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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절묘한 인연
남태일
거무튀튀하고 밝지 못한 색깔을 지니는 것 같지만 대륙의 기질을 품은 민족, 의리를 첫자리에 놓는 순박하고 다정한 중국친구들과 4년을 같이 공부하고 생활하다 사랑하는 가족의 품속으로 돌아가는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거대한 금속 덩어리는 마치 영원히 맑지 못할 것 같은 공기를 박차고 무한한 공간이 펼쳐진 구름위층으로 날아 올라갔다. 땅위에서 상상한 것과는 달리 오히려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날아다니고 거대한 금속덩어리는 일정한 높이에서 고정 되어있는 것처럼 평온하고 안전 하였다.
아침에 첸첸 (倩倩)이 자기 아버지가 사준 고급 외제차를 몰고 와서 나를 북경국제공항까지 대려다 주겠다고 하였다. 첸첸은 북경대학에서 학생 간부였고 열정이 넘치는 활달하고 아름다운 중국여학생이었다.
자기가 살았던 영역을 떠나 낯선 곳에 떨어져 외로움과 불안감, 경계심이 동반할 때, 첸첸은 학교에서 나를 각별히 챙기었다. 토요일이 되면 나의 팔을 끼고 고급식당에 가서 다섯 사람도 다 먹을 수 없는 요리를 주문하여 마음껏 먹으라 한다. 둘이서 아무리 먹어도 결국 접시의 음식은 그대로 남아, 버릴 때가 다반사였다. 백화점에 가서 내가 좋아하던 싫어하던, 돈은 상관하지 않고 새로운 유행 스타일이면 무조건 사서 나에게 입히고는 지인이나 옛날 동창을 만나면 쌩긋 웃으며 “내 한국 동창 어때!”라며 마치 자기 남자친구처럼 자랑을 하였다. 그때마다 남학생들이 던지는 질투의 눈초리를 한, 두 번 느낀 것도 아니었다.
오늘따라 그녀는 밝게 화장하고 하얗고 미끈한 다리위에는 핑크색 폴로원피스가 아슬아슬하게 가려졌다. 운전 하는 그녀는 옛날의 당당한 모습은 사라지고 나를 옆 눈으로 바라보다 눈길이 마주치면 고개를 숙이고 수줍은 듯 얼굴이 불그스레해지군 하였다. 개찰구에서 작별을 할 때, 그녀는 가슴에 스며드는 듯한 정겨운 목소리로 자기를 한번 안아 달라며 내 귀에 대고 속삭이었다. 그의 봉긋한 젖가슴은 탐스러웠고 부드러웠다. 그녀는 내 손에 쪽지 한 장을 쥐어주었다. 긴장해서인지 손바닥은 촉촉이 젖어 있었고 하얗고 긴 손가락은 약간 떨리고 있었다.
갑자기 예상치 못한 기류를 부딪쳐서인지 비행기 몸체가 약간 떨었다. 이때, 미세하고 하얀 물방울들이 유리창에 부딪쳐 은구슬 같이 부서지며 날아갔다. 나는 첸첸이 쥐여 준 쪽지를 펼쳐 보았다.“대한민국을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한글로 쓴 비뚤비뚤한 글씨가 눈 안으로 들어 왔다.
인천 공항에 도착하자 밝고 상냥한 얼굴과 부드러운 말소리는 다른 세상에 온 듯한 따사로우면서도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출입구로 나오자 마중 나온 많은 사람 중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언제나 미덥고 듬직한 형님이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얼싸안고 오래 떨어 졌다가 재회한 희열과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우아, 우리 동생 키도 커졌고 멋진 미남이 되었네. 그런데 피부가 왜 그리 거칠어졌니?”
“중국에 가자마자 그런 것이 약을 발라도 안 되네요. 아무래도 환경 탓이겠지요.”
형님을 바라보며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승용차를 타고 서울로 오면서 인천대교를 지날 때, 북경에서는 도무지 볼 수 없는 갈매기가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넓은 바다를 바라보니 마음이 한결 상쾌했다. 형님은 운전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연신 핸들을 가볍게 두드리고 휘파람까지 불고 있었다. 그는 피부에 윤기가 돌아 한결 더 젊어 보이고 눈빛은 샛별처럼 반짝이었다. 그 빛은 결코 나와 재회하여 반짝이는 그런 빛이 아니었다. 나는 형님의 신변에서 다른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육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형님, 무슨 좋은 일이 있나 봐요. 혹시 예쁜 형수님을 사귀셨나요?”
