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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화가 진상용 원문보기 글쓴이: 국화
한 화가가 다양한 주제와 기법을 넘나드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평생을 한 우물만 파도 쉽지 않은
예술가 세계에서는 모험이겠지요. 그런데 19세기에 유행했던 모든 사조를 섞어보려고 한 화가가 있습니다.
이 겁 없는 화가가 미국 출생의 찰스 S. 피어스 (Charles Spargue Pearce / 1851~1914) 입니다.
고독 Solitude / 144.15cm x 111.76cm / 1889
고독해 보이는가요? 강 옆으로 난 길 옆 어디쯤인가에 앉아서 책을 읽다가 다시 걸음을 재촉했지만
머리 속이 복잡해지자 그만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책 갈피 삼아 손가락을 책 사이에 넣은 것을 보면
책의 한 구절이 여인을 괴롭혔을까요? 고독은 내가 누구와 또는 무엇과 일치되지 않을 때 느끼는 자신만의
감정입니다. 그렇다면 수 많은 일치와 불일치가 반복되는 것이 사람 사는 일이겠지요. 문득 고독하다고
느끼는 것, 당연합니다.
피어스는 보스턴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보스턴에서 잘 알려진 시인의 딸이었고 아버지는
중국 도자기를 수입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피어스의 부모는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를 할 수 있었다고
하니까 피어스가 어린 나이에 예술에 눈을 뜰 수 있었던 환경은 잘 갖추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양 치기 소년 A Shepherd Boy / 55.88cm x 46.99cm
양을 돌보다가 따분했던지 악기를 꺼내 들었습니다. 오보에도 아니고 클라리넷도 아니고 무슨 악기인가요?
리드를 물고 있는 뺨이 볼록합니다. 눈은 머리 속의 악보를 따라가고 있는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한쪽 발 위로 또 다른 발을 올려 놓은 자세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습니다. 들판을
건너 가는 소년의 연주 소리를 떠 올려 보았습니다.
‘넌 훌륭한 음악가가 될 거야’
등을 두드려 주고 싶습니다.
보스턴의 유명한 라틴학교를 다니는 동안 피어스는 미술에서 재능을 보입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5년 동안
아버지의 도자기 수입 업무를 돕게 되면서 아버지로부터 시대의 예술 경향과 가장 미국적인 것에 대해
배웁니다. 이론도 중요하지만 현장에서 감각적으로 체득한 경험도 중요하지요.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의
아버지는 첫 번째 스승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저도 제 아이의 첫 번째 스승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큰 아이의 죽음 The Death of the First-Born / 1877
구약성경에 모세의 이집트를 탈출 이야기를 묘사한 부분이 ‘탈출기’라고도 하는 ‘출애굽기’입니다. 떠나려는
모세와 유대인들을 파라오가 막자 하늘로부터 10가지의 재앙이 내려 옵니다. 그 중에서 마지막 재앙은 모든
이집트 집안의 맏이를 걷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갑작스러운 맏이의 죽음 앞에 망연자실한 부부가 앉아
있습니다. 아이를 담은 항아리의 무표정함과 그 조그만 크기 때문에 슬픔이 더욱 커졌습니다. 참 무정한
하느님이십니다.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우고 있었지만 피어스는 화가가 되고 싶었고 그 결심에 따라 1873년 23세의 나이로
파리 유학 길에 오릅니다. 파리에 도착한 피어스는 초상화와 역사화, 풍속화에서 대단한 평가를 받고 있던
레옹 보나의 화실에 입학합니다. 미국 화가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파리에 와서 배우는 선생님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름이 레옹 보나와 장 제롬 그리고 윌리엄 부게로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레옹 보나는
학생들을 위한 별도의 화실이 있었다고 합니다.
엄마와 어린 아이 Mother and Child / 92.71cm x 73.66cm / c.1880
엄마의 옆 얼굴과 아이의 정면을 보는 구도는 모자상을 묘사할 때 자주 만나게 됩니다. 아이에 대한 엄마의
가없는 사랑과 엄마 보다는 세상에 눈을 돌리는 아이들의 속성을 가장 잘 보여주기 때문 아닌가 싶기도 한데,
만약 저보고 모자상을 그리라고 해도 저 범주에서 크게 벗어 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엄마 품에 안긴 아이의
표정이 편안해 보입니다. 그런데 아이의 얼굴이 몸에 비해서 어찌나 조숙한지요.
