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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집권 2년 기자회견을 했어요. 시종 진중한 표정으로 현안들에 대한 당신의 입장과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담담히 말을 이어갔는데 진정성과 보스의 아우라가 느껴졌습니다만 진보를 자처하는 야당들은 ‘택도 없단’ 입장입니다.
"고집불통 대통령의 기자회견”이라며 “언제까지 국민이 절망해야 하느냐”(민주당)
“윤 대통령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고, 변할 생각이 없음이 확인됐다”(조국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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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박찬대 원내대표는 이날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지켜봤지만, 결과는 역시나였다”며 “총선 결과에 대한 성찰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국민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하는 몹시 실망스러운 회견이었다”고 했어요. “민주당의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 요청과 해병대원 특검법에 대해선 언급조차 피하며 사실상 거부 입장을 밝혔다”며 “앞서 윤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의 회담에서 민주당이 국민의 요구를 가감 없이 전했음에도 윤 대통령은 민심을 수용하고 변화할 기회를 스스로 걷어 찼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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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한민수 대변인도 “김건희 여사가 불가침의 성역임을 다시 한번 확인 했다”며 “수개월째 제자리걸음인 해병대원 순직 사건 수사를 믿고 지켜보자는 말로 국민을 허탈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조국혁신당 잘난 조국 대표는 페이스북에 “마이동풍, 동문서답, 오불관언”이라고 올렸어요. 김보협 대변인은 “‘국정 방향은 옳은데 국민들이 체감을 하지 못하는 게 문제’라고 말한, 총선 직후 국무회의 때 인식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며 “윤석열 검찰 독재정권 조기 종식의 길을 찾겠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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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보수가 싫어서 40년 신앙을 박차고 나온 개혁주의자이며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진보와 개혁을 자처하는 조국의 현실을 보면 울화통이 치밀어서 아예 뉴스를 안 보고 살다가 뉴스를 틀었는데 대통령을 탄핵한다는 둥 셀프 퇴진이라며 막말의 수위는 막장입니다. 보수 종교계가 윤 대통령을 감싸고 도는 것은 뉴라이트에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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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 잘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나는 희망 없는 보수가 진절머리나지만 그렇다고 막장 진보세력과 결을 같이 하고 싶지 않습니다. 원칙 따지고 착한 놈들이 나중에 보면 정나미 떨어진 일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아십니까? 십자군 전쟁 때 하느님의 이름으로 수많은 학살을 했고 가톨릭에 피해망상증 걸린 프로테스탄트들이 똑같은 짓거리를 했어요. 지금 중동 전쟁에서도 선민이라는 이스라엘이 반대편을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학살을 하고 있어요. 오죽했으면 미국 대학생들이 대모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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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에 대해 글을 하나 쓰긴 했는데 공산주의보다도 더 엉뚱한 파시즘의 실체를 알고 싶어 리라이팅합니다."민주주의에 ‘반’하는 파시즘보다 민주주의 ‘속’에서의 파시즘이 더 위험하다.”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1960년대 독일 사회에 팽배한 ‘일상의 파시즘’을 비판하며 던진 이 말은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지금 한국에서‘민주주의에 반하는 파시즘’의 시대는 독재자 전두환 and 노태우의 죽음과 함께 최종적으로 끝났으나 ‘민주주의 속에서의 파시즘’은 여전히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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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 피카소의 〈게르니카>, 로버트 카파의 〈어느 병사의 죽음〉 등 수많은 걸작의 배경이 된 스페인 내전은 현대사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수행된 이념 전쟁이자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 됩니다. 한국전쟁으로 내전 상황을 겪은바 있는 우리로서는 당시 좌우의 대결장이었던 스페인 내전이 남의 일 같지 않은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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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4년이 흘렀지만 남과 북은 아직도 긴장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열이 형은 공산당과는 ‘협상 불가‘입장입니다. 1936년 7월 17일, 군부 쿠데타로 시작된 스페인 내전은 스페인 내부의 전쟁인 동시에 전 세계 강대국들이 개입한 국제전입니다. 내전을 일으킨 국민 진영은 공화정부를 무너뜨리고, 옛 스페인을 되살리기 위해 파시즘 운동 세력인 팔랑헤당과 상류계급이 단결한 세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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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전쟁 초반부터 파시즘 국가인 독일과 이탈리아가 국민 진영을 지원하고, 소련이 공화 진영을 지원하면서 내전은 국제적인 양상을 띱니다. 스페인 내전은 조지 오웰, 어니스트 헤밍웨이,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앙드레 말로, 파블로 네루다, 시몬 베유 등 국적과 인종을 초월해 수많은 지식인과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참전한 유례없는 전쟁이 됩니다.