“어찌 알았니? 지금 사귀고 있는 중이다.”
형님은 빙긋이 웃으면서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어갔다.
“지금 사귀고 있는 여자는 조선족 유학생인데 올해 석사 학위를 받았다네. 아버지께 인사도 드리고 해외에서 돌아오는 너도 만날 겸, 며칠 내에 한번 방문하겠다고 하더라.”
형님은 붕- 들뜬 목소리로 형수님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축하 드려요. 조선족 여대생이라고요? 중국 어딘가요? 어떻게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세 살 위인 형님은 떡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근육, 얼굴이 검고 눈이 작은 편이지만 사람들에게 온화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해병대 출신이고 태권도 유단자이었다. 형님은 지금 자동차 부속품회사에서 기술팀장직을 맡고 있으나 서른이 되었지만 아직 여자 친구가 없으니 아버지께서는 늘 걱정을 하셨다. 형님은 출근 하면서 새벽에 일찍 일어나 30분 정도 높은 담장이 둘러싸인 뜰 안에서 태권도 연습을 한 후 아침식사를 하는 좋은 습관을 유지하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의 어느 토요일 저녁, 미국에서 복싱을 하고 있는 전우가 어제 입국 하였으니 형님과 술 한 잔 하자고 연락이 왔다. 형님과 전우는 형님이 자주 찾아다니던 치킨 집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한강을 한눈으로 볼 수 있는 치킨 집은 그 특유한 맛에 저녁이 되면 늘 많은 손님들이 붐비었다. 형님도 때로는 이 식당에서 흐르는 한강물을 바라보며 고소하고 담백하며 쫄깃쫄깃한 치킨에다 시원한 호프를 한잔씩 하군 하였다.
붐비는 식당 안에서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아 강변 쪽으로 바라보니 촘촘히 들어선 대교가 한눈에 들어오고 높은 빌딩에서 내뿜는 네온사인은 강물위에 출렁이고 있었다. 벌써 집안에서 더위에 지치고 스트레스에 지친 많은 사람들이 강변으로 모여 한강의 황홀한 야경을 보며 시원한 강바람으로 몸을 식히고 있었다. 새파란 잔디위에서 가족들과 친구들이 둘러 앉아 맥주를 마시며 한담하는 모습도 한눈에 들어왔다.
형님은 이 식당에 자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예쁘장한 여대생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녀의 예쁜 얼굴에 범접 하지 못할 생소한감을 느꼈다. 점차 거의 말투에서 조선족유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름답고 섹시하기보다는 그냥 곱살하게 생긴 여자애이고 자연스럽게 선 코 아래 붉고 도톰한 입술은 언제나 보아도 육감적이다. 그 녀가 옆에 다가와서 상냥한 목소리로 음식 주문을 받고 고개를 약간 갸웃하며 웃을 때면 왠지 가슴이 뭉클하고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면서 말할 수 없는 정감이 혈관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 같았다.
오늘 어쩐지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옆에 알바생에게 물어보니 금방 전에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같이 나갔는데 아직 소식이 없다고 하였다. 은근히 보고 싶었던 그녀를 볼 수 없으니 괜스레 마음속이 텅 빈 것 같이 허전하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단독주택은 4층이다. 1, 2, 3층은 모두 세를 놓고 있는데 대부분 한국으로 돈벌이 나온 조선족 동포들이었다. 원래 2층에 젊은 교포 부부가 살았는데 며칠 전 60대 중반에 깡마른 체격, 탄탄한 근육을 가진 조선족 노인 한 분이 새로 와서 살고 있었다. 새벽이면 한 뜰 안에서 그 노인은 중국의 태극권(太極拳)을 연습하고 형님은 한국의태권도를 연습하였다. 어느 하루 노인이 갑자기 중국으로 떠나면서 형님에게 색이 누렇게 바랜 무술 책 한 권을 선물하였다. 그러나 무술 책에는 모두 한문으로 적혀 있어 이미를 파악할 수 없었다. 형님은 치킨 집에 찾아가서 조선족 유학생에게 이 책을 번역할 수 없는 가고 물었다.
