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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성(靈性, spirituality) 원문보기 글쓴이: 현요한
우리 민족과 한 핏줄일 가능성 높아.. 1만8000년 전 베링해협 통해 건너가
빙하 회랑 빠져나와 남미대륙 끝자락까지 도달
일부는 알래스카·그린란드·알류샨열도로 진출
지금으로부터 약 1만5000년 전 빙하시대에는 해수면이 낮아져 베링해협이 육지로 연결돼 있었다. 그 시절 아시아 북동부 시베리아 툰드라에 살던 몽골계 부족들이 대거 이 길을 따라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더욱이 최근의 한 연구에 의하면 기원전 10세기부터 기원후 10세기에 걸쳐 우리 민족이 엄청난 규모로 캄차카반도와 알류샨열도를 경유해 미 대륙으로 이주했으며, 특히 멕시코의 아즈텍 제국은 고조선을 세웠던 맥이족이 아사달로부터 이주해 건설했다고 한다. 피가 물보다 진한 이상 우리 민족의 한 갈래일 수도 있는 인디언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갖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인디언들은 왜, 언제, 어떻게 구대륙에서 신대륙으로 건너갔는지, 구대륙의 인류는 문명발전을 거듭해 청동기를 거쳐 철기시대까지 진보해 대포와 총을 만들었는데 인디언들은 왜 여전히 석기시대에 머물고 있었는지, 그리고 존 웨인의 서부영화에서 보았듯이 인디언들은 백인의 머리가죽이나 잘라내는 잔인하고 무지한 야만인인지 누구나 한번쯤 호기심을 가져봄 직하다. 역사란 승자가 기록하기에 패자가 당한 '불편한 진실'은 왜곡되거나 은폐되기 일쑤다. 인디언들의 패망에는 피눈물 나는 슬픈 이야기가 가득 차 있다. 이번 기회에 태곳적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시간에 걸쳐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걸어온 길을 그들의 시각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대부분의 인류학자들은 인류의 먼 조상인 직립원인이 400만~500만년 전에 최초로 출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가장 폭넓게 지지를 받고 있는 아프리카 기원설에 따르면 우리와 같은 현생인류는 아프리카 남부에서 15만~20만년 전에 나타났다. 학자들은 최초의 인류가 북상을 계속해 약 10만년 전에 유라시아대륙으로 건너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라시아로 넘어온 집단은 둘로 나뉘어 한 무리는 유럽으로 향하고 또 한 무리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아시아의 여러 지방으로 흩어졌다. 아시아로 이주한 사람들 중 일부는 북동진하여 시베리아의 툰드라 동토 지역에 삶의 터전을 일구었다. 시베리아에 자리잡은 종족들은 혹한의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수렵과 채취에 의존한 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이 무렵 지구의 기후는 11만년 전부터 홍적세의 마지막 빙하기를 맞고 있었다. 이 빙하기는 1만8000년 전쯤에 절정에 달했으며 1만2000년 전께 끝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빙하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해수면이 지금보다 120m나 낮아졌다고 한다. 유라시아대륙과 아메리카대륙을 분리하고 있는 폭 85㎞의 베링해협은 지금도 수심이 40m밖에 안되기 때문에 당연히 육지가 되었을 것이다. 흔히 당시의 해수면 하강으로 생겨난 베링해 일대의 땅을 베링기아라고 부르는데 이 땅의 넓이는 남북으로 1700㎞나 되었다고 한다. 베링기아의 땅은 강, 호수, 습지와 함께 낮은 구릉으로 변하고 이끼와 낮은 키의 관목류가 생장하고 순록을 비롯한 한대 포유류 동물도 서식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유라시아 북부 툰드라에 살던 몽골계 종족은 새로운 사냥터를 찾아 자연스레 베링기아를 경유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왔을 것이다.
유라시아에 살던 인류가 아메리카로 건너온 시기에 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있다. 종래에는 미국 뉴멕시코주의 클로비스에서 발견된 석기시대 유물에 근거해 1만3000년 전께 구대륙에서 신대륙으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1970년대 펜실베이니아주의 메도크로프트 록셀터에서 1만8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주거유적이 발견됐다. 따라서 최초의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최소한 1만8000년 전에 베링해를 건너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들의 집단이주는 수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으며 이주 루트도 크게 세 갈래로 나뉘었다. 베링해를 건너온 사람들의 대부분은 보다 따뜻한 곳을 찾아 계속 남하해 북아메리카 전역과 중앙아메리카를 거쳐 남아메리카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주민의 일부는 한대지방에 머물기를 원해 알래스카와 그린란드로 팽창해 나가 오늘날 에스키모의 선조가 되었다. 또 한 무리는 알류샨열도로 진출해 오늘날 알류트족의 조상이 되었다.
오늘날 캐나다에 해당하는 북아메리카 대륙의 반 정도가 두꺼운 빙하로 뒤덮여 있는 상태에서 인디언들은 어떻게 남쪽으로 내려올 수 있었을까. 여기에 대한 해답으로 빙하 회랑설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이 가설에 따르면 북아메리카의 빙하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한다. 동쪽으로 로렌타이드 빙하가 있고, 이보다 작은 규모의 코딜레라 빙하가 서쪽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두 빙하 사이로 사람들이 이동하기에 충분한 공간이 회랑처럼 만들어져 있었다고 한다. 대륙 곳곳에서 발견된 클로비스 석기 유물에 근거해 추정해 보면 인디언들이 빙하 회랑을 빠져나와 남미대륙 끝자락까지 이르는 데에는 불과 1000~2000년의 비교적 짧은 시간밖에 안 걸린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배재대의 손성태 교수는 2014년 발간한 저서 '우리 민족의 대이동(아메리카 인디언은 우리 민족이다: 멕시코 편)'에서 상당수의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3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건너간 우리 민족의 후예들이라고 주장했다. 손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기원후 820년께 요동.요서 지역에 살고 있던 맥이족이 아사달(중국 랴오닝성의 의무려산 자락에 위치한 북진으로 추정)을 출발해 부여.고구려계 우리 선조인 고리족이 거주하던 북만주 지방을 거쳐 알류샨열도를 통해 미 대륙으로 건너온 후 500여년 동안 북미대륙을 떠돌아다니다가 1325년에 아즈텍 제국을 건설했다고 한다. 그의 언어학적 분석에 따르면 아즈텍은 아사달을 뜻하며, 멕시코의 원어인 맥이곳은 맥이족이 세운 곳(땅)을 뜻한다고 한다. 또한 중국의 대표적 사학자인 왕대유는 그의 저서 '용봉문화원류'에서 아메리칸 인디언은 은나라에서 건너간 사람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은나라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라는 사실은 정설로 거의 인정받고 있으며, 우리 민족도 동이족의 일파이니 크게 보아 인디언들을 우리 민족의 후예로 봐도 된다는 얘기가 된다.
김철 전 한양대 겸임교수
“아메리카 인디언은 우리민족의 후예이다”
언어학자 손성태 교수, 연구서 펴내고 사학자들에 공개검증과 토론 제안
기사입력: 2014/08/12 [17:40]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스페인어를 전공한 언어학자인 손성태(배재대학교 중남미학과) 교수가 아메리카의 고대 ‘아스텍 문명’을 건설한 주체는 한민족이라는 사실을 언어학적, 풍습, 유물, 신앙, 생활 등 모든 분야에서 연구하고 추적해 놓은 저서 ‘우리민족의 대이동’(코리刊·25,000원)를 펴냈다.
‘아메리카 인디언은 우리민족이다(멕시코편)’이란 부제를 단 이 연구서는 손교수 필생의 작업의 결산물로 그의 첫 저서이기도 하다. 그만큼 자신의 연구결과에 대한 확신이 있다. 그래서 언어학자인 그가 한국고대사학회 등 정통 사학자들에게 공개검증을 하자고 제안했다. 이의를 다는 정통사학자에겐 공개토론을 하자고 했다.
멕시코에서는 9월 25 26일 열리는 국제학술대회에 그를 특강강사로 초대했다.
손 교수는 우리 민족의 이동이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 왔음을 구체화하는 멕시코쪽 자료를 연구 발표해 그간 언론의 주목을 받아 왔다.
그는 이책에서 아스텍(Aztec, 스페인어) 문명은 발해의 유민이 건설했다는 것과 그들의 이동보다 앞서 고리족이 멕시코에 이주했음을 밝혔다. 또한 아스텍인의 언어 나와들어(語, 나와들=우리들)에 있는 우리말의 흔적을 추적해 놓았다.
그는 고조선이 세워진 ‘아사달’(阿斯達)과 아스텍인들의 선조가 유입됐다는 왔다는 ‘아스단’을 주목한다. 아사달을 중국어로 읽으면‘아스다’이며 아스단’은 바로 ‘아스다’라는 것이다.(서정범의《국어어원사전》에 보면 우리말의 ‘땅’은 원래 ‘닫 > 달 > 다 > > > 땅’으로 변천되었다고 하는데 ‘다’나 ‘단’은 모두 ‘땅’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스텍에서도‘아스단’의‘단’이 ‘땅’을 의미한다고 기록에 나와 있다.
또한 500여년 전에 기록된 멕시코 문헌에 ‘아스’는 ‘하얀’이란 뜻이다. 결국 아사달, 아스다, 아스단은 모두 ‘하얀 땅, 하얀 흙’을 뜻한다. 이것은 우리민족의 풍습 가운데, 장례 때에 하얀 흑, 회(灰)를 관 위에나 사체 위에 뿌려주는 풍습과 관련이 있으며, 흰 옷을 입게 된 풍습, 즉 백의민족으로서의 풍습과도 관련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아스텍인들도 장례식 때에 사체 위에 흰 흙을 뿌렸고, 흰 옷을 즐겨 입어서 백의민족이라고 불렸다. 즉 ‘아즈텍Aztec’도 ‘아스단’에서 나온 말이로 ‘아스단’에서 비롯된 영어 단어라는 것이다.
