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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I Love Soccer (축구동영상) 원문보기 글쓴이: 윤복희
이름: 이 동 국
생년월일: 1979년 4월 29일 출생
태어난 곳: 경북 포항
가족관계: 이길남父 김명자母씨의 2남1녀 중 막내
포항동부초-포철동초-포철중-포철고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포항을 떠나지 않았고, 그 후 K리그 프로팀인 포항에 이르기까지
그는 포항을 대표하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로 자리 잡는다.
원래 그에겐 축구화 대신 발에 육상화가 신겨져 있었다.
100m와 200m가 주종목. 초등학교 3학년 때 가능성을 엿본 포철초등학교 축구부 코치선생이 그에게 축구입문을 권유
그리고 고등학교 포철공고 재학 당시 올 고교대회 득점왕,MVP 차지
96 시.도대항MVP 96대구 MBC 대회 득점왕 97KBS배 봄철연맹전 득점왕,MVP
전국대회 3번 출정하며 우승 두번 준우승 한번
(이동국이 있던 포철공고와 프로팀 포항과의 연습경기가 있는 날이면 프로선배들을
쩔쩔 매게하고 '쟤 고등학생맞아?'라며 혀를 내두르는 모습을 보는 것이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였다.)
이미 그때부터 '제2의 황선홍','황새를 능가할 초신성'과 같은 그의 애칭에서
알수 있듯이 대형스트라이커에 목말라있던 한국축구에서
그는 떠 오르는 초대형 샛별이였다.
(홍명보와 라데의 일본J리그 진출 황선홍의 부상결장으로 스타를 잃어버린 포항의 축구팬들은 이제 겨우 고3인
그에게서 희망을 찾는다. 어쩌다 택시를 타도 무료 '좋은 선수가 되는 것이 차비다'라며 받으려 하지 않았다고..)
1996년 부터 1997년까지 청소년대표로 뽑혀 활약을 하고
1998년 아시아청소년축구국가대표로서 또한 활약을 한후
차범근 감독에게 발탁되어서
1998 프랑스 월드컵 당시 최연소 국가대표로 참여하게 된다.
네델란드전에 출전하여
큰 점수차로 패색이 짙은 게임이었지만
후반 교체 투입되어 단 몇분만을 뛰었던 이동국은
대한민국 축구의 앞날을 밝게해주는 선수였다.
당시 최연소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뽑힌 이동국은 월드컵에서의 한경기로 이후에
차범근-최순호-황선홍 으로 이어지는 스트라이커의 계보를 잇는 초석이 된다.
98프랑스 월드컵에서 일방적으로 경기를 이끌어간 네델란드를 상대로 날린 위협적인 한방의 중거리 슛은
비록 아쉽게 골대를 벗어 났지만 그 슛 한방으로 이동국은 깜짝스타가 되고 그해 K리그 신인왕을 거머쥔다.
사실 이때 K리그 신인왕은 지금까지도 유례가 없는 상당히 치열한 신인왕 쟁탈전이였다.
향후 한국축구계를 이끌고 갈 인재들로 각축을 벌였는데 당시 주인공들이 부산대우의 안정환, 수원삼성의 고종수,
그리고 포항의 이동국이였다.
이 셋은 실력뿐만 아니라 출중한 외모로 당시 인기도 엄청나 그들의 존재는K리그의 흥행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카드였다.
그리고 결국 그해 신인왕 수상자는 이동국이였다.
그리고 이제 갓 스무살을 넘긴 한 청년의 화려한 축구선수로써 전성기가 펼쳐진다.
청소년 대표팀 아시안게임 대표팀 그리고 성인 대표팀까지 3개의 국가대표팀에
대한민국 최초로 이름을 올리는 기록을 세우며 대활약을 펼친다.
올림픽대표 예선에서 8골을 기록하며 본선행을 견인
아시안컵에서는
중국과의 2:2무승부 쿠웨이트와 1:0 패배한 뒤 대승을 해야 다음 라운드 진출이 가능했던 인도경기에서
홀로 3골을 몰아치며 8강행 견인
96아시안컵에서 6:2라는 우리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준 이란을 상대로 극적인 결승 골을 뽑아내며 또 다시 4강행 견인
비록 4강에서 탈락했지만 4강 경기에서도 1골을 기록
중국과의 3,4위전 예선에서 2:2로 비기며 공한증 타도를 외치던 중국에게 또다시 결승골을 넣으며 팀의 승리 견인
월드컵과 아시안게임 올림픽경기에 잇다른 활약과 1999년 2월에 열린 던힐컵에서 4골을 기록하며 대회 득점왕에 오르는 등 이제 더 이상 그는 유망주의 레벨이 아니였다.