“어마나, 아저씨 이 책은 심오한 비법이 적힌 아주 귀중한 책이에요. 제게 일주일 시간을 주세요. 정확하게 번역하여 드릴게요.”
형님은 무술 책을 전수 받은 후 아침마다 중국권법을 연습하게 되었다. 그리고 형님은 점차 고기집의 단골이 되었다.
형님과 복싱하는 전우는 오랜 간만에 만나 술을 마시며 지나간 군부대 생활과 무술, 복싱에 대한 얘기를 하다 보니 언제 마신 술은 벌써 탁자 위를 가득 채웠다. 술자리가 거의 끝날 무렵 전우는 집에서 급한 일로 전화가 왔다. 그는 급하게 집으로 떠나고 형님은 술값을 계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8월의 밤하늘에는 초승달이 떠오르고 한강강물은 시름없이 유유히 흘러갔다. 오색찬란한 전등 빛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한강대교는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강변을 스치고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해서 금방 집으로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때 어두운 강변 산책 길 끝에서 여자의 가냘픈 소리와 남자의 윽박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 왔다. 형님은 급한 걸음으로 비명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 곳에는 머리를 짧게 깍은 얼굴이 울퉁불퉁하게 생긴 사내가 젊은 여자의 머리채를 휘여 잡고 어두컴컴한 강변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이때는 늦은 밤이라 강변에 산책하는 사람들도 드물어졌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빨리 손을 놓아요.”
젊은 여자가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 사내는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말로 지껄이고 있었다. 그 사내는 중국 조선족교포였다. 머리채를 잡힌 젊은 여자는 푸줏간에 억지로 끌려가는 새끼 양처럼 애처롭게 발버둥치고 있었다. 이때, 한 젊은이가 나서서 그들을 말려 보았지만 머리채를 잡은 사내를 제지 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사내는 눈알을 부라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 누구야, 이 여자는 내 약혼녀야! 저리 비켜!”
사내가 다짜고짜 젊은이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치자 그 남자는 얼굴을 감싸 쥔 체 넘어져 일어나지 못했다. 벌겋게 충혈 된 눈을 부라리는 사내의 모습은 소름이 끼쳤다. 사내는 괴성을 지르며 젊은 여자의 머리채를 쥐여 잡고 오늘 저녁 끝장이라도 보겠다는 듯 강변으로 끌어가고 있었다. 형님은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가는 젊은 여자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가 없었다. 그 젊은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사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쳐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때, 옆에서 바라보고 있던 형님이 침착하게 사내 앞으로 다가 갔다. 날카로운 눈길로 흉측한 사내의 얼굴을 쏘아 보면서 낮고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그 아가씨의 머리채를 놓으시오”
사내는 난데없이 자기 앞에 나타 난, 자그마한 체구의 한 남자를 얕잡아 보고는 멀리 꺼지 라며 큰 소리를 치고 있었다. 그 사내의 입에서는 구역질 날 정도로 술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형님은 침착하게 젊은 여자의 머리채를 쥔 사내의 억센 손을 풀려고 하자 사내는 다른 주먹으로 형님의 얼굴을 후려쳤다. 순간 형님은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면서 번개같이 손목을 낚아채고 사내의 뻗은 팔을 힘껏 잡아당기는 동시에 다리를 걷어 차버리자 사내는 잡았던 젊은 여자의 머리채를 놓고 제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사내의 머리가 콘크리트 바닥에 처박히면서 입에는 모래와 먼지가 한 가득했다. 그때 온갖 수모를 당하던 젊은 여자가 형님을 불렀다.
“아저씨, 아저씨 저예요, 어서 구해주세요,”
자세히 보니 그 젊은 여자는 형님이 자주 다니던 치킨 집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유학생이었다. 그녀는 온 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고 얼굴은 유령처럼 창백했다. 그때, 형님의 두 눈에도 분노의 빛이 타오르고 불끈 쥔 두 주먹은 세차게 떨고 있었다. 형님의 손발이 번개같이 움직이자 눈 깜짝할 사이에 사내는 밑동이 잘린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중국에서 사내는 주먹질 꽤나 했던 모양인데 오늘은 키도 자기 머리하나만큼이나 작은 사람에게 당하기만 하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모양인지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또 달려들었다. 당황한 빛이 역력한 사내의 얼굴은 더욱 흉측스럽게 보였고 입에서는 역겨운 입김을 내뿜고 있었다. 그때, 사내가 갑자기 옆구리에서 단도를 꺼내들고 마구 휘두르고 있었다. 형님은 단도를 휘두르는 그를 이리저리 피하면서 번개 같은 발로 그의 손목을 차버리자 단도는 그 사내의 손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두려움으로 떨고 있던 유학생의 어깨를 스치며 떨어졌다. 붉은 피가 그녀의 뽀얀 피부위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형님의 두 눈에는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형님은 단 한 번의 주먹질로 쓰러뜨려 버렸고 사내는 신음소리만 내며 이내 일어서지 못했다. 형님은 그녀에게 다가가서 자신의 티셔츠를 찢어 상처를 동여매 주었다. 형님은 사내를 경찰에게 신고하고 상처를 입은 그녀를 엎고 병원으로 갔다.