그는 “발해인들이 바다를 건너 아메리카로 와서 멕시코에 아스텍제국을 세우고 살 때까지 어떻게 고조선의 옛 지명을 그대로 기억했을까”하는데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그것이 유목민의 특징이라고 해석한다. 유목민은 자기들에게 소중한 지명은 반드시 간직하고 다닌다. 항상 떠돌이 생활을 하니까 그마저 잃어버리면 자기의 근원지를 모르기 때문에, 유목민들은 자기 민족에게 중요한 지명은 신앙처럼 가슴에 묻고 다닌다는 것이다.
아스텍 역사에 보면, 아스텍인들의 조상이 820년경에 그들이 살고 있던 ‘아스단’을 떠나 북쪽으로 이동해서 옛 부여가 있던 땅을 거쳐 알류산 열도를 타고 베링해를 건너 결국엔 멕시코까지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820년경이면 발해의 최절정기이다. 물론 아스텍 역사에 발해란 명칭은 안 나온다. 그 당시 백성들은 국가보다는, 자기들을 이끌어주는 무(巫)다. 당(제사장)들에게 큰 관심이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백성들 가까이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하던 무당, 이들의 영향이 가장 컸다고 본다. 아스텍 기록에 의하면 그 무당들이 백성들을 규합해서 데리고 떠났다고 한다.
발해는, 고구려가 망한 후 대조영이 요동과 만주, 두만강 유역 그리고 연해주를 아우르는 방대한 지역에 세운 국가이다. 인적 구성은 고구려 땅에 살던 옛 고조선의 후예, 고구려인, 부여의 후예, 그리고 말갈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말갈족도 우리 선조들의 일부이다.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때가 7세기이고, 발해를 건국한 장소가 지금의 요동, 곧 고조선의 아사달(=아스다) 지역이다. 그리고 그들이 발해를 떠나 아메리카로 건너온 시기가 대략 10세기 전후로 추정되고, 스페인이 아스텍제국을 발견하여 그들의 원래 조상이 ‘아스단’에 살았다는 사실을 기록한 것은 1500년대 초이다.
이외에도 그는 언어학자로서의 지식을 살려 민속놀이 풍습, 천문지식, 신앙 등과 연계시켜 ‘아스텍 문명’을 건설한 주체는 한민족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이를테면 멕시코쪽 기록에 기원후 49, 50년부터 ‘콜와’라는 민족이 멕시코에 도착하기 시작하여 670년 경에는 대규모로 이동해 왔다고 나와 있다. ‘콜와’에 관한 기록을 보면, 이들은 멕시코에 도착한 이후 다섯 집단으로 나뉘어 한 집단만 지금의 멕시코시티 지역에 남고, 나머지는 동서남북으로 흩어졌다고 한다. 남쪽으로 향한 집단은 중미 지역을 지나 남미로 내려갔다고 본다. 남미 잉카제국의 언어에 다양한 우리말 흔적이 나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아스텍인들을 맞이한 이들은 바로 멕시코시티에 그냥 남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이끈 지도자가 ‘케찰코아들’이라 불리던 무당이었다. 케찰코아들은 우리민족의 ‘용’(龍)이다. 즉 용을 신으로 모시던 무당이 지도자였다는 것이다.
멕시코의 기록에 의하면, ‘콜와’의 어원인 ‘고리’라는 말은 ‘둥글게 휘어진 물건’이외에 ‘나직하고 봉우리가 둥근 산’과 그리고 ‘할아버지’를 뜻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도 이런 산을 고리라고 했다. 충청도 옥천군에 환산(環山)이 있는데, 그 옛 이름이 고리산이라 한다. 또 ‘고리타분하다’라는 말을 쓰는데 이는 구세대란 뜻을 갖고 있다. 할아버지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말의 ‘고리’와 멕시코의 ‘콜와’족을 가리키는 ‘고리’는 정확히 일치한다.
그는 ‘멕시코Mexico’는 ‘맥이가 사는 곳’이란 뜻으로 풀이한다. 그런데 우리민족은 예맥족 또는 맥족으로 불리어 왔다. 5세기경 기록된《후한서》에 보면 우리민족을 ‘맥이’라고 불렀다(신용하 교수힘). 동이(東夷)의 이(夷)자까지 붙여서 맥이(貊夷)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발해인들이 820년경에 요동을 출발했으니, 5세기 이후의 명칭인 ‘맥이’를 사용한 것도 역사적 흐름상 맞다고 한다.
아스텍인들은 그들 제국의 수도를‘맥이곳’이라 불렀는데 자신들을 가리키는 ‘맥이족이 사는 곳’이란 뜻이다. 스페인 사람들이 와서 그 명칭을 듣고 스페인어로 ‘Mexico’라고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 단어는 스페인어 발음 원칙으로는‘멕시꼬’로 읽어야 하지만, 아스텍인들이 ‘맥이곳’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 명칭에 따라서 ‘멕이고’라고 발음한다. 오늘날에도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이 멕시코를 ‘멕이꼬’라 부른다며 스페인어 언어학자다운 분석을 하기도 한다.
손교수는 이러한 언어학적 분석과 역사적 문헌을 통해 다양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바로 우리 선조들이 3세기에서 10세기에 사이에 건너간 우리민족의 후예들이라는 엄청난 사실을 이 책에서 밝혔다. 앞으로 우리민족의 역사는 다시 써야 하게 되었고, 세계사와 인류사도 다시 쓸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강조한다.
그가 제안한 공개검증과 공개토론이 관심을 끌 수 밖에 없다.
"동이족 상형문자 북미대륙서 여럿 발견..美대륙 진출 증거"
고대 중국 동북부 지방에 거주하면서 우리 민족의 뿌리와도 연관이 있던 동이족(東夷族)이 사용한 상형문자가 북미대륙 곳곳에서 발견돼 이들이 오래전에 북미 대륙으로 건너갔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볼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미국에서 나왔다.
러스캠프 박사는 앞서 2015년에도 미국 서부 뉴멕시코주(州) 앨버커키 지역의 페트로글리프 국립유적지내 암석에 새겨진 특이한 문양이 중국 상(商) 왕조 말기에 사용된 문자라고 분석하고 고대 중국인들이 2천500년전에 미국에 건너와 살았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동이족 상형문자 북미대륙서 여럿 발견..美대륙 진출 증거" | 북미뿐마누아니라 남미 페루 이쪽도 한국이랑 비슷한 단어와 생활 풍습도 있다고 하는거 같단데
아메리카 원주민 수난사
[원로 목사의 증언]
중국과 인도제도에 무진장 있을 황금과 향료를 찾아 떠난 콜럼버스의 배가 1492년 산살바도르 라는 카리브해안에 닿은 것은 역사적인 대실수였다. 이 대실수를 미국 사람들은 위대한 신대륙 발견으로 둔갑시켜 10월 12일을 국경일로까지 정하여 기리지만, 콜럼버스의 발견 이전(B.C.-Before Columbus)부터 이 땅에 살아 온 원주민들에겐 학살로 점철되는 피의 시대 개막을 알리는 오욕의 국치일인 셈이다.
콜럼버스가 인도로 착각하고 인디언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원주민들은, 인도인과는 생김새가 다른 붉은 피부, 불거진 광대뼈, 굵고 검은 머리털을 가진 몽골계 후예로 알려진, 아시아에서 베링해의 얼음을 타고 넘어 와 이미 3만년 전부터 이 땅에 살고 있는 토착 주인들이다. 당시 북미에선 800만에서 1천만 명으로 추정되는 원주민들이, 농경지에 정착하여 사는 부족도 있긴 하였지만 대부분은 광활한 초원지대에서 들소와 함께 이동하는 유목생활을 하였다. 비록 문명과 화력은 유럽보다 뒤지지만 자연과 더불어 목가적 생활을 하던 이들에게 탐욕스러운 유럽인들의 침입은 엄청난 재앙의 시작이었다.
콜럼버스가 원주민 장신구까지 싹쓸이 한 황금보화약탈과 환금작물인 담배 소식이 퍼지면서 유럽 열강들의 신대륙 식민지사업을 놓고 벌린 각축은 땅 따먹기 였다. 아즈택과 잉카문명을 무너뜨리며 중남미를 먼저 선점한 에스파냐인은 황금약탈과 기독교 개종이라는 명목으로 300만명 이상을 도륙하였지만 남아있는 인디오들이 페루나 볼리비아에서 원주민 대통령이 선출될 정도의 숫자를 남겨 두었다.
그러나 에스파냐인 보다 1세기나 늦은 1607년부터 북미대륙에 제임스타운을 건설한 영국계 최초 정착민들은 기독교 전파가 아닌 광산채굴과 탐사라는 상업성 목적으로 여왕의 특허장을 들고 온 사람들이다. 이때 디즈니월드의 만화영화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포카혼타스라는 열한 살짜리 인디언 추장 딸이 스미스라는 백인선장을 구출하는 감동스러운 이야기가 생겼다. 그녀는 17살에 존 롤프라는 백인과 결혼하여 영국으로 이주, 레베카 라는 세례명으로 개명하여 사회적 명사로 생활하다 천연두로 사망한다. 인디언중에서 아마 그녀만이 백인들에게 착하고 아름다운 인디언으로 사랑 받는 유일한 인물일 것이다.
