
1917년 볼세비키 혁명 이후 당시 일제 강점기의 조선사람들 중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이론을 공부한 허가이, 조봉암, 여운형과 중국에서 공부한 김원봉, 김재봉, 김두봉 그리고 일본에 파견되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일본의 승리하도록 작용했던 러시아 사람 "조로케"에 의해 일본에서 생성된 공산주의자들에게 일본 유학파로서 공산주의를 공부한 김삼용, 이주하, 김약수, 하준수, 박갑동이 있으며, 국내에서 공산주의 서적을 통해 자생적으로 공산주의자가 되었던 박헌영 등 해방공간의 조선에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득실대는 상황에서 8.15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제시대 나라를 잃은 지식인들의 눈에는 역사관과 경제관에 대한 뚜렸한 이념이 없는 자본주의에 입각한 민주주의의 약점들이 드러나던 시대라서 공산주의의 역사관인 변증법적 유물론과 경제학 이론인 자본론 이론은 애국심을 키우는 도구가 되기에 안성마춤이었다.
그리하여 일제치하에서부터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자로 양성되기 시작했는데, 러시아에서 공산주의를 공부한 사람들과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공산주의를 공부한 사람들, 그리고 조선에서 공산주의 서적을 통해 공부한 사람들의 세 부류의 공산주의자들이 있다.
■남한내 공산주의 발생 배경:
그 당시까지 중국이나 일본이나 조선이나 할 것 없이 대다수 백성들이 절대군주의 노예이거나 왕정정치의 폭압정치에 억눌려 살던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없이 똑같이 일하고 필요에 따라 평등하게 분배한다는 공산주의 이론을 들으면 거부할 이유가 없었기에 공산주의는 쉽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1945년 8.15 광복 때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되기도 전에 이미 제주도민의 70% 가까이, 그리고 전라도민의 상당수가 공산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그러던 차에 1945년 8월14일 일본의 무조건항복이 결정되자 조선총독 아베(阿部信行)는 80만 일본인의 안전과 재산보호, 10만 일본군대의 철수 등 항복 후 사태를 염려하여 저명한 한국 지도자에게 행정권을 넘기고자 했다. 총독부는 여운형을 그 적임자로 보았으며, 이미 일본의 패전을 확신하면서 건국동맹을 결성, 이후의 사태에 대비해온 여운형은 이를 받아들이고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했다.
"전 조선의 정치범·경제범 즉시석방, 경성에 3개월분의 식량확보, 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간섭치 말 것. 학생 및 청년의 조직화에 간섭치 말 것.
조선 내 각 사업장의 일본인 노무자를 우리 건설사업에 협력시킬 것"
총독부가 이 조건들을 수락하자, 해방 당일 건국동맹위원을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17일 부서결정을 마치고 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안재홍, 총무 최근우(崔謹愚) 등이 선임되었으며 25일 선언과 강령을 발표했다. 건준은 치안확보, 건국사업을 위한 민족총역량의 일원화, 교통·통신·금융·식량대책 강구를 목표로 하여 반민족적 친일세력을 제외한 각계각층을 총망라한 좌우연합의 일종의 통일전선체였다. 여기에 불참한 것은 송진우를 비롯한 일부 우익 진영이었다. 일제하에서 민족개량주의를 부르짖고 친일경력을 가진 지주 세력인 이들은 <임시정부 봉대>를 내세우며 참여를 거부, 후에 한민당(韓民黨)을 결성했다. 건준은 설립목적을 알리는 담화문을 발표하고, 조선총독부로부터 치안유지권 및 방송국·언론기관 등을 이양받았다.