그 사건이 일어 난 후 한동안 그녀의 소식은 알 수 없었다. 애타게 그녀를 기다리는 형님의 마음은 복잡했다. 어느 일요일 아침, 그녀로부터 형님에게 문자 한통이 날아왔다. 문자를 받은 순간 가슴이 세차게 뛰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시 바삐 그녀를 보고 싶어졌다. 비록 짧은 문자였지만 그녀 마음의 애정이 가득담긴 내용임을 알 수 있었다.
그날 오후 K백화점 앞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화장을 진하게 하고 조용히 다문 도톰한 입술은 더없이 싱싱하고 육감적이었다. 연두 색 원피스는 봉긋하게 솟은 앞가슴위로 팽팽하게 감싸고돌아, 그녀의 관능적인 몸매가 한결 강조되었다.
형님은 그녀와 함께 그의 하숙방으로 갔다. 그의 하숙방은 경기도 부천에 사는 다른 여학생과 합숙을 하고 있었는데 그 여학생은 금요일 오후 집에 갔다가 월요일 아침이면 돌아온다고 했다. 하숙방은 반 지하였지만 오후가 되면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와 그나마 생기가 조금 도는 듯했다. 침대, 책상, 노트북 각각 두개씩 놓여 있었고 방은 조금 눅눅했지만 정리정돈이 깨끗하게 되어서 깔끔한 인상을 주었다. 방 한쪽 구석의 찬장에는 깨끗한 접시와 그릇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집안은 후덥지근하게 무더웠다. 그녀는 선풍기를 틀어놓고 과일을 깎으며 약간 착잡한 표정으로 형님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하였다.
“혹시 오늘 가족들과 함께할 시간을 제가 빼앗지는 않았는지요?”
형님은 아직 결혼 전 총각이라고 웃으며 대답하자 그녀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고 반짝이는 눈빛으로 형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형님은 그녀가 깎아 주는 과일을 받아먹으면서 그 날 저녁에 있었던 일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어 보기 시작했다.
“예, 오늘 제가 만나자고 한 것은 그 날 저를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또 그날 발생한 일의 원인을 말씀드리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일찍 만나서 말씀 드리려고 했지만 그가 마약 사건에 연루 된 일 때문에 경찰서로 왔다 갔다 하느라고 늦었어요.”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날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저는 중국 요령성 단동에 북한과 마주보는 동항(東港)시의 작은 마을에서 부모와 여동생, 나 네 식구가 살았어요.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셨고 시간이 날 때마다 서해바다에 나가서 고기도 잡았어요. 때로는 북한 사람들과 장사도 했고요. 신도는 서해바다에 있는 북한의 작은 섬이었어요. 신도는 수많은 작은 섬들이 둘러싼 아름다운 섬이었지요. 바다바람에 얼굴이 까맣게 탄 중국어민들과 신도의 북한사람들은 같은 바다에서 함께 고기도 잡고 물물교환으로 장사도 했지요. 때로는 북한 사람들이 밤에 우리 집으로 와서 아버지와 함께 밤늦도록 술을 마시다가 돌아가 곤 했어요. 그때마다 그들이 가지고 온 구리와 동으로 양식과 과자, 사탕 등을 바꿔갔지요. 그때를 생각하니 참 좋은 때였어요. 아버지가 동과 구리를 팔게 되면 우리에게 새 옷도 사주고 맛있는 음식도 많이 사주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겼어요. 건강하던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기 때문이지요. 어머니 혼자서 저와 제 여동생 공부를 시킬 수 없어서 심양에서 식당을 하는 외숙모를 찾아가 그 밑에서 일하며 우리를 공부 시켰어요. 몇 년 후 외숙모가 연로하셔서 식당을 할 수 없게 되자 어머니가 인수해서 식당을 운영 하고 있었는데 그 때 한창 한국 분들이 중국에 와서 사업을 할 때였어요, 많은 한국 분들이 저희 집 민박에서 주무셨는데 자상하고 이해심이 깊은 분들이었어요. 그들을 통해 한국을 더 많이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나는 기회가 되면 꼭 한국에 가서 공부하고 싶었지요.”