그 이후 1620년 플리머쓰에 도착한 필그림(Pilgrims)들이라 불리는 제2의 정착민들도 41명만 이교도로 불렸던 청교도(Puritans)들이고 나머지는 신대륙에서 일확천금을 노렸던 이방인들이었다. 런던 상인들에게 돈을 꾸어서 까지 온 초기 정착민들은 처음에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터를 잡게 되었다. 초기정착을 위하여 원주민들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농사법 전수와 식량지원을 받던 개척민들도 다른 이주민들이 바닷게처럼 계속 밀려오며 숫자가 우세하여 지자 원래 이주 목적인 황금과 땅에 대한 탐욕의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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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땅은 하늘과 같이 무한한 것이어서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땅에 대한 소유개념이 없던 원주민들은 초기 이주민들의 땅을 소유해야겠다는 이상한 관습을 이해하지는 못하였지만 모두가 나눠 써야 할 땅이었기에 그들의 정착을 도왔다. 1624년 네델란드인들이 24불어치의 냄비와 낚시바늘, 유리구슬 등 잡동사니로 인디안 추장을 꼬드겨 지금의 맨하탄을 빼앗은 사기극은 애교로 볼 수도 있다. 그 후 백인들의 욕심은 그때까지 처녀림 같았던 산천에 문명이라는 산불을 지르고 갖은 악랄한 수법을 동원하여 인디언을 수 만년 살아 온 그들의 터전에서 몰아내기 시작한다. 포카혼타스의 아버지인 포와탄 추장도 자기가 살려 준 스미스선장에게 항의한다.
‘호의적이고 평화롭게 얻을 수 있는 것을 왜 구태여 무력으로 뺏으려는 거요? 당신들에게 식량을 지원해준 우리를 왜 파멸시키려는 거요? 전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대체 뭐란 말이요?’
미타쿠예 오야신이라는 인디언은 땅을 뺏으러 온 백인들에게 말한다.
‘우리가 어떻게 공기를 사고 팔 수 있단 말인가?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 판단말인가?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우리가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또한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사고 팔 수 있는가? 햇살 속에 반짝이는 소나무들, 모래사장, 검은 숲에 걸린 안개, 눈길 닿는 모든 곳, 잉잉대는 꿀벌 한 마리까지도 우리의 기억과 가슴속에서는 모두가 신성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우리 얼굴 붉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살아있다. 우리는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분이다. 대지는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며, 인간이 오히려 대지에게 속해 있다.’
한 추장은 조지 워싱톤 대통령에게 말했다.
‘나는 내가 태어 난 대지를 사랑한다. 그 위에 자란 나무들과 풀들을 사랑한다. 그것들이 있기에 우리들은 지금까지 살아왔다. 난 선물을 받으려고 이곳까지 온 것이 아니다. 나는 아직 젊고, 원하는걸 내 땅에서 사냥해 아이들과 여자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 나는 우리를 제발 가만 내버려 두라고 부탁하려 온 것이다. 그게 우리에게 오래가는 행복을 마련해 주는 최상의 방법이다.’
수1700년대 후반부터 100여년간 미 연방정부와 인디언간에 371건의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백인들의 변절로 모두 휴지조각이 되었다. 백인들은 인디언들을 짐승으로 볼 거냐 인간으로 볼 거냐를 심각하게 논의하였지만 결국은 인간으로 보되 제거 시켜야 하는 대상으로 ‘가장 아름다운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이다.’ 라는 인식이 팽배하여 어린이와 부녀자까지 포함한 무차별 학살이 자행되며 인디언의 머리가죽을 장식용으로 사고 팔며 인디언의 해골을 거리에 매달기도 하고 심지어는 수집용으로 주지사의 사무실에 진열되기도 하였다.
한 인디언 토벌대장은 ‘올해 인디언을 많이 죽일수록 내년에 죽일 인디언이 그만큼 줄어든다’고 병사들을 격려할 정도인 인디언 말살정책은 남북전쟁 후 1868년 통과되어 노예였던 흑인까지도 포함한 만민 평등권을 부여한 개정헌법 제 14조에서 인디언은 제외시켰다. 1883년 미 대법원은 인디언은 미국 땅에서 태어났어도 이방인이라고 판결하였다. 19세기 말까지 미 연방군은 수많은 병력과 비용을 투입하여 인디언 소탕전을 끊임없이 벌였다. 그 결과 인디언의 수는 백인의 100분의 1도 안되는 30만정도로 급감했다. 유럽인들의 페스트나 장티푸스 같은 질병에 대한 면역체가 없던 토착민들이라 이러한 전염병으로 떼죽음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긴 하지만 수 세기동안 우수한 화력으로 들소 사냥하듯 총질한 백인들의 집요한 인디언 소멸작전이 없이는 100살 넘겨 살던 장수족들의 인구 격감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천연두균을 묻힌 담요를 나눠 주는 생화학전을 포함하여 한밤중에 쳐들어가 모닥불을 지피듯 인디언 텐트에 불을 지르고, 튀어나오는 인디언들을 동물 사냥하듯 죽인 것은 연방군 병사들이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야만스러운 인디언과 싸우는 낭만과 모험이 가득한 카우보이들은 대부분 백인들이 만들어 낸 영웅들이다. 실제로 소몰이꾼인 카우보이라는 직업이 1867년부터 1887년까지 20여년동안은 전성기를 누렸지만 그 이후 개량 교배종 소와 철조망의 출현으로 소를 몰고 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간간히 산발적으로 벌어졌던 카우보이와 인디언간의 교전으로 미미한 희생자도 생기긴 하였지만 군인들의 추악한 집단학살을 위장하기 위하여 용감무쌍한 정의의 사도 같은 영웅상을 만드는 것이 시대적인 요청이었을지도 모른다. 소몰이 카우보이들에게 있지도 않았던 낭만과 모험이 신화같이 미국인들의 정신세계로 전승되면서 인디언은 더욱 야만스러운 인종으로 각인되었다. 그러나 리틀 빅혼 전사인 한 추장의 말은 일제 강점기의 안중근 의사나 이봉창 의사를 연상케 한다. ‘만일 당신에게 더 없이 귀중한 나라, 당신 국민들이 언제나 속해 있던 나라가 있다면…..그런데 다른 민족이 찾아와 그 나라를 무력으로 빼앗으려 한다면 국민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싸워야지요’
자기 땅을 지키려는 인디언들의 용맹성은 역설적이지만 오만 잡다한 배경과 목적을 가진 백인들을 단결시키는데 공헌을 하였다. 백인들은 서로간의 증오심을 버리고 공동의 적인 인디언을 소탕하기 위하여 뭉쳤다.
아무리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 하지만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 전범들은 죄과를 물어 처형하는데 무자비한 인디언학살의 주역인 앤드류 잭슨은 대통령을 두 번씩이나 하고 윈필드 스캇 같은 장군은 조지아 주립공원의 이름으로 헌정 되기도 하였다.
동물과 다름없이 들판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인디언들은 1890년 ‘운디드니’에서 최후의 학살이 끝난 30년 후인 191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출생률이 사망률을 앞지르는 회생력을 보였다.
이렇듯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인디언들에게 미 의회가 1924년 미국 시민권을 주며 유화적인 손길을 내민 것은 세계 1차 대전에서 총알받이로 싸워 준 알량한 대가였다. 시민권이란 법적지위를 얻었어도 많은 주에선 인디언에게 선거권을 주지 않았고 인종차별적 착취는 여전했다. 그간 인디언 레져베이션이라고 불리는 허울좋은 인디언보호구역안에 몰아 넣은 생존 인디언들의 참상은 정부보고서 조차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고 표현할 정도로 죽음의 수용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많은 인디언부족이 인디언만의 자치정부 자율권을 요구하며 그간 체결한 조약의 이행을 연방정부에 촉구하였다. 이에 아이젠하워 정부는 종료정책(Termination)이라는 법령을 만들어 부족해체 작업을 시행하면서 아예 인디언에 대한 지원정책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다 1980년 인구조사에서 150만명으로 가장 빠른 인구증가세를 보였지만 여전히 최하 빈민층으로 남아있는 인디언에게 미 의회는 1988년 카지노운영권을 허용하는 선심성 실수를 한다. 그 후 카지노로 번 수 백억불의 흑자 돈으로 각 정당에 거액 정치자금을 대주며 정치적 목소리를 키우는 한편 장학금으로 똑똑한 인디언을 양성하여 조상들의 명예와 영토회복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간 젊은 인디언들은 미 연방정부와 조상들이 체결한 조약들을 연구검토하며 일부 땅의 반환과 주 정부와 동등한 자치정부 수립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흑인 민권운동보다도 더욱 확실한 명분과 결속력으로 사회 이슈화 될 전망이다.
미국의 역사는 땅뺏기 역사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땅뺏기 시합인 아메리칸 훗볼이라는 스포츠에 열광하는
미국인들에게 선조들의 유전인자와 피는 계승되고 있다.
그 땅뺏기의 역사는 백인들의 개척사지만 뒤집으면 가슴 저릿한 인디언의 멸망사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승자들의 함성에 패자들의 진혼곡은 묻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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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스모키 산-체로키 원주민 수난사
체로키 부족은 스모키 산을 중심으로 남쪽의 조지아와 앨라배마를 비롯하여 테네시, 캔터키, W.버지니아, 버지니아, 싸우스와 노쓰 캐롤라이나 등 지금의 8개 주에 해당하는 광대한 땅에서 1만년이 넘도록 농경과 수렵으로 살아왔다. 비록 유럽 문명에 비해 미개하였지만 자연과 더불어 순수한 영혼을 지닌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었다.