그런데 총독부는 갑자기 태도를 바꿔 행정권 이양을 취소하고 경찰서·신문사·학교 등을 다시 접수했다. 이는 미군선발대가 비밀리에 서울에 와서 "일본의 통치기구를 그대로 미군에게 인도 할 것"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준의 활동은 계속되어 8월 말까지 전국에 지부로서의 인민위원회가 145개 세워졌으며, 당시 민중들의 지지를 받는 유일한 전국적 정치세력을 형성, 미군이 진주하기 이틀 전인 9월 6일에는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경기여고에서 열고, 국호를 조선인민공화국이라 결정함과 아울러 이날 정부 각료 명단을 발표하기까지 했으나 우익진영에 의해 벽상조각(壁上組閣)이라고 비난받았다. 게다가 내부에서 좌익의 영향력이 확대됨에 따라 안재홍 등 민족주의자들이 탈퇴하고,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하였으나 곧바로 건준조직은 자연 해체되었다.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해체된 주된 이유는 여운형 및 핵심세력들이 공산주의 신봉자들이었고 이들이 건준을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을 결집하여 건준을 그들의 영향권 하에 움직이게 하려는 의도를 알아챈 이승만과 반공주의자들이 건준에서 탈퇴하였고, 조선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국가가 건국되기를 원했던 미군정이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였던 이승만을 앞장세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북한은 이미 러시아에서 내세운 김정일을 중심한 공산세력이 장악한 상태여서 남북이 통일된 자유민주국가의 건국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였고, 미국에서 공산주의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던 이승만은 할 수 없이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된 것이다.
■해방(정부수립)후 공산주의와 대립된 남한내 사건들;
그러나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된 대한민국 자유민주국가를 전복시키기 위하여 남한내 공산당 조직인 남로당이 제주에서 시민폭동을 일으키니 이를 4.3제주폭동사건이라 한다.
그리고 제주폭동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공산주의남로당원이었던 여수와 순천의 사단장들을 통해 쿠테타를 도모하는 이른바 여수 순천 반란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그 이후 대구폭동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남로당 청년당원이었던 박상희를 통해 동생이었던 박정희 장군도 남로당에 가입해 있었던 사실이 밝혀져 박정희도 체포되었으나 경찰에 적극 협력하여 자기가 알고 있던 군부내 남로당 원들을 체포하고 일망타진하는데 큰 기여를 하면서 다시 군부로 돌아가 장군으로 복직하던 중 5.16 군사혁명을 통해 집권하면서 강력한 반공정책을 펼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박정희대통령은 북한의 김일성에게는 철천지 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정권과 박정희 정권의 강력한 반공정책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남로당 잔존세력과 북한에서 침투시킨 고정간첩, 공산서적을 해외에서 구입해서 독학으로 공부하여 운동권의 핵심세력이 된 주사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중 김일성으로부터 정치자금을 지원받으면서 항상 민주화의 기수로 자타가 공인하는 남한 내 최고의 고정간첩으로서 유일하게 국회의원이 된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대중이었다.
김대중은 이미 청년시절부터 맹렬한 공산주의자로 이승만의 자유당정권시절에도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대기중 어느 유력인사의 도움으로 석방된 이후에정치인이 되어 민주화를 가장한 채 미국 한인회와 일본 조총련계를 통해 공산주의자들과의 인맥을 형성해 음으로 양으로 지원을 받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정책에 무조건 반대하고 끝없이 정부전복의 기회를 노려왔다.
김대중은 정권을 흔들기 위해 갖가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 대형사건들을 김일성과 함께 기획하고 진행하였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조총련 청년을 통한 육영수여사 저격사건이며,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3김시대가 도래하였으나 당시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을 수사하던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씨가 정권을 잡으려는 것을 눈치채고 북한의 김일성과 미리 짜고 북한 특수부대를 남한에 침투시켜 내란을 유도한 것이 이른바 5.18광주사건이다.
이에 전두환정권은 사형선고를 하였으나 미국의 유력정치인들 중 김대중을 보호하는 정치인들의 보호에 힘입어 다시는 정치를 하지않는다는 조건으로 구사일생 되었다
만일 5.18 내란음모가 성공했더라면 그때 벌써 대한민국은 사라지고 김일성이 통치하는 공산화통일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전두환합수부장이 5.18을 강제진압한 것은 본인은 모르고 정권욕에 한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하늘이 대한민국을 보우하사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김대중의 계획은 무산되었고, 민주화의 열망에 의해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