‘아주머니, 아이가 크면 한 자리 하겠습니다’
피어스의 그림을 따라가면 특이한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스승인 보나의 화실의 커리큘럼에 의한
것이겠지만 처음에는 성경 속의 역사화에서 두각을 나타냈다가 초상화로 관심이 옮겨 갑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정착지는 풍속화였습니다. 때문에 당연한 말이지만 초기 작품에는 보나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아랍의 보석 세공인 Arab Jeweler / c.1882
긴 담뱃대로 불을 붙이는 줄 알았는데 금을 보석을 녹이기 위해 불에 바람을 부는 중이었습니다. 한 손으로는
보석을 불 속에서 녹이고 있고 한 손으로는 빨대로 바람을 넣고 있는 세공인의 자세가 진지합니다. 집게를
잡기 위해 벌린 손과 화면 가운데 자리를 차지한 큰 발이 그림 속 세공인의 자존심 같아서 웃음이 났습니다.
일에 몰두한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입니다.
파리에 도착한 해 후반에 피어스는 같은 화실의 친구인 아더 브릿지맨과 함께 3개월간의 이집트 여행을
떠납니다. 폐결핵을 앓고 있던 그는 따뜻한 곳에서 치료를 할 목적도 있었는데 그만 이집트 풍광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당시 파리의 살롱에는 장 제롬이나 외젠 들라크루아 같은 화가들이 사진 같은 오리엔탈리즘의
작품들을 선보여서 젊은 화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는데 그 무대의 한 복판으로 들어간 것이죠.
총재정부 시대 의상의 여인 Woman of the Directoire / 39.5cm x 32.25cm / 1884
한 마디만 하면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 질 것 같은 얼굴입니다. 제가 대단히 뭔가를 잘못한 느낌입니다.
시선을 피하고 있는 눈과 다문 입술이 주는 이미지 때문일까요? 그림 속 인물에게 미안해보기는 처음입니다.
작품의 제목이 좀 복잡한데 총재정부는 1795년부터 1799년까지 프랑스를 통치하던 정부 이름입니다.
그림 속의 여인은 100년 전 의상을 입고 있는 것이죠. 허리에 손을 대고 한 손에는 우아한 지팡이를
들었지만 ‘알았으니까 원래대로 입고 싶은 옷 입어’라고 말해주고 이 자리를 얼른 피하고 싶습니다. 저는 우는
여자가 세상에서 제일 무섭습니다.
이집트 여행에서 돌아온 피어스는 다음 해 겨울 다시 알제리 여행을 다녀 옵니다. 훗날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수 많은 중동 관련 레퍼토리가 완성되는 순간이죠. 파리에 온지 3년, 1876년 피어스는 파리 살롱전에
데뷔합니다. 그런데 고집스럽게도 중동에 대한 풍부한 자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여인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를 출품합니다. 수상 경력이 나와 있지 않은 것을 보면 비평가들의 평도 일반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빨래 널기 Hanging Laundry / 93.98cm x 139.7cm / 1882
바쁜 시골 생활에는 아이의 손도 한 몫을 합니다. 어머니가 텃밭을 돌보는 동안 어린 딸이 빨래를 널고
있습니다. 바지랑대에 걸린 줄이 높아 의자 위에 올라 선 뺨이 발갛습니다. 옷을 보니 아직 따뜻한 계절은
아니군요. 화면이 조금 더 환했으면 빨래 널기에 좋은 날인데 ---. 얼마 전 이웃 블로그에 갔다가 빨래처럼
온 몸을 줄에 걸려 보여 주고 싶다는 내용의 시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제까지 햇빛 좋은 날이면 빨래처럼
마르고 싶다는 생각만 했었는데 말입니다. 마르기 전에 보여준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요?
1877년 피어스느 종교화로 주제를 바꿔 살롱전에 다시 출품합니다. 그가 출품한 종교화에는 중동의 섬세함이
그림 속에 녹아 들어 있었습니다. 앞 서 보신 ‘큰 아이의 죽음’처럼 말입니다. 그의 작품을 본 사람들은 좋은
종교화가가 등장했다고 말했고 그 역시 종교화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기독교 주제를 중동의 풍물과 섞은
피어스의 능력이 사람들에게 각인되는 기회였습니다. 그리고 1879년에도 종교화를 출품했는데 1881년에
출품한 ‘목이 잘린 세례자 요한’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양떼를 몰고 집으로 Return of the Flock / 121.92cm x 160.02cm / 1888
앞의 ‘양치기 소년’에서 등장한 소년이 다시 등장했습니다. 여전히 악기를 불고 있군요. 하루 초지에서 잘
먹은 양떼를 몰고 가는 소년의 표정은 여전히 진지합니다. 녀석,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 양도 사람처럼
앞서 가는 모범생 양이 있는가 하면 뒤에서 딴 짓 하는 양이 있군요. 저러다 ‘길 잃은 양’이 되는 거죠?
