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가려진 신불산 공비 토벌 작전
65년 만에 국가 유공자가 된 故 남상을(南相乙)
2018.1.20.고향에 왔다가 고향의 노모당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6.25 때 남편을 잃고 딸 하나를 두고 청상과부로 혼자 살아왔던 미망인(남상을南相乙 처)을 만나게 되어 근황을 물어보니, 6.25 사망자 유족연금은 물론 생활보호 대상자 혜택도 못 받고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도 6.25 참전용사비를 받고 있는데, 목숨을 바친 사람의 가족들이 이렇게 소외되어서는 안되겠다 싶어 사망자의 인적사항 파악에 나섰다.
주변에서 옆집에 살았던 남철희씨가 잘 안다고 하여 수소문하여 대신동에서 만나보니, 처음 전사자로 유족 연금을 받았으나, 1961년경 밀양 보훈지청으로부터 호출이 있어 미망인과 함께 갔더니, “전사자가 아니고 결핵으로 병원에서 질병으로 사망한 병사(病死)이므로 잘못 지급되어왔으므로 지금까지 받아 온 금액을 납부하라”고 하여, 이를 거부하고 온 이후 지급 중단 되었다고 한다.
족보와 제적등본의 기록을 검토하였으나, 군번을 몰라 병적 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없었다.
다만 제적등본에는 1953년6월18일 일시 불상, 지구 불상에서 전사(戰死)라고 기록되어있었다.
2018.1.26.일 유가족 딸 남문학과 함께 부산지방 보훈청을 방문하여 알아보니, 다행히 과거에 받았던 구 대장(臺帳)에서 군번(2602441)을 발견하여, 29일 병적 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육군본부에 탄원서를 낸 결과 3/4일 육군본부로부터 사망자의 신원을 확인받고, 국방부에 민원을 제기토록 안내를 받았다.
7/12 국방부 중앙전공사상심사위원회에 심사 결과 ‘순직Ⅲ형’ 판정 받아 사망 보상금 1,000만원 수령과 고향 공동묘지에 있던 유해를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하였다.
2019.1.25 문재인 대통령 명의 국가유공자 증서 수령 및 2000만원 일시금 및 매월 160만원의 유족 연금을 수령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65년만에 명예를 회복하고 유족으로서의 혜택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故 남상을(南相乙)은 1926년5월3일 生으로 경남 창녕군 부곡면 구산리에서 태어났다.
입영(入營)은 1949년1월27일이고 유일하게 유족이 보관하고 사진에는 하사 계급장에 부대마크는 3사단 23연대 소속이었다.
고향 원로들이 증언하기로는 양산에 공비토벌작전에 나갔다가 폐결핵으로 집에서 요양하고 있었다고 한다.
휴전회담이 타결되 전 5육군병원(구 부산 망미동 소재)에 입원하여 1953.6.18.일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는데, 계급은 하사가 아닌 일병으로 기재 되어 있었다.
영남지역의 치안을 담당했던 3사단
1947년 12월 1일 조선경비대 제5, 6, 9연대를 근간으로 부산광역시에서 창설된 한국군의 8개 초기사단 중 하나. 이응준 보병 대령을 초대 여단장으로 조선경비대 '제3보병여단'으로 창설되었으며, 1949년 5월 12일 최덕신 대령을 초대 사단장으로 하여 '제3보병사단'으로 승격되었다.
보병 제18연대(진백골연대)는 자원입대한 서북청년단원들이 중심이 된 부대였는데, 극도의 반공성향과 전투적 기질을 자랑했고, 자신들의 철모 좌우에 백골(白骨)마크를 그려넣었다고 한다.
"백골부대" 라는 명칭은 전쟁 당시까지만 해도 진백골연대만을 칭하는 별명이었고 3보병사단의 별명은 "사자부대" 였는데, 한국전쟁 이후 더 전투적인 이미지의 "백골부대"를 사단 상징명칭으로 정하게된다.
보병 제23연대는 1949년6월20일 경남 마산시 월영동에서 초대 연대장 김종평 중령을 중심으로 창설되었다.