체로키 부족은 이웃 부족들과 가끔 분쟁이 있기는 하였지만 남미대륙의 잉카나 아즈택 같은 전제국가를 건설하여 산 사람들을 신의 제물로 바치던 원시인은 아니었다. ‘Fire’ the center of life 라는 모닥불을 중심으로 빙 둘러 앉아 성인이면 모두가 돌아가면서 의견을 말하여 적절한 합의를 도출하여 부락운영에 반영하는 민주적인 회의방식은 미국 건국당시 민주주의의 기본정신으로 채택되어 운용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숲이나 강이나 하늘 땅을 지배하는 ‘위대한 정령’을 믿으며 주변의 모든 미물까지도 사람과 동격으로 의인화擬人化 할 정도로 자연 친화적인 삶을 영위하였다. 현대의 문명속도에 정신이 황폐하여진 많은 지식인들이 새삼스레 인디언의 정신을 본받으려는 것은 그들의 영혼이 그 만큼 순수하였다는 뜻일 게다. <사진의 뒷배경-인디언들이 살던 비옥한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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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로키부족이 처음 유럽인들을 만난 것은 콜럼버스상륙이후 50년이 지난 1540년, 황금을 찾아 훌로리다를 거쳐 조지아에 들어 온 헤르난데즈 디 쏘토 라는 스페인 사람이 이끄는 무리들이었다. 헤르난데즈 디 쏘토는 300명도 채 안 되는 병력으로 잉카제국을 무너뜨리고 9피트 천장까지 가득찬 황금전리품에 재미를 본 적이 있어 더 많은 황금을 찾아 북미 대륙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만나는 체로키 부족은 너무나 가진 것이 없어 빼앗을 물건이 없었다. 가는 곳 마다 황금의 유무를 살폈지만 페루 잉카제국에서 한 몫 잡았던 황금항아리나 황금으로 만든 잔, 황금상자는 북미 대륙엔 없었다. 결국 훌로리다, 조지아, 테네시, 앨라바마를 헤매다 죽었고 시체는 미시시피강에 던져졌다.
이 탐욕적인 여행도 위대한 탐험으로 둔갑 되어 조지아 주립공원에 그의 이름이 헌정되었다. 당시 체로키인들은 황금을 갖고 있지않아 스페인 병사들의 공격을 받지는 않았으나 그들과 만난 대부분의 체로키인들이 체내 면역성이 없는 유럽질병으로 죽었다. 이후 1600년대 초부터 들어 오기 시작한 영국인들과의 관계도 이 황금 때문에 모진 시련의 역사가 반복 된다. 초기 북미 이주자들도 황금을 원했지만 땅 속에 묻혀 있어 찾지를 못했다. 대신 환금換金 작물인 담배 재배를 위하여 체로키 땅을 빼앗기 시작한다.
100년간 유럽 열강들이 벌인 식민지 전쟁에서 토착 주민인 체로키 부족의 운명은 총부리로 겨누어지는 애꿎은 들소 같은 신세가 된다. 특히 7년간 지속된 후렌치/인디언 전쟁은 프랑스와 인디언의 싸움이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간의 싸움에 인디언이 프랑스와 손잡았기 때문에 영국인들이 붙인 이름이다. 체로키인 쪽에서 보면 프랑스나 영국이 똑 같은 침략자이지만 프랑스인이 비버가죽 값을 더 쳐 주고, 계속 당하기만 했던 영국인에게 복수할 기회라 여겨 프랑스 편을 들어 싸웠는데 프랑스의 패배로 오히려 영국인의 보복대상이 되어 참혹한 살육을 당한다. 영국인들과 교역하던 사슴가죽이 때론 인디언머리가죽이 되기도 하고 생포되면 노예로 팔려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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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사람들이 그렇듯이 자기의 행동을 정당화 하기 위하여 유리하고도 그럴듯한 변명과 구실을 만들어야 한다. 그 당시 개척민들은 동물간에 약육강식이 자연의 섭리이듯 하나님의 선민인 월등한 인간이 황무지의 미개하고 열등한 인간들을 체로 치듯 거르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자 신의 섭리로 생각하였다.
이런 의식을 고상하게 한 차원 높여, 유럽인들이 이 땅을 평정하고 다스려야 한다는 신의 뜻을 유럽인 후예들은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 불렀다. 이러한 협잡배 같은 사상이 인종적 편견을 만들어 순진무구 하게 맑았던 생명을, 인디언의 종자를 말리는 작업을 죄의식 없이 처리하게 된다. 들판의 소떼처럼 쫓기던 체로키인들은 1800년대엔 조지아, 앨러배마, 테네시로 거주지역이 좁아지다가, 1900년 초 무렵엔 체로키 땅의 90퍼센트를 빼앗기게 된다.<사진-1818년에 지었다는 개척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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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와중에도 체로키 부족은 유럽 침략자들의 문명을 받아들여 자체적으로 도로와 학교, 교회 등을 건설하며 체로키 라는 독립국을 세워 대의제 정부 조직을 갖춘 개화된 문명인이 되고 있었다.
그 당시 동남부에 살던 5개 부족 중에서 가장 문명적이고 진보성향을 지녔던 체로키인들은 백인들과 숱하게 맺은 동맹과 조약이 그들의 기만과 협잡으로 번번히 깨졌지만 최소한의 땅과 부족의 명맥을 위하여 백인들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심지어 체로키 추장들이나 지도층은 백인여자를 아내로 맞아 인종개량을 시도하기 까지 하였다. 그러나 서부의 골드러쉬 보다 20년 빠르게 주지아주의 달로네가 개울가에서 사금덩어리가 발견되면서부터 백인들의 눈이 뒤집히고 상대적으로 체로키부족의 운명은 나락으로 치닫게 되었다.
조지아 정부는 주내 조그만 부락에 살던 체로키인 20여명한테서 받은, 500백만 불에 미시시피강 동부 땅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빌미로 조지아주의 모든 인디언 재산과 땅, 광산채굴권을 몰수하여 제비뽑기 추첨으로 백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에 체로키인들은 연방대법원에 소송하여 인디언은 주 정부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연방의회의 결정에만 따른다는 승소판결을 받았으나 당시 대통령이었던 앤드류 잭슨(1829-1837재임, 20달러 화폐의 초상화인물)은 ‘그것은 마샬(당시 대법원장)의 결정일 뿐이다, 능력 있으면 법 집행을 해봐라’며 코 웃음을 쳤다. 집행능력이 없는 판결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가난한 개척민의 아들로 무자비한 인디언 소탕 전력으로 성가를 올려 대통령이 된 그는 최초의 평민 출신 대통령으로 미국 민주주의의 시금석이 되었다 하나 인디언들에게는 비수(匕首)로 불릴 정도로 냉혹하였으며 백인들에게도 잭슨대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카리스마를 휘둘렀다. 백인과 인디언은 같이 살 수 없다는 그의 신념은 의회를 압박하여 인디언 이주법령(Indian Removal Act)을 제정하여서 동부인디언을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 강제 이주시킨다. 이주가 아니라 땅을 뺏기 위한 강제 추방이다. 이를 싹쓸이 ‘제거’보다는 인도적이었다고 옹호하는 기록이 있지만 강자의 ‘악어 눈물’ 격이다.
1837년부터 윈필드 스캇장군이 이끄는 7천명의 기병대 총칼 위협에 정든 집에서 소 돼지처럼 끌려 나온 엄마, 아빠, 아들, 딸들은 말뚝 친 들판에 가두어 졌다가 1938년 10월부터 이듬 해 3월까지 5개월여의 유폐여행을 한다. 후세 사람들은 이 추방의 대이동을 조금은 낭만스럽게 눈물의 행로(Trail of Tears)라 부르지만 사실은 혹독한 겨울에 강행한 죽음의 행진이었다. 조상대대의 뼈가 묻힌 삶의 터전인 고향을 떠난 1만 6천 여명의 체로키인들은 테네시와 캔터키를 지나 오하이오강과 미시시피강을 건너 후일 오클라호마로 불리는 곳까지 이르는 행렬과정에서 추위와 피로, 그리고 굶주림으로 4천 여명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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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행로’이야기를 조부모부터 들은 인디언 혈통의 작가 포리스트 카터는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이라는 자전적 소설에서 그 당시 처절했던 상황을 묘사한 부분이 있어 옮겨 적는다.
‘고향 산에서 멀어져 가자 사람들이 하나 둘 죽어가기 시작했다. 비록 체로키의 혼은 죽지도 약해지지도 않았지만 , 어린아이와 노인들과 병자들이 그 까마득한 여행 길을 견디기는 힘들었다. 처음에는 병사들도 행렬을 멈추고 죽은 사람을 묻을 시간을 주었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 수는 순식간에 몇 백 몇 천으로 불어나, 결국 전체의 삼분의 일이 넘는 체로키들이 행진 중에 숨을 거두었다.
그러자 병사들은 3일에 한번씩 만 매장할 시간을 주겠노라고 했다. 하루라도 빨리 일을 마치고 체로키에서 손을 떼고 싶은 게 병사들의 심정이었다. 병사들은 죽은 사람들을 수레에 싣고 가라고 했지만, 체로키들은 시신을 수레에 누이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안고 걸었다. 아직 아기인 죽은 여동생을 안고 가던 조그만 남자아이는 밤이 되면 죽은 동생 옆에서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면 그 아이는 다시 여동생을 안고 걸었다. 남편은 죽은 아내를, 아들은 죽은 부모를, 어미는 죽은 자식을 안은 채 하염없이 걸었다.
병사들이나 행렬 양 옆에서 서서 자신들이 지나가는 걸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돌리는 일도 없었다. 길가에 서서 구경하던 사람들 중 몇몇이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체로키들은 울지 않았다. 어떤 표정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에게 자신들의 마음을 내비치고 싶지 않았다. 체로키들은 마차에 타지 않았던 것처럼 울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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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행로’를 피해 산속으로 도망간 사람들과 오클라호마에서 되 돌아 온 사람들을 모아 만든 곳이 지금 스모키산 자락에 있는 인디언 레저베이션 이다. 체로키인은 오클라호마에 30여만명, 스모키 산에 1만 여명이 살고있다.
