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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파란 하늘을 보며 9월을 시작하였습니다. 시작이 좋구나 싶은 것이지요. 빗물로 얼룩진 여름이었습니다. 가을을 맞는 새 달이 희망으로 그려집니다. 비록 물을 너무 많이 먹었지만 잘 이겨내고 풍성한 과실을 맺기를 바랍니다. 이 어려운 때에 먹을 것이라도 부족함이 없기를 비는 것입니다. 사람의 기본이 채워지지 아니하면 만사가 귀찮고 짜증나는 일 아닙니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바람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겠지만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전해지리라 믿습니다. 국가(國歌)에 ‘하나님’이 불리는 나라는 우리 대한민국이 세상에서 유일하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과연 재고하시리라 생각합니다. ㅎㅎ
심방을 다니느라 엊그제 오랜 만에 하루를 돌아다녔습니다. 그 사이 이런 길도 생겼네, 하고 놀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교통이 혼잡한 곳은 여전하구나 싶기도 했습니다. 더 이상 길을 넓히기도 힘들 테고 길 자체를 2층으로 올리기 전에는 방법이 없겠지요. 새 길이 열렸어도 시간이 조금 지나면 다시 혼잡한 도로가 되고 맙니다. 사람은 줄어들고 있다는데 차량은 졸어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늘어나고 있나요? 두 사람의 한 대 꼴이 이제는 사람마다 한 대로 발전(?)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거 참! 그래야 자동차 제조업도 유지가 되는 것이지만 이 좁은 땅덩이에 차가 너무 많기도 합니다. 아니면 인구 분산정책이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누가 도시를 떠나려 하겠습니까? 이렇게 편한 곳을 말입니다. ㅋㅋ
아무튼 9월입니다. 좋은 꿈을 꾸며 각자 예쁘고 실한 열매들을 맺으면 좋겠습니다. Come September, 노래도 있던데 과일 값이라도 내리기를!! ㅋㅋ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 2023년 9월 2일 김종우 목사 드림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마태복음 24 : 9)
<오펜하이머>
전쟁을 빨리 끝내려는 희망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야 먼 타국으로 목숨 걸고 나간 아들들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런 선한 목적이 있기에 그 무시무시한 무기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즉각 실행했습니다. 결과는 엄청났습니다. 기대한 대로 전쟁은 곧 끝났습니다. 더 끈다면 그 후에 어떻게 되리라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무조건 항복’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긴 전쟁의 시간이 끝나고 많은 군인들이 고향으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반세기가 지나도 진행 중이었습니다. 도시가 다시 들어서고 당시의 상처 입었던 사람들은 이제 거의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다고 끝났을까요?
그곳에는 군사기지나 병기공장은 얼마 없습니다. 민간인이 훨씬 많습니다. 무고한 생명들이 수만 명입니다. 그래도 우리 젊은이들이 돌아올 수 있다면 그게 문제인가? 그래요. 어차피 전쟁인 걸요. 희생은 따르는 법입니다. 그런데 여태 경험하지 못한 대량살상이 일시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냥 물 건너 남의 일입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남의 전쟁에 껴드는 일은 왜 합니까? 물론 숨어있는 또 다른 이유들이 있습니다. 국익을 위해서나 지역방어를 위해서 참전할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개인적인 신념과 이념에 충실해서 참전하기도 합니다. 이러저러한 이유와 목적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장은 그야말로 지옥을 만드는 곳입니다.
1대1에서 1대 다수로 나아가 한 번에 대량의 살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단추 한 번 누르면 도시 하나, 수십 만 이상 백만 단위로도 해할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지금 그 우려하는 핵전쟁이 발생한다면 우리 모두가 자멸할 것입니다. 남아있다 한들 삶이 제대로 이루어지겠습니까? 그 때를 상상하여 이야기도 만들어지고 영화도 나오기는 했습니다. 상상하기도 싫은 이야기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지금 그 위험을 안고 살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두려움과 나아가 공포로까지 번졌지만 이제는 그것도 익숙해진 모양입니다.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역사상 첫 핵전쟁을 시행하고 난 ‘오펜하이머’는 장차 일어날 핵무기 경쟁을 두려워했습니다.