그리고 그 해 열린 AFC U-20 청소년 월드컵, 이동국은 '샤프'김은중과 투톱을 이루며 절정의 플레이를 펼치며 대회 득점왕에오른다. 아시아인중에서는 드물게 훌륭한 신체를 가진 이동국은 순간속도가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지만, 강인한 바디 밸런스와 강하고 정확한 슛팅력, 머리와 좌/우를 가리지 않는 득점루트를 가진 타고난 대형 스트라이커였다. 특히 일본과의 경기에서 보여준 180도 터닝슛은 많은 사람들이 꼽는 이동국 커리어 최고의 골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 오노 신지, 이나모토 준이치 등 좋은 미드필더를 보유했지만 스트라이커의 부재로 골머리를 앓던 일본 대표팀의 필립 트루시에 감독은, " 다카하라나 오노 신지를 내주더라도 이동국을 트레이드 해오고 싶다 " 라는 발언을 했을 정도였었다. 이 대회 이동국은 대회 득점왕, MVP를 포함해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동나이대의 아시아를 제패하고 최고의 유망주이자 스트라이커로 각광받게 된다.
1998-2000년 까지 각종 컵,대회에서 이토록 그는 아시안컵과 올림픽대표 성인국가대표와 프로리그에서
그의 존재와 위상을 떨쳐보이며 이제 명실상부한 대형스트라이커가 된다.
그러나 청소년대표,올림픽대표,성인국가대표와 소속된 프로팀을 병행하던 그의 몸에 이상이 오기 시작한다.
지나친 경기출전이 결국 화를 불러 부상에 시달렸고
이는 곧바로 선수생활의 부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에 대한 찬사가 비난으로 바뀌는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후 이동국은 계획치 않았던 해외이적을 경험하게 된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둔 축구협회의 주도 아래 유망주들의 해외진출이 이루어졌고, 포항은 울며 겨자먹기로 헐값에 이동국을 독일 분데스리가의 베르더 브레멘으로 임대시키게 된다.
당시 이동국은 부상이 완쾌되지도 않았던 시점이였고, 브레멘 역시 하부리그의 하부클럽도 아닌 분데스리가의 중상위권 클럽이었기에 부상까지 달고 있는 이동국이 주전을 차지하기란 사실상 어려운 일이었다.
이동국은 몇 차례 경기에 나서지도 못했고, 브레멘은 임대
계약이 만료되는 시점에 포항 구단에 기존과 같은 헐값에 임대 연장을 제의하게 된다.
이미 포항 구단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이동국을 그런 헐값에 넘길 수 없었던 팀은 이동국을 다시 포항으로 복귀시키게 된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대한민국에서는 이미 2002년 월드컵 준비가 한창이었다.
당시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의 중요성으로 인해 K리그의 클럽들은 모든 일정을 대표팀에 양보했으며
이동국 역시 부상이 완쾌되지 않은 시점에서 다시 대표팀을 들락거리게 된다.
2002월드컵이 한참 지난 후 당시 포항 감독이었던 최순호 감독은 '히딩크 감독에게 이동국을 완전히 회복시키고 몸을 만들어 대표팀에 보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선수를 망쳤다고 언론에 밝힌 바 있었다. 히딩크 감독도 2002월드컵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이동국 카드는 그만큼 버리기 힘든 카드였으며 최종 발탁까지도 수많은 고심 끝에 결정한 것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동국의 월드컵 출전 열망은 강했고, 당시 치열했던 선수들간의 경쟁 속에서 부상 치료를 한다는 것은 곧 대표를 포기한다는것을 의미했기에, 이동국은 아픈 발을 참고 훈련에 임할수 밖에 없었으며 그로 인해 감독의 눈에 차지 못하는 경기력을 선보였다는후문이다. 물론 이 모든 말들은 이동국을 위한 핑계에 불과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히딩크 감독의 눈에 들지 못해 탈락한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당시 이동국의 몸이 온전하지 못했다는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를 둘러싼 점차 켜져가는 불신과 오해
그리고 2002년,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은 열광했지만 단 한 사람만은 그렇지 못했다. 너무 이른 나이에 과도한 관심과 무리한 혹사를 당했던 이동국은 대표팀 탈락이라는 커다란 충격과, 언론이 붙여준 지긋지긋한 별명 '게으른 천재'라는 꼬리표만을 단 채, 조금씩 예전의 영광을 잃어 가며 이른 나이에 한물 간 선수처럼 비춰지게 되었다.