그녀는 바나나 껍질을 벗기여 형님에게 건너 주면서 말을 계속 하였다.
“지난 번 그 난리를 치던 그 사람도 우리 식당의 단골이었고 같은 고향 사람이었어요. 그는 저를 많이 좋아했고 끈질기게 따라 다녔지요. 그는 일찍 공부를 그만두고 북한과 장사도 하고 큰 식당도 운영하면서 돈도 많이 벌었어요. 단동 시에 아파트와 승용차까지 사서 동네에서는 능력 있는 일등 총각이라고 불렸지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한국으로 유학 오기 1년 전 서로 사귀기 시작했는데 사귀면서 나는 점차 후회를 했어요. 그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어요. 돈 밖에 모르고 너무 무식하여 만나면서부터 관계가 조화롭지 못 했어요. 제가 한국으로 유학을 온 후 우리의 관계가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지난번 그가 갑자기 한국, 제가 아르바이트 하는 식당까지 찾아와서 저를 만나자고 했어요, 결국 한강변에서 그 사람을 만났어요. 그는 제가 한국에 오래 있으면 한국남자들에게 마음을 빼앗길 수 있다며 다짜고짜 중국에 가서 결혼을 하자고 했어요. 한사코 반대하자 그는 결국 술을 많이 마신 후 제게 폭력을 쓴 것 이예요. 그 일이 있고 난 후 경찰이 저를 호출하였는데 알고 보니 그는 북한 마약을 한국에 팔았고 북한 여자들을 인신매매한 협의를 받고 있다고 했어요. 이제는 그 사람과 모든 것을 깨끗이 정리했어요.”
그녀는 이야기를 하면서 중간 중간 긴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는 가끔씩 무엇을 기다리는 듯한 간절한 눈길로 형님을 바라보고는 섬세한 손가락으로 머릿결을 자꾸 쓸어 넘기고 있었다. 그녀가 거울로 자기머리와 화장 상태를 확인한 후에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녀는 형님의 눈빛을 바라보고는 점차 갸름한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형님은 많은 말들을 하고 싶다는 듯 입술만 달싹 거리며 끝내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녀는 궁금하다는 듯이 형님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저씨도 조선족들은 법을 잘 지키지 않는 불편한 존재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요, 저희 회사에도 두 명의 조선족 근로자가 있는데 열심히 일을 잘하고 있습니다.”
라고 정색하며 형님은 대답했다.
“다행입니다. 하기는 한 ▪ 중 수교이후 많은 조선족들이 입국하고 있는데 그들의 대부분이 중국의 낙후한 농촌에서 생활하던 분들이었어요. 서울 같은 세계수준의 도시에 갑자기 정착하여 생활하다 보니 법과 생활습관이 그들에게 익숙하지 못 하였지요. 한국인들에게 조선족은 법을 잘 지키지 않는 불편한 존재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들은 나름대로 적응을 빨리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녀는 대담하게 형님을 바라보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을 계속 이어갔다.
“우리 조선족들이 자기의 행위가 한국의 법과 질서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한국 분들도 조선족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이 점점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해요.”
여자들은 때로 마음속의 남자들이 적극적인 마음을 표현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녀도 이미 형님이 적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도록 말과 눈빛으로 묘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형님은 그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고 묵묵히 그녀의 말만 듣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의 숨소리는 유난히 높았다. 그때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서며 촉촉한 눈길로 형님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오늘은 특별히 아저씨께 중국요리를 대접하려고 초대했어요,”
잠시 뒤 그녀가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 들어섰다. 그녀의 요리 솜씨는 빠르고 숙련된 것이 요리사 같았다. 고개를 약간 기웃거리고 연두색 티셔츠에 들어 난 하얀 두 팔이 재빠르게 움직이면서 중국 볶음 채가 하나하나 밥상으로 올라왔다.
