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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2일
말씀 : 고후7:11
제목 : 깨끗함을 나타내는 삶
우리는 거듭난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도 거듭난 삶을 살지 못하면서 살고 있다고 착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육체적, 감정적으로 감동 받아 눈물 흘리는 것을 은혜 받았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거듭난 삶의 기준을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지난주에 나눈 미가의 이야기 그 후의 사건들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큰 착각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점검해보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미가와 그의 어머니가 말씀 가운데 서지 않아서 모든 것이 틀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사사기 17장 7절을 보면 유다 베들레헴에서 온 레위 청년이 등장합니다. 사사기 17장을 유심히 보면 7, 8, 9절에 연달아서 나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삿17:7-9 ‘유다 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청년이 있었으니 그는 레위인으로서 거기서 거류하였더라 그 사람이 거주할 곳을 찾고자 하여 그 성읍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가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매 미가가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부터 오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서 거류할 곳을 찾으러 가노라 하는지라’ 사사기의 저자는 왜 세 번이나 반복해서 이 레위인이 ‘유다 베들레헴’ 사람임을 강조했을까요? 그것은 이 레위 청년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기업을 벗어나,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떠나 떠돌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수아 21장을 보면 레위인들의 거주지는 따로 정해져 있었는데 당시 레위인이 자신의 거주지를 떠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레위인은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과는 다르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그분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특별한 사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자는 17장의 레위인이 유다 베들레헴 출신임을 강조함으로써 그가 거주지를 이탈하여 사명을 저버리고 에브라임 산지까지 오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영역과 의무를 다 버리고 온 이 레위 청년은 우연히 미가의 집에 이르게 되었고, 미가는 그가 거주할 곳을 찾고 있다는 것을 듣고 자기의 가문을 위한 제사장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왜냐하면 레위인이 자기 집의 제사장이 되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삿17:13 ‘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미가는 레위인이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는 율법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집에 은 신상이 만들어졌을 때 자신의 아들을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결국 미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 자기 눈에 좋게 보이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레위 청년도 미가와 함께 지내는 것에 만족했습니다. 그가 미가의 집에 머물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미가가 그에게 재물을 약속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해마다 은 열 개와 의복 한 벌과 먹을 것을 준다는 제안에 뒤도 안 돌아보고, 즉 하나님께 기도 한번 해보지 않고 바로 결정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레위 청년이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편하고 만족스러운 것들을 구하는 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위해 구별되었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규례나 율법을 어기는 것을 개의치 않는 타락한 레위인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삶은 '그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우리 마음 중심에 십자가와 복음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지만 이 세상 혹은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단 지파의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에서 거주지를 얻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미가의 집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단에게 주신 땅은 이곳이 아니었지만 그곳에는 강력한 아모리 족속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곳으로 들어가는 대신 '소알'과 ‘에스다올’로 물러가 새로운 정착지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 정복이라는 위대한 사명을 뒤로하고 자기들이 만족할 만한 땅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는 단 지파의 모습이 미가의 집에 살고 있는 레위 청년의 그것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회피한 채 편안함과 부요함을 택하며 살아갔습니다
미가의 집에 잠시 머무르게 된 단 지파의 정탐꾼들은 제사장인 레위 청년에게 자기들의 여정이 형통할지 하나님께 여쭤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듣고 싶어 했던 축복의 말을 해주었습니다. 저자는 레위 청년이 실제로 하나님께 여쭈어보았는지에 대해서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는 곧 그가 단순히 단 지파 정탐꾼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들이 원하는 축복의 말을 해주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말을 들은 정탐꾼들은 그들의 지파가 머물 땅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섰고, 정탐이 끝난 후 그들은 전쟁을 위한 600명의 용사들과 함께 다시 미가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 있는 에봇과 드라빔과 신상을 들고 나오면서 레위 청년에게 미가의 집을 버리고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달라고 제안했습니다. 사명이 아닌 물질 때문 미가의 집 제사장이 된 그는 그들이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자 전에 그랬던 것 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 지파에 합류했습니다. 돈만 주면 어디든 가서 제사장이 되어주는 타락한 레위인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미가는 그가 만든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을 다 빼앗기게 됩니다. 자신에게 복을 줄 것이라 생각했던 신상과 드라빔이 오히려 그에게 큰 손해를 입혔습니다. 또한 단 지파는 하나님을 버리고 미가에게서 훔쳐간 우상을 섬겼으며(삿18:30), 자신의 안락함과 만족을 위해 제사장 자리를 옮겨 다녔던 레위인을 그들의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사사기의 저자는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된 레위인 청년이 누구인지 밝힙니다. 그는 바로 그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손자이며, 게르손의 아들인 ‘요나단’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세의 가문이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런데 불과 2세대가 지난 후 모세의 손자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를 벗어나 자기의 구미에 따라 사역지를 정하고 돈과 재물과 명예를 따라 제사장직을 결정하는 세속적인 레위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모세의 가문까지 이와 같은 영적 타락에 빠졌다는 사실은 신자들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지 100년도 채 되기 전에 그들은 이미 그들 앞에서 쫓겨난 가나안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으며, 하나님의 말씀 대신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살아갔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사사기의 첫 번째 끝맺음은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을 고발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미가 한 사람이 만든 신상이 단 지파 전체에 악영향을 끼쳤고 마침내 이스라엘 전체를 올무에 빠트리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올바른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사사 시대 이스라엘이 영적 타락을 겪게 된 이유는 하나님이 아닌 자기 스스로를 왕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중심이 아닌 나 중심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못하고, 십자가를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고, 십자가를 통과한 삶을 살지 못하는 오늘날의 교인들이 미가 시대의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열심을 내고 있다고, 복을 받을 것이라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예배한다고 말하면서 이 땅에서의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종교의식을 동원하며 세상의 방법으로 살아간다면 우리 또한 사사 시대의 그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삶은 하나님 중심의 삶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왕은 누구입니까? ‘나’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존귀하게 여기는 자를 존중하십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고 거듭난 자로서 십자가의 보혈을 적용하며 사랑을 실천하여 변화된 삶을 추구하는 심령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복음을 더 깊게, 더 세부적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기 유익이 아닌 그 나라를 위해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무엇이 풀리면 모든 것이 풀립니까? 