스모키 산 입구에 있는 인디언 박물관내 극장 스크린에 나오는 인디언 할머니는 말한다.
‘얼굴 흰 사람들(백인)은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약속을 하였지만 모두가 깨졌다, 그러나 지킨 것은 단 하나다, 우리 땅을 갖겠다고 약속했고 그들은 우리 땅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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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로 밝혀보는 한민족의 뿌리
“한국인 주류는 바이칼호에서 온 북방계 아시안”
70~80%가 북방계, 20~30%는 남방계, 그리고 일부 유럽인 그룹으로 구성된 한국인 유전자 풀
북부아시아인의 유전자 풀 원천은 마지막 빙하기 시기의 바이칼 호수
인류의 아프리카 원조설과 네안데르탈인의 돌연변이론
아메리카 인디언은 한국인과 한핏줄
이홍규·서울대 의대 교수·내과
이 글을 보는 독자들은 우선 당뇨병을 치료하는 내과의사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우리 민족의 뿌리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고백하자면 필자는 당뇨병 연구를 하다가 우리 민족의 뿌리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는 1980년대에 ‘1형 당뇨병’과 조직적합성 유전자(Histo-compatibility antigen, HLA)와의 관련성을 한창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떤 특정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보기 드문 1형 당뇨병에 잘 걸린다는 것을 알고 그 상관 관계를 확실히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이었다.
이 때문에 1986년 일본 삿포로에서 열린 국제회의에도 참석하게 되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의학자들의 발표 자료를 보니 지역별로 유전자들의 빈도가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특히 중국 북부지역 사람들과 남부지역 사람들의 차이가 뚜렷이 나타났다. 또 일본인과 우리나라 사람들의 유전자들은 아주 비슷하며, 중국 북부인들과 우리나라 사람들도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의학적으로 여러가지 병을 앓는 사람들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병이 없는 건강한 사람(대조군이라고 부름)과도 같이 비교해보아야 한다. 그래야 어떤 유전자가 병을 일으키는지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국제회의에서도 건강인들의 자료를 따로 모아서 지역별로 그 분포를 분석하는 논문, 즉 인류학 연구 부분의 보고가 특별히 마련돼 있었다.
그런데 그 결과를 보니 당시 필자 같은 인류학의 문외한도 “아! 유전적으로 보면 한국인·일본인·중국 북부인은 비슷하고, 중국 남부인과 기타 남방 지역의 사람들과는 다르구나” 하는 점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필자는 이 대회를 마친 후 한국으로 돌아와서 질병과 유전자 간 관계를 좀더 깊이 연구하려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유전자 배경(뿌리)을 파악해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일환으로 여러 학자들을 만나 주변 정보를 알아보았다.
그런데 단국대에서 고대사를 연구하는 윤내현 교수를 만나 필자의 의도를 설명하고 배움을 청하는데, 오히려 윤교수는 무슨 내용인지 (한민족)학회에 한번 발표를 해달라는 것이 아닌가. 혹 떼려다 혹 하나를 붙인 셈이었다. 결국 거절하지 못하고 성신여대 박경숙 교수의 도움을 받아 논문을 써서 한민족학회지에 발표하는 ‘외도’를 하고 말았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결국 당뇨병의사로서 한민족의 뿌리를 밝히는 일에 매달리게 된 것이다.
아무튼 필자는 당시 한민족학회지에 발표한 글을 기초로 하고 최근의 연구 성과를 덧붙여 한민족의 유전적 뿌리를 좀더 세밀하게 찾아보고자 한다.
모든 동물들 중에서 원숭이와 인간이 가장 비슷하다는 것은 동물원에 한번이라도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면 원숭이, 침팬지, 고릴라 중 어느 것이 인간과 가장 가까울까. 지금 우리는 분자유전학적 연구를 통해 인간은 침팬지와 가장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이후 지금은 멸종된 많은 중간 단계의 유인원들과도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리키 등의 연구로 알게 되었다.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
다윈과 헉슬리는 인간이 아프리카에서 발생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단순히 사람과 비슷한 원숭이와 고릴라 등이 아프리카에 가장 흔하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나 고고 인류학적 연구 결과 인류의 기원은 약 600만년 전 침팬지의 조상과 분리된 후, 오스트랄로피테신을 거쳐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가 출현한 뒤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가 나와 지금으로부터 3만년 전까지 세계 여러 지역에서 살았다고 추정하고 있다. 학자들은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자바원인, 북경원인, 아슐리안토기를 만든 프랑스원인 등 호모 에렉투스가 세계 각 지역에서 살았으며, 이른바 네안데르탈인(Homo neanderthalensis)을 거쳐 현대 인류가 각 지역에서 진화하였을 것이라는 ‘샹델리아 모델’을 생각하고 있었다. 가령 우리 한반도의 선조는 수십만년 전부터 한반도에 살았고, 유럽에 살던 사람들과는 조상이 아주 다르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영국의 고인류학자 크리스토퍼 스트링거와 미국의 앨런 윌슨은 각각 두개골 화석을 비교하는 방법과 분자유전학적 방법(분자시계)으로 현대 인류가 약 15만년 전 동아프리카의 사바나 지역에서 돌연변이를 일으켜 발생한 후 이 후손들이 세계 각 지역으로 이주하여 모든 인류의 부모가 되었다는 ‘노아의 방주 모델(또는 Out of Africa theory)’을 주장하였다. 지금은 수많은 자료가 이 이론과 합치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호모 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은 현 인류(크로마뇽인)에 의하여 ‘대체’되어 사라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윌슨이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하여 얻은 결과와 부합된다.
여기서 유전자 분석법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1995년 독일의 느봔테 파아보가 1856년부터 보존되어 있던 네안데르탈인의 유골에서 뼈를 조금 떼내 유전자를 분석해본 이후 여러 사람들도 이와 유사한 연구를 한 바 있다. 그 결과 네안데르탈인들 사이에는 유전적 차이가 거의 없었으나, 네안데르탈인과 현 인류와는 그 차이가 상당히 큰 것으로 확인되었다.
유전되는 생물체의 특성은 기본적으로 DNA 염기서열에 의하여 결정된다. 생명체의 종(種)이 다르면 당연히 이 염기서열도 달라진다. 염기서열에 어떤 생명체의 청사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로 보면 요즈음 막 끝난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사람의 모든 염기서열을 밝혀낸 기념비적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 결과를 보면 사람들은 평균 1300염기서열에 하나의 비율로 차이가 난다. 생명체 사이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염기서열의 차이도 크다. 즉 ‘염기서열이 다른 정도’가 크면 클수록 생물간의 차이도 커진다는 것이다. 생명체들이 원시적인 것에서 점차 진화해왔기 때문인데,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변화하려면 유전자들의 복잡성도 커져야 하는 것이다.
예를들어 세포내 물질인 미토콘드리아DNA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인류 사이에는 단지 8개의 염기서열 차이를 보이는 반면 네안데르탈인과는 무려 27개의 차이가 나타나고, 또 유인원과는 55개의 차이가 나타난다. 따라서 네안데르탈인과 인류 사이에는 염기서열에서 차이가 크므로 인류의 직계 조상으로 간주하지 않는 경향이 생겼다.
미토콘드리아와 분자시계
이러한 차이점들을 근거로 결론지어 말하면 인류는 어떤 ‘공동의 조상’으로부터 약 60만년 전에 나뉘었다고 계산되고, 아프리카에 있던 네안데르탈인의 일부가 유럽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멸종되었고, 아프리카에 남아 있던 네안데르탈인에서 현 인류의 부모가 나타난 것으로 본다.
최근 들어서는 분자시계 개념과 DNA 돌연변이론으로 인류의 기원을 풀어보려는 연구가 매우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1963년 주커칸들과 폴링에 의해 처음 제시된 분자시계 개념은 대략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진화에는 시간이 걸리고 환경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어떤 환경에 잘 적응한 생물은 변화를 일으키지 않으나, 환경의 변화가 크면 그 지역에 살던 생물의 수는 줄어들고 새로운 형질을 가진 생물의 수가 증가할 기회가 부여된다. 이러한 현상을 뒤집어보면 새로운 형질을 가진 생물체가 많을수록, 즉 다양성이 증가할수록 그러한 진화가 진행된 시간이 길고 아마도 환경의 변화도 컸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떤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크면 클수록 진화가 일어난 시간이 오래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렇게 돌연변이에 의하여 나타나는 단백질의 변이(나아가 단백질을 만들도록 지령하는 DNA의 변이)를 조사하여 진화가 일어난 시간을 측정할 수 있다는 ‘분자시계’의 개념은 이후 직접 DNA 분석자료와 지질학적으로 얻어진 자료들을 대비함으로써 확립되었다. 이러한 분자생물학적 방법들은 지금은 모든 생물학 연구의 핵심 기법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분자시계 개념은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을 통해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발전소 같은 것으로, 우리가 먹은 당분이나 지방질들을 태워서화학에너지인 ATP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미토콘드리아는 수억년 전에 외부에 존재하던 어떤 미생물이 세포 안으로 들어와 공생을 하게 되면서 생긴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에 대한 가장 그럴싸한 이유는 미토콘드리아에는 자체적으로 유전정보를 가진 DNA가 있기 때문이다. 미토콘드리아 DNA(mtDNA)는 세포질에만 있어서, 세포의 핵 DNA와 달리 어머니의 난자를 통해서만 유전된다(정자에 있는 mt DNA는 수정될 때 들어가지 않는다).