공화정부, 제3세력 협력, (소련,스탈린)vs 프랑코 반군(좌파)히틀러(독),뭇솔리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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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1939년 3년 동안 스페인을 초토화한 이 내전은 이념과 계급과 종교가 뒤엉켜 폭발시켰으며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파시즘 등 온갖 정치 이념들의 격전 장자, 자본가, 지주 계급과 노동자, 농민 계급이 맞붙은 계급 전쟁이었습니다. 스페인 민중과 민중을 억압하는 권위주의적 가톨릭교회가 격돌한 종교 전쟁이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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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과 독일이 이 전쟁에 개입해 자신들의 군사력과 전략을 실험했고, 그 결과가 제2차 세계대전에 그대로 반영 됩니다. 무엇보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위해 전쟁터로 뛰어든 3만 5천 명의 국제 여단 병사들로 인해 ‘러시아 혁명’, ‘제2차 세계대전’과 더불어 20세기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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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이 중요한 사건을 제대로 다룬 내용이 별로 없었어요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는 “내전은 전쟁이 아니라 병이다. 적이 내 안에 있고,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싸운다.”라고 말했어요, 스페인 내전의 비극은 상상 이상입니다. 스페인 내전은 정치적 신념의 차이가 어떤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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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의 시작은 1936년, 스페인령 북아프리카 주둔군이 사회주의 공화정부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시작해 3년간 스페인을 철저하게 파괴했어요. 프랑코 장군(24세)이 이끄는 반란군은 정규군을 동원해 공화정부를 밀어붙였고 공화정부 군도 게릴라전으로 끈질기게 저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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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스페인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바라보는 유럽 열강들은 복잡한 계산을 하며 개입을 꺼렸다고 해요. 먼저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 긴장이 높아지던 시점에서 유럽에 또 하나의 파시즘 국가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어요.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의 각국은 스페인 내전이 또 다른 세계대전으로 확대되는 것을 우려하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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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연맹을 통하여 각국의 군사개입을 금지하는 불간섭 조약을 체결합니다. 그러나 공화파와 프랑코파 양측 모두 세계 각국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공식적으로 중립을 표방했으나 공화파에게 각종 물자를 조달했고, 프랑코파 측은 히틀러의 나치 독일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왕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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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파에 지원한 아일랜드 정부는 스페인 내전에 대해 중립을 선언했다가 아일랜드인들은 각자의 정치 신념에 따라 양측 모두에 참전하였습니다. 아일랜드의 청년 250명이 공화파를 위해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는 동안 아일랜드 공화국군의 에오인 오더피가 이끄는 ‘푸른 셔츠 단’ 700명은 프랑코파 측을 위하여 참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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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에스타두 노부 체제의 독재가 이루어지고 있던 포르투갈에서는 비리아토스라 불린 8,000명의 자원병이 프랑코의 휘하로 들어갑니다. 포르투갈은 많은 군수품을 프랑코 측에 지원하였고 루마니아의 극우주의 세력이었던 철위대 역시 자원병을 프랑코 측에 제공하였습니다. 프랑코파 반란군에게 가장 큰 지원을 한 곳은 히틀러 치하의 나치 독일과 무솔리니 파쇼 치하의 이탈리아였어요. 프랑코파 반란군은 히틀러와 무솔리니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히틀러는 스페인 내전 동안 세 차례의 주요 작전을 수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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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작전 ‘불의 마법’은 1936년 1월 말에 진행되었으며 프랑코에게 군수 물자를 지원하기 위하여 52척의 군함과 20여 기의 수송기 및 6대의 전투기를 동원했고 같은 해 9월 두 번째 작전 ‘오토’를 통해 히틀러는 프랑코에게 24대 이상의 1호 전차를 제공합니다.
