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하면 100세까지 산다는 환상
저자: 정현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기사등록: 2020-07-02
얼마 전 지인의 부친이 돌아가셔서 문상을 갔더니 평소 건강하셔서 그랬는지 100세까지 사는 걸 기정사실로 알아서 죽음에 대한 준비는 전혀 하지 않은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수십년간의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마무리하지도 못한 채 황망하게 떠나갔으니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수년 전 진료실을 찾아온 70대 남자분은 “암에 안걸리고 90살 넘겨 살 수 있도록 병원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정밀검사를 다 해주세요.”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몸에 암이 생기지 않는 곳은 머리카락과 손톱과 발톱, 세 군데를 제외하고는 없다고 했더니, “사실은 120살까지는 살고 싶은데” 라고 말하며 몹시 아쉬워했다. 건강검진을 열심히 받는다고 하여 모든 질병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요즘 방송과 언론 매체에서 100세 환상을 부추겨서인지, 누구나 웬만하면 80, 90세까지 살며 100세를 사는 일도 그다지 어렵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100세까지 산다는 것은 평균수명이 늘어났다고 하는 현재로서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몇 년 전 타계한 지인 한 분이 떠오른다. 평소 몸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술도 멀리하고, 등산과 골프로 다져진 몸매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여서, 65세로 정년퇴임 할 때만 해도 주위에서는 90세까지 사는 데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2년 후 건강검진 때 관상동맥이 좁아지는 협착이 발견되었는데, 심장질환 전문가들은 특별한 치료가 필요하지 않다고 했지만 본인이 강력하게 원해서 좁아진 심장혈관을 넓히는 스텐트 시술을 받게 되었다. 시술 후 피가 흐르는 스텐트가 막히는 걸 방지하기 위해 피를 굳지 않게 하는 아스피린 등의 약물을 지속적으로 복용했는데, 몇 개월 후 주차장에서 넘어지면서 머리를 크게 다치는 사고를 당하게 되었다. 신경외과에서 두개골을 열고 응급수술을 하려고 했으나, 혈액응고를 억제하기 위해 복용하고 있는 약물로 인해 머릿속 출혈이 워낙 심해 손을 대지 못했고, 중환자실에서 수 주일을 보낸 뒤 사망하였다. 평소 건강에 대한 자신감으로 죽음에 대한 준비는 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수십 년을 같이 살아온 가족들에게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한 마디 작별인사도 하지 못한 채 황망하게 세상을 떠난 셈이다.
이 사례를 접하면서 삶의 유한함과 더불어 죽음의 예측불허성을 다시 한 번 절실하게 느꼈었다. 지금은 건강한 육체를 갖고 있더라도 언제 갑자기 죽음과 마주하게 될지 모른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레 일깨워준다. 잘 알려진 보왕삼매론의 첫 구절이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이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은 누구나 다 본능적으로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고 더 나아가 죽지 않기를 바란다. 어찌 보면 이런 바람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심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바람대로 되기 몹시 어려운 것이 인간 삶의 현실이다.
2009년 5월 8일 한겨레신문에 실린 도쿄경제대 서경식 교수의 칼럼은 동료교수의 장례식장에 가서 느낀 점을 썼는데 매우 인상적이어서 일부를 소개한다. “부인이 와서 관 덮개를 열고 N교수 주검과 대면시켜 주었다. 죽은 이의 얼굴은 의외로 평온해 보였다. 그 순간에도 내 속에서 밀고 올라온 것은 슬픔이나 애도의 염이라기보다는 ‘마침내 어깨 짐을 벗었군요’하는 위로의 기분이었다. 거기엔 약간의 선망의 기분도 들어 있었다.” 지인의 죽음에 슬픔이나 애도보다는 어깨의 짐을 벗음에 대한 선망의 느낌이 들었다는 내용이 신선하고도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자신보다 먼저 고되고도 엄중한 지상에서의 임무를 완수하고 떠난 사람에 대한 부러움 같은 감정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삶의 유한함을 절감하면서 죽음을 담담하게 대하는 우리나라의 지성인도 있다. 2009년 9월 1일 한겨레신문에는, 신종 플루가 한창 유행할 즈음 ‘때가 되면 결국은 죽는 것을’이라는 제목으로 김형태 변호사가 쓴 칼럼이 소개되었다. "처가 여름 뒤끝에 며칠 몸살을 앓았다. 처음에는 기침이 나고 목이 붓더니 열도 났다. 병원에 간다는 걸 겁을 주어 말렸다. 요즘 유행하는 신종 플루인지 확인하는 데만 15만원이 든단다....(중략) 내 처가 비교적 가벼운 질병의 공포 때문에 들어가는 15만원의 검사비를 당장 굶어 죽어가는 아프리카 아이에게 돌리고, 내가 적당히 늙으면 독감에 걸려 죽어 주는 게 ’가장 멀리 있는 자‘와 ’태어나지 않은 자‘들에 대한 도리이다." 영원히 살겠다고 하루 100-250개의 알약을 복용하며 영생을 추구하고 있는 외국의 미래학자와 참으로 대조되는 현명한 죽음관이라고 할 수 있다.
<술은 익어가고 도는 깊어지고>에 소개된 장자의 지락편을 인용한다. 여행길에 오른 장자가 쉬기 위해 잠이 들었는데 공교롭게도 해골 위에서였다. 꿈에서 장자는 해골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장자가 말한다. "생명의 신에게 부탁해서 당신의 형체를 회복시켜 살과 근육이 다시 자라나게 하고 부모와 아내, 친구들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준다면 어떻게 하겠소이까?" 해골이 답하기를 "싫소이다! 내가 왜 임금보다 더한 즐거움을 포기하고 인간 세상의 고통 속으로 다시 기어들어가겠소?" 해골이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은 그가 있는 곳이 모셔야 할 왕도 없고 신하도 없으며 추위와 더위도 없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왕이 누리는 기쁨과는 비교도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의 길이를 연장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직 가보지 않은 세계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은 그렇게 회피하고 혐오할 만한 세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미국의 정신과의사, 신학자이자 작가였던 스캇 펙은 자신의 강연을 들은 청중이 “우리에게 무언가 인생의 은총 같은 게 있을까요?”라고 묻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리 모두 죽게 된다는 점이죠. 인생을 끝낼 준비를 할 만큼 세상살이에 지친 건 아니지만 이런 쓰레기 같은 세상을 3,4백년 더 헤치고 살아야 한다면 아마 내가 가진 모든 돈을 털어서라도 일찌감치 죽는 쪽에 투자할 겁니다.” 죽고 나서도 냉동질소 탱크에 보관돼 미래에 해동되어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생사관을 보여준다.
미국의 토머스 제퍼슨은 “우리 모두에겐 죽음이 무르익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으로써 또 다른 성장을 이루어야 할 바로 그때가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다 산 뒤에 남의 것을 탐할 수는 없죠.”라고 말했다. 1986년 55세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건축가 김수근 선생은 타계하기 얼마 전 병문안을 왔던 후배에게 “나 50년 살았지? 하지만 일과 여행, 놀이를 다른 이들 세 배는 한 것 같으니 150세까지 산 셈이지”라고 말하며 담담하게 생을 마무리하였다. 삶의 길이에만 집착하는 많은 현대인들의 모습과 참으로 대조된다. 이러한 생사관으로 삶을 영위해 왔다면 애써서 100세까지 사는 걸 목표로 하는 삶을 추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