날은 어두워지고 먹장구름과 세찬바람이 밀려오는 것을 자그마한 창문으로 볼 수 있었다. 곧 큰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밥상위에는 중국요리가 가득했고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까지 꺼냈다.
“아저씨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웃으며 가득 채운 맥주잔을 비웠다. 창문 밖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리는 비와는 상관없이 그들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늘 따라 밝게 화장한 그녀는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요염한 눈빛으로 형님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그날부터 아저씨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어요. 아저씨를 볼 때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으로 가슴이 설레곤 했어요.”
그녀의 말소리는 떨렸고 두 눈은 사랑으로 불타고 있었다.
“아니, 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형님은 치솟는 격정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는 그녀의 보드라운 두 뺨과 귀밑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강한 전류가 온 몸으로 흐르는 듯 어깨를 세차게 떨고 있었다. 청춘 남녀의 가슴속에는 사랑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머릿속으로는 서로의 신비의 육체를 갈망하고 있었다. 창문 밖에는 천둥번개에 폭우까지 쏟아졌다. 그녀는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가려는 형님의 손을 잡고 혼자서 무서워 못 있겠다며 방 한쪽의 침대를 가리키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오늘 밤은 저 침대에서 쉬고 가시면 안 될까요?”
이윽고 전등이 꺼지고 천둥번개가 번쩍이며 불빛이 뒤 창문으로 비쳐들어 왔다. 장대 같은 빗방울은 더욱 맹렬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번개 불이 번쩍일 때마다 방안의 한쪽 침대에서는 두 남녀의 엉킨 몸이 언뜻언뜻 비치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는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우리 집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 형님, 나 삼부자는 음양이 기울어진 긴긴 세월을 보냈다. 내가 귀국한 며칠 후 형님이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와서 집식구들에게 인사를 시키겠다고 했다. 형님이 아버지께 여자 친구가 조선족 유학생이라고 먼저 얘기 하였다. 아버지께서 반대할 줄 알았는데 도리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시며 앞으로는 중국이 최대강국으로 될 것이라며 한 사람을 평가할 때 국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도덕성과 포용력에 기준을 두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하셨다.
시커먼 남자 셋만 있던 우리 집에는 그야말로 희소식이었다. 나는 형수 될 분이 어떤 사람인지 몹시 궁금해 하면서 우리 어머니 같은 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과 예비 형수님이 나란히 집으로 왔다. 순간 음침하던 집안에 아늑하고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공손히 목례를 하며 먼저 인사를 하였다.
“반갑습니다. 형수님.”
고개를 들고 형수님을 마주 보는 순간 “앗” 하는 신음소리가 나도 모르게 입에서 새어나오면서 심장이 얼어붙은 듯하다가 세차게 요동을 쳤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김 소연이라 부릅니다.”
바로 그 감미로운 목소리, 싱싱하고 도톰한 입술, 고개를 약간 갸웃하며 매혹적인 웃음을 발사하는 두 눈…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이 현기증이 나고 금세라도 어디론가 튀어 나갈려다가 가까스로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방문 틈을 타고 형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학까지 갔다 온 녀석이 형수를 처음 보니 쑥스러운 모양이구먼.”
형님의 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방에 들어 와서 두 손으로 책상을 집고 심호흡을 몇 번하고 하고 나서야 비로소 머릿속에 4년 전 생명 부지인 그녀와 1박 2일을 알몸으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역경을 헤치고 왔던 추억이 생생히 떠올랐다.