또 다시 그의 관심 분야가 바뀝니다. ‘그 시대에 미국을 떠난 화가 중에 가장 호기심이 많았고 야심적인
화가가 피어스였다’라는 세간의 평이 허튼 소리는 아니었습니다. 이번에 피어스가 관심을 가진 분야는
풍속화였습니다. 당시 파리에는 오리엔탈리즘과 일본풍 같은 이국적인 정서가 힘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드가나 마네 같은 경우는 특히 일본풍에 많이 빠져들었던 화가였죠. 시골의 장면을 묘사하기 시작하면서
피어스의 능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먼 길을 돌아 온 건가요?
저녁 Evening / 101.6cm x 177.8cm / c.1880~1889
어쩌자고 달이 뜰 때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을까요? 다행히 달이 환하게 비추는 바람에 가는 길에
험한 곳은 들지 않겠지만, 목동과 양치기 개의 속마음은 안중에도 없는지 양들은 풀을 뜯기에 바쁩니다.
‘야, 그만 먹고 집에 가자’
속타는 양치기 개의 소리가 몽환적인 풍경 속으로 퍼져가고 있습니다.
피어스의 작품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서도 전시 됩니다. 필라델피아 미술 아카데미에서 열린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고 3등 메달을 수상합니다. 전 세계에 걸쳐 이목을 받는 계기가 되었죠.
1883년 살롱전에는 ‘물 긷는 여인’이라는 작품으로 3등 상을 수상하면서 풍속화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합니다.
성 즈느비에브 Sainte-Genevieve / 208.28cm x 167.64cm / 1887
남루한 옷차림의 소녀가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는 중입니다. 살짝 눈을 들어 앞을 보는 눈이 간절합니다.
이 소녀는 기도로서 외적을 물리친 파리의 수호 성녀인 성 즈느비에브입니다. 중세 시대의 파리 사람들은
도시에 위험이 닥치면 그녀의 유골이 담긴 함을 들고 촛불 행진을 했다고 합니다. 종교화와 풍속화가
절묘하게 섞였습니다.
1880년대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농촌 생활에 관심을 가진 피어스는 1885년 오베르 쉬르 우와즈에 있는
농장을 구입,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곳에서 머뭅니다. 오베르 쉬르 우와즈는 고흐가 마지막 자살하기 전
마지막으로 거주하던 곳이고 그의 무덤이 있는 곳이죠. 사는 곳과 관계없이 피어스는 매년 꾸준하게 살롱전
출품을 계속 합니다.
나무꾼의 딸 The Woodcutter's Daughter / 121.92cm x 104.14cm / c.1894
정말 당당한 여전사의 모습입니다. 생활 속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가 온 몸에 가득합니다.
생활이 녹녹해 보이지는 않지만 한 손으로 잡은 나무 뭉치나 허리 뒤 쪽으로 보이는 두툼한 칼을 보고 있으면
곧 그녀 인생의 주인이 될 것 같습니다. 살짝 치켜 뜬 여인의 눈에서 ‘이 정도의 상황이 나를 주저앉힐 수
있을 것 같아?’ 하는 자신감이 보입니다. 그럼요, 그래야지요. 그림 속 여인을 보면서 잠시 잊었던 각오가
새로워졌습니다.
1889년 38세가 되던 해 피어스는 그 해 파리에서 개최되는 만국박람회 심사위원으로 선발됩니다. 그 때부터
피어스는 많은 대회의 감투를 씁니다. 인지도가 높아졌다는 이야기이겠지요. 1894년에는 벨기에서 개최된
미국 화가들의 전시회를 기획하기도 합니다. 어려서 아버지에게서 배운 시대의 경향을 정확하게 알고는 미국
화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데 더 열심이었습니다.
들판 위의 소녀 Woman in the Fields / 78.74cm x 66.04cm
피어스의 풍속화에 있는 인물들의 표정이 대부분 진지한데 조심스럽게 잎을 따는 소녀의 표정도 마찬가지군요.
붉어진 뺨을 보니 일이 조금 버거운 모양입니다. 옆의 소녀의 얼굴은 맑은 녹색으로 물들었습니다.
그래도 참 곱네요.
피어스의 말년은 특별한 것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돌아보면 그의 인생에서 무슨 고비가 있었을까 싶습니다.
워싱턴에 있는 토머스 제퍼슨 의회 도서관 장식으로도 이름을 떨쳤고 덴마크와 프러시아, 벨기에와 프랑스
전부로부터 각 종 훈장을 받은 그의 생애는 좋았습니다.
아마도 그런 배경이 사실주의와 신고전주의, 오리엔탈리즘, 자포니즘, 자연주의, 인상주의, 상징주의와
점묘법까지 두루 작품에 적용할 수 있었던 힘이 되었겠지요. 좋으셨죠, 피어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