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일본의 식품 기업인 닛신식품의 창업주였던 안도 모모후쿠]는 면에서 효과적으로 수분을 제거할 방법이 없어 수 년 간 고심하던 중, 어느 날 아내가 덴뿌라를 튀기는 것을 보다 튀김옷의 수분이 날아가는 걸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면을 튀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유탕면에 닭뼈 육수를 첨가해 '치킨라멘(チキンラㅡメン)'을 출시했습니다.
세계 최초의 인스턴트 라멘이었습니다. 이 닛신 치킨라멘은 2020년대 현재에도 거의 본래 모습 그대로 판매되고 있으며 일본 내 슈퍼마켓, 드러그 스토어 등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다고 합니다.
안도 모모후쿠는 당시 탈세 혐의에 회사가 부도가 나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다시 부를 거머쥐었고 2007년 1월 5일 96세로 사망하는 날까지 매일 인스턴트 라멘을 먹었다고 전합니다.
컵라면 역시 일본에서 최초로 개발되었다고 합니다. 닛신 식품에서 미국 시장에 치킨라면을 출시한 후 안도 모모후쿠와 임직원들이 미국에 방문했는데, 당시 만난 미국 측 인사들이 종이컵에 부순 라멘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익힌 다음 일회용 포크로 먹은 뒤 포크와 종이컵을 간단하게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을 보고 컵라면의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이후 상용화를 위해 여러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세계 최초의 컵라면인 컵누들을 출시했다고 합니다.
한국인은 1인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라면을 가장 많이 소비한다고 합니다. 2014년도 조사에 의하면 한 사람이 연 평균 70개 이상의 라면을 먹으며 이는 일본과 중국의 2배에 달하는 수치였습니다.
2015년 세계 라면 협회 통계에서도 여전히 한국은 1인당 라면 수요량이 75개로 압도적인 1위였으며, 2위인 인도네시아가 50개, 3위 일본이 43개, 4위 중국이 36개였습니다.
저도 1년에 30개 이상은 먹는 것 같습니다. 여기 대한민국 라면의 아버지를 소개합니다.
<9월 15일은 한국 라면의 환갑날이었다.
삼양공업(현 삼양식품)의 삼양라면 출시일이기도 하다. 오늘은 60년 전 이날에 얽힌 한일 두 기업인의 라면 얘기를 해볼까 한다. 전중윤 삼양식품 창업자와 오쿠이 기요스미 일본 묘조식품 사장이 그 주인공이다.
동방생명(현 삼성생명) 부사장을 지내고, 제일생명 사장을 하던 전중윤은 1961년 8월 서울 하월곡동에서 창업에 나섰다.
목표는 라면 사업. 어느 점심시간 남대문시장에서 미군 부대 잔반으로 끓인 꿀꿀이죽(일명 유엔탕)을 사려는 긴 줄을 보며 결심했다. 직접 먹어 보니 깨진 단추는 물론 담배꽁초까지 나왔다. “동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밥 한 끼인데, 미래를 준비하는 보험이 무슨 소용인가. 값싸고 배부를 수 있는 음식을 만들자.”
1959년 일본 출장길에 맛본 라면을 떠올렸다. 창업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일본에 가서 기계와 기술을 사오자.”
사재를 털어 자금은 마련했는데, 달러 구할 방도가 없었다. 당대 최고 실세 김종필 중앙정보부 부장을 찾았다. “혁명을 왜 했느냐. 국민 잘살게 하자는 것 아닌가.”
설득에 성공했고 5만 달러를 확보했다. 1963년 4월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일본 최고 라면업체와 또 다른 라면 기업 등을 찾았지만 죄다 퇴짜를 맞았다.
낙담한 그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찾은 곳이 ‘묘조식품’이었고, 사장이 오쿠이 기요스미였다. 오쿠이는 전중윤에게 “왜 라면 사업을 하려는가?”라고 물었다.
