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전쟁의 시작
전쟁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60여 년 전 벌어진 6·25전쟁에서 전쟁을 제대로 이해하는 대한민국 군 지휘관은 거의 없었다. 중국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정부의 군대에서 경력을 쌓았던 김홍일 장군, 일본 육사 출신으로 실전을 치렀던 김석원 장군 정도가 전쟁을 조금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두 장군 역시 대규모로 벌이는 전쟁에서 경험을 쌓은 것은 아니었다.
대대급 병력의 전투에서 참여해 본 경험이 거의 다였다. 대한민국을 이끌었던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였다. 국제무대에서 약소국이 지닌 서러움을 잘 알고 외교적 전략을 통해 대한민국의 입지를 다지는 데는 아주 탁월했던 분이었지만 전쟁 자체는 잘 알지 못했던 대통령이었다.
전쟁 당시 국방부를 이끌었던 신성모 장관도 그랬다. 그는 선원 출신이었고, 상하이(上海)를 기반으로 국제노선을 오가는 상선(商船)의 선장을 맡았던 게 가장 큰 이력이었다. 어느 누구도 전쟁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시기였다.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김일성의 섣부른 야욕은 이 땅에 거대한 전쟁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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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포스터 덜레스 미 국무성 특사가 38선 시찰을 하면서 촬영한 사진. 왼쪽부터 존 무초 주한대사, 신성모 국방장관,덜레스.
나는 1950년 4월 전까지 광주에서 국군 5사단을 지휘하다가 임진강 전면을 방어했던 1사단의 사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대한민국은 개성을 우리 땅으로 안고 있었다. 그러나 부임 직후에 개성 일대를 살펴보니 방어 전면이 너무 넓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언제라도 북한의 김일성 군대가 남침을 시도하리라 봤다. 그 가능성이 얼마인지와는 상관없이 국군 1사단장으로서의 나는 전쟁 가능성에 대비해야 했다. 나는 전쟁이 돌발하면 개성을 지키기가 어렵다고 봤다. 1개 사단으로는 90㎞에 달하는 개성 방어 전면을 담당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임진강 남쪽의 파평산~적성 일대에 참호를 파서 주방어선을 설정한 다음, 그 뒤로 3선까지 이어지는 방어 계획을 확정했다. 당시 대한민국 군대는 혹시 있을지 모를 김일성 군대의 남침에 대비하기 위해 전선의 사단에 방어 계획을 가다듬으라고 지시했다. 그에 따라 나는 개성 이남의 진지 공사에 돌입했다.
그렇게 분주히 방어 계획 작성에 열중하던 나는 그해 6월 10일 경 발령을 받았다. 시흥의 육군보병학교에 가서 고급 지휘관 교육과정을 이수하라는 내용이었다. 그에 따라 서울의 신당동 집에서 시흥으로 출퇴근하며 교육을 받았다. 차량 등 일선 지휘관에 대한 지원은 없었다. 매일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부지런히 시흥을 다녔다.
무시했던 전쟁의 조짐들김일성 군대의 동향은 그때까지 줄곧 관심사였다. 내 개인적인 관심사 정도가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와 군대가 줄곧 주목했던 동향이었다는 얘기다. 내가 1948년 정보국장의 자리에 있었을 때도 없는 예산에 많은 돈을 들여 사람을 파견하면서 모았던 게 북측 군대의 동향에 관한 정보였다. 그때에도 북한은 이미 적잖은 힘과 노력을 기울여 전쟁 준비에 나선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1950년에 접어들면서 김일성 군대의 동향은 더욱 분주해졌다. 6월 들어서는 그 정도가 훨씬 심해졌다. 그래서 채병덕 육군참모장 등 수뇌부는 6월 11일을 기해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김일성 군대의 남침이 전격적으로 벌어지기 하루 전 그 경계령이 풀렸다. 6월 23일 24시를 기해 전군에 내려졌던 경계령이 풀리면서 수많은 장병들이 외박과 휴가를 나갔다.
24일의 분위기는 아주 평화로웠다. 나는 마침 시흥의 보병학교에서 치를 시험에 대비하고 있었다. 토요일이었고, 평소보다 더 안온한 분위기에서 책을 들여다보며 씨름하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육군본부 한 구석의 상황은 그와 전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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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정보과에 배치돼 근무하던 소위 시절의 김종필.
김종필 중위는 당시 육본 정보국에 속해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문관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 등과 함께 1949년 12월 북한의 기습 남침 가능성에 관한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그랬던 까닭에 그는 전선 상황에 매우 민감했다. 심지어 6월 24일 38선 동향이 아주 심각해지자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에게 긴급 적정(敵情) 브리핑을 했다고 한다.