무엇을 세우면 모든 것이 세워집니까? 각자의 일터 또는 가정에서 이런 생각들을 많이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도해야 풀리고 세워 진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이 문제를 더 정확하고 더 깊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은혜는 어디서 옵니까? 문제가 잘 해결되어 위기를 넘기고 기쁜 일이 생기는 것이 은혜라고 한다면 그것은 결과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은혜는 십자가에서 나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은혜를 모른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은혜가 아닙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은혜를 알아야 진정한 은혜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감사도,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은 십자가에서 나옵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무엇이 풀리면 모든 것이 풀립니까? 무엇을 세우면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세워집니까? 이 질문의 해답이 십자가라는 것을 알고 체험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교회와 가정에서 반드시 십자가가 바로 세워져야 합니다. 모든 것은 십자가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복음으로 출발해야 우리의 목적인 하나님나라를 소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영광을 이 땅에서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주님의 십자가가 나의 죽음과 심판의 십자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회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참된 회개의 4가지 특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회개를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이유는 세상에 쉽게 동요될 만큼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철저하게 구별되기 위해 우리는 회개를 우리 안에 각인해야 합니다.
첫째, 참된 회개의 본질은 복음입니다. 회개는 오직 십자가 보혈로만 가능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 안에 애통함이 채워져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주님의 사랑이 십자가로부터 흘러 내려와 우리 영혼을 적심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한 우리의 수많은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알고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 안에 애통함을 채울 수 있습니다.
둘째, 참된 회개의 열매는 거룩입니다. 거룩은 오직 십자가로만 가능합니다. 십자가의 현장에서 십자가를 바라볼 때 드는 생각들과 느끼는 감정들은 십자가에서 나타나는 거룩함과 일치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현장에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마음이 녹아내려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사람의 회개는 그 본질과 열매가 거룩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셋째, 참된 회개는 강렬합니다. 슥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인간의 영혼 혼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가장 깊은 감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슬픔은 장자를 잃어버린 슬픔보다 더 큽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흔들어 놓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나의 죄를 보며 그곳이 내가 죽어야 할 자리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 참된 회개는 기쁨을 예고합니다. 경건한 슬픔으로 흘리는 눈물은 거룩한 기쁨의 싹을 틔우는 씨앗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이 귀한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은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됩니다. 시126:5-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이 은혜는 오직 기도하며 통회할 때 누릴 수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은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평안이 임하는 것을 체험하거나 복음의 진리를 깨달을 때마다 누리는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수 없습니다. 운명적으로 천국에 가 있는 우리들은 천국의 영광을 이 땅으로 끌어내려 그 나라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하려면 먼저 우리가 거룩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의 모든 영역이 거룩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철저하게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 모든 회개의 과정을 보여줍니다. 고후7: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에 대해 7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간절하게 하며’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의 잘못의 심각성을 진지하게 인식하고 그것들을 바로잡기 위해 열심을 품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변증하게 하며’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들의 입장에 대해 탄원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셋째, ‘분하게 하며’ 바울을 공격하여 그의 명예를 실추시킨 적대자들에 대해 고린도 교인들이 분노를 느끼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과거의 고린도 교인들은 그들에게 동조하였거나 적어도 그들의 행위를 방임했습니다.
넷째 ‘두렵게 하며’ 바울을 다시 볼 면목이 없는 것 또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가리킵니다.
다섯째, ‘사모하게 하여’ 복음을 심어준 바울을 진정한 사도로 받아들이며 예전처럼 신뢰와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간절히 열망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섯째, ‘열심 있게 하며’ 회개와 성결의 실천을 위한 열심, 그리고 바울을 섬기려는 열심을 의미합니다.
일곱째, ‘벌하게 하였는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공격한 자들을 공의에 입각하여 처벌하였음을 말해줍니다.
본문의 7가지 근심의 결과는 바로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입니다. 즉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의 무죄를 입증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깨끗함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대로 삶을 살아가기 위한 7가지 근심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은 회개를 통한 정결함과 거룩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기초가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너무나 세속화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하신 이름을 마치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우리의 욕심을 위해 도용하면서 교회의 핵심 가치를 놓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흥, 교회 사업, 관계 등에만 몰두하면서 교회의 핵심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회복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교회의 핵심 가치는 교회에 생명이 흐르는 것, 교회가 십자가 복음 위에 세워지는 것, 교회를 통해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핵심 가치에 집중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영명교회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