10월에는 세 번째 작전을 통해 600-800명의 독일군이 직접 스페인 내전에 참전, 히틀러의 가장 큰 지원은 콘도르 사단을 스페인 내전에 투입한 것입니다. 나치 자원병으로 구성된 콘도르 사단은 1936년 3,500여명이 참전한 이래 내전 기간 19,000여 명이 투입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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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솔리니는 스페인 내전의 공을 히틀러가 독차지하는 것을 바라만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히틀러보다 많은 군사를 스페인 내전에 투입하기로 결정 했고. 무솔리니는 내전 동안 50,000명 이상의 군대를 스페인 내전에 참전시켰습니다. 반면 헝가리 국제 여단의 유럽 전역을 포함한 세계 각국에서 스페인의 ‘민주공화국’을 지원하기 위해 의용병이 모였어요. 아나키즘, 사회민주주의, 공산주의, 극좌파, 자유주의를 아우르는 다양한 이념을 가진 이들은 국제 여단이라 불렸으며 스페인 내전을 파시즘을 저지하기 위한 최전방으로 여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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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개 국가에서 모인 약 30,000명의 국제 여단은 스페인 내전 동안 헌신적으로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마드리드 공방전에서 파시스트 군대를 저지하는 업적을 달성하기도 합니다. 미국인 의용병으로 구성된 부대는 에이브러햄 링컨 여단으로 캐나다 의용군은 메켄지-파피뉴 여단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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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여단의 상당수는 코민테른에 의해 모집되어 루마니아 공산당에서는 5백 명의 공산당원이 참전 해요. 윈스턴 처칠의 조카 에스먼드 로밀리와 같은 자유주의자들 역시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국제 여단에 합류합니다. 당시 국제 여단의 자원병으로 참여한 사람 중에는 헤밍웨이와 같은 지식인도 상당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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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프랑스가 불간섭 조약을 체결하여 어정쩡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제 여단의 참전은 공화파에게 사실상 유일한 병력 지원이었습니다. 소련제 T26 전차를 스페인 공화국 정부에게 지원합니다. 내전 기간 동안 지원된 군수 물자는 비행기 806기, 탱크 362대, 야포 1,555문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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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소련은 국제연맹의 불간섭 조약을 무시하고 소수의 군사를 파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탈린은 히틀러와 비밀리에 불가침 조약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직접적인 지원은 제한적이었어요. 대신에 군자금으로 상당한 양의 금을 스페인 은행으로 보냅니다. 이때 보내진 510 톤의 금은 모스크바 황금으로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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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약 700명의 군인을 파견, 독일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의용군’이라 불린 이들은 전차와 전투기를 운용하였습니다. 이들의 참전은 ‘X 작전’이라 불렸답니다. 당시 멕시코 내부의 여론은 다수가 프랑코파의 승리를 원하는 것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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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메리카의 다른 나라와 달리 멕시코는 공식적으로는 스페인 공화국 정부를 지원해요. 실제 지원 규모는 2백만 달러 규모에 불과 했대요, 멕시코는 멕시코 공군이 보유하고 있던 벨랑카 CH-300 등의 전투기를 지원했고 확전을 두려워했던 양국과 대서양 건너의 미국은 국제연맹의 ‘불간섭’ 원칙을 근거로 스페인 내전에 대해서 침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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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결정에는 공화정부가 승리했을 경우 스페인에 투자한 자금과 차관을 돌려받기 어려울 것이라는 경제적인 계산도 깔려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스페인 내전은 역사가 앤터니 비버의 표현처럼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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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는 프랑코파 반란군은 1937년 바스크 북부지방과 아스투리아스 지방이 반란군에 점령되었고, 1938년 12월 카탈루냐 지방이 반란군의 공격을 받아 1939년 3월 5일 공화파 정부는 프랑스로 망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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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7일에는 마드리드에서 공화파 내의 비 공산당 세력이 공산당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또 다른 내란이 발생하였고 3월 28일 반란군이 마드리드에 입성합니다. 내란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의 수는 5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됩니다. 또한 내전 후에도 승리한 반란군 측은 반대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및 보복을 시작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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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는 영아를 조직적으로 유괴해 인신매매까지 자행했다고 해요. 스페인의 총통이 된 프랑코는 1975년 사망할 때까지 일인 독재정치를 계속했으며 프랑코의 사후에 부르봉 왕조가 복고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반면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은 추축국과의 지나친 동맹을 우려한 미국에 의해 무역이 봉쇄되어 자급자족적 경제를 할 수밖에 없었어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마셜 플랜에 따른 지원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으나 농촌의 상황은 매우 열악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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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이후 스페인은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 국제연합에도 가입하였고, 1960년대 들어 스페인은 높은 수준의 경제 발전을 이룩하지만 인민전선 파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었고, 아울러 공화파를 지원했던 바스크어와 카탈루냐어는 공공장소에서의 사용이 됩니다. 인민전선 파의 스페인 망명 정부는 멕시코에서 1976년까지 존속해요. 스페인 내전은 신념과 용기의 좌절, 분열로 인한 정의의 패배를 보여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이후에 다가올 비극을 알리는 ‘징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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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 이득을 위한 계산에 몰두하며 파시즘의 위협을 간과했던 인류는 스페인 내전이 종식되고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제2차 세계대전에 휘말려야 했어요. 스페인 내전은 세계대전의 예고 편이었던 겁니다. 내전 이후 스페인은 군사독재정권을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는데 수십 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프랑코 파의 요구와 현재 야당의 요구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2024.5.10.fri.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