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컴퓨터가 아니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모두 기억할 수 없다. 그래서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존재이다.
한국에서 고교 동창들 만나서 이야기 하는 중에 다른 동창 A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서 문득 A가 나에게 부탁을 했던 일이 있어서 사연을 이야기 했더니 한 친구가 당장 A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나 A는 사건은 커녕 나를 전혀 기억도 못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는 증거가 없어 그냥 인정할 수 밖에 없었지만 호주에 돌아와서 증거를 찾아냈다. 왜냐하면 나는 ‘빈들의 소리’라는 간행물을 매달 10년 동안 발행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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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내용은 1994년 10월호에 실린 내용이다.
어느 날 전혀 만난 일이 없었던 고등학교 동창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용은 자기와 같은 교회에 다니고 있는 집사의 동생이 부천에 살고 있는데 불행한 일을 당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으니 도와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동창생이 전화로 알려준 병원으로 김씨를 찾아갔다. 36살의 김씨는 온 몸에 화상을 입어 참혹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차마 얼굴을 쳐다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다행히 간호를 하고 있던 김씨의 누나가 밖에 나가서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그래서 환자와는 말 한 마디 못해보고 황망히 병실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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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산골에서 올라와서 부천에서 자취를 하면서 혼자 공장에 다니고 있던 김씨는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이 오직 몸뚱이 하나로 살아 가느라고 까 변변히 연애 한 번 못하고 지내다가 주위 사람의 소개로 33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결혼을 하게 되었다.
비록 월세를 내는 단칸방이었지만 신혼 살림을 차리고 사는 재미를 부치려고 하는데 가끔씩 아내의 행동거지에 이상한 모습이 나타나곤 했다. 예를 들면 혼자말로 중얼거린다던가 해야 할 일을 안하고 멍하니 앉아 있다든지 하는 일들이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되었지만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어서 차일 피일 하다가 몇 달을 지냈는데 그만 임신을 하게 되었다. 입덧이 심해지자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하게 되어 몸이 허약해지자 정신을 완전히 잃어 버렸다.
이런 상태로 아이를 나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서 건강해진 다음에 아이를 낳자고 했지만 아내는 한사코 아이를 나아야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드디어 달이 차서 아이를 낳았지만 아내의 상태는 아이를 돌 볼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출산 후 20일 쯤 직장에서 돌아와 보니까 아이만 혼자서 울고 있었다. 놀라서 광주에 있는 처갓집으로 전화를 하니까 아내가 그곳에 가 있었다. 장모가 아내를 설득해서 다시 부천으로 올라와서 한 동안 아기를 돌봤다.
그러나 아이가 90일 째 되는 날 아기가 계속 울어대자 순간적으로 실성한 엄마가 아이를 죽였다. 김씨는 아기가 죽어 버리자 이제는 그 여자와 더 이상 살 수가 없다고 생각해서 이혼을 하자고 했지만 처가 집에서 제발 불쌍히 생각해서 데리고 사람 하나 살리는 셈치고 살아 달라고 애걸복걸을 했다. 김씨는 인정에 얽혀 매정하게 뿌리칠 수가 없어 헤어지지 못하고 다시 살게 되었다.
아내는 여전히 살림을 전혀 하지 못하고서 병원을 들락날락 거리며 세월을 보냈다. 피임약을 먹으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먹지 않다가 아내가 또 다시 임신을 하게 되었다. 다시 아이를 떼자고 했지만 아내는 이번에도 한사코 아이를 낳겠다고 했다. 도저히 안되겠어서 아이를 낳으려면 이혼을 하자고 하자 처가 집에서는 위자료를 요구했다.
그 동안 아내 병원 치료비로 처가 집에서 빌린 돈 4 백만 원에 기왕에 이혼 소송을 하려면 들어가야 된다는 돈 2 백만 원에다가 방을 얻을 돈 3 백 만원을 합해서 9 백만 원을 주기로 합의를 했다. 하지만 그 돈도 지금은 없으니까 일년 안으로 주기로 하고 드디어 이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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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혼자가 된 김씨는 몇 해 동안의 결혼 생활로 그나마 노동으로 벌어놓은 것은 다 까먹고 오히려 9백만 원의 빗만 진 상태에서 실의에 찬 채 하루 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사고가 난 그날도 설렁탕 한 그릇을 사먹고 집에 들어가 잠을 잤는데 새벽에 일어나 보니까 방 안의 공기가 어쩐지 메케했다. 하지만 평소의 습관대로 담배를 찾아 입에 물고 라이터 불을 켜는 순간 ‘펑’하는 소리와 함께 온 몸이 화염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사고가 나자 조사를 나온 경찰관은 당연히 모든 주변 정황으로 볼 때 자살의 성격이 있는 사건으로 이미 조서가 작성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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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률 50%로 생사의 기로를 헤매고 있는 김 씨가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조서대로라면 환자가 자해를 한 것이기 때문에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내가 도와주어야 하는 일은 경찰서에 부탁을 해서 자살이 아닌 사고로 조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경찰서를 찾아가서 정보 과장을 만나 자종치종을 설명하고 도와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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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동생이 불행한 일을 당한 교인이
A가 서울대학병원 원무과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혹시 도움이 될 수 있을까해서 의논을 한 것이고
A는 내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서
나에게 전화를 한 번 해준 것이고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에 곧 잊어버린 것이다.
생각해보니 단골인 부천 경찰서 정보과장에게 선의를 부탁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었는지가 나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 애초에 나에게 전화를 해왔던 A가 기억이 나지 않는 것도 절박한 부탁이 아니었었고 나도 그 사건 때문에 병원과 경찰서를 찾아 간 것으로 나의 나의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먼저 내가 상대방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하지만 대게의 경우 내가 도움이 될 일이 없기 때문에 그 다음에는 ‘이 사람이 누구와 연결되면 도움이 될 수 있을가?”를 생각한다.
그래서 항상 네트워킹을 맺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지금은 어디에 가나 Wi-Fi 신호를 찾아야 하는 시대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검퓨터는 단독으로 존재하는 고성능계산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네트워크에 접근 할 수 없는 컴퓨터는 컴퓨터 역할을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왜냐하면 컴퓨터는 네트워크 안에 존재할 때 비로소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Wi-Fi 가 없으면 살 수 없듯이 한 인간이 충분히 능력을 발휘하려면 네트워크가 필요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일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정말 급한 경우 아니고는 기도를 잘 하지 않는다. 나는 입으로 하는 기도와 행동으로 하는 기도의 차이는 트럭에 실고 다녀야 하는 짐바브웨 달라와 지갑에 넣고 다닐 수 있는 미국 달러의 차이만큼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