전쟁은 일단 이기고 봐야 합니다. 전쟁범죄를 따지는 건 사후의 일입니다. 죽으면 그만이니까요.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겨야 합니다. 이기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있기는 하지만 적보다 우월한 무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도 포함됩니다. 2차 대전이 진행되면서 은밀하게 핵폭탄 발명을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나치즘이나 파시즘과의 전쟁이었지만 진행 중에 또 다른 사상전이 개입되고 있었습니다. 바로 공산주의입니다. 이탈리아가 끝나고 이어 독일의 나치즘도 끝장났습니다. 일본의 제국주의만 누르면 다 됩니다. 그런데 전혀 상이한 것이 등장했습니다. 사람들의 정신과 영혼까지 파고드는 바이러스와도 같았습니다. 나치즘보다 더 두려워하기도 했습니다.
원자폭탄이 발명되기 전에 독일은 이미 끝났습니다. 일본만 무너뜨리면 됩니다. 끝까지 발악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게 힘들여 연구하여 드디어 실험까지 성공합니다. 즉각 현장에 투입합니다. 전쟁을 빨리 끝내려는 욕심과 희망 때문입니다. 만들어내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오펜하이머는 두려워합니다. 당장이야 승리에 도취할 수 있지만 이로써 나라들이 군비경쟁을 할 것이 뻔합니다. 공산주의를 출발한 소련부터 시작하여 너도나도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할 것입니다. 이 조그만 땅덩이 지구가 감당하기 힘들만큼 서로들 가지려고 노력할 것이고 넘쳐나게 됩니다. 어찌 하려고? 다 같이 죽자고? 이게 말이 되는 겁니까?
영웅이 되어 대통령의 초대를 받아 백악관에 갑니다. 그리고 그 마음 그대로 표현합니다. 큰 죄인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자칫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이라 들릴 수 있습니다. 물론 발명한 사람은 과학자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지도자가 선택하고 결정합니다. 결정권자가 책임을 지는 것이지요. 당연히 그 책임도 져야 합니다. 그러니 책임은 과학자가 아니라 대통령에게 있는 것입니다. 대통령이나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달리 표현한다면 일개 과학자가 월권을 저지른 것입니다. 대통령이 즉각 쫓아냅니다. 측근에게 지시합니다. 다시는 내 앞에 징징대는 어린애는 데려오지 말라고 말이지요. 차라리 잠잠히 있었더라면 나중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지원을 받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미국에도 그런 일이 있었구나 생각하니 문명국이라고 별수가 있는 것도 아니라 싶습니다. 소위 미국식 ‘마녀사냥’입니다. 1950년대 일어난 일입니다. 툭하면 ‘빨갱이’ 딱지를 붙여 제거하는 것입니다. 정식 수입을 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안에서 오랜 시간 써먹었고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우리의 놓인 상황이 그 불씨를 지펴줄 만한 조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야 그 사람이 실권하고 나서는 슬며시 수그러졌지만 우리는 처지가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은 아픔과 슬픔과 안타까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더구나 여전히 진행되고 있으니 불안하기도 합니다. 누구 말대로, 이용하는 그들은 미워도 우리나라는 사랑하는 걸요.
한 사람의 원한과 오해로 시작되어 영웅이었던 오펜하이머가 어떻게 추락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그의 고백이 아프게 들립니다. ‘자신의 삶을 심판받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야.’ 천재라고 지혜로운 건 아니지. 공감이 됩니다. 아무리 따져보아도 잘못이 없는데 어떻게든 밀어내려는 적대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 때문에 인생이 더러워지기도 합니다. 영화 ‘오펜하이머’(Oppenheimer)를 보았습니다.
수수께끼 해볼까요?
