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수 변천사 외 1편
권위상
우리는 어쨌든 목표를 위해 방어선을 뚫어야 했다.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며 정면돌파를 시도했을 때
중무장한 전경들의 방패에 찍히고 군화에 짓밟히면서,
페퍼포그에 눈물 콧물 쥐어짜면서 거듭 뒤로 밀렸다.
본능적으로 우리는 보도블록을 깨 던지기 시작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돌덩이는 근처에 가지도 못한 채 구르고
어쩌다 목표지점에 도달한 돌멩이는
포수 마스크보다 더 단단한 철모에 무력화되고
치열한 공방 끝에 우리는 우연히 그들의 치명적인 약점을 발견했다.
언더핸드로 하체를 공략하라.
방패가 막아주지 못하는 하체를 집중공격하자
철벽같던 대오가 우왕좌왕 무너지고
우리는 낙오된 한 무리의 전경들을 포위해 무장해제 시키자
두어 달 전까지도 함께 돌 던지던 하숙집 동기도 잡혀 있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언더핸드는 그 위력을 떨치고
방어율이 두 자리 수인 투수들이 언더핸드로 변신해 성공을 거둔다.
오늘 야구장에서
9회 말 투아웃 만루 상황에서 언더핸드 투수가 삼진을 잡자
열화 같은 관중의 함성이
적어도 우리들에겐 그날의 함성으로 부활하고
그때 사로잡혔던 동기는 촛대뼈에 난 상흔을 더듬으며
언더핸드의 위력을 다시 한번 절감하고
한 시대의 아픔이 우리들의 가슴에 다시 한번 요동쳤다.
그날 우리는 스크럼 짜듯 어깨동무를 하고
포장마차에서 새벽을 맞이했다.
생명보험
이 목숨을 값으로 치면 얼마나 될까.
살아 지은 죄와 매월 박봉에서 자동이체한
성나자로 희망원 후원회비 기만 원
기타 몇몇 선악을 가감하고 나면
남아있는 금액은 얼마나 될까.
옆자리 동료가 죽었다. 노모와 아내 그리고 어린 자식 둘을 남겨놓고 원인도 없이 그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생면부지의 동료 아내는 죽은 남편을 내내 원망하며 내게 장사라도 하게끔 보증을 서달라고 간곡히 요청해왔을 때 나는 함부로 인감도장을 찍어주었다. 이 불신의 시대에 선생님 같은 분도 있네요. 그녀는 흐느꼈지만 나는 결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맞다. 이 불신의 시대
나는 누구를 믿고, 누가 나를 믿어줄까.
믿는다는 게 단순히 마음의 문을 여는 걸까, 구원의 역학일까.
두어 달 뒤 찾아온 동료의 아내는 불쑥 생명보험 계약서를 들이밀며 보험에 가입해 달라했다. 장사가 안 돼 정리했지만 보험을 열심히 해서 갚겠다는 그녀의 눈물은 남의 일이 아닌 것 같아 또 인감도장을 찍어주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사람답게 사는 것이 내포되어 있는 법.
어떻게 사는 게 사람답게 사는 걸까.
어떤 삶이 우리에게 안식을 줄까.
그 후 그녀로부터 연락이 끊겨버렸다. 죄송하다는 문자를 끝으로 그녀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어디로 갔을까, 어디서 또 눈물을 뿌리고 있을까. 늙은 시어머니는 모시고 갔을까, 두 아들은 챙겼을까.
특별한 이상은 없는 것 같은데요.
신경성인 것 같은데 정신과로 가보세요.
현대인들은 누구나 선생님처럼 스트레스를 받고 있답니다.
흉부외과 의사가 써주는 추천서를 주머니에 챙겨 넣고 나오자
몇 가닥 햇살이 눈을 파고든다.
이 목숨을 값으로 치면 얼마나 될까.
생명 앞에서
인간은 평등하다고 굳게 믿어왔건만
생명이 다하는 날 생명보험 회사는
직업과 월수입, 학식과 장래성 따위가
각자의 가격임을 호프만 식으로 명쾌하게 제시해 주었다.
─『시에』 2012년 여름호
권위상
부산 출생. 2012년 『시에』로 등단.