미토콘드리아는 극히 정교한 전자전달장치를 가동하여 에너지를 생성하는데, 이 과정에서 유리(遊離) 전자가 나오고, 이것은 소위 (산화)스트레스로 작용하여 mtDNA에 돌연변이를 일으킨다. 더구나 mtDNA는 잘 보호되고 있지 않아서 나이가 들면서 돌연변이가 축적되고, 결국 이것이 산소호흡을 하는 생명체가 노화를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된다. 운동, 특히 유산소 운동을 하면 미토콘드리아의 기능이 활발해져 산화 스트레스를 같이 막아줄 경우 장수하는 것이다.
아무튼 1만6500개의 염기로 이루어진 mtDNA는 그 돌연변이가 핵 DNA에 비하여 훨씬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그 변이를 조사하면 정밀한 분자시계를 찾아낼 수 있다.
윌슨이 세계 각처 사람들의 mtDNA를 분석한 분자시계 이론에 의하면 피그미족을 포함한 모든 인류는 아주 적은 변이만을 나타냈다. 이 결과는 약 20만년 전 인류는 한 어머니에서 모두 갈라져 나온 것으로 해석될 밖에 없어서, 모든 인류는 한 어머니를 가졌다(미토콘드리아 이브)는 설명이 뒤따랐던 것이다.
미토콘드리아 이브
그림 1 인류의 이동도
스트링거가 지적한 것처럼 어떤 한 지역에서 인류가 나타나 다른 지역으로 그 일부가 이주하게 되는 경우(노아의 방주 모델), 인류의 원(原) 발생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유전적 변이는 이주하여 사는 사람들의 유전적 변이보다 훨씬 다양하다. 가령 일본 오사카에 이주하여 사는 우리 동포나 연변지역에 사는 우리 동포의 유전적 변이는 그 중심지인 서울의 유전적 다양성에 훨씬 못미칠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이는 엄격한 의미에서 유전적 차이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한민족의 특성’을 기준으로 한 비유적인 의미에서다.
한민족의 뿌리를 찾아내기 위해 mtDNA를 분석하는 일은, 우리들의 어머니 유전자가 다른 사람들의 mtDNA와 얼마나 비슷한지 알아보는 친자감별법을 크게 확대한 것으로 생각해도 좋다.
이런 식으로 보면 mtDNA의 변이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서 가장 다양하게 나타났고, 분자시계 개념으로 계산할 때 가장 오래된 변이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아프리카에서 이 mtDNA를 가진 여성이 우선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계 각처 사람들의 mtDNA 분석은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또 분자인류학적 연구 수단으로 많은 연구를 해오고 있다. 지금 각 지역 사람들의 특성을 ‘하플로 그룹’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그 자세한 것은 미국 에모리대의 더글러스 월레스가 운영하는 Mitomap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된다.
한편으로 사람의 성을 결정하는 것은 성(性)염색체다. 이른바 Y염색체가 있으면 (XY) 남자가 되고, 그것이 없으면(XX) 여자가 된다. Y염색체에 있는 어떤 특성, 즉 어떤 유전 요소는 민족에 따라 크게 다르게 존재한다.
그러나 이 요소는 유전인자가 아니다. 어떤 형질을 나타내는 것, 즉 표현형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토씨처럼 그냥 따라다니는 DNA 염기서열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실제 인체 게놈에는 엄청나게 많다. 그래서 유전자에 기생하는 이기적 유전자(요소)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무튼 이 요소를 포함한 여러 유전자의 변이를 분석한 결과 최근 남자의 원형은 약 5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나타난 것으로 결론이 났다. mtDNA 분석 결과와 시간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는 것 같으나, 분자시계법으로 얻은 수치의 오차는 상당히 커서 수만년의 차이 정도는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에 대한 연구는 단국대 김욱 교수의 업적을 위시하여 일본 학자들에 의해 많이 이루어졌다.
<그림 1>는 최근 에모리대의 월레스와 스탠퍼드대의 피터 언더힐 및 루카 카발리 스포르차의 자료들을 종합해 ‘뉴욕타임스’의 스티브 듀에네즈 기자가 그린 인류의 이동도다. 단 바이칼호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화살 그림은 필자의 이론에 근거해 수정한 것이다.
한민족의 뿌리는?
아프리카에 있던 네안데르탈인에서 현 인류의 조상이 나왔고, 이들이 세계 각처로 이동하였다면, 한민족의 뿌리는 대체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최근 유전학자들은 ‘인종’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지금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류는 유전학적으로 너무나 비슷해 ‘문화적인 차이’는 인정되지만, 유전학적 차이로는 사람들을 분류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가령 유럽인과 동양인의 Y염색체의 기본은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면 민족이란 무엇인가. 민족을 하나의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해석한다면, 한민족은 우리말과 글을 공통의 문화요소로 사용하며 한반도에 집중되어 사는 사람들을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한민족의 뿌리찾기란 결국 지금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경로를 거쳐 한반도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그 유전자 풀은 어떤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의학적으로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악성빈혈이나 백혈병을 치료하기 위해 골수이식을 할 때 이 정보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 나온 우리의 선조가 택한 경로는 대체로 두 갈래로 추정된다. 하나는 과거 인류학에서 ‘버마 경로’라고 부르던 것으로 인도양과 아시아의 해안을 따라 동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현 인류와 같이 두뇌가 발달한 집단이라면 쉽게 사람들이 살지 않는 땅으로 이동해 정착할 수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중국 땅에 현 인류가 정착한 것을 6만∼7만년 전의 일로 보고 있으니까, 아프리카에서 갈라져 나온 인류는 수천년 내에 중국대륙까지 이동했다고 볼 수 있다.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남아메리카의 남쪽 끝, 즉 칠레의 팔리아이케 동굴에 도달하기까지 약 1000년이 걸렸으니까 비슷한 정도로 팽창하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필자는 이들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현 중국인들의 유전자 풀에 어느 정도로 기여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없다. 유럽의 예를 보면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나, 인도네시아의 경우를 보면 또 의심스럽기도 하다.
어떻든 필자는 중국에 도달한 사람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한반도와 일본에도 정착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부근이 당시에는 육지로 연결되어 있어서 중국과 한반도를 분리할 이유가 없고, 사람 살 만한 곳에 사람이 없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최근 에모리대의 월레스는 이 그룹의 일부가 미 대륙으로 건너갔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림 1>에서 3만5000년 전 아메리카로 건너간 B그룹을 가리키고 있다. 아마도 해안을 따라 북상하던 그룹이 빙하기에 얼음으로 연결된 베링해를 지나 아메리카로 건너갔을 것이다.
또 하나의 경로는 히말라야 산맥 북쪽을 택하여 실크로드를 거치거나 시베리아를 거쳐 내려오는 것이다. <그림 1>의 클러스트 6, 9를 가리킨다. 지금 사람이 다니는 길을 6만∼7만년 전이라고 못 다녔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필자는 당시에는 못 다녔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다닐 수 있게 된 것은 빙하기가 끝난 1만3000여 년 전부터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유전자 풀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과 아메리카 인디언은 한뿌리
유전자 풀이란 한 종류의 생물집단이 가진 유전자의 다양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가령 혈액형(A, B, AB, O)에 따른 사람들의 분포는 각각 A형이란 유전자와 B형이란 유전자가 얼마나 그 집단에 있냐에 따라, 즉 A와 B 혈액형 유전자 풀에 의하여 결정된다. 실제로는 혈액형을 따지는 것이나 혈액형을 결정하는 유전자, 즉 DNA의 변이를 따지는 것이 훨씬 자세하게 그 실상을 알게 해준다. 서론에서 지적한 바 있지만, 중국 북부인과 남부인 사이에는 이러한 혈액형의 차이가 크다.
유전자 풀의 분석을 통하여 세계 각지 사람들의 이동을 오랫동안 조사해온 사람이 루카 카발리-스포르차 교수다. 그는 각 지역의 농경문화가 이동하는 것과 유전자 풀의 변화를 연계시켜 사람들의 이동이 농사기법의 전파와 함께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1988년에는 미국 과학원회보에 사람들이 쓰는 언어의 차이가 유전자 풀의 차이와 가까움을 통합해 전세계인을 분류하였다.
이것을 변경한 1995년판 ‘세계인 분류도’를 보면 한국인과 일본인, 티베트인, 몽골인들은 에스키모,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유전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 한묶음이 된다. 또 중국 남부인들은 캄보디아인, 태국인, 인도네시아인, 필리핀인들과 함께 묶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남부 중국인과 북부 중국인·한국인은 다른 갈래에서 왔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의문의 하나는 ‘북부 아시아인들은 언제 남부 아시아인들과 나뉘었을까’ 하는 점이다. 1986년 호라이와 마쓰나가가 보고한 일본인의 mtDNA 유전형 분포 패턴을 보면 일본인 중에 두개의 커다란 mtDNA 클러스트가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약 20%와 80%를 차지하는 이 두 그룹은 분자시계로 보아 약 12만년 전에 분지(分枝)된 것으로 보고된다.
이 자료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남북 아시아인들은 12만년 전에 분지되었다가 다시 만난 한핏줄의 사람들인 것이다. 김욱 교수의 Y염색체를 이용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약 30%는 남부 아시아인의 유전형을 보인다고 하니까, 아마도 우리나라와 일본의 인구집단 중 20∼30%는 남부 아시아인이 조상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남·북부 아시안은 언제 갈라졌나
즉 한민족의 뿌리는 두 갈래다. 그리고 그 주류는 인구 숫자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북방 아시아인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간 많은 고고학적 연구나 문화인류학적 연구 결과와 합치한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 결과를 보면 인디언들의 중심 그룹이 동북아시아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한 때를 1만4000년 전으로 보고 있으며, 이들이 현 아메리카 인디언의 선조라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시기는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는 시점이므로, 빙하가 녹으면서 동북아시아에 살던 사람들이 아메리카로 이동했다는 것도 상식처럼 되어 있다.