오래 전, 우리나라에 아직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전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에 ‘스무고개’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퀴즈 풀기 대항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한참 학생들 대상으로 ‘장학퀴즈’라는 프로그램이 오래도록 진행되었지요. 근간에도 계속되는지 모르겠지만 알고 있는 것은 ‘골든 벨’입니다. 어른들을 대상으로 하는 퀴즈 대회도 있습니다. 거액의 상금이 걸려있기 때문에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는 경우도 있는 줄 압니다. 아무튼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도 때때로 서로 퀴즈풀이를 합니다. 이때는 정식으로 한다기보다는 분위기 반전을 위한 넌센스 퀴즈가 많이 사용됩니다. 서로 재미로 하는 거죠. 문제 한번 낼게요. ‘개미네 집 주소는 어떻게 됩니까?’ 답은, ‘허리도 가늘군 만지면 부러지리’입니다.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말은 말인데 타지 못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답은, 거짓말입니다. 재미있지요? 지금은 ‘퀴즈’라고 영어 단어를 사용하는데 오래전 우리는 ‘수수께끼’라는 말로 사용하였습니다. 아무튼 이 수수께끼의 답을 찾느라 끙끙거립니다. 심심한 상황에서 분위기 반전으로 많이 사용합니다. 모두 재미있어 합니다.
성경 속에도 수수께끼 이야기가 나오는 곳이 있습니다. 삼손이 이방여인과 혼인하고 그 혼인잔치에 모인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냅니다. 삿 14 : 12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수수께끼를 하리니 잔치하는 칠일 동안에 너희가 능히 그것을 풀어서 내게 고하면 내가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너희에게 주리라”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말씀하여 백성에게 수수께끼를 내라 하십니다. 겔 17 : 1 - 2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수수께끼와 비유를 이스라엘 족속에게 베풀어” 그런데 여기 하나님이 베풀라 하시는 수수께끼는 비유입니다. 다시 말해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 답은 그 비유를 해석해야 나오는 것이지요. 비유 자체가 수수께끼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아 알겠지만 성경에는 비유가 많이 나옵니다. 특히 예수님이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마 13 : 34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여기서 ‘이 모든 것’은 천국비밀에 관한 모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 말씀하신 모든 것이 비유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비유로 한 것은 천국에 대한 것과 장래사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구약시대에는 무엇을 비유로 말씀할까요? 구약시대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에게 성경을 통하여 무엇을 알려주려 하셨을까요? 메시야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메시야 곧 구세주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고 메시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지요. 여자가 아주 예쁘면 흔히 ‘양귀비’ 같다고 합니다. 요즘은 누구를 빗대어 말하지요? 아주 잘 나가는 여배우가 있습니다. 그 여배우를 빙자해서 누구처럼 예쁘다고 표현하지요. 주체는 누구입니까? 여배우가 아닙니다. 여배우는 빙자했을 뿐이지요. 실제 말하고자 하는 대상은 다른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호 12 : 10 “내가 여러 선지자에게 말하였고 이상을 많이 보였으며 선지자들을 빙자하여 비유를 베풀었노라” 슥 7 : 12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신으로 이전 선지자를 빙자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노가 나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나왔도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빙자하여 누구를 말씀하려 하셨는가 하는 것이지요. 누구이겠습니까? 메시야입니다. 하나님은 메시야를 말씀하고 싶으신데 그것을 선지자를 빙자하여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공은 선지자가 아니라 메시야입니다.
잘 보십시오. 겔 17 : 1 - 2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수수께끼와 비유를 이스라엘 족속에게 베풀어” 여기서 ‘나’는 일차적으로 선지자 에스겔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사실 에스겔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장차 누군가 와서 이스라엘에게 비유를 베풀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겔 20 : 49 “내가 가로되 오호라 주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그는 비유로 말하는 자가 아니냐 하나이다 하니라” 여기서 ‘나’도 일차적으로는 선지자 에스겔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장차 올 메시야라는 것이지요. 메시야가 와서 비유로 말하리라는 것입니다. 시 78 : 1 - 2 “내 백성이여, 내 교훈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찌어다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 이 시편은 그 위에 표기되어 있듯이 아삽이라는 사람이 썼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나’는 일차적으로 아삽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삽을 빙자하여 메시야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마 13 : 34 - 35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선지자가 바로 아삽임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선지자의 말을 이제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었다는 것을 친히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수수께끼 문제를 주면 답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가 생깁니다. 마찬가지로 비유를 베풀면 그 뜻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가 생기는 것입니다. 문제는 단순히 알고 모르고가 아니라 그 결과가 아주 다르다는 것이지요. 마 13 : 10 - 11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말한 대로 예수님은 천국의 비밀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왜 비유로 말씀하시냐고 묻습니다. 그 이유는 알아야 하는 자들이 있고 알아서는 안 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저희에게는 왜 허락되지 않는 것일까요? 15절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중요한 이유는 마음이 완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완악하다는 겁니까? 이방사람들입니까? 불신자들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이라는 사람들입니다.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완악하다는 말입니다.