4년 전 여름의 일이었다. 중국 유학을 떠나기 며칠 전 친구들과 강원도의 시원한 계곡을 찾아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한참 재밌게 노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밀려오고 천둥 번개와 함께 장대 같은 소나기가 쏟아지면서 계곡 물이 점차 불어 올랐다. 쉴 사이 없이 퍼붓는 폭우에 홍수가 마치 사나운 히말라야의 눈보라 같이 포효하며 모든 것을 삼키려는 듯 밀려 왔다. 어쩔 사이도 없이 물건을 내동댕이친 채 뿔뿔이 산봉우리를 향해 뛰어 올라갔다. 산봉우리에 도착했을 때는 누런 흙탕물이 흰 파도를 높이 감아올리며 산 밑으로 굽이쳐 흐르고 있었다. 다행히도 같이 왔던 친구들은 건너편 산 봉오리에 올라있었다. 이때, 후미진 곳에 물위에 뜬 나무토막을 잡은 한 사람을 발견하였다. 나는 앞뒤를 가릴 겨를 없이 다짜고짜 물에 뛰어 들어 그 사람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기슭으로 끌어 올렸다. 그는 젊은 아가씨였다. 기묘하게 조각한 옥기둥 같은 두 다리 위에는 짧은 치마가 가려져 있었고 젖은 생머리는 뽀얀 얼굴 위에 헝클어져 있었다. 옷은 찢어지고 배가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보아 물을 많이 먹은 것 같았다. 그녀를 어깨에 메고 산기슭으로 올라 왔을 때는 기력이 탈진하여 혼미한 상태였다. 순간 머릿속에 무언가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재빨리 그녀를 거꾸로 쳐들고 등허리를 두드리자 그녀는 마치 펌프에서 물을 내뿜듯이 입으로 물을 토하며 간신히 눈을 떴다.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하늘에서는 차가운 비가 계속 내렸다. 옷이 다 찢어진 그는 저 체온으로 마치 찬바람에 흔들리는 풀잎 같이 온몸이 떨고 있었다. 나는 바지와 윗옷을 벗어 그녀를 감싸주고 비 피할 자리를 찾았다. 마침 두 사람이 들어 갈수 있는 동굴이 있었고 바닥도 건조하여 그녀를 안고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내 품에 안긴 그녀는 컨디션이 많이 회복 되었고 두 눈에는 생기가 돌았다.
동굴은 침침하고 두 사람 눕기에는 좁았다. 희미하게 비친 그녀의 얼굴은 연꽃같이 청순하고 아리따웠다. 그 녀는 정면으로 얼굴을 맞대고 마주 보는 나에게 투명한 미소를 보냈고 하얀 두 팔로 내 목덜미를 껴안으며 나직이 신음 비슷하게 속삭이는데 붉은 입술은 꽃잎 같이 부드러웠다. 나는 으스러져라 그녀를 껴안을 때 마치 구름위로 걸어 다니는 것처럼 쾌감에 도취되었다. 그의 팔딱팔딱 뛰는 심장의 고동소리가 봉긋하고 팽팽한 가슴을 타고 내게 전해왔다. 그녀와 나는 그렇게 서로 격려의 뜻을 온몸을 통해 끊임없이 주고받았다. 동굴 밖에서는 계곡으로 흘러가는 물소리만 들리고 그녀는 더욱 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우리는 서로의 따뜻한 체온을 나누며 영혼과 육체가 하나가 되었고 어둠은 우리를 남김없이 모두 덮었다.
다음날 아침 어둠이 사라지고 아침 해가 솟아올랐다. 밝은 빛이 어두웠던 동굴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하룻밤을 같이 지낸 그녀는 기력이 회복되고 정신상태도 좋아졌다. 7월의 한 낮은 또 무덥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내 옷을 벗어 줄 때, 관능적인 몸 전체를 나의 눈앞에 드러냈다. 날씬하면서도 유연한 곡선, 신이 조각 해놓은 듯한 봉긋한 앞가슴, 매혹적인 까만 눈동자에서 발사하는 귀여운 웃음……. 그녀의 이름은 김소현, 조선족 아가씨였고 한국에 온지 1년 밖에 안 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와서 기업에서 통역 일을 하고 있었다. 어제 회사의 동료들과 강원도에 피서를 왔다 이런 일을 당했다고 했다. 멀지 않아 곧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나는 그에게 많은 것을 물어보았다. 우리는 오래 전의 친구같이 서로 편안한 감을 느꼈다. 그때 그녀가 한 말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분명 나를 좋아 한다는 것도 눈치를 차리었다.
“한국에 와서 처음에는 적응하느라 힘들었지만 지금은 중국으로 가기 싫어 졌네요. 한국은 어느 방면에서도 서민들이 살기 편리하도록 해놓았어요. 특히 여자들이 살기 편리하게 설계 해놓았어요. 오빠가 유학하고 돌아오면 저는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대화중에서 간간히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서 순결함과 진실성이 담겨 있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아주 사랑스럽고 귀여운 여자라는 것도 느끼게 되었다. 우리는 다행이 조난당한 사람을 찾는 산악구조 헬기에 구조 되었다.