이 말을 뒤집으면 그전까지는 이동할 수 없었다는 뜻이 된다. 즉 빙하가 녹으면서 사람이 이동할 수 없는 장벽이 제거된 셈이다. 실제로 중국 북부에서 7000∼8000년 전으로 측정되는 최초의 신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되고, 일본 아이누인들의 정착도 8000∼1만년 전의 일로 추정되고 있는 것을 보면 대략 빙하가 녹은 이후 인구의 이동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미국 우주선에서 동남아시아 지역을 촬영한 위성사진을 보면 중국 동부지역은 저지대를 이루고 서북부는 퇴적물이 쌓인 고지대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진들과 마지막 빙하기에 있었던 아시아 지역의 빙하 위치와 주요 산맥들, 그리고 빙하가 녹으면서 만든 퇴적층의 분포를 보면, 현재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 지질학적으로 상당히 최근의 것임을 생각하게 한다.
북부 중국에 1만1000년 전쯤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석기 유적이 발견됐다고 하는데, 이를 사실로 받아들일 경우 1만1000년 전에 역시 빙하가 녹으면서 장벽이 제거되어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왔음을 의미한다.
필자는 히말라야산맥에서부터 몽골 지역과 시베리아를 잇는 광대한 지역이 마지막 빙하기에는 빙하로 덮혀 있었거나 광대한 동토(凍土)여서 사람들이 이동할 수 없는 장벽을 만들고 있었다고 본다.
실제로 앨러스테어 도슨이 쓴 ‘빙하기 지구(Ice Age Earth)’를 보면 이 시기의 시베리아는 동토로 사람이 살 수 없었고, 히말라야산맥으로부터 이어지는 산맥이 얼음으로 뒤덮히거나 좀 낮은 지역은 빙하-동토대로 이루어져 사람의 이동이 불가능했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남부 아시아인들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기원해 빙하기가 끝나면서 지금의 실크로드 경로를 택해 동으로 이동해 왔다면, 아마도 북부아시아인들은 그 북부에서 살다가 몽골루트를 거쳐 남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최근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mtDNA의 분석결과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필자로서는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다. 인도네시아 아이크만연구소의 헤라위티수도요 교수의 말에 의하면 인도네시아인들 대부분은 7000년 전 대만에 도착한 후 남으로 내려가 정착한 신석기시대인들이며, 구석기시대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 같은 그룹의 사람들은 거의 멸종했다고 한다.
이것은 남부 아시안들이 비교적 최근인 신석기시대에 중국대륙을 거쳐 남부로 이동하였음을 의미하며, 중국 남부인들도 중국 서부로부터 이동했을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하는 대목이다. 즉 미얀마 통로가 아니라 지금의 실크로드를 따르는 경로라는 것이다.
바이칼 호수는 원래 저지대
즉 <그림 1>에 나타난 이동은 1만5000년 전에 빙하가 녹으면서 시작된 것이다. 나는 바이칼호수의 물이 대부분 이때 쏟아져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의 바이칼호를 지금 흘러들어가고 있는 물로 가득 채우려면 약 400년이 걸린다니까 말이다.
바이칼호수는 길이가 636km, 최대 너비 79km, 면적 3만1500㎢로 유럽의 중소국가 벨기에의 크기와 같다. 그 둘레는 2200km이며, 최대심도 1742m로 세계에서 가장 넓고 가장 깊은 호수다.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곳이 마지막 빙하기에는 어떠했을지 생각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필자는 바이칼호수가 마지막 빙하기에는 수면이 지금보다 훨씬 낮았을 것으로 생각하고, 사람들이 잡아먹을 수 있는 동물과 물고기들이 풍부해 고대인들이 풍요롭게 생활할 수 있는 터전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현재도 바이칼호에서만 사는 동물의 종이 무려 1200종이나 되는데, 이들은 세계 어느 지역의 생물과도 다르고 유전적으로도 엄청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즉 이들 생물은 바이칼호에서 진화하고 살아남은 것이다.
2001년 11월 MBC 방송국에서 방영한 ‘시베리아, 시베리아’를 보면 소련 이르쿠츠크대의 올가 이바노브나 박사와 캐나다의 안제이 베베르 박사 등 발굴팀에 의해 바이칼호 주변의 고고학적 발굴이 5차에 걸쳐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업에서 신석기시대부터 이곳에서 사람들이 거주했다는 증거들이 나오고, 이들이 아메리카 인디언의 조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환경에서 어떻게 그런 복잡한 문화가 발달했는지는 수수께끼이며, 그 문화는 세계 어느 곳의 문화와도 다르다는 말도 하고 있다.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어떤 격리된 지역에서 장기간 살면서 진화해야만 그 지역에 적응된 형질을 얻을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특징은 추위를 이겨내기 위하여 적응된 것으로 해석되는데, 낮은 코, 두꺼운 눈꺼풀, 가는 실눈 등이 그렇다.
필자는 북부 아시아인의 조상이 간빙기에 이곳으로 이동했다가 오래 머물면서 추위에 이기는 특성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마지막 빙하기에 시베리아의 다른 지역이 모두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는데 반해 이 부근에서는 북방 아시아인의 유전자 풀이 형성되었기 때문이고, 또 이곳만이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랴트인들과 에스키모를 유럽인과 대비하면 서로 비슷함과 차이점을 알 수 있는데, 이런 차이가 5만∼7만년 전 사이에 생긴 것이다.
‘신동아’ 2001년 11월호에 실린 동국대 윤명철 교수의 바이칼호 기행문을 보면 바이칼호의 미즈반도에는 불한바위라는 곳에, 무당들이 제사를 지내는 동굴이 있다고 한다.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물이 바로 아래에서 찰랑거리는 벼랑의 중간쯤에 굴이 있다. 샤먼스카쉐바라는 이 동굴은 폭이 2m가 조금 넘고, 높이가 2.5m로 불규칙한 형태의 입구와 내부를 가진 동굴이다. 흡사 고분 속 같은 내부에는 평평한 터가 없고 안쪽으로도 무너져 내린 흔적이 역력하다. 무너지기 전에는 양쪽으로 뚫려 있어서 한쪽의 좁은 구멍으로 햇빛이 비쳐들게 돼 있었다.”
즉 이 동굴은 인위적인 구조물이자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1990년 6월 미·소(러시아) 합동조사단은 초음파를 이용해 바이칼호를 광범위하게 탐사한 바 있는데, 그 결과는 꽤 흥미롭다. 가령 호저(湖底) 420m의 깊이에서 뜨거운 물이 솟는 구멍을 발견했는데, 과거 이 부근이 마른땅이었다면 사람들이 극히 선호하는 지역이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면서 이곳의 저지대가 물에 잠겼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현상은 세계 곳곳에 전해져 내려오는 대홍수 이야기와 연결할 수 있다. 현재 이러한 가설 아래 흑해에서는 미국과 불가리아의 합동 탐사팀이 흥미로운 조사를 벌이고 있다.
타이태닉 잔해를 찾아낸 미국인 탐험가 로버트 발라드의 지휘 아래 활동하고 있는 이 팀은 대홍수 이전에 이 지역에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보다 앞선 문명이 존재했다는 전제를 기반으로 삼고 있다. 그러니까 빙하기 말에 빙하가 녹아 내리면서 바닷물이 넘치기 시작해 지중해의 엄청난 물이 보스포러스 해협을 통해 흑해로 흘러들었고, 이로 인해 원래 담수호였던 흑해와 주변의 문명들이 바다가 된 흑해 속에 잠겼다는 것이다(2001년 9월8일자 소피아발 AP통신).
필자는 그 비슷한 불행이 바이칼호에도 일어났을 것으로 생각한다. 중국의 고대 신화를 보면 뽕밭(상전)이 바다(벽해)가 되었다든가, 하늘까지 차오르는 홍수 때문에 사람들이 다 죽고 오누이 사이인 복희와 여와만 살아남아 중국인의 선조가 되었다는 이야기 등이 전해오고 있다.
인류의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대홍수 이야기는 이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도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나는 북부아시아인의 선조들이 거대한 홍수를 만나 바이칼호를 탈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빙하가 녹으면서 변두리에 있던 사람들이 남쪽으로 생기는 새로운 통로들을 발견하고 먼저 이동했을 가능성도 크다.