천국의 비밀은 비유로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알아서는 안 되는 사람들에게는 말 그대로 비밀로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수수께끼를 알 수 없습니다. 눅 8 : 10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잘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다른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주장할 것입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이지요. 그것은 자기네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막 4 : 10 - 12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 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자오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이제 외인이라고 말씀하지요. 주님 ‘안’이 아니라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깨닫지 못하게 하여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유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무슨 결과를 낳는지 이해가 됩니까? 죄 사함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얻지 못하는데 천국에 들어가겠습니까? 죄인이 천국에 들어갑니까? 그런데 몰라도 되는 겁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자기 생각입니까? 마귀의 속삭임에 넘어가지 않기를 빕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천국의 비밀인 비유를 깨달으면 죄 사함을 받고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면 죄 사함을 얻지 못하고 결국 천국에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비유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 있습니까? 알면 좋고 몰라도 그만이 아닙니다.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어렵습니다. 왜 어렵습니까? 모르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알면 쉽지요. 시 107 : 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알기 위해서 먼저 사모하는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저희’에게 왜 천국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하지요?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쉬운 말로 바꾸면 ‘고집불통’이라는 뜻입니다. 자기주장만 있고 남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심하면 하나님보다도 앞섭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이대도 막무가내지요. 다시 말합니다. 불신자들을 향해서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렇게 보셨습니다. 그 때는 이렇게 표현하였지요. 신 9 : 13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이 백성을 보았노라 보라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예수님 다녀가시고 스데반 집사가 예수님을 증거하다 붙잡혀 순교하기 직전에도 경고합니다. 행 7 :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누구에게 하는 말입니까? 저 이방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이라 자부하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니 구약 때나 신약 때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완악한 것이지요. 지금은 어떻습니까? 나아진 것이 있습니까? 교단, 교파가 자꾸 갈라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타협이 어렵습니다. 서로 자기만 옳기 때문이지요. 완악하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교단도 교파도 아니고 내가 ‘너희’ 쪽에 있는가, ‘저희’ 쪽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 번 점검해봅니다. 계 1 : 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여기서 일곱 별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이게 비유인데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릅니다. 그렇지요? 계 17 : 7 “천사가 가로되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의 탄바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여기서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은 무엇인가요? 더 어렵습니다. 군대에 가면 암구호라는 것이 있습니다. 야간 보초를 나가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인기척이 들립니다. 그런데 아군인지 적군인지 분간할 수가 없지요. 그 때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암구호입니다. 암구호는 그날그날 다릅니다. 상부에서 비밀리에 내려옵니다. 시간이 되면 모든 병사에게 전달됩니다. 물론 아군만이 알도록 합니다. 그래서 어둠 속에서 확인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그 날의 암구호가 ‘고구마/고추’라고 합시다. 이쪽에서 ‘고구마’ 했는데 저쪽에서 고추가 아니라 ‘감자’라는 대답이 오면 이건 아군이 아닙니다. 전시에는 그대로 총을 쏘아댈 것입니다. 암구호를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것은 목숨과 연관되는 일입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하나님 백성이 비유를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것은 바로 생명과 연관된 일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몰라도 된다고 가르친다면 그게 하나님의 목자의 할 일입니까? 큰일 날 일입니다.