연대의 주요 공적으로는 부산 및 경남지구 공비토벌 작전에서 적 142명을 사살하고, 56명을 생포하였으며, 1950년 6월25일 북괴의 불법 남침시 동해안의 주요 요충지인 영해지구에서 적 5사단과 치열한 공방전 끝에 낙동강 교두보를 확보하고, 호림유격대 소령 홍성준 이하 394명이 편입하여, 아군의 반격작전시 포항지구 전투에서 한국군 최초로 형산강 도하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적 방어선을 돌파후 울진, 강릉, 삼척을 탈환함으로서 연합군의 북진 공격에 결정적인 발판을 마련하였다.
1950.10.1일 강원도 양양군 만세고개에서 통한의 38선을 최선봉으로 돌파함으로서 국군의 날로 제정케 되었고, 1950.10.10.일 북괴의 최대 요충지인 원산을 최선봉으로 탈환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부대 방문과 함께 전장병이 1계급씩 특진하는 영예를 누렸다.
1950.11.30.일에는 최북단 라남까지 진격한 연대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불가피하게 성진항에서 LST로 철수하였다.
1951.1.4.일에는 강원도 영월 옥동리전투에서 적9사단을 격멸하여, 공세이전의 발판을 마련 하였다. (보병제23연대 2009년 6월20일 부대 창설 60주년 기념탑에서 발췌)
그러나 1951년 그 유명한 현리 전투에서 부대원 2/3가 전사, 실종 당하는 참패를 당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당시 3사단 사단장이 전장병 외출및 귀가 통제 조치를 하여 전쟁이 터지자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현재는 제5군단 예하 사단으로 중부전선 철원 지역에서 제6보병사단과 함께 GOP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아래에는 국군 최초의 기갑여단인 제1기갑여단과 국군 최강의 화력을 자랑하는 제5포병여단 있으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메이커 사단이다.
6.25 전쟁 개전 당시 국군의 사단 배치
6.25 개전 당시 남한 정부의 병력 배치는 다음과 같다.
제1선 (전방)
옹진 반도 : 17연대
개성지구 : 제1사단(10,000명 : 제11, 12, 13연대)
동두천지구 : 제7사단(10,000명 : 제1, 3, 9연대)
춘천 원주 지구 : 제6사단(9,000명 : 제2, 7, 19연대)
서울 : 수경사(7,000명 : 제3, 8, 18 기갑연대)
주문진, 강릉지구 : 제8사단(7,000명 : 제10, 21연대)
제2선(후방) 예비사단
중부 : 제2사단(8,000명 : 제제5, 16, 25연대) - 대전지구
영남 : 제3사단(7,000명 : 제22, 23연대)
호남 : 제5사단(7,000명 : 제15, 20연대)
영남지역 빨치산 투쟁의 근거지가 된 신불산
격동의 해방공간, 그리고 전쟁. 치열한 좌우 대립 속에 수많은 빨치산들이 자신의 이념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사실은 역사적으로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빨치산들은 지리산 근방에서 대규모로 활동했지만 그 외에도 전국적으로 널리 분포했다. 영남 지역에서는 신불산이 그 근거지가 되었다.
해발 1,209미터 신불산 일대는 간월산, 영축산, 재약산, 가지산, 운문산 등 고봉들이 몰려 있어 영남알프스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높은 봉우리와 크고 작은 계곡들은 빨치산 활동에 최적지가 되었다.
이곳은 1948년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빨치산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전쟁 발발 이후에는 동해남부유격대 정예부대가 이북에서 내려와서 기존에 존재하던 빨치산들과 합류하여 함께 활동하게 된다.
영남알프스는 신불산 빨치산의 근거지였다.
신불산 빨치산은 1948년부터는 남로당 경남도당 동부지구당 소속이었고, 6·25 전쟁이 나면서 동해 남부지구당으로 바뀌었다가 전쟁 중에 남로당 제4지구당 제3지대로 편제됐다.
6.25 전쟁 당시 신불산 빨치산 대장은 ‘남쪽으로 진격하여 부산을 점령하라’는 뜻을 가진 남도부(南到釜, 본명 하준수)였다.
남도부는 1950년 6월 24일 강동정치학원 출신 유격대원 300여 명을 이끌고 남하한다.
그는 전투를 계속하며 7월 경북 청도군 운문산에 도착한다. 병력은 130여 명으로 줄었다.
처음에는 주암계곡에, 나중에 681고지인 태봉산에 사령부를 두고 빨치산을 지휘했다.