태극전사들의 4강 신화에는 그가 없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과 같은 해에 열린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이란과의 준결승
결국 승부차기 끝에 아쉬운 대한민국의 패배
한국의 탈락은 곧 이동국의 군대 입대를 의미
그렇다, 대표팀에 뽑히지 못한 그에겐 아시안컵 우승이 병역특례를 받는 유일한 통로였다.
이동국은 결국 상무로의 입대결정을 하게 된다.
그리고 보란듯이 그가 뛰는 상무경기에서 내걸린 악질적인 걸개
그러나 이후에 그가 본인 입으로도 이야기 했던 것처럼 상무에서의 생활은
정처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던 그의 축구 인생에 잠시 한숨돌리는 여유를 갖게되는 시간이 된다.
"내가 운명이, 군대 갈 운명이구나. 그렇게 생각했죠. 또 가서 하나라도 얻으면 되는 거고..."
전역 후 친정 포항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확실히 입대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최전방에서 골을 노리던 그의 플레이는 차츰 행동반경을 넓혀갔고
'게으른 천재'라는 소릴 떨쳐버리려는 듯 패스에 관여하는 일이 잦아지고
패싱력또한 좋아졌다.
이곳저곳을 종횡무진 뛰어다니고 확연히 이전과는
달라진 플레이로 운동장을 누비며 K리그에서 다시한번 자신의 위상을 떨친다.
당시 지휘봉을 맡고 있던 국가대표 감독인 본프레레의 마음까지 단번에 사로잡게 되며
본프레레의 황태자 라는 애칭을 등에 업고서
그렇게 다시한번 다가오는 2006년 독일 월드컵을 맞이 하고 있었다.
그 러 나
2006년 4월 5일, 월드컵을 두달여 앞둔 그 날 이동국에게 다시한번
부상의 악몽이 찾아온다.
인천과의 K리그 경기에서 4경기 연속골로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던 중 동료의 패스를 받으며
몸을 틀던 과정에서 갑자기 그라운드에 쓰러진 것이다.
전방 십대인대 파열, 월드컵 출전을 염원하던 그에게 또한번 시련이 닥치는 순간이다.
그렇게 8년을 기다려온 월드컵을 코앞에두고
그의 꿈은 다시한번 한순간에 그라운드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그동안 노력한 게 한순간에 무너지는구나'라고 생각했죠.
몇일동안 많이 힘들었어요."
월드컵의 시련에 젖어 낙담에 빠진 그에게 동화같은 마법이 펼쳐졌다.
미들스브로의 입단
다시한번
이동국에게 쏠리는 관심과 언론
기대를 모았던 EPL진출
"아시아의 베컴을 영입하다"
(더 썬)
"라이언킹 코리안 프리미어리거 4호 주인공이 되다"
(한국언론)
"기존의 공격수와는 다른 스타일이다 점프력이 특히 좋다
테스트과정에서 체력 기술 등 모든게 만족스러웠다 기대가 된다"
(사우스게이트 감독)
이동국이 표지를 장식한
미들스브러 매치데이 매거진 레드 스퀘어(RED SQUARE) 를 들고 있는 아이들
그러나
"몸상태, 컨디션이 최고조에 오르지도 않은 상태에서...
지금 생각하면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진출을 했죠."
기대를 한몸에 받고 떠난 영국진출은
'올해 최악의 영입'이라는 불명예를 안으며 결국 2008년 K리그 성남으로의 복귀를 하게 된다.
그러나 기대 이하의 활약으로 이 마저도 방출
그리고 2009년도 최강희 감독 제의에 전북현대로의 이적
그리고 2010년 3월 3일 월드컵을 약 3개월여 앞둔 코트디부아르와의 평가전에서 선제골을 넣으며
다시한번 공격수로써 대표팀 주전에서 그의 자리를 굳힘
그러나 또 다시 월드컵을 한달 앞두고 무릎부상 재발
월드컵이 끝나고 선수단 귀국 후 밝혀진 사실은 월드컵 기간 중 언론에서 알려진 사실과는 다르게
심각한 부상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지휘봉을 맡고 있던 허정무는 그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동국이 허정무가 이끌던 올림픽대표팀에서 맹활약을 펼쳤던 기억 때문일까
월드컵 16강본선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인 조별예선 마지막경기인 나이지리아전을 염두해
오직 그 한경기를 위하여 엔트리에 결국 이동국을 최종 엔트리에 포함시키며 남아공으로 출국한다.