“꿀꿀이죽 먹는 동포들이 더 이상 배곯지 않게 구하고 싶다”. 오쿠이는 답 없이 다음 날 다시 오라고 했다. 오쿠이 옆에 두 사람이 더 있었다. 제면기 업체의 우에다 사장과 튀김 가마 제조업체의 오쿠타니 사장이었다.
그 자리에서 오쿠이는 “선생을 전면적으로 돕겠습니다. 기술료, 로열티는 필요 없습니다. 기계 값도 실비만 받겠습니다. 일본은 6·25전쟁으로 일어섰습니다. 묘조식품이 직접 그 혜택을 입은 건 아니지만 갚겠습니다. 내일부터 두 사람에게서 기술을 배우세요.”
그렇게 열흘 동안 배웠다. 하지만 수프 제조법만큼은 알려주지 않았다. 묘조의 핵심 경쟁력이었기에, 혹 다른 업체로 흘러갈까 우려해서였다. 귀국길에 오쿠이 사장 비서가 공항에 밀봉한 봉투 하나를 들고 왔다.
봉투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작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수프 배합표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저 말고 회사에 몇 사람 없습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배고픈 사람을 위한 좋은 제품을 만들기 바랍니다.”
삼양라면 출시 가격은 ‘꿀꿀이죽’ 5원을 감안해 10원이었다. 커피 35원, 담배 25원인 시절, 오쿠이 사장이 ‘너무 싸다’고 할 정도였다. 전중윤은 ‘막노동 일당이 100원인데, 그나마도 매일 일거리가 없는 상황에서 이 가격은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두 사람이 맺은 11개 항의 계약서 중 2항은, 기자가 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약 문구’였다. ‘갑(묘조)은 을(삼양식품)에게 제조 기술을 무상으로 제공한다. 을은 갑의 기술 전수에 따른다. 위생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다.’
이렇게 탄생한 한국 라면은 세계 음식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올 들어 9월 16일까지 100여 나라에 수출한 한국 라면만 6억5700만 달러(약 9000억 원)어치다. 전년 대비 23.5% 성장했다.
‘인간백회 천세우(人間百懷 千歲憂)’. 사람은 100살을 살지만 1000년 후를 생각해야 한다는 전중윤의 경영철학이다. 반목과 광기의 시대라던 20세기 중반, 배고픔과 전쟁을 벌였던 두 기업인을 다시 한 번 추모한다.>조선일보. 이인열 산업부장.
출처 : 조선일보. 오피니언 경제포커스. “꿀꿀이죽 먹는 국민 구할 것”...라면 60년, 기억해야 할 韓日 기업인
처음에 출시했던 라면은 맛이 한국인의 입맛에 그다지 잘 맞지 않아 별 인기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삼양이 출시한 라면은 일본의 묘조(明星-명성)식품의 제조법을 그대로 가져온 일본식 치킨라면이었고. 이 때문에 닭고기 국물을 재현한 수프라서 느끼한 맛이 났다고 합니다.
라면을 포기할 수 없었던 삼양식품은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회사 내에 스프 관련 실험실을 설치하는 한편 종로 거리에서 공개 시식회를 하는 등 화제를 모았고, 청와대까지 가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라면을 선보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때 라면을 처음 먹은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한국인들은 맵고 짭짤한 맛을 좋아하니 고춧가루가 좀 더 들어갔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그 뒤로 한국의 라면은 기본적으로 매운맛을 가미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라면이 대한민국 식생활에 혁명을 가져왔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특히 자취생에겐 최고의 선물이었을 것입니다. 저도 다른 음식은 해먹을 줄 모르지만 라면은 끓여 먹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 라면은 비약적으로 발전을 했고, 세계 어디서나 사랑을 받는 식품이 되었는데 이렇게 대한민국의 라면이 성장한 바탕은 전중윤 삼양공업 사장님과 일본 묘조식품의 오쿠미 기요스미님입니다.
죽창가도 좋고, 반일도 좋지만 일본 사람 중에 오쿠키 기요스미 같은 분도 있다는 것을 우리 국민들이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전중윤 님을 잘 알지 못하지만 그분의 애국심과 경영철학을 존경하고 그 뜻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時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