그렇다면 비유가 언제까지 모르는 채로 남아있겠습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하나님 백성은 알아야 합니다. 풀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는 알도록 허락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풀릴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요 16 : 25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오래 전 버스에 이런 광고가 붙어 다닌 적이 있습니다.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사람들이 도대체 무엇인가 궁금해 했지요. 도대체 뭐가 안 나오고, 뭐가 쳐들어간다는 말인가? 알아요, 몰라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고 약 두 달 후에 제품이 나왔습니다. ‘쾌변 요구르트’라는 것입니다. 그제야 아 - 하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해가 되지요. 수수께끼가 언제 풀립니까? 실체가 나타나면 풀립니다. 구약의 비밀이 언제 풀렸습니까? 구약의 수수께끼가 무엇이었습니까? 메시야입니다. 언제 풀렸습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풀렸습니다. 수수께끼의 실체, 비유의 실체는 바로 예수님이셨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셔야 풀리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도 그 때까지는 봉함하라고 지시하십니다. 단 12 : 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사실 선지자도 받아서 쓰기는 하였으나 자기 자신도 모릅니다. 궁금하겠지요. 그래서 묻습니다. 8절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내가 가로되 내 주여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삽나이까” 그러나 아무 때나 열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9절 “그가 가로되 다니엘아 갈찌어다 대저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그렇습니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언제라고요? ‘마지막 때’입니다. 합 2 :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그 정한 때가 바로 마지막 때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는 언제입니까? 성경에서 마지막 때는 두 번 있습니다. 일단 언제를 마지막 때라고 하는지 보겠습니다. 우선 비슷하게 사용하는 용어들이 있다는 것부터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 때’ ‘말세’ ‘세상 끝’ ‘종말’ 모두 같은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바로 예수님이 오시는 때입니다. 마 24 : 3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주의 임하심’ 곧 재림 때를 이야기하는데 ‘세상 끝’이라 말합니다. 히 9 :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예수님의 고난을 이야기합니다. 죄 사함을 위한 십자가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끝에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예수님 초림 때를 ‘세상 끝’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입장에서는 세상 끝 곧 말세가 이미 한번은 지나갔고 이제 한 번 남았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구약의 비밀은 실체인 예수님이 오셔서 풀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셨습니까? 눅 24 : 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빙자하여 말씀하고 싶으셨던 비밀 곧 메시야를 설명해주신 것입니다. 44절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그렇게 성경의 수수께끼를 풀어주니 그것을 깨달은 제자들은 천국 비밀을 아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거부하고 자기만이 옳다고 완악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배척했던 유대인들은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 차이는 구원과 멸망, 생명과 사망, 곧 천국과 지옥이지요.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지금 이방인들을 상대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이라 자부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때만 그런 것이 아니지요. 다시 오시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서 나뉘는 것입니다. 즉 믿는 자들 곧 오늘 그리스도인들 속에서 나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심판은 교회 안에서 먼저 시작된다고 말씀합니다. 벧전 4 : 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어디서 심판을 시작한다고요? 하나님 집, 오늘날 어디입니까? 교회입니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그렇게 예언하셨습니다. 렘 25 : 26 “보라 내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에서부터 재앙 내리기를 시작하였은즉 너희가 어찌 능히 형벌을 면할 수 있느냐 면치 못하리니 이는 내가 칼을 불러 세상의 모든 거민을 칠 것임이니라 하셨다 하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시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하신답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입니다. 그 때는 예루살렘이고 오늘은 교회입니다. 겔 9 : 6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 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찌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우리가 여태 가르치고 배우고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불신자들이 심판받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지금까지 성경을 보았듯이 심판은 신자와 불신자를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하나님 백성 곧 이스라엘 속에서 이뤄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 백성에게 자기를 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호 6 :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바로 우리 안에서 먼저 이루어집니다. 다시 말하지만 아는 자와 모르는 자를 갈라 세우는 것입니다.
천국 비밀은 예언되어 있습니다. 수수께끼입니다. 비유로 말씀되어 있지요. 몰라도 된다고 고집하면 어떻게 되리라 이제 깨달은 줄 압니다. 배우기를 바랍니다. 천국을 아이들 간식 정도로나 알고 신앙하는 사람은 그 대가를 그대로 받을 것입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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