이리하여 그토록 염원하던 월드컵
12년만에 드디어 서게 된 삼수생의 꿈의 무대
"프로 12년차로 월드컵 한 번, 15분 밖에 뛰지 못했죠.
이번 월드컵이 마지막 월드컵이 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월드컵 대표팀에 우여곡절끝에 승선은 했지만 부상의 재발과 이전과는 다른 대표팀에서의
본인의 녹녹치 않은 자리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염원하던 월드컵이라는 꿈에 무대에 한발짝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리고 월드컵 16강 우르과이전
마침내 찾아온 12년만의 기회 그 한많고 지독한 축구인생에서 승자가 될 수 있었던 순간
다시한번 월드컵이 끝나고 K리그로 다시 돌아온 이동국은
제주와의 경기에서 3골을 넣으며 헤트트릭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 직후 그의 인터뷰
"나에게 믿음을 준 사람에겐 절대로 실망을 주어선 안된다는 것이
감독님을 만나고 나서 다짐이 되었다
믿음이...........날 일으켜 세웠다"
다시한번 이동국을 실감케 하는
각종 기록들을 갱신하며 전북현대에서 제 8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요즘
송종국 “이동국이 없어서다. 아니면 이동국 같은 선수가 없어서거나.”
- 코엘류 체제에서 팀 공격이 제대로 안되고있는 이유를 묻자.. 옆 자리에는 조재진이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김상식 “게으르다고 하는데 뭐가 게으른 건지 모르겠다. 이동국보다 게으른 선수는 우리나라에 엄청나게 많이 있다. 오히려 이동국 보다 더 열심히 하는 선수를 찾는 게 더 어렵다.”
김은중 “이동국은 어디서 슛을 때려도 골문으로 찰 수 있는 선수다. 말은 쉬워보이지만 이렇게 할 수 있는 선수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몰디브전에서 이동국은 분명히 잘 했다. 컨디션만 좋았다면 10골도 넣었을 것이다.”
황선홍 “그럼 내가 돌아다니고 이동국이 가운데 서있으면 될 거 아니냐?”
- 2001년, 이동국의 플레이가 너무 움직임이 없지 않냐는 질문에..
김남일 “공 주면 골 넣잖아. 근데, 이동국이 니 친구냐?”
- ‘왜 오빠는 이동국한테만 패스해요?’ 라고 묻는 팬의 질문에..
자 다시 1998년 프랑스 월드컵으로 돌아가서..
일방적인 경기력으로 패색이 짙던 네델란드전
당시 최연소 나이로 월드컵 국가대표에 발탁된 한 선수가 후반 15분을 남겨놓고 '날쌘돌이'서정원과 교체되어 투입이 된다.
골을 기록하진 못했으나 애띤 얼굴을 가진 모습과는 달리 그가 쏘아올린 위협적인 슛한방으로
일약 그는 스타덤에 올랐고 이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형 스트라이커로 자리잡는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월드컵에서 깜짝스타로 단박에 눈도장을 찍은 갓 19살 청년이 있었다.
"화려하게 데뷔했으니 화려하게 마무리 짓고 싶다."
"난 실패라 쓰고, 경험이라 읽는다."
"이 시절 가슴에 태극마크는 정말 멋잇어 보입니다~~~
태극마크 달기는 정말 어려웠었는데..."
다시한번 이 동 국
"태극마크를 달고 뛴 시간이 너무 즐거웠었습니다~~^^"
잘했던 만큼 기대가 컸고
좋아했던 만큼 실망이 컸던
허나 미워해도 싫어할 수 없는 선수
그래서
'백넘버 20 이동국은 대한민국 축구에 애증의 이름이다'
'근데 이동국선수 등번호는 왜 20번이예요?'
"10번 달기 부담스러워서?^^;"
-이동국 트위터에서-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드라마는 분명 해피엔딩이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당신을 응원합니다
나의 영원한 스트라이커 2 0 이 동 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