한국인은 유전적으로 하나의 민족 아니다
결국 유전적으로 보아 우리 민족의 뿌리는 크게 두 갈래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 중 70∼80%는 북방계이고 20∼30%는 남방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타 일부 유럽인과 다른 그룹이 섞여 있다. 필자는 이러한 유전자 구도가 구한말 이제마 선생이 주창한 사상체질의학(四象體質醫學)의 유전적 근거가 될 수도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다음은 결론적으로 단국대의 김욱 교수가 Y염색체 및 mtDNA 변이분석을 통해 동아시아인의 집단형성에 관한 연구 결과들을 개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동아시아인 집단형성에 관한 과거 인류의 집단팽창 과정과 이동경로, 그리고 그 시기 등에 관해서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이에 관한 연구는 많은 인류진화학자들에게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대부분의 인류유전학자들이 지지하는 아프리카 기원설에 의하면 아프리카에서 갈라져나온 인류가 중동을 경유해 인도 또는 동남아시아에 정착한 경우와, 중동을 거쳐 중앙아시아를 경유한 집단이 동남아시아 또는 한반도·일본에 정착했을 경우 두 방향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어느 곳에 먼저 정착했는지는 현재까지 분명치 않다.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대의 리 교수 등은 Y염색체 DNA 분석을 통해 약 6만년 전에 동남아시아에 먼저 정착한 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는 무렵 동북아시아 및 시베리아로 이주했다고 주장하고 있고, 중국 쿤밍(昆明)대의 야오 교수 또한 mtDNA 분석에서 이와 비슷한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미국 애리조나대의 해머 교수 등은 동아시아인의 집단형성은 더 복잡한 경로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그는 Y염색체 DNA 분석을 통해 중앙아시아의 유전자 풀이 동북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집단에 상당한 기여를 했으며, 일부의 경우 최근의 집단 팽창을 통해 중국 남부 또는 동남아시아의 유전자 풀이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에 기여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김욱 교수팀)가 동남북 아시아인 집단을 대상으로 Y염색체 DNA 및 mtDNA 변이분석을 통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 집단의 유전자 풀은 동북아시아인 집단의 유전자 풀이 대부분이나, 이와 함께 중국 남부 및 동남아시아인 집단의 유전자 풀이 상당량(약 30%) 혼합된 결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집단은 동아시아인 집단 가운데서도 중국인집단과 가장 가까운 유전적 변이를 지니고 있으며, 일본인 집단은 한국인과 가장 유사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때문에 한국인 집단은 적어도 두 가지 경로 이상의 다양한 민족집단이 혼합과정을 겪으면서 형성되었으며, 유전적으로 하나의 민족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초기 한반도에 정착한 민족은 물론 최근의 민족집단이 이동한 경로 및 그 시기를 밝히는 것은 향후의 과제며, 한반도에 가장 먼저 정착한 민족과 이후의 민족이동 및 집단형성 등에 관해서도 좀더 자세한 연구가 진행돼야 할 것이다.”
세계인들의 경쟁
필자는 더 자세한 결론을 얻기 위해서는 동북아시아 사람들에 대한 유전자 풀 분석이 진행돼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미국 에모리대의 월레스는 2002년 중반 정밀한 연구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한다. 즉 우리의 유전적 뿌리를 미국 학자들이 밝히는 단계에 있는 것이다.
또 이웃 일본에서는 수년 전부터 일본인의 기원을 찾는 연구를 위해 해마다 10억원의 정부 예산이 집행되고 있다. 게다가 일본의 NHK방송은 현재 일본인의 기원에 대한 르포를 시리즈로 방영, 일본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외국에서 이러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하더라도 필자는 한국인의 유전자 풀과 동북아시아 지역의 유전자 풀을 비교 연구하는 우리의 ‘이브(EVE) 계획’은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내는 일을 우리 손이 아닌 남의 손에 맡겨둔다는 것은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 그리고 우리 손으로 우리 자신의 정체를 파악해내는 작업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일이다.
필자는 이브 계획이 단순히 한국인의 염기서열 분석에 그칠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진화과정에서 겪었던 과거를 감안하고 지금의 체질을 함께 조사하는 대형 연구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이 한민족의 진화(Evolution)와 역학(Epidemiology)을 함께 조사하려는 이브계획(국립보건원 주관)의 기본 시각이다.
유명한 진화론자인 도브잔스키는 “당뇨병과 같은 흔한 유전적인 질환의 이해는 인류의 진화(과정과 적응한 환경)에 대한 이해 없이는 올바르게 접근할 수 없다”라고 갈파한 바 있다. 물론 이 프로젝트에는 미토콘드리아 유전체를 중시하는 뜻도 있다.
새천년을 맞이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이 바이칼호를 찾고 있다. 필자와 몇몇 사람들은 2002년 7월 바이칼호변의 도시 이르쿠츠크의 아카뎀고로도크 과학도시에서 한국인의 뿌리를 찾는 조그마한 학술모임을 계획하고 있다. 이 모임이 발전하여 제대로 된 해저고고학적 탐사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며, 한국인의 유전적 뿌리를 찾는 일에 여러분들의 지원을 부탁드린다.
(이 글을 위한 자료 수집과 내용에 도움을 주신 성신여대 박경숙 교수, 단국대 김욱 교수, 서울대 최몽룡 교수께 감사를 드린다)
출처: http://lssblog2.tistory.com/213 [돌나라의 역사이야기]
(칼럼) “미국 인디언의 조상은 한국인”
아메리카 인디언의 뿌리는 한국인이다.
2007-10-24 오후 2:14:01
미국의 인디언 영웅 ‘태쿰세’ 여추장은 한국인
- 소설가 김 용필 -
아메리카 인디언의 뿌리는 한국인이다.
아메리카의 인디언은 아시아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베링 해를 넘어 아메리카로 이동하였다. 몽골리언 아메리카 이동의 루트를 살펴보면 제1차(BC 15,000년경) 제2차(BC 6000년 경, 제3차(BC 4,000-2,000경)에 걸쳐 이동하였다.
AC 1만년 까진 아시아와 아메리카는 대륙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BC 6000 년경에 두 대륙으로 갈라졌는데 당시의 기후가 온난해서 빙판이 아닌 옅은 연안이어서 작은 뗏목 정도로 건너다닐 수 있었고 썰물 땐 걸어서도 이동할 수가 있었다.
바이칼 호수의 몽골리언들이 아시아에서 아메리카로 건너간 역사는
AC 15,000년경에 시베리아 레나강변의 ‘아메린드’족과 ‘알곤킨’족이 캐나다로 건너가서 북미에서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로 이주하여 현재 남미의 인디언 쇼니족 이 되었다.
그 후 BC 6,000년경에 시베리아 알단강 유역의 ‘아타바스카(나데네)족이 이주하여 중앙아시아의 잉카문명을 만들었고, AC4,000년부터 BC2000년경에 흑룡강(아무르 강)변의 고조선의 동이 예맥족 (에스티모 얄륫)이 베링 해를 건너 캐나다 북미에 정착을 하였다.
소위 위스콘신 제4빙하기에, 캘리포니아 샌디애고까지 내려갔다. 그들이 북미의 인디언 ‘아파치족’ 이나 ‘나바호’족의 조상인 것이다.
BC 2203년 고조선의 4대 오사구(烏蛇邱)왕이 반란으로 왕위가 박탈당하자 유민 500여명을 이끌고 흑룡강(헤이룽 강=아무르강)으로 도망을 갔다가 베링 해를 건너 아메리카로 이동하였다. 그들이 미국 서해안에 정착한 미국의 원주민이었다. (샌디애고까지 정착)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유전자를 살펴보면 한국인과 꼭 같다. 이들은 고조선의 후예들로써 한국의 언어를 사용하였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신앙은 샤머니즘 숭배인데 이들은 “곰”을 어머니의 조상신으로 모시고 있다. 이는 고조선의 단군이 곰의 아들이란 신화와 같은 것이다. 알라스카 웨일즈 섬에 가보면 한국과 흡사한 무속신앙을 볼 수 있는데 솟대와 장승(천하대장군 여장군)이 여기저기 세워져 있고 그 장승과 솟대위에 까마귀 상이 얹저 있다. 바로 오사구 왕을 상징하는 기물이다.
‘아파치’란 뜻은 아버지란 뜻이고 ‘나바호’란 곰 즉 어머니란 뜻이다. 이렇게 북아메리카의 인디언은 고조선의 후예들로 이들이 미국의 원주민인 것이다. 그러나 아파치 족의 최후는 고조선의 후예들의 종말을 고했던 슬픈 역사로 기록되었다.
미국의 위대한 인디언 여추장 ‘태쿰세 ( Tecumseh )’ 는 바로 한국인계 추장이었다. 그녀는 인디언의 영웅이었다. 오하이오 주에서 태어나 여추장이 되어 영토수호를 위해 백인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종족이 전멸위기에 달하자 영국군에 투항하여 영국의 지원을 받아 인디언 복지에 나섰다.
그녀는 인디언의 대변자가 되어 백인사회에서 출세한 인물이 되었고 백인으로부터 막대한 후원을 받아내서 인디언 복지에 힘썼고 백인과 인디언이 공존하는 사회를 만든 영웅이었다. 아무튼 미국은 한국계 인디언들이 원주민으로 살았던 땅이었다. (끝)
아메리카 인디언. 미국의 인디언 학살! 거론되지 않는 역사! 관심사!
2013.06.21.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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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전 미국내 인디언수는 1500~2000만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조선의 인구와 거의 동일하다.
허나 영국을 비롯하여 여러 이주민이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하고 학살과 유행병으로 인해
현재 25만명 정도이며
순수 인디언은 더욱 적을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 문자 대부분 소실된 상태이다.
미국은 처음부터 인디언을 보호하고 공생할 목적은 없었으며 처음부터 학살이 목적인 정책을 폈다 그리고 서서히 수를 줄여 왔다..
생각해보면 히틀러와 다를바가 없다 아니 히틀러보다
더 악랄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히틀러는 단기간에 60만명정도 이다(일부 600만이라고 하나 좀 과장됬다고 하며 15~100만정도라고 이야기된다)
반면 미국은 2000만명 우리나라 인구의 반이다.
2차대전 총 사망자수인 5000만명에 비교하면 절반수준이다. 세계대전에 비교해도 절반인 수준이다..
즉 미국은 2천만명을 학살한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자세히 거론되지도 않고 책이나 교과서에서 큰비중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강대국 이라는 이유로 하나의 문명을 말살했어도 논쟁거리 조차 되지 않는다.
참 아이러니 하다...
또한 유대인은 세계 주류 민족이라는 근거로 모든 나라의역사교과서와 대중매체등을 통해 피해자로 각인되고 불쌍한 민족으로 각인 되고있다.
반면 유대인의 약35배 정도 학살된 인디언은 비주류라는 이유 만으로 신중하게 이야기 되지 않는다.
역사는 승자(강자)에의해 거론되고 쓰여진다는 말이 사실이라는걸 다시한번 느낀다.
[출처] 아메리카 인디언. 미국의 인디언 학살! 거론되지 않는 역사!|작성자 듀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