지리산과 마찬가지로 영남알프스는 1천 미터 이상의 험준한 산세와 사방팔방으로 연결되었기에 유격활동으로, 무엇보다 부산 경남 일대의 후방을 교란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홍길동 부대는 두서면 아미산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남도부 사령부가 있었던 갈산고지로 가는 길은 베네치아 산장의 인공폭포 오른쪽 펜션 뒤로 난 길에서 시작한다. 길의 처음은 가파르다. 산이 가파를수록 숨이 찬 것은 당연하다. 밧줄로 부여잡고 걷는 길이다. 숨이 벅차오름과 길의 경사는 비례한다. 10여 분 걷다 보면 배내고개를 조망하는 곳이 나온다. 올라오는 길목을 지키는 곳인지 참호가 있다. 배내를 오가는 사람이 보이는 곳에 있다. 길은 다시 완만하다 다시 가파르기를 반복한다. 가파르게 오르는 길목에는 어김없이 참호가 있다.
백 년을 넘음 직한 소나무 위에 오르면 태봉마을을 비롯하여 배내골을 오가는 토벌대를 관측할 수 있을 정도이다. 하늘을 머리에 이고 걷는 길이라 산길은 밋밋하나 좌우는 가파르다.
1시간 정도 걷고 나면 빨치산의 지휘소가 나타난다.
다소 평탄하다. 반월형으로 산허리를 따라 참호가 파여 있지만 지금은 낙엽의 무덤이 되었다. 그곳에서는 당 지휘부와 전투 사령부가 거리를 두고 생활했었다.
지휘부가 있었던 장소에 주먹이 들어갈 정도의 구멍을 가진 소나무가 역사의 현장을 지키고 있다. 그곳에서 20여 미터 떨어진 곳 바위 아래에 큰 참호가 있고, 또 그 아래로 옹달샘이 있어 기본적 식수를 확보할 수 있다.
빨치산 지휘소가 있던 곳에 세워진 전망대. 갈산고지는 빨치산 중화기 소대장 우종대의 별칭에서 비롯되었다.
다시 걸음을 옮겨 태봉산 정상에 도달한다. 정상에는 3층 전망대가 세워져 있다.
전망대에서 1km 정도 걸으면 파래소폭포가 나온다. 15미터의 높이에서 떨어지는 청아한 소리는 더위를 씻어낸다. 이곳은 빨치산들의 취사장이었다.
그리고 여름날은 목욕 장소가 아니었을까. 전투의 긴장 속에서 그들도 어린아이처럼 환한 웃음 지었을 것이다. 지금은 관광객들의 소리 가득하다.
신불산 빨치산은 북에서 내려온 유격대원을 중심으로 그 후 지방당원을 받아들여 최고 220여 명에 이르게 된다.
군경과의 교전 700여 회, 군경 사살 1800여 명, 각종 무기 약탈 800여 정, 각종 실탄 약탈 2만여 발, 민가 방화 100여 호, 민가 습격 500여 호, 군용열차 전복 20여 차량, 군용트럭 소각 또는 파괴가 200여 대에 달하는 등 후방 교란 작전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남도부의 전투지역은 전쟁 기간 동안 한 번도 인민군에게 점령된 적이 없었다.
그들은 적진 한 가운데에서 고립적인 전투를 할 수밖에 없었다.
평양으로 어떤 연락을 해본 적도 없었고, 보고와 지령 그리고 전투장비와 물자의 보급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비정규군인 빨치산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총과 탄약은 전투를 통해 노획 가능했지만, 식량은 결국 지역 주민을 통할 수밖에 없었다.
대규모 보급투쟁에는 부대원 60~70명과 당원 20~30명이 동원되기도 했다.
밀양 재약산에 많을 때는 소 32마리를 방목하고, 하루에 2마리를 잡은 적도 있었다.
쌀밥 대신 소고기로 배불리 먹기도 했다. 전투부대들은 교대로 영양보충을 하며 돌아갔다.
하지만 빨치산이 보급투쟁을 하며 지역민에게 주었던 ‘원호증’은 휴지조각이나 마찬가지였다. 매일 100여 명이 먹을 식량을 확보한다는 것은 빨치산이나 지역민에게는 엄청난 고역일 수밖에 없다. 당시 지역주민 200여 명이 살상 내지 피해를 입었다.
주암계곡은 남도부 부대가 처음 지휘소로 삼았던 곳이다.
이곳에서 1951년 12월 토벌대는 빨치산들이 소를 잡고 국솥을 걸었던 흔적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