병원에 도착해서 그녀를 입원 시키고 나는 유학 떠날 준비로 이것저것 바삐 서둘러야 했다. 며칠 후 그녀를 한여름 밤의 아름다운 기억 속에 남겨둔 채 북경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 후 북경에서 가방과 그녀의 연락처까지 모두 분실하여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항상 마음속으로는 감회에 젖은 그날 밤의 추억과 순결하고 온유한 그녀를 잊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뜻밖에 나의 형수 자격으로 내 앞에 나타났으니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당혹스럽고 어처구니없는 사실 앞에서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지 깊은 고뇌 속에 빠지며 막연하기만 했다. 더욱이 앞으로 형님과 그녀를 어떻게 대하여야할지 착잡한 생각이 밀려오면서 온 밤을 뜬 눈으로 세웠다.
이튼 날 아침 그녀는 나를 보고“도련님, 도련님”하고 부르면서 별다른 기색 없이 아주 평온하게 다가왔다. 혹시 그때 탈진 상태에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을까? 혹시 기억 하면서도 모른 척 하는 것일까?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물음표를 던졌지만 그녀는 내 옆에 다가와서 시동생을 대하듯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도련님, 지방회사에 있는 여동생이 마침 이곳 회사에 출장을 왔다가 시간이 있어서, 새 형부와 도련님이랑 같이 점심식사를 하자고 하는군요.”
그녀는 그 일을 전혀 기억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와는 달리 나는 그녀를 본 후 기억이 더욱 선명하고 생생하게 떠올랐다. 조용히 다문 싱싱하고 도톰한 입술, 희고도 투명한 피부, 매혹적인 두 눈… 만약 그 기억이 한 장의 사진이었다면 당장 끄집어내서 불에 태워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기억을 머릿속에 두고 한집에서 형수로 모시며 같이 생활한다는 것은 나 자신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방법은 한 가지, 오직 북경으로 가는 길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경 유학할 때, 지도 교수가 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언제든지 자기를 찾아오라고 하지 않았던가, 첸첸도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는가, 나 혼자 문밖의 담장 그늘 밑에서 머리를 숙이고 줄담배를 피우며,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내가 이집에서 떠나야만 제일 현명한 처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일이라도 당장 북경으로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때였다. 나의 앞에 그녀가 또 서있었다. 금방 집안에 있었는데 언제 내 앞에 왔을까? 무엇을 말하려고 나를 찾아 왔을까?
“저기요, 한 가지 물어 봅시다.”
정면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갑자기 얼굴이 환해지며 눈빛이 반짝였다.
“오빠!”
그녀는 다짜고짜 나의 품에 안기었다.
“아! 이러지 마세요, 안됩니다.”
순간 당황하여 그녀를 밀쳐냈다.
“오빠! 저를 모르시겠어요, 4년 전 강원도 홍수 때 있었던 일 말예요.”
가슴이 섬뜩했다. 생김새도 똑같은 아가씨가 마치 두 개 똑 같은 사과를 앞에 놓아둔 것 같이 또 나의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도련님, 아까, 제가 말했든 점심 식사를 같이 하자던 제 여동생예요. 우리는 쌍둥이 자매예요.”
형수님이 계단에서 내려오면서 웃음을 참지 못하며 소개를 하였다. 이때, 나의 품에 안겼던 아가씨가 언니를 바라보고 또 나를 바라보면서 무슨 영문인지 알게 된 것처럼 말하였다.
“나도 헷갈려서 오빠가 언니하고 사귀는지 알았네요. 그렇게 되면 나는 절대 사양하지 않을 거예요.”
이때, 형님도 4층에서 내려오며 이 광경을 보고 빙긋이 웃으며 말하였다.
“우리 쌍둥이 처제로구먼. 말은 많이 들었는데 처음 보니 구분이 쉽게 안되네. 둘이 생김세가 너무 닮아서 앞으로 어떻게 구분하지. 여하튼 우리 집이 경사 났네 경사 났어. 쌍둥이 호박이 넝쿨체로 굴러들어 왔네.”
“하하하”
네 사람의 행복에 겨운 웃음소리가 초가을의 높고 맑은 하늘에 오래오래 퍼져 나가고 있었다.
첫댓글 남태일씨는 원미2동 에세이교실 회원이고
원미마루기자입니다
지난해에는 한중수교 23주년기념 중국대사
관에서 실시한 수필공모전에서 3등에
입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