김종필은 그 자리에서 “적이 전선에 병력과 무기들을 전진배치하고 있어 오늘내일 안으로 공격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아주 정확한 예측이었다. 김종필 등 정보국의 발 빠른 움직임에 따라 육군본부 총참모장 채병덕 장군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두 팀을 적진으로 파견했다고 한다.
60여 년 전 벌어진 6·25전쟁의 속내를 드러내 보여준 학자는 꽤 많다. 그 중에서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줄곧 나를 찾아와 당시의 여러 가지 사정을 두고 인터뷰를 했던 학자다. 그의 저작은 전쟁 당시의 상황을 아주 깊이 파고 들어갔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에 따르면 채병덕 총참모장은 동두천과 포천, 개성 지구에 정보장교들을 급파했다고 한다.
24일에 보낸 요원들은 다음날인 25일 오전 8시까지 채병덕 총참모장에게 보고를 하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이튿날 새벽에 터지고 말았다. 일부는 26일 오전 육군본부에 돌아와 적정에 관한 보고를 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전선은 이미 북한군에 의해 철저하게 짓밟힌 뒤였다. 다른 일부 정보요원들은 개성으로 넘어가 적진에 들어갔다고 했다. 이들은 결국 육군본부가 대전으로 후퇴한 뒤에야 돌아와 보고를 마칠 수 있었다.
정보국의 김종필 중위는 그날 당직을 자처했다고 알려져 있다. 상황이 너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줄곧 적정을 파악하던 김종필 중위는 오후 들어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고 한다. 육군본부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전쟁 발발 15일 전인 6월 10일 대대적인 인사이동으로 전방의 사단장과 육군본부의 지휘관이 상당수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쟁 전야의 한가로운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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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발발 당시 인민군의 남침에 대한 작전을 총지휘해야 했던 채병덕 육군총참모장.그는 간밤의 파티에서 늦게 돌아와 잠들었다가 몽롱한 상태에서 북의 남침과 직면해야 했다.
적의 침공에 대비해 방어 계획 작성을 주도했던 강문봉 작전국장도 그때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후임자인 장창국 대령에게 자리를 물려준 뒤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모든 상황이 김일성 군대의 남침에 유리하게 맞춰지고 있었던 셈이다. 게다가 느닷없이 비상경계령을 해제하면서 전선의 핵심 방어인력 중 상당수가 외박이나 휴가를 나간 상태였다. 오로지 육군본부의 정보국만이 전전긍긍하면서 전선 너머의 적정을 파악하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날 저녁에는 용산의 장교구락부 준공식이 있었다. 지금 미 8군 용산캠프 안에 있는 콘크리트로 지은 건물이었다. 장교구락부의 준공식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대한민국 군대의 고위 장교들이 서로 모여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였으니 말이다. 교육생 신분이기는 했지만 나 역시 그 자리에 초청을 받았다. 나는 저녁 무렵 도착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을 비롯해 정부 요인, 일선 사단장을 포함한 고위 지휘관 등이 그 자리에 얼굴을 드러냈다. 나는 술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래서 미군이 들여온 작은 콜라 두 병을 시켜 마시면서 한 구석을 지키고 있었다.
폭풍 전야였다. 준공식은 스탠딩 파티 형식으로 벌어졌다. 적지 않은 부인네들도 눈에 띄었다. 고위급 장성들이 모이고, 정부의 요인들도 얼굴을 드러내는 자리여서 제법 흥이 높아져 갔다. 벌써 술을 들이켜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나는 자리가 흥에 익어갈 무렵 그곳을 떠나 신당동의 자택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들은 내용이다. 우리 고위 장교들은 술이 거나하게 취하도록 그 자리를 이어갔던 모양이었다. 채병덕 총참모장의 귀가 시간은 새벽 2시였다고 한다. 박명림 교수의 기록에 따르자면 그렇다. 육군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총참모장이 자리를 떠나지 않으니 다른 고위 장교들도 자리를 지켜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술자리는 새벽까지 이어졌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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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하하는 북한 전차들.
그날 38선 전역에서는 북한군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병력 이동은 이미 마친 상태였다. 세부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전선 일대에서 곧 강력한 야포 사격을 벌일 작전명령이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육군본부에서 그에 주목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장교들은 술에 취해가며 그 순간을 맞이했다. 정보국의 일부 당직자들만이 애를 태우고 있었다. ‘뭔가 크게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초조에 휩싸이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